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사랑 했을까

사랑에 벅차게 물이 오른 전도연과 사랑의 생화학에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하정우는 칸 영화제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다. 둘 사이에 고여 있는 사랑의 경험은 서로를 어떻게 품을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 사랑이 어떨까 조바심을 낼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맑은 하룻동안의 러브 스토리 ?멋진 하루?

블랙 터틀넥 스웨터와 그레이 팬츠, 레오파드 프린트 스카프는 루이 비통(전도연). 블랙 수트와 화이트 셔츠, 타이는 모두 란스미어(하정우).

원피스와 롱 부츠는 구찌. 목걸이는 Tom Binns by 10 Corso Como(전도연). 저지 티셔츠는 이브 생 로랑, 블랙 팬츠는 본, 부츠는 토즈, 재킷은 르메일(하정우).

화이트 셔츠는 로에베, 팬츠는 루이 비통, 시계는 IWC.

러플 장식이 달린 블랙 코트와 니트, 스커트는 모두 버버리 프로섬. 보라색 앵클 부츠는 보테가 베네타.

스트라이프 롱 니트 카디건은 소니아 리키엘, 모자는 헬렌 카민스키.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블랙 카디건, 재킷과 팬츠는 모두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 블랙 슈즈는 프라다, 뿔테 안경은 알랭 미끌리.


전도연이라는 배우, 하정우라는 배우


심은하나 장미희 같은 여배우는 그 자체로 타고난 예술작품이다. 그녀들은 액자 너머로 사라지거나 반대로 스스로를 액자 속의 작품으로 응고시키면서 대중과‘신비화’의 룰을 유지시켰다. 그녀들은 어떤 역할을 맡았는가에 대한 명성보다 그녀 자신이 누구인가, 때문에 기억되고 재생산된다. 전도연은 어떤가? 그녀는 한 번도 액자속으로 들어가 신화 속의 인물이 된 적이 없으며, 영화 역사상 유례없이‘연기’라는 자신의 시지푸스적인 신성한 노동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누렸을 뿐이다. 제60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20년 전 강수연이 스무 살에 〈씨받이〉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받았던 여우주연상(오리엔탈리즘에 비벼진 본능적인 쾌락의 표정 연기)과는 다른 중량감을 준다. 그것은 전 세계 영화기자가 인정한(어떤 외국 평론가는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주지 않는다면 영화제 단상에 뛰어올라가 난동을 부리겠다고까지 했단다) 고결한 노동으로, 〈타임〉이나〈이브닝 스탠더드〉는‘모든 것을 견디는 어머니, 칸 영화제를 빛낼 열정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여배우, 고통 앞에서 나약한 영혼에 대한 완벽한 묘사, 황금 종려상을 능가할 여우주연상’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녀는 어느 순간 스스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규정했던‘여배우의 순애보’에서 멜로 여왕의 눈물의 왕관을 벗었다.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빈틈없는 성격의 전도연의 입장에서 볼 때 나이를 먹고 결혼과 임신을 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현명한 경력 관리였다. 순정 소녀 같은 역할을 연기했던〈접속〉의 시대가 끝나고, 불륜에 빠진 전문직 여성〈(해피엔드〉), 잡초 같은 생존자 〈(피도 눈물도 없이〉), 에이즈에 걸린 매춘부 〈(너는 내 운명〉), 자존심 강한 과부 〈(밀양〉)를 연기하는 전도연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멋진 하루〉가 개봉되기 전까지, 남편과 아들에 이어 신과의 사랑에도 실패한 〈밀양〉의 끈질긴 패배자‘신애’역할은 그녀가 연기한 배역 중 최고의 역할이었다. 뻔뻔한 유괴범과 철없는 그의 미용사 딸에게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의 승자는‘신애’였다. 모든 것은 허울뿐인 미모의 힘을 능가하는 전도연의 연기적 인격과 의지의 개가였다.

