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한 순수

여배우로서 엄지원의 직업적 행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훨씬 넓고 자유롭다. 1980년대 광주를 배경으로 한, 김현석 감독의 스카우트와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그녀는 시대의 어두운 공기를 코믹한 기질로 돌파해낸다.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네이비 랩스커트는 비터앤스위트(Bitter&Sweet),아방가르드한 화이트 셔츠는더치스 바이 이윤정(Duchess byLee Yun Jung), 블루 새틴 슈즈는최정인(Choi Jung In).

한국 영화계에서 여배우 엄지원의 지정학적 위치는 어디쯤인가요?
감독들은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하고, 제작자는 고개를 갸우뚱 하는 그런 위치죠(웃음).

감독들은 당신을 좋아하죠. 곽경택, 홍상수, 김지운, 김대승, 그리고 이번에 촬영한 <스카우트>의 김현석 감독에 이르기까지. 바다 건너 후샤오시엔 감독과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일반적으로 감독들은 똑똑한 여배우를 좋아합니다.
네, 하지만 영화 현장에서 똑똑한 여배우를 만나기가 쉽지 않죠.

그건 당신이 똑똑한 여배우란 말씀인가요?
아니요. 전 영화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감독들과 영화사에 대해 얘기할 수도 없는 걸요. 하지만 전 마흔이 넘은 어른들과 친구처럼 이야기하길 좋아합니다. 그분들이 앉아서 툭툭 던지는 이야기는 생의 근본을 짚어내지요. 감독들이 왜 좋아하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좋아하는데 무슨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홍상수 감독은 왜 당신을 <극장전>에 캐스팅했었나요?
홍상수 감독은 마초적이면서도 여성적인 면이 있는 남자 배우를 기용합니다. 여배우의 경우는 예쁘지 않은 사람을 스카우트하는 것 같아요. 감독의 시선에 맞게 움직일 수 있는 평범한 여자. 제 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나눈 후 “해보자”고 해서, 저도 즉석에서 대답했어요. “네, 감독님. 그럴까요, 그러면?”

영화사업은 순간적이고 비이성적인 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면이 있죠.
하지만 감독과 여배우는 정확하게 소통해야 해요. 그리고 그 소통의 책임은 여배우에게 더 많이 지워집니다. 어떤 감독도 먼저 자신을 던져주지 않기 때문에, 제가 엄지원이라는 재료를 다양하게 던져야 해요. 그중에 어떤 것을 골라 쓸지는 감독의 결정입니다.

명랑하게 지적인 면이 있군요. 예전에<보그>에 영어를 어떻게 마스터했는지에 대한 에세이를 기고한 적이 있죠? 칸 영화제에서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도 ‘영어 잘하는’ 엄지원이 지적인 배우로 어필됐더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영어를 잘하면 지적인가요? 지적이면 영어를 잘하나요? 아니죠. 전 단지 공부하는 걸 좋아해요. 제 엄마도 언니도 3개 국어를 하세요. 영어를 하는 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애티튜드는 좀 더 자유로워져요. 전 지금은 일어에 심취해 있어요.



<주홍글씨> 촬영 현장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그 영화의 흥행과 암울한 레즈비언 코드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했죠. 고(故) 이은주 씨와 함께.
사람들이 왜 <주홍글씨>를 얘기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겐 특별할 것 없는 똑같은 작품 중 하나였어요. 은주와 제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건 인정해요. 다만 그 아이가 어두웠다면 저는 아주 밝은 사람입니다.

<화려한 휴가>가 광주 항쟁의 비극을 담아냈다면, <스카우트>는 5.18 직전까지, 1980년대 광주를 그리고 있어요. 하지만 그 시절 광주의 희망이었던 선동렬을 서울로 스카우트 해야 한다는 사명을 띤 임창정과 달리, 그 사이에 끼어든 엉뚱한 지역 운동권 여학생이라는 당신의 캐릭터를 예상하면 약간 진부해 지기도합니다.
[YMCA 야구단]과 [광식이동생광태]를 만든 김현석 감독은 여자에 대한 전형성을 갖고 있어요. 김혜수 씨와 이요원 씨가 그랬던 것처럼요. 남자의 이미지 속에 남겨진 첫사랑, 가녀리고 여성적이면서 뜨거운 진심이 있는 여자. 전 감독이 생각한 이상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죠. 감독님이 여자를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결과는 만족하나요?
제 본래 모습 중에서 밝고 귀여운 면이 가미됐어요. 찬스였죠! 코미디로 포장돼 있지만, 그 시대의 소소한 뉘앙스를 담아낸 완성도 있는 영화가 나왔답니다. 극의 후반부로 가면서 저는 확실히 영화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할 수 있었어요. 임창정 씨는 달리고, 박철민 씨는 웃기고, 그리고 저는 사랑스러움 속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줍니다.

