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소시민

말쑥한 신사복 차림의 한 남자가 당나귀를 타고 걸어온다. 5백여 년 전, 보부상을 이끌던 이 영웅 호걸은 그 시절의 우직함과 뚝심으로 21세기를 산다. 우리 시대의 돈키호테, 정재영이다.



당나귀에 올라타고 스튜디오를 한 바퀴 돈 그는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이라기보단 영락없는 돈키호테다. 세상의 부정과 비리를 도려내고 학대 당하는 사람들을 돕고자 로시란테라는 앙상한 말을 타고 편력의 길에 오른 돈 키호테 데 라 만차! 그의 양복 주머니엔 배우로서의 권위와 허식 대신, 인간에 대한 한 줌의 믿음이 담겨 있다.“난 정의를 믿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세상이 돌아가는 거겠죠. 모두가 동물의 왕국처럼 산다면 벌써 3차 대전이라도 일어나 다 죽지 않았을까요?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 조금만 생각하면 되는 일인데…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이해를 못할때가 있긴 하죠. 부부싸움만 해도 그래요. 그렇게 사랑해서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거 가지고 싸운단 말입니다. 그래 놓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아, 내가 이렇게 아둔하구나’후회를 하죠.”그 소소한 부부싸움의 끝에 쓰레기 봉투라도 들고 바로 우리 옆집 현관문을 열고 나타날 것 같은 소탈한 이웃. 촛불을 들고 당장 거리로 나서진 않을지라도 그에겐 적어도 아무데나 침은 뱉지 않는 양심 같은 게 있다. 고매한 이상주의자라기 보단 정의로운 현실주의자.

〈신기전〉에서 그는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했다. 5년 8개월이라는 제작 기간에 제작비만 1백억원이 넘었다는 영화는 세종 시대의‘로켓 추진 화살’이란 그 이름만 봐서는 도무지 내용을 짐작하기 힘들다. 그가 맡은 설주는 싸움도 좀 하고, 여자와 술도 좋아하는 그야말로 영웅호걸이란다.“보부상을 이끌만큼 리더십도 있고 진지하면서도 인간적이죠. 어떻게 보면 한량 같은 인물인데, 농담도 잘 하고, 약한 모습도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사실은 더 완벽하죠! 아니, 멋진 놈이 멋지기만 하면 재수없잖아요. 저와 거의 98% 같다고는할 수 없지만, 2% 정도는 같지 않을까… 하하.”



화이트 셔츠는 질 샌더, 재킷은 조르지오아르마니, 팬츠는 솔리드 옴므.(왼쪽)레이어드한 카디건은 시스템 옴므,셔츠는 질 샌더, 팬츠는 버버리.(오른쪽)

서울예대를 졸업한 후,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정재영은 연기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목소리 출연이며 까메오로 참여한 것까지 합하면, 영화만 25편. 누구나가 그런 것처럼 힘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시간은 결국 그럭저럭 잘 흘러온 편이다.“이제부터는 나이를 안 먹을 거예요. 딱 서른 아홉에서 스톱!”40대를 앞둔 남자의 심정은 30대를 목전에 둔 스물 아홉 여자의 마음과 비슷하다. 보톡스는 아직까지 맞아본 적 없지만, 혹시 20대의 젊은 남자역할이라도 들어온다면 시도해볼 의향은 있다. 그러니까 순전히 관객의 감정이입을 위한 성의 표시 차원에서. 어쨌든 그는 현재가 참 다행스럽다.“집사람이나 애들한테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으니까…‘남들은 다 나이키 신는데, 난 언제 한번 신어볼까?’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지금. 전 어렸을 때 그랬거든요. 맨날 페가수스 같은‘짜가’만 신고. 월드컵에서 프로 월드컵 신으면 너무 좋은 거야. 프로스펙스까지는 못 신어도. 지금 생각하면 참 아무것도 아닌데, 그때는 발만 보여요. 다행히 내가 못 가졌던 걸 자식들에겐 줄 수 있는 형편이니 만족스럽다기보다는 다행스럽죠. 부모로서, 남편으로서. 배우라는 직업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20대 때나 지금이나 똑같고.”사실 20대엔 마흔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먹고 살기 바빴으니까. 그리고 젊음이란 원래 술 마시고 난 다음날처럼 어지럽고 쓰리게 마련이다. 어쨌든 세월은 흘렀다.성질 급한 어떤 강산은 마르고 닳았고, 그 사이 그에게도 매너리즘이 찾아왔다.“어떤 직업이나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순간에는자기가 그런 상태인지도 몰라요. 그걸 알면 그러겠어요? 요미우리 4번 타자가 왜 갑자기 공이 안 맞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젖어드는 거죠. 문제는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거죠.”오늘은 날씨가 안 좋아서라고 하늘 탓하는 스포츠 선수처럼 그렇게 인생에 투정을 부린 적도 있었다.“전 어렸을 때는 남의 탓을 상당히 많이 했어요.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기회가 없을까, 잘 할 수 있는데. 근데 나이 들고 철이 들어가며 보니, 결국 내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거더라구요.”

그날 마침 우리의 박태환 선수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정재영의 인생론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소재를 옮겨갔다.“물론 천재들이 있어요. 박태환처럼. 타고났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우리나라 최고지만, 주변에서 좋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자기도 열심히 노력하니까 이런 결과가 있는 거죠. 스무 살도 안 된 친구가 전국민을 흥분시킨다는 건 쉬운 게 아닌데… 한창 클럽 같은데서 정신 없이 놀 땐데 그걸 다 포기한 거야.”정재영은 그래서 더 열심히 하고, 더욱 많은 생각을 하면서 덜 자만하기 위해 지금도 고민한다고 말했다.타고난 천재가 아니라면, 어쩌겠는가? 노력하는 수밖에. 그 잘난 사람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낮잠을 자는 순간을 노리는 것.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우직한 승리. 실제 삶처럼 대부분의 영화 속에서도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10년동안 조직에 충성하던 동치성(<거룩한 계보>)이 그랬고, 경찰 서장에게 딱지를 떼는 고지식한 정도만(<바르게 살자>)이, 순진한 노총각 홍만택(<나의 결혼 원정기>)과 동막골의 리수화(<웰컴투 동막골>)가 그렇다. 캐릭터 자체는다를 지라도 정재영이라는 배우가 지닌 그 소시민적인 성실함과 강직함은늘 스크린 속 인물들에게 따뜻한 인간미를 부여했다. 명나라로부터‘신기전’을 지키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설주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5백여 년 전, 보부상을 이끌던 이 영웅호걸은 지금 21세기의 강남 한복판에서 당나귀를 탄다. 오랜만에 현실로 돌아온 그가 담배를 피워 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냈다.‘신기전’과‘수류탄’의 유사성에 대해 한참을 설명하다, 역시 권총은 화살보다 적중률이 낮다고 단언하던 그는 새삼 진지한 얼굴로 누군가 권총을 들이대면 잽싸게 요리조리 움직이라고 당부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야 산다는 게 총칼을 섭렵해 본 배우의 결론이다. 어쩌면 그는 과거에 더 어울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천박한 스노비즘이 쿨한 애티튜드로 포장되는 화려한 도시에서 여전히 정의를 믿는다는 남자. 후르룩 커피 한잔을 비운 후, 이윽고 거리로 나선 그가 ‘그럼, 또 잘 살라’고 인사를 건넸다. 야구모자를 눌러쓴 이 시대의 마지막 돈키호테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