전도연은 멜로 드라마의 관점에서 위력적이고 영향력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더 훌륭한’이라는 단어를‘영향력 있는’이라는 단어로 바꿔놓는다면, 나는 또 다른 연기를 하나 더 꼽을 수 있다. 바로 김진아 감독의〈두 번째 사랑〉에서 보여준 하정우의 연기다. 하정우는 이 어두운 이민자 스타일의 멜로드라마에서 한국과 미국을 관통하는 매너리즘 연기 전통에 이별을 고했다. 신선하고 기민하면서 기발한 그의 연기 스타일은 단순한 리얼리즘 연기가아니라 현실을 끊임없이 고양시켜 나가는 독특한 스타일의 연기였다. 내가 느끼기에 하정우 연기의 특출난 점은 겉으로는 거친 사내의 이미지를 풍기는 인물이 섬세하고 고상한 성격이 드러나는 행동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백인 여자에게 정자를 제공하는 수치스러운 일을 하면서, 그녀와 사랑에 빠진 감정을 누가 그처럼 고상하게 연기해낼 수 있을까? 다정함과 깊은 슬픔이 한데 뭉친 그런 눈빛으로 영어 연기를 해낼 수 있을까? 그는 장마 구름을 뚫고 온 햇살처럼 건강했다. 카메라가 담아 내는 하정우의 몸은 헬스 클럽에서 시끄러운 음악, 트레이너의 반복된 조련, 인공 태닝으로 탄생된 조미료 냄새 강한 몸과는 달라 보인다.‘몸’을 예찬했던 아테네 시절의 구릿빛 전사들처럼 햇빛과 바람과 자연(승마, 트래킹, 등산, 조깅 등등)의 힘으로 자연 풍화된 것 같은 몸은 오일을 바르지 않았는데도 번질번질하다. 하정우에게서는 겸손하게‘땀 흘리는 남자’의 뉘앙스가 풍겼으며, 곰팡이 냄새 물씬한 매력적인 밤의 영화 〈추격자〉와 〈비스티 보이스〉로 칸 영화제에 다녀온 직후에도 특유의 집요함과 건강함은 여전했다.


전도연이라는 여자, 하정우라는 남자


나 같은 배우가 어떤 배우야? 많은 여배우들이“전도연 선배님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할 때마다 나, 그게 정말 궁금하더라. 칸 영화제에서 상을 타는 거, 그런 걸 보고 부러워하는 걸까? 시상식장에서 여우주연상‘전도연~!’그렇게 화려하게 이름이 불리면 탐이 날 수도 있잖아? 정말로 내가 연기를 사랑하는 만큼, 그 열정을 닮고 싶은 걸까? 칸이나 청룡 영화상에서 트로피를 쥐고 웃는 모습을 볼 때, ‘나도 반 드시 저기에 서고 말 거야!’그럴 수 있잖아? 나, 정말 궁금해. 난 말이지 심은하나 장미희 같은 여배우가 아니잖아. 그녀들은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졌고, 나는 그게 가끔 부럽고 샘도 나. 그녀들은 특별하지. 나는, 나는 그냥 보통 여자야. 보통 여자와 특별한 여자의 차이가 뭔 줄 알아? 특별한 여자는 자기 앞만 보고 간다구. 보통 여자는, 보통 여자는 항상 자기 앞에 어떤 뒷모습, 뒤통수를 보고 가. 난, 내가 앞서가고 싶지 않아. 난 1등보다는 2등이 좋아. 열등감을 가진 보통 여자. 내 첫 영화 데뷔작〈접속〉의 아이디도, ‘여인2’. 내 연기의 비결이 뭔 줄 알아? 열심히 정직하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배우. 그게 바로 나야.

누나 같은 배우가 어떤 배우냐? 정답을 알려줄까? 순수한 배우. 당신은 정말 일상에서도 감정 표현이 확실해. 카메라 앞에서도 거짓말을 절대 안 하지.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배우. 좋은 작품을 하려면 현실 세계의 캐릭터도 희생되는 부분이 있잖아? 누나는 아직도 10대야. 여자로서도, 배우로서도. 10년을 넘도록 연기하면서 아직도, 싱싱해. 그동안 난 멋진 여배우들과 함께 했잖아. 고현정, 김선아, 성현아, 베라 파미가, 그리고 전도연. 그녀들을 포함 해서 당신은 연기의 조급함이 없고, 언제나 상대를 기다려줄 줄 알아. 자기 에너지로 주위의 격을 환하게 높여주지. 〈히트〉의 고현정은 세계적인 거장 감독에게 캐스팅되어도, 30점짜리 그렇고 그런 감독에게 캐스팅되어도 자기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는 유연함이 멋졌어. 〈두 번째 사랑〉의 베라 파미가는 누나와 동갑내기지? 서양 여배우인데도 동양 배우의 향기가 나는 그런 여자. 승부욕도 강해서 내가 에너지를 올리면 자기도 에너지를 끌어올리려 애쓰는 게 귀여워.

