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원, 무방비 도시

예지원은 어디로튈지 모른다. 그 에너지로사람을 속절없이 웃기기도, 울리기도 하는 본능적인 여배우. 120% 충전된 감성 에너지로 세상을 해석하고 반응하는 예지원은 ‘최고’ 대신 ‘가장 독창적인 여배우’라는 타이틀을 선택했다.

튜닉 스타일의 원피스는 로에베, 참 장식이 있는 화려한 팔찌는 디올.

예지원은 고매한 포즈와 애티튜드로 인터뷰에 대처하는 보통의 여배우와는 다르다. 그녀는 인터뷰 도중에도 울고 싶으면 운다. 4년 전 <대한민국 헌법 제1조> 개봉을 앞둔 인터뷰에서, <아나키스트>얘기가 나오자마자 그녀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었다. 가족을 떠올리면서 울었다는 후문도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오늘 4년 만에 다시 만나 세상을 뜬 친구이자 가족인 ‘뽀삐’얘기를 할 때도 그랬다. “우울증이 아직 날 괴롭혀요. 어떤 강아지도 키울 수 없을 것 같아요. 수명이 긴 애를 찾아본 적도 있었는데, 악어 같은 거밖에 없더라구요.” 미안한 말이지만, 난 그 대목에서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 심각한 순간, 모 CF처럼 거대한 악어에 목줄을 매고도 도도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예지원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지원의 에너지는 사람을 긴장시키기보다는 무장해제시킨다. 예측 불가능해서 당혹스럽지만, 위험이나 경계심이 존재하지 않는 ‘무방비도시’같은 여자. 이제껏 예지원은 여기에서만 살법한 묘한 여자들을 불러 모았다. 사랑보다 성을 먼저 안 육덕진 여자 (<96 뽕>), 부끄러운 줄 모르고 춤추고 유치한 시를 쓰는 명숙이(<생활의 발견>), ‘모든 남자들이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외치며 ‘요술공주 밍키’를 부르는 순이(<귀여워>), “만져주세요. 더더더더더러워지고 싶어요”하던 자넷(뮤지컬〈록키 호러 픽쳐쇼>)까지. 최고로 대우 받은 적 없는 예지원은 대신, 엉뚱 발랄한 여성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가진 것 없지만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새로운 종족의 여자들.그래서 대중의 사랑을 얻는다는 건, 곧 그녀에게는 독창적인 존재감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 그들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한국에는 없는 캐릭터이니까요. 또한 이들은 다 예지원 안에 있는 여자들이기도 해요.” 규정할 수 없는 기운에 반한 소설가 김종광은 한 지면을 통해 그녀에게 이렇게 공개 프러포즈했다. ‘난 순이라는 캐릭터에 뿅갔고, 만난 적 없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소.언젠가, 당신에 의한, 당신을 위한 장미를 따 드리리다.’(예지원 캐릭터로 시나리오를 써 보고 싶다는 거다) 이 얘기를 듣더니 그녀가 까르르 웃는다. 예지원은 얼마전 개봉한 <올드미스 다이어리>로 안전한 흥행 배우의 전당에 안전하게 등극했다.

하지만 그녀는 본인 말처럼, ‘30대 초반까지 오디션을 본 여배우’였다. 제목도 모르는 무수한 영화의 오디션장을 들락거렸고, 그횟수만큼의 고배를 마셨다. ‘배반의 장미’와 ‘홍콩 아가씨’를 신들린 듯 부른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데뷔작인 <96 뽕>도, 데뷔 4년 만에 출연 기회를 잡은 <아나키스트>도, ‘연기파’라는 고상한 타이틀을 안긴 <생활의 발견>도, 모두 오디션으로 얻은 역할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오디션 배우’라는오명 아닌 오명을 벗었다. 예지원이 아니면 안 되는 역할들은 점점 늘어 갔고, 대중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늘었으니까. “제 능력이 아니라, 세상이 좋아져서 그래요. 요즘은 여배우라고 마냥 고상한 역할만 맡을 필요가 없잖아요.그러니까, 제가 서른 넘어서도 여배우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거겠구요.” 그런 예지원이 이번에 그녀의 도시에 어떤 요상한 여자를 불러 올까?

