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계략의 얼굴, 손예진

팔색조처럼 변화무쌍한 로맨스 헤로인 손예진이 이번엔 강렬한 붉은색의 팜므파탈로 옷을 갈아입었다. 새영화 <무방비도시>의 소매치기로 사랑과 계략의 얼굴을 보여줄 손예진, <보그>가 그녀안의 선명한 핏빛 에로스를 포착했다. 色, 戒–紅.

하이네크 라인의 새틴 원피스는 커스텀 내셔널(Costume National), 모피 숄은 제니 퍼(Genny Fur).

드레스는 강희숙(Kang Hee Sook), 팔찌는 미네타니(Minetani).

“당신을 증오해요. 너를 믿어.”“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당신을 사랑해. 한번 더 말해줘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영화〈색, 계〉와〈정사〉의 대사다. 모든 팜므파탈 영화는 사랑에 대한 복합적인 가능성-사랑에 빠질 가능성,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사랑했었을 가능성, 사랑하게 될 가능성-을 모두 건드린다.“ 우리 사귈래요? 두 사람 기절해버리게.” 손예진에게 희미하나마 팜므파탈의 가능성을 본 건 그녀가 영화〈외출〉에서 애드립으로 만들어냈다는 이 대사 때문이었다. 배우자의 불륜을 알고 중첩된 불륜을 제안하는 여자.“ 본성이 순하고 착하지만, 미움을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술도 얼큰하게 적당히, 갑자기 그 말이 터져 나왔어요.”〈외출〉은 사랑이라는 실존의 변방에서 떠도는 캐릭터들을 다룬 영화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을씨년스러운 영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작업의 정석〉. 암컷과 수컷의 파워 게임을 이토록 뻔뻔한 수작으로 뻔하게 까발리다니. 사랑에 관한 손예진식의 반전이고 배신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혼한 이후에 시작되는 희미한 사랑의 실화〈연애시대〉. “이상하세요? 엊그제까지는 첫사랑의 소녀였던 제가, 여자가 되어가는 게? 전 변했어요. 앞으로도 변할 거구요.”

화이트 셔츠는 크리스 크리스티(Chris.Christy), 스커트는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슈즈는 지미 추(Jimmy Choo), 링은 우드리(Woodry).

레드 원피스는 커스텀 내셔널(Costume National), 귀고리는 미네타니(Minetani).

플라워 프린트 원피스는 프라다(Prada), 슈즈는 지미 추(Jimmy Choo), 클러치는 상아(Sang A).

〈색, 계〉보셨나요? 그 여자 탕 웨이, 파격적이죠. 첫 영화였고, 게다가 그걸 리드한 남자가 리안 감독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과감했겠죠. 저라면 어땠을까… 묻고 싶으세요? 하는 것보다는 보는 게 덜 위험하죠. 대리만족의 희열 같은 거.〈 외출〉의 섹스신은 어떠셨어요? 강했나요? 아뇨. 그건 아주 정적이고 절제돼 있었어요.

전, 여배우예요. 그것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8번의 경험이 있죠. 처음엔 다들 그러셨죠. “넌 왜 맨날 아프고 슬픈 것만 하니?”〈외출〉때부터 전 달라졌어요. 여자가 된 거예요. 여자. 제 목소리 기억하세요? 삼척의 여관에서, 어쩌다 한마디 할 때마다 스산하게 갈라지던 목소리.〈 무방비도시〉에선, 더 아슬아슬한 여자가 됐어요. 포카리 스웨트 시절은 기억도 안 나실 거예요. 더 깊고, 더 세고, 더 강한 여자… 솔직히 말하면, 전 밑바닥에 자의식이 없어요. 제가 어떤 여자인지 저조차 알 수 없답니다. 그래서 더 깊게 배역으로 가라앉고 싶은 걸까요? 넌 대체 누구니? 어떤 아이고 어떤 여자지? 하지만 여러분이 풋풋한 손예진을 원하시면, 다시 교복을 입을 수도 있어요.