전도연은 1997년〈접속〉으로 청룡과 대종상 신인 여우상을 받으며 영화계에 축복처럼 등장했고, 하정우는 2005년, 첫 주연작 〈용서받지 못한 자〉로 영화평론가상 신인 남우상과 디렉터스컷 신인 남우상을 받으며 영화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컴퓨터 세대의 사랑법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접속〉은 멜로 드라마의 신풍속도를 제시하며 흥행 돌풍을 이어갔고, 제작비 2천만원, 디지털 카메라 1대로 만들어진 한 영화학도(윤종빈 감독)의 졸업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는‘군대 내 폭력성이 이슈화되면서’센세이셔널을 불러일으켰다.그리고 2007년, 그녀는〈밀양〉이라는 가슴을 에이는 리얼리즘 영화로, 그는 〈추격자〉라는 빠른 비트의 장르 영화로 우연히 동시에 칸 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정우야, 나, 너의 〈두 번째 사랑〉을 보았어. 그리고 너에 대해서도 다시 봤어. 참 좋더라, 영화도 연기도. 너도, 베라 파미가라는 여배우도. 그 여자 나랑 동갑이라지? 영화의 색감이 배우의 감정을 해치지 않도록 도와준 수작…그 영화처럼 〈멋진 하루〉는 여성 영화는 아니잖아. 이 영화… 어쩌면 네 이야기인 것 같아. 〈너는 내 운명〉이나〈밀양〉처럼. 그때도 정민이 오빠나 강호오빠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능청맞고 예뻤던지. 넌, 네가 얼마나 건강한 매력이 있는 줄 아니? 나는 네가 다듬어지지 않아서 좋아. 때로는 푹신하고 때로는 휩쓸려갈 것 같고… 그 강함이 유연해 보이지만, 그걸 벗기면 안에 또 커다란 강함이 있고. 아이 같고, 소년 같고. 내가 봤을 때는 얄밉게도 네가 그걸 너무나 잘 아는 것 같아. 후후.

누나, 혹시 서울 3부작이라고 들어봤어? 〈추격자〉〈비스티 보이스〉, 그리고 〈멋진 하루〉. 3편이 하정우의 서울 3부작이야. 달빛 아래 어두운 골목과 산동네를 전전하며 살인자로 보낸 〈추격자〉, 달빛도 없는 지하의 현란한 화류계에서 호스트로 보낸〈비스티보이스〉, 그리고 축복처럼, 태양의 밝은 기운 아래서 옛 여자 친구와 함께 마음을 나눈 하루 〈멋진 하루〉. 이 영화는 〈두 번째 사랑〉처럼 당신의 시점으로 가는 영화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당신은 무언가를 깨닫게 되잖아. 말썽꾸러기에다 철도 없고, 난 당신에게 3백50만원이라는 돈을 빌린 채무자지만, 이상하게 진정한 남자다움을 보여주잖아? 하하. 돌이켜보니 내가 출연한 영화엔 공통점이 있어. 여자를 보호해주는 느낌, 반대로 내가 보호를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 난 내가 멜로 드라마에 어울린다고 믿어. 왜냐면, 난 진실한 사랑을 해봤으니까.

