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효진의 어느 뜨거운 하루

“너는 물기가 많아, 물은 돌이 나오면 비켜 갈라지고, 앞이 막히면 새 길을 뚫지. 그리고 물은 불을 끄지. 쇠를 녹슬게도 하지 – 〈 – 게이샤의 추억〉.” 배우와 여자는 물이다. 그래야만 살아남는다. ‘색(色)의 세계’에서 그 색의 전형에 벗어나 있으면서도, 언제나 절절한 로맨스의 승자로 기억되는 천상 여자 공효진의 어느 뜨거운 하루.

연한 바람에도 스커트 자락이 날리는 시폰 소재의 체크 프린트 그린 롱 드레스는 랄프 로렌 컬렉션(Ralph Lauren Collection), 커다란 크리스털 반지는 디올(Dior).

얇은 생고사 버선에 나막신처럼 중간이 잘려 나간 나무 굽의 샌들을 신었다. 화려한 플라워 프린트 드레스는 겐조(Kenzo), 샌들은 이브 생 로랑(YSL).

빳빳한 실크 소재로 만들어져 볼륨이 살아 있는 옐로 컬러의 드레스는 이브 생 로랑, 골드 깃털 장식의 네크리스는 샤넬(Chanel), 손에 든 부채는 소서노 한복.

브이 네크 라인에 튜닉처럼 디자인된 플라워 프린트 장식의 니트 원피스는 겐조(Kenzo), 깃털 모양의 골드 헤어 핀과 허리에 장식한 코사지는 모두 샤넬(Chanel).

연한 핑크빛 산퉁 실크 롱 드레스는 디올(Dior), 한폭의 그림처럼 꽃들이 멋지게 그려진 기모노를 연상시키는 코트는 겐조, 수묵화가 그려진 부채는 소서노 한복.

타탄 체크 프린트의 그린 롱 드레스는 시폰 소재로 만들어져 걸을 때마다 찰랑거린다. 드레스는 랄프 로렌 컬렉션(Ralph Lauren Collection), 나무 굽의 플랫폼 힐은 랑방(Lanvin), 커다란 크리스털 반지는 디올(Dior).

가죽이 장식된 블랙 재킷과 보타이는 하용수(Hah Yeong Soo), 화이트 셔츠는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화려한 프린트에 구조적인 패턴으로 완성된 볼륨 드레스는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앞부분에 동그란 링 장식이 달려 있는 다홍빛 롱 드레스는 바네사 브루노(Vanessa Bruno), 알록달록한 플라워 프린트의 실크 가운은 폴 스미스(Paul Smith). 남자가 입은 화이트 셔츠와 베스트는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그레이 팬츠는 하용수(Hah Yeong Soo).



여미고, 닫혀 있는 여자
“우리 세계는 특이하지. 오직 아름다움만 존재해. 또한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예술 작품이지.–롭 마샬〈게이샤의 추억〉.”공효진을〈보그〉패션 무비 시리즈의 피사체로 떠올렸을 때, 몇 가지 견해들이오갔다. 〈더 퍼〉의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천재 사진가 다이안 아바스에서〈클로저〉의 선병질적인 줄리아 로버츠, 그리고〈밀레니엄 맘보〉의 바스라질듯한 서기까지. 그 모두 호기심을 부추길 법한 흥미로운 비주얼 이미지였지만, 흔한 표현대로 2% 부족한 느낌이었다. 서늘할 정도로 기다랗고 매끈한몸매, 새초롬하게 앙다물고 있는 도톰한 입술, 적당히 눈꼬리가 치켜 올라선눈매. 이것들이 함의하고 있는 단 하나의 뉘앙스. 더도 덜도 아닌‘여자’였다.장쯔이와 공리가 대적한〈게이샤의 추억〉과 탕 웨이를 세계적 스타로 알린〈색, 계〉. 그들이 품고 있는‘여자’의 알리바이를 공효진에게서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하는 동안 순식간에 비주얼 시놉시스 한 편이 탄생됐다.기모노의‘게이샤’와 치파오의‘비밀요원’이란 코드에‘여밈’과‘닫힘’으로 상징되는 동양적 실루엣과 디테일을 합했을 때 탄생되는 시각적 충격과 쾌감!그건 디자이너 하용수가 지적한 대로‘내숭의 미학’인지도 모르겠다. “수줍은 듯, 한 꺼풀을 창문을 통해 훔쳐보는 것이 동양 여자의 매력이죠. 한낮의쨍쨍한 햇살이 아니라 비가 오는 날의 축축함 같은, 한 꺼풀 발이 드리워진듯한 느낌.”공효진은 그렇게‘물의 여자’의 알라바이를 푸는 데 합류했다.

