안나 몰리나리와 정려원

2명의 자녀와 2명의 손주를 뒀으며 매일 6잔의 에스프레소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30년이상 매 시즌 3개의 컬렉션을 선보여온 안나 몰리나리. 7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그녀가 <보그 코리아>와 재회했다. 장미와 스타일로 가득했던 어느 일요일!

정려원은 라임그린과 옐로가 조화롭게 매치된 장식적인 드레스에 같은 톤의카디건과 상큼한 레몬 컬러 스트랩 슈즈를 매치했다. 의상과 슈즈는 모두 블루마린(Blumarine).

플라워 패턴이 화사하게 장식된 라임그린 튜닉 드레스와 블루그린체인 백은 모두 블루마린(Blumarine).

“이 CD 틀어주실래요?”11월 26일 일요일 늦은 오후, 스키니 팬츠에 블랙 가죽 점퍼를 입은 배우 정려원이 영화〈원스〉의 OST를 들고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스태프들과〈원스〉의 배우와 음악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헤어와 메이크업 마무리를 받던 그녀는 안나 몰리나리를 만난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촬영을 위한 해외출장때마다 쇼핑을 즐기죠. 가끔 빈티지 옷을 사서 직접 리폼할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아요. 안나 몰리나리 여사를 만날 생각을 하니 정말 설레는군요!” 세트 스타일리스트는 장미·수국·작약 등으로 가꾼 실내 정원을 스튜디오에 완성했고, 촬영장의 행어엔 봄향기가 물씬 풍기는 블루마린과 블루걸 의상으로 가득했다. 푸들이 프린트된 귀여운 화이트 톱과 깅엄 체크의 풀스커트에 빅 벨트를 매치한 려원이 단독 컷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의 정원에서 포즈를 취했다. 영화〈원스〉, 며칠 전 참석했던 청룡영화제 레드 카펫,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입게 된 블루마린 봄 컬렉션에 관해 신나게 얘기를 늘어놓던 그녀가 정원에 서자 스튜디오는 밀라노 블루걸 스토어의 쇼윈도로 변했다.

한편, 7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안나 몰리나리(Anna Molinari)의 일요일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숨가쁘게 이어진 4개의 인터뷰를 스케줄대로 마친 후, 그녀가〈보그〉스튜디오를 향해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틀 전만 해도 인터뷰나 촬영을 위해 숙소인 신라호텔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하던 몰리나리는〈보그 코리아〉에서 그녀만을 위한 특별한 세트를 준비했다는 설득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물론 한겨울에 활짝 핀 봄 정원을 만들기 위해 스태프들은 하루 종일 꽃시장을 뻔질나게 들락거려야 했고.

첫 번째 촬영이 끝날 무렵, 블랙 비즈 드레스에 모피 숄을 걸친 안나 몰리나리가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넓은 유리창 안으로 한겨울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스튜디오 한가운데에 마련된 봄 정원을 보자 그녀의 표정은 이내 천진한 미소로 바뀌었다“제 작업실도 핑크·블루·그린 등의 컬러로 이뤄져 있죠.” 밀라노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 역시 아주 밝고 화사한 분위기라며 자랑을 늘어놓는 그녀. “두개의 공장 사이엔 수영장이 있고, 그 옆엔 정원이 있는데, 이 세트장과 정말 똑같아요. 밀라노에 온 듯 편안한 기분이군요.” 그리고는 려원에게 블루걸의상이 너무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니고 있네요. 이 세트와 의상, 모두와 잘 어울리는 배우인 걸요?” 곧바로 안나와 려원이 함께하는 촬영이 시작되었다. 어깨에 두르고 있던 모피 숄을 내려놓고 화이트 레트로 의자에 앉은 그녀는“제가 꽃을 들고 여기앉으면 어떨까요?”라며 제안했다. 화려한 비즈가 장식된 라임그린과 옐로 컬러의 미니 드레스와 카디건을 걸친 려원이 피팅룸에서 나오자 그녀는 다시 칭찬을 퍼부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화사한 미소가 제 컬렉션을 더욱 돋보이게 하네요. 얼마 전 밀라노 쇼가 끝난 후엔 샤론 스톤이 제 옷을 몇 착장이나 가져갔는지 몰라요. 줄리아 로버츠, 스칼렛 요한슨도 블루마린의 팬이죠.”하지만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안젤리나 졸리를 자신의 의상과 가장 잘 어울리는 셀레브리티로 꼽았다. “안젤리나는 아주 여성스러우면서도 강인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자녀를 입양하고, 봉사 활동에 열심인 그녀는 항상 미소를 잃지 않죠. 블루마린과 블루걸 컬렉션은 그렇게 미소가 아름다운 여성이 입었을 때 가장 돋보인답니다.”