전도연이라는 여자와, 하정우라는 남자는 과연 어떤 사랑을 할까? 전도연은 숨쉴 때마다 뼛속까지 계집애인 여자고, 하정우는 시시각각 피가 끓는 마초 같은 남자다. 뼛속까지 계집애인 여자는‘사랑’이라는 신화에 겁도 없이 무섭도록 달려들었다. 그녀는 한 번도 사랑에 수동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갈수록‘위험한 사랑’을 탐했다. 환희와 경악이 어우러진 황홀감, 거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순진한 사랑의 원형. 깡패(박신양)에게 눈 멀어 성당에서 눈물 콧물 짜내며 결혼식 올릴 때 〈(약속〉), 동그란 이마를 드러낸 채 아이를 업고 시골 학교 총각 선생님(이병헌)을 짝사랑할 때 〈(내 마음의 풍금〉), 아기한테 수면제 먹이고 나갈 만큼 가슴에 불륜의 불꽃이 꺼지지 않을 때 〈(해피엔드〉), 주근깨 투성이 새까만 얼굴에 그 예쁜 종아리로 제주도 돌담길을 통통통 뛰어다니며 우체부(박해일)에게 줄 부침개를 걷어올 때 〈(인어 공주〉), 바람둥이(배용준)의 사랑 게임에 빠져 빨간 머플러를 남긴 채 얼음구덩이 속으로 퐁당 빠져버릴 때 〈(스캔들〉), “모르겠니? 나 걸레야!”다방 레지에다 에이즈까지 재앙처럼 닥친, 그래도 사랑받고 싶다고 방백할 때 〈(너는 내 운명〉). 그녀는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남자의 심장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순진한 여자의 본성으로, 여배우의 본능으로. 남자들은 불 켜진 성냥개비를 쥐고 뜨거워 어쩔 줄 모르는 그녀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천국에서 지옥까지 단숨에 롤러코스터를 타버리는 그녀를 아기처럼 다독이고 보호해줘야 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용서해버리는 전도연이기에 그녀의 남자들은 바람둥이든, 순정파 쑥맥이든 전도연에게 항복하듯 가슴을 열었다. 한석규로 시작해서 설경구, 이병헌, 박신양, 박해일, 황정민, 송강호까지.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살인범까지 용서하고 사랑하겠다고 벼르던 그녀가, 전도연이 자가당착에 빠져 어쩔 줄 모른 채 처음으로 짐승처럼 울었다. 그것은 멜로의 여왕, 눈물의 여왕의 울음이 아니었다. 피조물의 애끓는 절규, 그것도 사랑이 었을까? 이창동 감독은 왜 사랑지상주의자인 그녀에게 그런 시련을 안겼을까? 너, 이래도 정말 사랑할래?

나, 〈밀양〉이 끝나고 결혼했어. 〈밀양〉이 끝나고 나서‘사랑’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꿈이 더 커졌을 수도 있어. 나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교회 다녀 본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사랑도 연애처럼 설렌다고 하더라. 신과의 싸움이 무섭긴 했어. 하지만 그 사랑조차도 희망이고 바램이고 싶어. 이창동 감독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 왜 나를 캐스팅 했어요? 그러니까 그분이 뭐라고 했냐면, 모성애가 강해 보여서. 그 전까지 난 감독을 대할 때도 사랑하는 방법이랑 똑같이 대했어. 기죽고 눈치 보다 어느 순간 확인 받고, 매달리고. 그런데 이창동 감독님 하고만 그게 안 됐어. 그래서 미워 죽겠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알게 된 거야. 감독도 모르는구나. 저 사람도 정답을 모르는구나. 알면서 일부러 안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모르는구나. 그때부터 감독이라는 존재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됐어. 〈밀양〉을 통해서 내가 성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건 몰라. 다만 앞으로 나아갔다고는 생각해. 끝없이 못난 내 자신과 대면하는 걸 통해서, 어쨌든 생을 밀고 나간 거야. 〈해피엔드〉 의 보라를 할 때도, 〈밀양〉의 신애를 할 때도 그렇게 쑤욱 밀고 나간 거야. 정우, 네가 그랬다지? 연기는 하체에 힘을 키우고 상체를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든 다음,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거라구? 하하. 멋진 말이야. 하지만 아직도 나한텐 연기가‘착하게 살자’그런 지고지순한 인생의 교훈처럼 느껴지는 걸?