아이에서 여자로, 여자에서 사랑으로
영화지〈필름 2.0〉에서 뽑은‘2002년의 아이’는 지금에 와 모든 층위의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여자’가됐다. 모델 출신답게 하늘하늘거리는 늘씬한 키와 올망졸망한 마스크는 브라운관이 반기는 조건이었겠지만, 사랑받는 여자의 전형적인 타입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이 죽일 놈의 사랑’을 제대로 보여줬다. 첫사랑의 전형적마스크인 전지현이나 섹스 어필의 강자 이효리도 성공하지 못한 영역 그것은 절절한 멜로. 물론 그 사랑엔 공효진의 말대로“그 인물이 돼서 살고 싶은역할이 없을 만큼”각기 다른 아픔이 있었다. 〈네 멋대로 해라〉의 미래는 저보다 예쁜 전경에게 복수를 빼앗겼고, 〈눈사람〉의 연욱은 사랑해서는 안 될형부를 사랑했다.〈 상두야, 학교가자〉의 엔딩 신은 첫사랑 상두와의 동반 죽음이었고, 〈고맙습니다〉의 은환은 에이즈에 걸린 봄이를 낳은 미혼모였다.“신데렐라라기 보다 캔디에 가까운 인물들이었고, 그 사랑 중엔 치명적인 것들도 많았죠. 매번 현실적인 인물들을 연기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자신이 연기했던 인물들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시무룩한 낯빛을 데워가는 그녀에게 나는 그 중 당신이 가장 많이 투영된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다… 나와 닮아 있어요.〈 네멋〉의 미래처럼 쿨한 면은 분명 내 것이고, 〈눈사람〉〈상두야, 학교가자〉의 순애보적이면서도우유부단한 면들도 나와 닮아 있죠 . 배우는 두 가지 타입이 있어요. 자신을감추고 완벽히 다른 인물이 되는 사람과 자신을 드러내면서 연기를 하는 사람. 전 후자 쪽이에요. 〈고맙습니다〉의 순박하고, 따스한 은환 같은 역할은아마 데뷔 초였다면 할 수 없었을 걸요?”그리고 덧붙였다“. 변신이라는 말은제게 옳지 않아요. 변화가 맞죠. 제가 변할 때 제 연기도 변화하니까요.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넌 날 망쳤어. 전엔 감정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는데, 널 본 뒤로 모든 게 망가졌어.–롭 마샬〈게이샤의 추억〉.”“뭐로 사로잡아요? 내 몸으로? 당신은 그를 몰라요. 연기라면 그가 몇 수 위죠. 날 안을때마다 그는 마치 뱀처럼 내 몸을 파고 들어요. 난 노예처럼 그를 받아들이고, 충실히 내 역할을 다해 그의 마음을 얻어내죠. 그는 매번 내가 피를 흘리고, 고통의 비명을 질러야만 만족해요. 그 때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죠. 그는 내 반응이 가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이러다 사로잡히는 건 내가 되고 말 거예요. 점점 두려워져요!–리안 <색, 계>.”어디에선가 공효진이 남겼던 말을 기억한다.“사랑이 일보다 중요해요” 제 할말 똑 부러지게 다 하는 당찬 이미지의 20대 여배우가 내뱉은 발언이라고 보기엔 너무 구식이어서 신선하기조차 한.“ 왜 사랑이 위대하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할 거예요. 사랑은 컨트롤이 안 되는 유일한 종목이라고.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도 있어요. 내 인생에 너만 없으면 이렇게 맘 고생 할 일이 없을 거라고요. 왜 살면서 절대 용서하지 말아야겠다 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용서하게 됐을 때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졌다는 생각이 들죠. ”나는 놓칠 새라 짓궂은 투로 묻는다. 연애를 하면서 모든 남자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나요? 당신 인생에서 몇 명? 한 명? 페이드 아웃 같은 그녀의 객쩍은 웃음. 한 테이크가 끝났으므로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그림자와 비밀
“그녀는 화장 뒤에 표적을 감춘다.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다. 게이샤는 원하지 않는다. 게이샤는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부초 같은 세상의 예술가다. 춤추고, 노래하고, 기쁨을 주고, 순종한다. 그 나머진 그림자다. 나머진 비밀이다.–롭 마샬〈게이샤의 추억〉.”9회 말 2아웃 역전 홈런을 치는 인생이 있다면, 첫 시구에서부터 홈런왕이 되는 행운아도 있다. 공효진은 후자에 가깝다. 이를 테면 시청률이 뒤쳐져도 마니아가 뒤따르는 식의 어떤 상황에서도 히든 카드를 내미는, 만만한 구석이 없어도 너무 없는 배우.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전언대로“그저 좋은 운을 따라가서”였을까.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요것저것 집요하게 묻기 시작했다. 연기를 할 때 당신은 주도적인가요? 개봉을 앞둔 그녀의 첫주연작인〈홍당무〉를 촬영했을 때 공효진은 인물에 대해 감독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이해할 수 없어요.”“왜죠?”“더 이상은 못해요!”“모든 세포가 다 살아나와서 죽겠어, 죽겠어, 하는 거예요. 하루 24시간을 내내 촬영하고, 다시 쉬고, 다시 또 24시간 강행. 나중엔 그런 생각이 드는거예요. 내가 제일 고생했어! 감독님만큼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어.”감독과벌인 초반의 실랑이는 수십 개의 테이크 중 매번! 같은 신을 고르는 희열로이어졌고, 공효진은 자기 생애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연기를 했다.〈 여고괴담두 번째 이야기〉의 김태용 감독이 꼬박 10년이 지나 공효진에게〈가족의 탄생〉을 하자고 프러포즈 했을 때, 뛸 듯이 기뻤던 공효진의 기우는 단 하나.“감독님한테 꼭 당부했어요. 10년 전 내 모습이 보이면 말해달라고요. 그런연기는 안 하겠다고. 전 진짜 배우가 되고 싶었거든요. 절실히!”시간은 촉박하게 흘렀다. 카메라에 담아야 할 신과 포착해야 할 배우의동선들. 갈 길이 멀었다. 그런데 이 현장의 대책 없이 느긋한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단 한 번 조르지도, 되묻지도 않는 피사체의 자연성. 그 어디든 순응하며 흐르는, 물의 유연한 기질처럼.