<죽어도 해피엔딩>(8월 23일 개봉)은 예지원을 위한 역할이었다. 프랑스블랙코미디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를 리메이크한 강경훈 감독은 여주인공의 직업을 추리소설가에서 잘나가는 여배우로 바꾸었다. 그 참에 이름도아예 ‘예지원’으로 바꾸었다. 예지원을 둘러싼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마음대로 넘나들어도 좋다고 공식적으로 승낙한 셈이다. “저, 사진 찍는 걸 너무 좋아하잖아요? 이번엔 제가 배우로 출연하기 때문에 모아둔 제 사진으로 벽을아예 도배했어요. 얼마나 황홀했겠어요?” 그 ‘황홀한’ 여배우에게 프러포즈한 띨띨한 남자들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나가고, 여배우는 시체를 감추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지원’이라는 역할은 예지원이 맡은역할 중 가장 영악하고, 현실적이며, 기존의 것과 가장 동떨어진 여자다.

가슴 부분이 포인트인 하이 웨이스트 원피스는 손정완, 빛 바랜 골드 컬러 힐은 미스지 콜렉션.

우연과 필연, 진실과 거짓말들이 공박을 펼치는 <죽어도 해피엔딩>은 제목이 풍기는 막무가내 뉘앙스와는 달리 치밀한 영화다. 예지원은 코미디와 정극의 미묘한 차이를 육감적으로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 아주 ‘생각도 많이하면서’연기했다. 이때다 싶으면 오버도 하고, 청승도 떨었다. 하지만 번번이 감독의 모니터 앞에서 지적당했다. 본래의 에너지를 발산하던 예지원이 절제하느라 힘든 것도 당연하다. 해야 할 일은 또 어찌나 많던지. 다이어트하랴, 모아둔 사진 챙기랴, 헤어 메이크업 신경 쓰랴, 의상 챙기랴, 대사 외우랴,얼굴 붓지 않게 신경 쓰랴, 많은 남자 조연들 신경 쓰랴.“다른 여배우들은 거뜬하게 해냈을 거예요. 하지만 한동안 전 편안한 여배우였죠. 얼굴 부어 있으면 ‘아, 오늘 얼굴 좋으십니다’하던 감독들만 만났잖아요. 분칠도 안 하고 막돌아다니고. 하루에 18시간씩 촬영하며 전쟁처럼 영화를 찍고 나니, 딱 보약한 재 먹은 기분이 들어요. 더 건강해진 것 같은 느낌 같은 거.”

예지원은 달변가다. ‘척’하지 않기 때문에 밤새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사람이다. “옛날엔 이런저런 역할 맡고 싶다고 했는데 이젠 그게 최우선은 아니에요. 좋은 분들과 하면 어떤 역할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아요.” 당신도 겁이 날때가 있나요? “당연하죠! 처음 캐스팅 됐을 때만 좋아요. 그 후부터는 책임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죠. 일이니까요.” 당신은 일도, 세상도 겁내지 않는 여자인 줄 알았어요.“전 늘, 제가 아스팔트 위의 집시라 생각하고 살아요. 영화와 내 분신들 덕분에 전 자유롭게 살고 있어요.” 그럼, 지금 당신은 행복하겠군요? “20대보다 30대의 배우 생활이 더 좋아요. 날 둘러싼 모든 것이 여러모로 풍부해졌으니까요. 하지만 무엇이 행복인지는 정의 내리기 힘들어요. 영화 흥행이 잘 되면? 상을 받으면? 이런 게 나이가 든다는 거겠죠?”

고전 영화의 여배우처럼 꽃단장한 채 카메라 앞에 선 예지원은 쓸쓸한 웃음을 여운처럼 남긴 현대판 그레타 가르보 같기도, 사랑스러운 오드리 헵번같기도 했다. 프로 모델처럼 감정의 호흡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컷’사인이 날 때까지 한없이 우아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드는 여배우.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크로바틱하듯 허리를 구부리고 두 팔을 하늘을 향해 폈다. 한껏 고양된 그 모습에, 스튜디오에서는 몇 번의 실소가 터져 나왔다(그컷은 ‘짤렸다’). 그러나 예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리든 말든,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 너무 좋다”며, 자유로운 몸과 마음을 자랑하는 여자. 그녀가 훨씬 더 철 든다 하더라도, 여전히 예지원이라는 이름의 ‘무방비도시’에서 날아드는 독창적인 초청장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괜히 유쾌해졌다. ‘언제든 놀러 오세요.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해두세요. 이 도시에서는 새롭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도 책임질 수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