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정, 신현준의 ‘잔혹한 연애’

신현준과 강혜정은 영화에서나 사생활에서나‘혹독한 연애’로 단련된 고귀한 배우들이다. 누아르 로맨스 〈킬미〉의 개봉을 앞둔 두 주인공. 지금, 그 어떤 배우보다 마음이 열려 있는 강혜정과 신현준이 〈보그〉스타일의‘다이닝 호러’한 편을 훌륭히 마무리했다.

강혜정이 입은 블랙 롱 드레스는 미쏘니, 팬츠와 블랙 퍼 케이프가 매치된 레이스 셔츠는 모두 레주렉션 바이 주영, 슈즈는 마놀로 블라닉. 신현준이 입은 플라워 모티브의 프린트 셔츠는 앤 드멀미스터, 블랙 팬츠는 돌체 앤 가바나.

신현준이 입고 있는 실버 글리터링 팬츠는 프라다.

강혜정이 입은 섬세한 레이스 블라우스는 발렌티노, 레이스 스커트는 오브제, 블랙 비즈 뱅글은 샤틀리트, 블랙 반지는 망고.

신현준이 입은 블랙 베스트는 앤 드멀미스터, 네이비 글리터링 빕과 화이트 미니칼라는 프라다. 강혜정이 입은 러플 컬러 셔츠는 알렉산더 맥퀸 바이 분더숍, 블랙 비즈 뱅글은 샤틀리트, 호피 장식의 체인 뱅글은 타임.

강혜정이 입은 화이트 셔츠는 에르마노 설비노, 블랙 레이스 스커트는 오브제, 블랙 필복스 햇은 제이미 앤 벨, 깃털장식의 브로치는 나인식스 뉴욕, 슈즈는 나인 웨스트. 신현준이 입은 화이트 턱시도 수트는 모두 란스미어, 브로치로 연출된 화이트 깃털 헤어피스는 꼴레뜨말루프, 슈즈는 토즈.

강혜정이 출연한〈올드보이〉는 영원토록 보물로 남을 영화 중 하나다. 창조적 영감과 세심한 기교로 가득한 이 작품은 원죄와 복수에 대한 영화인 것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섹스에 대한 영화다. 감독 박찬욱의 세련된 냉소주의가 섹스라는 요소와 비밀리에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모두는 진화론적 윤리를 거스르고, 알든 모르든 근친상간의 충동에 따라 행동한다. 유지태는 학창 시절 누나와의 근친상간 소문을 퍼뜨린 최민식을 조롱한다.“ 우린 다 알고도 사랑했어.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15년을 감금당한 최민식은 자신이 원하는 건 복수뿐이라고 생각한다. 15년을 외롭게 큰 강혜정은 자신이 원하는 건 사랑뿐이라고 생각한다.“ 아저씨, 나 아저씨 좋아서 하는 거야.”그녀는 섹스 중에 열에 들떠 속삭인다. 그들의 관계가 부녀지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혀를 자르고 최면으로 기억을 지운 나약한‘괴물’최민식을 껴안으며 강혜정이 설원에서 아이처럼 읊조린다.“ 사랑해요, 아저씨!”죽고 죽이는 근친과 복수의 알레고리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순수한’승자는 강혜정이었다. 그렇게 강혜정식 연애잔혹사가 서막을 알렸다.