6캐럿, 그리고 다이아몬드
“짙은 남색 벨벳으로 장식된 작은 상자 안에 완두콩 크기의 핑크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다. 그녀가 반지를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이 사람 날 정말 사랑하는구나!”–장아이링〈색, 계〉.”“그 영화 하면 반지 신이 떠올라요. 알이 크고, 매우 반짝거렸거든요. 제탄생석이 다이아몬드이기도 해서 더 그랬나. 번쩍이는 것에 대해 여자들은유혹당하는 것 같아요. 확 반해버리는 거 말이에요.”누가 더 사랑한 것 같냐는 사심 가득한 질문. 답변은 자명해 보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당연히 양조위죠. 남자가 여자에게 반지를 선물할 때의 그 눈빛이 기억나요. 여자가 연기를 하고 있는 동안 남자는 여자한테 사로잡힌 거예요.”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남자에게 사로잡히나요?“ 옷 잘 입는 남자에게 끌려요. 어떤 스타일을 정해놓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스타일이 좋은남자! 그건 가르쳐준다고 되는 것이 절대 아니거든요. 더 중요한 건 스타일이맞으면 취향도 맞다는 거구요.”이상 기온의 무더위. 온몸으로 땀이 배어나올 듯 온 사위는 습하고, 동공을 찌를 듯한 쨍쨍한 햇살은 마침 정오. 공효진은 제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헤어 피스를 붙이고도 무의식적으로 터져나올법한 탄식조차 내뱉지 않았다. 매우 감성적인(검열하지 않는!) 술회. 게다가메이크업을 잠시 스톱시킬 만큼 성실한 답변. 나는 이 배우의 오종종한 얼굴속에서 찬찬히 그러나 또렷하게 촉촉한 물기를 감지했다. 정말 여자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사자와 양
그녀라면 이렇게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여자, 여자란 존재는 뭐죠? 막연한 안개 같은 질문. 답변은 소낙비처럼명징했다“. 여자란 남자에게 보호 받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해요.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고 책임져야 하고요. 그 공식이 성립되지 않으면 남녀 관계는 어려워져요. 나는 남자를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와 깨달은 게 있죠. 져줄 때는 냉큼 져줘야지, 이기는 게 능사가 아니야. 맞아요, 여우! 여우가돼야 해요! 마더 테레사와 성난 고양이 그 모두를 연기해야 해요.”공효진은 영화〈가족의 재탄생〉에서 전 남자 친구 류승범과 연기를 했었다“. 승범이는 남이 될 수 없는 너무도 큰 존재인 것 같아요. 그래서 연기도 할수 있었던 거예요. 이런 면에선 저 되게 쿨하죠?”이런 경우엔 쿨보다는 핫이적합한 수사다. 그들은 지금 다시 연인이 됐다“. 저는 양자리고 승범이는 사자자리인데, 양은 더우면 더울수록 엉겨 붙는 습성이 있고, 사자는 널찍이 떨어져 있는대요. 다행인 건 사자와 양, 게임이 안 된다는 거죠. 하하. 저는 승범이의 연기를 존경하고 그의 비평을 신뢰해요. 네… 저보다 좋은 배우, 내가우러러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여자니까요.”

