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한 에로스의 얼굴, 김하늘

김하늘은 청춘 만화에 나오는 솜사탕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닌 여자다. 반면 비밀을 속삭이는 뉘앙스로 거친 벨벳처럼 얘기할 줄도 안다. 영화 〈6년째 연애 중〉에서 연애의 권태를 경험한 김하늘이, 안개가 자욱한 ‘미스티 블루’풍의 고적한 에로스를 연출했다. 色, 戒-靑.

드레스는 로베르토 카발리(Roberto Cavalli), 귀고리는 부세론(Boucheron).

블라우스는 모그(Mogg).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비상식적이고 광적인 베티의 지독한 사랑〈베티 블루 37.2〉에서 베아트리체 달은 필터가 없는, 통제 불능의 아이처럼 자폐적인 사랑에 몰두한다. 야성적이고 충동적인 베티…, 그렇게 순진해 뵈는 모든 여자의 내면에도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할 만큼의 도발적인‘에로스의 본능’이 잠자고 있다. 안개 낀 푸른 바다 속으로 피아노를 수장시키는 홀리 헌터의〈피아노〉는 어떤가? 꽉 조여진 검은 드레스가 벗겨지면 그녀의 몸은 침묵을 깨고, 가장 열정적인 소나타를 연주한다. 여자의신비, 여자의열기, ‘She wore blue belbet’이란 이사벨라 롯셀리니의 빛 바랜 노래처럼, 여자에겐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오르가슴의 동굴이 있다. 쉽게 변하고 쉽게 익숙해지고 쉽게 권태로워지는, 남자라는 단순한 종족이 절대 침범할 수 없는, 몰래 잠자리를 훔쳐본 일곱 살 여자 아이처럼, 푸른 조개 껍데기를 벗기면 더 싱싱하게 드러나는 천진한 관능의 속살. 김하늘에게 관능은 마르고 여린 육체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정신성에서 나온다. 그러니 제자를 사랑한 여선생의 당당한 연애담〈로망스〉나, 시골 총각을 농락하는 사기꾼 여자의 로맨스〈그녀를 믿지 마세요〉처럼, 지금 겉으로 보이는‘딱딱한’그녀를 믿지 말아라. “전 감정기복이 심해요. 친구들이 그래요.” 너랑 있으면 좋은 것을 좋다고, 싫은 것을 싫다고 못하겠어. 니 감정의 높이를 도저히 못 따라가겠어. “저는 저를 안 감춰요. 여과장치, 그런 게 없어요. 저한텐.”

드레스는 로베르토 카발리(Roberto Cavalli), 귀고리는 부세론(Boucheron).

원피스는 손정완(Son Jung Wan), 슈즈는 수콤마 보니(Sue Comma Bonnie), 귀고리는 부세론(Boucheron).

화이트 셔츠는 띠오리 맨(Theory Man), 블루 사파이어 목걸이는 부세론(Boucheron), 슈즈는 수콤마 보니(Sue Comma Bonnie).