여배우로서의 자의식이 뚜렷해 보이는군요.
오래도록 배우와 인간의 경계선에서 괴로워했어요. 어릴 땐 내가 감당 못할 명성이 올까 봐 두려움에 떨었죠. 자연인으로서 내가 사라질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내가 차 한잔 대접한 적 없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 없는데도, 대중들이 나를 보고 신기해하고 즐거워한다면, 그건 제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행운의 여신이 당신과 함께했나요?
가장 큰 행운은 건강함이었어요. 전 제가 열심히 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열심히 해도 정당한 기회를 얻지 못한 배우가 쇼비즈니스 피라미드의 밑바닥에서 지금도 사투를 벌이고 있죠.
반대로 재능도 없는데 스타가 된 사람들도 많아요. 모두에게 자기 몫의 인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예인은 행사장에 한 번 참석해 주는 걸로 코트 한 벌을 받죠. 배용준은 <태왕사신기> 한 편당 2억원의 개런티를 받구요. <보그> 기자님은어떠세요? 패션쇼에가고, 화려한 옷을 입고 선물도 많이 받으시죠. 하지만 마감 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으시잖아요. 모든 것에는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이면이 있어요. 남들이 모르는 엄청난 자기 투자가 필요한 거죠. 세상 일에는 브라이트한 면과 다크한 면이 공존하는 것처럼요.

독특한 칼라 디테일이 돋보이는 브라운 셔츠는 김서룡 옴므(Kim SeoRyong Homme), 샤이니한 블랙팬츠는 비터앤스위트, 핑크 진주 네크리스는 제이 제이 퀸(JJ Queen).

일요일 아침, 평범한 남녀를 연결해주는 <사랑의 스튜디오>에서 ‘러브러브 셰이크’라는 분위기 메이킹 코너를 진행하셨더군요.
네, 얼떨결에 그 일을 했어요. 남녀의 번호만 불러주면 된다고 해서요. 1년을 진행했는데, 인기는 많았지만 재미는 없었어요. 그때 진행자였던 임성훈 씨의 충고를 들었어요. “지원아, 어떤 일이든 네가 즐거운 일을 해라.”그 말이 제 마음을 울렸고, 1년간 일한 돈으로 연기 학원에 등록했어요.

그 뒤론 참담한 오디션 생활을 거쳤겠군요.
견디기 힘든 건 미팅 자리에서 얼굴 보고 된다, 안 된다를 통보받을 때죠. 모멸감이 드는 일입니다. 오디션은 괜찮습니다. 100% 성공했으니까요. <똥개> 오디션장에선 천 몇 백번의 번호표를 들고 있었어요. 하지만 전 제가 될 줄 알았어요. 최종 면접을 보고 문을 열고 나와서 매니저에게 외쳤죠. “틀림없이 내가 될거야!”

대체 어디서 그런 확신이 나왔죠?
내가 대사를 마쳤을 때 곽경택 감독님이 “물 마실래요?”라고 했거든요. 나중에 제게 그러셨어요.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이마에서 오로라 같은 빛이 나왔단다. 그때 알았지. 저 아이가 내 배우가 되겠구나!”

어떤 감독이 당신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죠?
홍상수 감독이요. 그분은 사람을 관찰한 후 늘 배우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지곤 해요. 그러곤 그날 촬영할 대본을 현장에서 써서 쥐어주시죠. <극장전>의 베드 신도 현장에 와서 말씀하셨죠. “ 지원, 원래는 안 할려고 했는 데 찍다 보니까 필요하게 돼 버렸지 뭐야~. 으흐흐.”

심각한 계약 위반을 저지르셨군요.
네, 일단 매니저와 함께 그날 촬영을 접고 현장을 떠나야 했는데, …그러고 싶지 않더라구요. 왜 베드 신이 필요한지 제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정말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어요.

어떤 배우가 당신을 웃게 합니까?
임창정 씨요. 그의 순발력과 재치는 브릴리언트합니다. 자신감과 내공이 꽉 차 있어요. 박철민 씨는 다릅니다. 생각하고 준비한 애드립을 선보이죠. 저는, 그 중간쯤이에요.

코미디에 소질이 있나요?
네, 남들도 그걸 인정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배우를 인내심을 갖고 길게 봐준다면요. 배우에겐 시간이 필요하고 제겐 충분히 코믹한 기질이 있습니다.

지리학을 전공했으면 여행을 좋아하겠군요.
네, 새롭고 두렵고 외롭고 자유로운, 그것 자체가 또 새로움과 자극으로 다가와요.

후회하는 영화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사랑의 스튜디오>에서 코너 진행자로 일할 때 우연히<찍히면 죽는다>라는 영화에 출연했어요. 배우로서 생각이 정립되기 전이었고, 제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지요. 어리석은 시기였기 때문에 제 필모그래피의 스타트에서 지우고 싶습니다.

<똥개>, <주홍글씨>, <극장전>등 당신의 연기와 목소리에는 물기가 많은 편이죠.
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아주 드라이한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송강호 선배나 공효진씨처럼 건조한 톤을 차용해서요.

출연한 영화의 인물들과 당신을 어느 정도 동일시 하나요? <똥개>에서 스쿠터에 올라타 “그런다고 내가 주나?”라고 할때나, <극장전>에서 여관을 나오며 “이제 재미 봤으니, 그만 뚝!”이라고 할 때, 당신은 이웃집 누나처럼 남자를 애달프게 품는 면이 있었죠.
네, 맞아요. 하지만 전 그 정도의 강도는 식상하다고 생각해요. 한국 영화의 여자 캐릭터들은 더 다양해져야 합니다. 드라마를 보세요. < 커피프린스 1호점>의 윤은혜, <환상의 커플>의 한예슬,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임수정, <굿바이 솔로>의 김민희…정말 신선한 여자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