살아서도 죽어서도…여자.
“다 말라버린 나무를 나무라 부를 수 있을까?–봅 마샬 〈게이샤의 추억〉.”〈네 멋대로 해라〉의 미래의 대사처럼 사랑이란“네가 죽으면 울어줄 여자있어? 없지! 그럼 없는 거야!”영향력의 범위와 기억의 파동에서 판가름 난다.진솔하고 담백한, 게다가‘사자’와 연애중인 그녀의 유일한 두려움은?“ 버림받는다는 것이요. 정정할래요.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요. 이야기의 흐름과 관계 없는 역할을 하게 된다거나, 가족이나 남자친구에게서 아무런 감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존재가 된다던가, 하는 것. 그게 가장 두려워요.”배우는 그림자이고 비밀이다. 게다가 그것이 물의 여자, 여배우일 경우에 그를 추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코스모스를 발견했다. 들과 풀, 사람과 도시, 건물과 그늘이 공존하는, 말하고생각하고 생성하고 소멸하는 우주. 쉼 없이 꿈틀꿈틀거리는 것. 할퀴고, 깨물어주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순간 오늘 하루내 그녀를 카메라에담았던 여자 사진가 보리가 마치 첩보원처럼 내 귀에 대고 살짝 귀띔해주던말이 떠올랐다.“ 본능이 누구보다 발달되어 있는 배우예요. 웃는 걸 보세요.저런 건 평범한 웃음이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