제가 말라 보여요? 마르고 연약해 보이는 이미지에 전 불만 없어요. 글래머러스해져야 되지 않느냐? 그런 게 있다면 조금씩 뿜어져 나오겠죠. 영화〈색, 계〉는 너무 매력적이에요. 영감을 주고 자극을 줘요. 저의 색깔은 블루…. 제 이름은 하늘, 제 동생 이름은 우주랍니다. 그래요, 나한텐‘청년’의 이미지가 있어요. 청년 김하늘, 좋아요. 하지만 지금처럼 몽환적인 컬러도 제 안에 있어요. 푸르고 고요한 하늘도 있지만, 구름의 소용돌이로 휘몰아치는 다크 블루의 하늘도 있죠. 예전에 전 나무토막 같았죠. 걷는 건 어떻게 해야 하죠? 차를 마실 땐 어떤 포즈를 해야 하죠? 절 좀 도와줘요! 카메라가 저를 어떻게 훑어 내릴지, 백치에 가까웠죠. 연기를 공부한 적도, 꿈을 품어본 적도 없었는 걸요.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이나 가야지…, 수줍은 많은 새침떼기 소녀, 그게 저였답니다. 제게 유일하게 욕망을 품게 한 남자는 듀스의 가수 김성재였어요. 그 사람이 스톰의 모델을 했죠. 그리고 어느 날, 그 파트너 모델을 구한다는 광고를 본 거예요. 생애 처음의 용기…, 하지만 전 떨어졌고, 김성재 씨는 죽었어요. 그리고 그 삐삐 소리…, 김하늘을 찾습니다. 삐삐, 삐삐. 독서실에서 재수를 하고 있는 제게 교신이 날아왔죠. 그 촌스러운 사진 속의 저를 향해 삐삐, 삐삐. 전 다시 스톰 모델이 됐고, 첫 영화〈바이준〉을 찍었답니다. 성장이 멈춘 채 뒷걸음질치던 소녀로, 김하늘이 세상에 나왔죠. 그리고 이어지는 청순 가련한 여자들. 저란 여자, 바깥에선 남자 배우들을 띄워준다고 소문이 났다죠? 유지태, 송승헌, 김재원, 권상우, 강동원, 윤계상… 드라마〈해피 투게더〉에선 이병헌과 송승헌에게 사랑을 받는 가여운 여자아이였어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기로 인해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미운 오리새끼. 그게 저였어요. 그때의 제 모습을 보면 기가 죽어서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아요. 막이 내리면 어서 이 무대를 떠나야겠다,고 가슴 졸이며 눈치 보던 아이, 그게 저였어요. 이젠 달라요. 오기가 생겼거든요.〈 로망스〉를 계기로 전 변했어요. 너무 약해 부서지기 직전의 여자가 아니라, 실수해도 명랑하게 다시 일어서는 여자로. 전 낙천적인 사람이에요. 제가 원하면 어느 순간 그런 모습이 되어 있죠. 그래요, 그렇게 김하늘의 로맨틱 코미디 시대가 있었죠. 그리고 이제 제 나이 서른. 서른의 김하늘은 무엇을 보여줘야 할까요? 농염한 관능… 글쎄요, 제가 원하는 건 감정적으로 내장된 관능, 그런 거. 가슴이 크거나 볼륨이 있는 그런 육체적 관능이 아니라, 장만옥처럼 안으로 참아내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적인 섹슈얼리티. 오늘〈보그〉에서 찍은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 그런 배역, 들어올까요?

〈6년째 연애 중〉은 남녀 관계의 기승전결이 얼마나 똑같은가에 대한 얘기. 여자는 열정이, 수줍음이 변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남자는 그 반대. 그게 사랑이 식어서라기 보다, 남자들이 여자보다 단순해서 아닌가요? 윤계상 씨와는 오래된 연인처럼, 중학교 친구처럼, 그렇게 대책 없이 즐거웠어요. 전 배고프면 못 참아요. 제가 우울해하면 점쟁이처럼 눈치 채고 “너 배고프지? 다 알아. 얘는 입에 금방 뭐라도 넣어줘야 된다니까. 하하.” 피로에 지쳐있으면, “너 지금 졸립기 시작하지? 어우, 어떡해. 졸립다.” 마치 나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재치있게 웃기고. 전 남자 친구를 잘 챙겨줘요. 하지만 감정 기복이 심해서, 전화해서 안 받으면, 게다가 나중에 거짓말로 변명까지하면, 막 미쳐요. 어린애처럼 분노가 끓어올라요. 하지만 제 안에 드라마틱한 격정…, 그런 게 있나 찾아보면 잘 안보여요. 전 소설 문체도 뜨겁지 않은 것, 차갑게 가라앉힌게 좋아요.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그런 여자들의 맑은 문체가 여배우로서 제 감정의 주름을 만들어줘요. 파울로 코엘료의〈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피에트르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는 또 얼마나 좋은지. 어떨 땐, 그 사람 와이프가 너무 부럽기까지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 하나, 저한텐 공포가 있어요. 죽음에 대한 공포. 스르르 잠이 들다가도, 이대로 죽어버릴까 봐, 벌떡 깨버리는. 그럴 땐 몽유병 환자처럼 허공에 애처롭게 소리를 질러요. “하늘아, 괜찮아. 하늘아 괜찮아.” 지금은 안 돼,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품에 안겨서 잠이 들듯이 죽고 싶다고. 나이 들면, 전〈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메릴 스트립처럼, 오래 묵혀서, 더 힘이 센 그런 섹슈얼리티를 갖고 싶어요. 그 감정의 두근거림, 그 입술의 떨림, 살면서 그렇게 아쉬울 수 없는 순간을 바라보는 눈빛.

김하늘의 에로스엔 대상이 필요 없다. 누군가를 유혹 할 목적이 없는, 반어적으로 내가 섹시할 리 없다는 듯한 의심에서 나온 순수한 관능. 겁을 집어먹은 듯한 눈빛, 깊이를 알 수 없는 다크 블루의 욕실에서, 혼자서 나쁜 짓 하다 들켜버린 처녀처럼, 아무도 모르는 이국의 호텔 방으로 급히 짐을 싸서 떠나온 유부녀처럼, 김하늘은 부끄럽고 허무하고 때론 자신의 에로틱한 기행을 거울로 훔쳐보며 얼굴이 빨개지는 그런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