그녀는 언제나 패션쇼가 시작되기 전, 백스테이지에 모인 모델들에게도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을 외친다. 촬영한 컷을 확인하는 동안 안나 몰리나리여사가 말을 이었다. “려원은 크리스털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어요. 깨끗하고 맑은 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블루마린, 블루걸의 모든 컬렉션이 완벽하게 어울리는군요!” 이탈리아어와 영어를 섞어 대화를 나누며 촬영을 하던 중 안나와 려원은 오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려원이 “손이 정말 따뜻해요. 로맨틱하고 생기 넘치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다운 걸요?”라고 말하며 방금 전 촬영한 사진 아래쪽에 사인을 해달라고 하자, 안나는 두꺼운 펜을 찾더니‘Amore(이탈리아어로‘사랑’이란 뜻)!’라고 적어주었다.

강아지가 앙증맞게 장식된 블랙 앤 화이트 스트라이프 니트와 카디건, 볼륨감 있는스커트와 리본 장식 슈즈, 블랙 와이드 벨트는 모두 블루걸(Blugirl).

블랙&화이트 체크 패턴 셔츠와 리본 장식 슈즈,블랙 하이 웨이스트 팬츠와 패턴 스카프는 모두 블루걸(Blugirl).

기분 좋게 촬영을 마친 안나가 스튜디오 한켠에 있는 커다란 나무 테이블 위에 걸터 앉으며 에스프레소를 찾았다. “매일 6잔 정도의 에스프레소를 마신 답니다.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려 일해야 하니까요.” 여느 밀라니즈들처럼 에스프레소를 좋아한다는 그녀는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손으로 찻잔을 부드럽게 받쳐 들었다. “7년만에 한국에 왔는데, 예전보다 더 세련되고 안정적인 스타일을 가진 여성들을 많이 볼 수 있더군요. 쇼핑 플레이스들도 아주 멋있었어요.” 블루마린과 블루걸, 안나 몰리나리 컬렉션을 수입하는 LG 패션홍보팀은 안나가 30년간 패션계에서 일해온 디자이너답게 순식간에 한국 여성들의 스트리트 스타일을 정확하게 파악하더라고 귀띔했다. 갑자기 지난 밀라노 컬렉션이 끝난 후 그녀는 어떤 휴식을 취했을까,가 궁금해졌다. 빡빡한 일정에 시달리는 사람같지 않게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전혀! 컬렉션이 끝난 며칠 후부터 곧바로 일했어요. 믿기 어렵겠지만 전 일하는 것을 정말 좋아해요. 그리고 블루걸과 블루마린, 두 가지 브랜드를 동시에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쉴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죠. 30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패션 비즈니스를 펼쳐온 걸요.” 그녀의 패션 인생 30년은 1977년 남편과 함께 블루마린을 런칭하면서 시작됐다. 1981년 첫 번째 블루마린 쇼를 열었고, 1992년엔 헬무트 뉴튼이 촬영한‘안나 몰리나리’비주얼들이 소개되면서 가장 매력적인 브랜드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1995년부터‘안나 몰리나리 컬렉션’을 딸 로셀라 타라비니가 맡았고, 같은 해 로맨틱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세컨드 컬렉션인‘블루걸’을 런칭해 화제를 모았다. 이처럼 밀라노 패션 역사의 산증인인 그녀에게 지난 30년 간 패션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냐고 묻자 에스프레소 잔을 든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우선, 패션에서 로맨티시즘이 더 모던하고 세련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는 걸 꼽을 수 있겠죠. 제 딸이 디자인하는 안나 몰리나리 브랜드가 그런 이미지를 대표하고 있죠. 한편으론 절친한 디자이너 친구들이 저 세상으로 떠나는 걸 보는 것이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1994년 프랑코 모스키노가 세상을 떠났고, 1997년 지아니 베르사체, 그리고 얼마 전 지앙프랑코 페레가 저 세상으로 가는 걸 지켜봐야 했죠. 함께 밀라노에서 패션에 대한 꿈을 키워온 친구들이었기에 제게도 아주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또 젊은 디자이너들이 밀라노 패션계에 많이 등장했는데, 신선한 에너지가 밀라노 패션계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지만, 너무 빠른 변화로 인해 잃어버리는 것도 많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가던 그녀는 지난 30년을 떠올리며 잠시 기운이 빠진 듯했다. 하지만 딸 로셀라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이내 그녀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장미꽃처럼 피어 올랐다.