하정우는 남자와 일할 때, 여자와 일할 때가 다르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추격자〉와〈비스티 보이즈〉같은 남자 영화들, 그리고 〈시간〉 〈숨〉 〈두 번째 사랑〉 〈멋진 하루〉같은 여자 영화들. 남자 영화에 출연할 때 그는‘절제된 힘’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며 뒤엉킨 수컷의 군상들 속에서 차가운 마초성을 보여준다. 군대, 경찰서, 지하 호스트바라는 남자들의 폭력적인 위계 공간 속에서도 그는 결코 주눅들지 않는다. 아수라장 속에서도 리드미컬한 건강함이 유지된다.〈 추격자〉에서 여자 형사를 향해“생리하시나 봐요? 냄새가 비린 게”라고 말할 때조차, 마치 실험실에서 생선 냄새를 맡은 고양이처럼, 빈정거리는 추행의 냄새가 없어서 더욱 소름끼친다. 비참한 동물의 세계인 남자 영화 속에서도 하정우가 전혀 주눅들지 않기 때문에, 어떤 배우와 연기하더라도 영화 전체의 차가운 온도와 섬뜩한 질서는 하정우에 의해 유지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반면 김기덕 감독의 두 편의 영화 〈시간〉과〈숨〉에서 그는 성형 수술로 폐허가 된 여자(성현아)의 남자 친구, 사형수를 면회 가는 여자의 남편 역할을 그림자극의 배우처럼 해낸다. 김진아 감독의〈두 번 째사랑〉에서 한국 남편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백인 여자의‘씨내리’를 할 때도 그는 따스한 그림자처럼 침착하다. 여자 배우와 연기할 때, 하정우는 연기의 온도를 한층 끌어올려 그녀들을 감싸고, 또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치유해 낸다. 그와 함께라면 성형 수술 중독자든, 사형수와 바람 난 자살기도 중독자든, 임신강박증 백인 여성이든 모두 용서되며 마침내 돌아온 탕아처럼 기나긴 방황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놀라운 하정우의 정화력이다.

정우야, 나, 아직도 내가 아이 같아. 그래서 몸은 엄마가 되고 있지만, 마음은 아직 낯설어.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듯, 뱃속에 아이가 자라면서 나도 엄마로 자라는 거겠지. 그러면 또 다른 층위의 사랑을 알게 되겠지?

누나, 나, 아직은 이 도시에서 더 많이 떠돌며 사랑하며 살고 싶어. 1년에 한 번씩 이사 다니면서, 여러 곳으로 촬영을 다니면서 더 많이 일하고 싶어. 새벽에 혼자서 킴스 클럽을 배회하는 것도 좋아.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줘. 난 사람들의 오해처럼 플레이보이가 아냐(웃음).

난 나를 작게 만드는 남자가 좋아. 가진 게 많아서가 아니라 존재감이 커서 나를 한없이 작은 여자로 만드는 남자. 그러니 열정도 존경도 기대도 하지말고, 나를 그냥 오래도록 봐줘.

난, 위트가 있는 여자면 좋겠어. 그러니 당신도 당장의 나를 보고 판단하지 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다리면서 나를 즐겨줘.

이제 진정한 사랑에 벅차게 물이 오른 전도연과 아직은 사랑의 생화학에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하정우는 칸 영화제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다. 둘 사이에 고여 있는 사랑의 경험은 서로를 어떻게 품을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 사랑이 어떨까 조바심을 낼 필요가 있을까? 식물적 정서로 가득한 감독 이윤기와 함께한〈멋진 하루〉. 두 사람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맑은 하룻동안의 러브 스토리. 사랑을 조롱하는 일상은 도처에 있다. “350만원쯤이야, 널 위해 빌려줄게”로 시작한 사랑이“350만원 갚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어”로 균열하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영화, 좋은 배우, 좋은 사랑은 한 꺼풀 한 꺼풀 궁금증에 가득 차 벗겨낼 때마다, 보란 듯이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 인생 속에서 사랑은 또 변하고 오래 지속되는 것이겠지. 사소한 습관, 낡은 차용증, 혹은 우뇌의 기억 세포 속에서 숨었다가 불현듯 나타나 설움을 부추기기도 하고 때로는 바보처럼 웃게도 만들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이만큼 사랑했었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