…지금의 전, 목적을 위해 사랑도 내다버릴 수 있죠. 제 이름은 백장미. 국제적인 소매치기 조직의 여자 보스. 형사(김명민)와 서로 동물적으로 끌리는 관계…서로가 서로를 유혹하죠. 팜므파탈? 글쎄요,< 타짜〉의 김혜수씨와 비교하지 마세요.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팜므파탈. 전, 앞에서의 표정과 뒤에서의 표정이 다른 그런 여자. 앞에선 남자를 사랑하지만,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위해 뒤에선 배신할 수도 있는. 제 모습이 낯설어 보이세요? 한번도 짓지않은 표정, 몸짓, 말투, 시선… 걱정 마세요. 거친 욕설을 내뱉진 않아요. 그건 옛날 방식. 전 청재킷에 커트 머리를 한 밑바닥 소매치기가 아니랍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아요. 면도칼로 가방을 도려내고, 부하가 맘에 안 들면 가차 없이 물리적으로 박살을 내버리죠. 이 세계는 힘의 위계가 존재해요. 형사도 제 유혹의 힘 앞에서 흔들리죠.

하지만 사랑이 갖고 있는 힘은 얼마나 위대한 걸까요? 전 아직은 스물 일곱. 전 장만옥, 좋아해요. 그녀의 표정, 제스처, 말투… 선이 그토록 고우면서도, 참 어떻게 그렇게 남성적이고 드라이한 면도 공존할까요?〈 화양연화〉…, 여배우에겐 아련한 로망 같은 거죠. 어떤 여자가 그걸 마다하겠어요? 전쟁이든 스릴러든, 모든 영화엔 사랑이 있어야 해요. 저도 처음엔 그 사랑에 서툴렀어요.〈 취화선〉이나〈연애소설〉에선 어색하기 그지없죠. 우리 모두가 첫 사랑엔 얼마나 서툰가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의 맹목성을, 그리고〈외출〉에선 그 사랑이 불륜이 되는 일상에 지독한 배신감을 느꼈고….〈 연애시대〉에선 이혼을 딛고 밝게 일어섰어요. 그러면서 사랑이 판타지가 아니라 손예진의 삶으로 들어왔어요. 제게 남자란 어떤 존재일까요? 첫사랑의 연인으로, 죽어가는 연인으로, 불륜으로, 작업녀로, 이혼녀로, 팜므파탈로… 수많은 남자들을 거치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저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남자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여배우에겐 사생활이 없어요. 그래서 내 남자에겐 영화 속에서보다 더 다양한 손예진이 튀어나와요. 전 내숭이 없어요. 가식도 없죠. 가식이 없어서 더 가식적인 것처럼 보이는 여자. 한 남자가 제게 그러더군요. “너처럼 변화무쌍한 여자는 처음이야.” 전 저조차도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예요. 아직까진 에로스보단 로맨스가 좋아요. 격정적인 정사…, 제가 그걸 관객과, 어쩌면 미래의 내 자식과 공유하는 게 제 길인지, 모르겠어요. 전도연 선배님도 고민을 했겠죠. 어떤 여배우가 자유로울 수 있겠어요?

〈색, 계〉만큼 격정적인 장면을 다시 볼 수는 없겠죠. 이 촬영을 손예진 식의〈색, 계〉라고 해두죠. 혹시 천명관의〈고래〉를 읽어보셨나요? 전 그 소설에서 격정을 느꼈답니다. 뛰어난 언변과 황홀하게 변주되는 이야기, 여자와도 사랑하고 남자와도 사랑하고… 그 무방비의 좌충우돌, 경계 없음. 저라는 여잔 비관적이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과도한 열정, 부정적 시각, 일종의 결핍…, 그런 모습이 감독을 만나면 멋지게 변형돼요. 〈색, 계〉에서처럼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 그건 현실에선 쇼예요. 누가 그럴 수 있겠어요? 사랑조차 생존본능에서 나오는 건데요. 제가 죽고 싶을 땐, 오히려 아무런 감정도 없을 때. 행복, 외로움, 배고픔…, 그 어떤 욕망도 없을 때, 이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이…. 이렇게 슛이 들어가기 전에, 가만히 쉬고 있을 때, ‘아, 이 느낌이 좋다’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라는 유혹에 빠져들어요. 사랑보다 죽음에 대한 유혹이라니, 너무 치명적이죠.

어느 틈에 우리는 손예진이 연기하는‘에로스’의 관음증 환자가 된다. 농익은 눈빛, 선홍빛이 낭자한 와인,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움과 처참함에 빠진 태초의 이브처럼, 마작을 앞에 두고 계략을 꾸미는 마담처럼, 곰방대를 문로코코 시대의 방탕한 여인처럼, 첫 정사를 끝내고 불안에 잠식당한 고급 창녀처럼, 손예진은 옷을 벗지 않아도, 정사를 나누지 않아도 여자 안에 감춰진 ‘에로스’의 잠재력을 표현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