신현준은 어떤가. 20년 동안 무려 26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그에게 사랑의 신화적인 이미지를 덧씌웠던 최초의 작품은〈은행나무 침대〉. CG의 신기원을 이뤘던 감독 강제규의 환상적인 비주얼 속에서, 신현준은 한겨울 눈보라 속에서 정좌한 채 얼어붙고, 뜨거운 은행나무 침대 화염 속에서 타 죽는다. 사랑과 집착과 분노 때문에.“ 네 까짓 게, 네 까짓 게 뭘 알아. 너희들이 수백 년 뿌리를 맞대고 사랑의 유희를 나눌 때 난 홀로 그 긴 시간을 지켜봐야만 했어. 네가 까마득히 잊은 채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때 난 하루도 빠짐없이 그녈 찾아 헤맸어. 그리움이 뭔지 아나? 고독이 뭔지 알아?”황장군은 공주 미단에 대한 사랑으로 천 년을 배회하며 숭고한 악당으로 환생한다. 그의 사랑은 뼈까지 들어붙는 빙하이거나 살을 태우는 불길이었고, 목숨을 삼키는 살인이거나 광란의 전쟁이었다. 신현준 식 연애잔혹사의 시작이었다. 지금 강혜정과 신현준이 스튜디오에 모인 이유는 〈킬 미〉라는 영화의 홍보를 위해서다. 그들은 이 영화의 감독 양종현을 쿠엔틴 타란티노라 일컫는 다거나, 자신들의 출연작이〈저수지의 개들〉과 닮았다고 말하면서, 누아르 로맨스의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 한마디로 꺾는 맛이 있죠. 감독이 쿠알라 룸푸르의 햇빛 쏟아지는 고층 빌딩 아래 서 있을 때, 누군가 나를 저격하고있다, 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요. 그 느낌이 이 영화의 발상의 시작이죠.”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잔혹한’연애로 단련된 두 사람이 킬러와 자살녀로 만나사랑을 시작한다. 신현준은〈킬러들의 수다〉에선 자상한 형님 킬러였지만, 〈킬미〉의 그는 돈도 애인도 없이 알코올중독 엄마와 함께 사는 우울한 남자다. 그런데 자신을 죽여 달라는 한 여자의 황당한 의뢰가 그의 인생을 바꾼다. 강혜정은 자살을 청부하기 위해 사채를 빌려 쓴 여자를 연기한다. 죽여줄거라 믿었던 킬러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해 황당해 하는 상황. 코미디, 페이소스, 아이러니와 사랑의 본성 등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이 영화는‘연애잔혹사’의 절정을 이룬다.

“7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가 배신하고 조건부 결혼시장으로 들어가 버렸단 말이죠.”영화 속에서 강혜정은 남자 친구의 예식장 웨딩 카펫으로 당당히 걸어가 한 방의 총성을 날린다.“ 이별을 날로 먹어. 우리 사이에 이 정도 이벤트는 필요한 거 아냐? 오늘 미안했고 결혼식 마저 해.”그녀는 킬킬거리며 자신을‘깽판 전문 배우’라고 소개한다.“ 복수를 하고 나서도 죽도록 사랑한 대가가 이건가 싶어 절망스러운 거죠. 그리고 전세방을 빼서는 나를 죽여줄 킬러를 고용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킬러가 여자는 안 죽이는 분인 것 같더라구요.”그와 그녀가 주고받는 대사와 행동은 통속적인 로맨스물에 어울리는 남녀의 클리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뭐야, 그럼 이거 자살 아냐?”“자살이든 타살이든 무슨 상관이야?”“경고하는데, 그 따위로 사는 거 아냐.”“그래서 안 살겠다는 거 아냐. 그런데 킬러가 왜 그렇게 말이 많아?”“오래오래 장수해라. 미친년아.”“욕하지마, 이 개새끼야.”

그들의 구애 과정은 너무나 재미있다! 여기서 신현준의 연기가 보여주는 즐거운 점은 그가 두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는 살인자지만, 그럼에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데이트엔 서툴지만, 그럼에도 쉽게 로맨스에 빠져드는 남자다. 독살에서 식물인간까지 의뢰인들에게 살인의 옵션을 제시하지만, 그녀에게는 살아 있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사랑에 진실하게, 그리고 심하게 빠진 젊은 남자들처럼, 그의 의식은 한 가지에만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녀. 강혜정에게 키스하는 것은 불을 뿜는 권총에 키스하는 것처럼 두려움과 떨림을 줄 것이다.