우리는 지난 3월에 실린〈보그 코리아〉의 로셀라 단독 인터뷰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었다. 동시대적 스타일을 제안하는 감각적인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그녀의 딸은 안나 몰리나리 컬렉션의 가치를 점점 더 상승시키고 있는 중이다. 안나 몰리나리 여사는 안경을 꺼내 들고, 기사에 실린 컬렉션 컷부터 로셀라의 포트레이트, 자신과 함께 찍은 사진까지 하나하나 살펴봤다. “화가인 어머니와 조각가인 아버지를 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갤러리와 뮤지엄을 자주 드나들며 예술과 패션을 가까이했죠. 제 딸 로셀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저와 함께 작업실을 드나들곤 했으니까요. 올해 일곱 살인 손녀도 우리 집안의 피를 이어받은 게 틀림없어요. 제게 가끔 그림을 그려 보여주곤 하는데 실력이 꽤 뛰어나답니다. 블루마린과 블루걸 컬렉션을 이어 맡을 장래 후계자로 손색이 없죠.” 정원 세트에선 블루마린의 새로운 백을 들고, 옅은 그린과 블루 컬러의 플라워 프린트 미니 드레스를 입은 려원의 촬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안나가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올 가을엔 백과 구두를 비롯한 액세서리 라인을 크게 강화할 예정이에요. 자수나 프린트가 많은 블루마린, 블루걸의 의상에 잘 어울리는 디자인들이죠. 페미닌하면서도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부담 없이 들 수 있는 백이 디스플레이될 겁니다.”그녀는 블루마린과 블루걸 컬렉션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이번 S/S 블루마린은 란제리 룩을 기본으로 한 레트로 스타일이죠. 파스텔톤의 로맨틱한 룩이 많고, 노출이 자제되어 더욱 세련된 느낌입니다. 여기엔 요즘 트렌드에 맞게 매니시한 재킷이나 팬츠를 매치하는 게 좋아요.”그렇다면 더 젊고 경쾌한 느낌의 블루걸 컬렉션은? “블루걸쇼에선 50년대 오드리 헵번의 스타일을 응용해 봤어요. 스트라이프, 깅엄체크 등을 메인으로 사용했고, 커다란 벨트로 가느다란 허리 라인을 강조했죠.” 블루마린과 블루걸 컬렉션이 어울리는 여자가 어떤 모습인지 묻자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온다. “여성스러우면서도 개성이 강하고, 일을 사랑하는 여자. 나처럼 멈추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오랜 세월 브랜드를 이끌어온 그녀답게 전혀 망설임이 없다. 덧붙여 그녀는 자신의 의상들이 아담한 한국 여성들의 체형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저처럼 체구가 작고 어두운 머리색을 가진 여성들에겐 블루마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짧은 길이의 카디건과 재킷이 제격이죠. 그 안엔 미니 드레스나 핏이 좋은 크롭트 팬츠를 매치하면 좋아요.” 여전히 한 손에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말하는 그녀의 오른쪽 팔엔 리본 밴드가, 왼쪽팔에는 장미와 나비문신이 눈에 띄었다. “스물다섯살 때 생트로페에서 리본·장미·나비로 된 11개의 문신을 했어요. 허리엔 벨트처럼 장미 넝쿨 문신이 있는데 등으로 이어지죠.” 안나 몰리나리 여사의 귀여운 자랑에 감탄하자 그녀는 스스럼없이 이렇게 말했다. “몰래 한번 보겠어요?” 치마를 들어 보여준 그녀의 문신은 장미의 여왕의 심벌 그 자체였다. 와인빛 장미와 어두운 그린의 잎사귀가 어우러진 장미 넝쿨!

20대의 열정과 추진력을 지금까지 이어온 그녀는 늘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발전시킨다. 얼마 전엔‘스칼라 발레 스쿨’과 파트너십을 맺고 그들을 위한 발레 의상을 제작하기도 했다(발레를 아주 좋아하는 안나는 세계적인 발레리나 마르타로마냐와 절친한 친구사이기도하다). “어렸을 때 발레를 배우기도 했어요. 전 발레를 아주 좋아한답니다.〈 백조의호수〉같은 공연은 몇 번을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예요.”물론 클래식한 발레 공연을 즐기고, 손주들을 모아놓고 피아노를 치는 것을 좋아하는 소박한 면보다는 비즈니스우먼의 에너제틱한 모습, 디자이너의 감성적인 면이 더 돋보이는 그녀다.“ 은색 포르셰를 타고 질주하는 걸 좋아해요. 포르셰를 타고 떠난 여행에서 새로운 영감을 주는 대상을 만나면 꽃이든, 풍경이든 항상 가지고 다니는 연필과 종이를 꺼내서 스케치를 해요. 사진을 찍어와 집에서 이젤을 펴놓고 채색을 하기도 하죠.” 이런 여행의 추억, 직접 그린 그림들이 새로운 컬렉션의 핵심 아이디어로 연결됨은 물론이다.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했다는 그녀는〈보그코리아〉독자들에게 이탈리아 여행 팁도 아끼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정말 멋진 나라예요. 문화와 역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죠. 로마나 베네치아도 좋지만 토디나 코티나 같은 작은 마을에도 꼭 들러보세요. 예상치 못한 활력과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스튜디오를 꽉 채우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쉴새없이 계속되던 95분간의 대화는 올 크리스마스엔 몬테카를로에서 가족들과 파티를 열 거란 얘기, 다음 번 밀라노 컬렉션에서 꼭 만나자는 약속, 떠나는 그녀의 두 손에 꼭 쥐어진 한과 선물 등으로 이어졌다. 5분 단위로 끊어지는 빡빡한 한국 방문 일정에도 늘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는 다음 날 신라호텔에서 있었던 쇼에서도 연분홍 장미를 들고 피날레를 화사하게 장식했다. 그리고 애프터 파티장에도 꽃으로 만든 샹들리에를 걸고, 초콜릿을 묻힌 달콤한 딸기를 준비해 김정은·변정수·엄지원 등 셀레브리티를 비롯한 그녀의 팬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지금쯤 안나 몰리나리 여사는 아름다운 장미 정원이 있는 밀라노 본사에서 이 사진처럼 환하게 웃으며 다음 컬렉션을 준비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의 화수분이요, 장미의 여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