잠시, 그들의 필로그래피와 더불어 사생활을 관통하고 있는 연애의 산전수전을 들어보자.“ 저는 사랑하는 여자랑 헤어져도 봤고 연애에 있어서는 산전수전 다 겪었죠.‘ 죽도록 사랑해’라는 말, 전 강혜정의 대사를 듣고 감동했죠. 아,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구나.”-신현준

“전 반대였어요. 역시 목숨 바쳐 사랑할 필요가 없지. 사랑 때문에 죽고 싶은 적은 없었어요. 연애에서, 일에서, 너무 미워서 죽이고 싶은 사람은 있었죠. 전 항상 물리적으로‘쎈’사랑을 했어요. 이상하게도 영화에서 남자가 절 보호해주는 상황은 없었죠. 연애는 제게 곧‘파이트’였어요. 덕분에 여성적으로 케어를 받진 못했지만 한 인간으로서 저 자신의 모습을 맘껏 드러낼 수 있었죠. 전 아직까진 사랑받는 여자보다 존경받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사랑한다는 이유로 존중만 받고 싶진 않아요. 존경받는 데 사랑받는 것, 일종의 우정의 형태 같은… 그건 나에 대한 욕심일 거예요.”-강혜정

“제 나이쯤 되면 연애하는 과정이 귀찮아져서 시작도 안 하는 경우가 많아지죠. 하지만 전 지금도 사랑하다 죽을 수도 있고, 그만큼 아무리 실연의 상처가 크더라도 그 상처를 딛고 또다시 일어나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게 사랑인데…, 전 사랑에 대해서는 자유인이었으면 좋겠어요. 스캔들이 터지면 유교 사상으로 배우들을 가두는데, 영화하는 사람들은 맘껏 사랑해야 돼요. 이 영화에서도 전 돈도 없고 무식한 킬러지만 이 여자가 죽으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하죠.”-신현준

“영화를 보면 연애가 하고 싶어질 걸요?”-강혜정.

사랑을 믿지 않는 강혜정과 사랑에 도취된 신현준…〈킬 미〉가 줄 기쁨 중 하나는 배우들의‘사랑관’을 과장해놓는 방식과 그 과장된 특성을 아이러니하게 활용하는 방식이다.

강혜정은 신랄하고 위협적이며 공격적인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다(물속에서 아이를 낳던 데뷔작〈나비〉에서부터〈올드보이〉와〈연애의 목적〉의 불건전하고 신랄한 베드 신을 떠올려보라. 마치 백만 볼트와 제로 볼트의 감성과 지능을 오가는 트랜스처럼, 폭발적인 전압에서 순식간에 일곱 살 지능의 여자 아이〈( 허브〉), 완전한 백치 상태〈( 웰컴 투 동막골〉)까지 스스로를 방전시킬 수 있는 여자다.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타 섹스할 줄 아는 여자의 세상과 남한군과 북한군도 구분 못하는 소녀의 세상은 서로에게 별천지다.)그녀는 어떻게 하면 과감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지를 안다고 할까(실제 연인이었던 조승우와 연기했던〈도마뱀〉-이 영화에서 그녀는 보통 소녀처럼 웃고 여자처럼 운다-을 제외하고). 대부분 남성인 영화 감독들은 여성을 목표, 전리품, 숙적, 연인, 친구로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혜정이 출연한 영화들은 그녀가 영화의 핵심 인물임을 잘 보여준다. 강혜정은 한 번도 대놓고 성적 자신감이 넘쳐 흐르는 여성을 연기한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남녀관계에서‘파이터’기질을 발휘했다. 그 점이‘뼛속까지 여자인’전도연과 다른 점이다. 그녀는 성별을 무시하며 마치 액션 영화의 합을 맞추듯 섹스하고‘맞짱’을 뜬다.“ 나 자신을 여성화시키는 거 재미없어요.”

섹슈얼리티를 통해 서로를 빈정대고 이용해 먹는 〈연애의 목적〉에서 그녀는 정사 중 박해일에게 말한다.“ 너도 맛있어.” “배우들은 필름을 향해 몸과 마음을 다 던져버리죠. 달려오는 차, 날아오르는 창, 칼, 굴러 떨어져야 하는 벼랑…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미련한 열정이라도, 제 직업이 꾀부리면 티 나는 직업이라서… 하지만 요즘엔 누가 내 생명을 책임져줄까, 그런 생각도 하죠.”

강혜정을 키운 건 8할이 영화 현장이다. 그녀에게 스승은 박찬욱이고 봉준호이며 류승완이었다. “저는 대학을 못나왔어요. 가방끈이 짧죠. 그러니까 오프로드. 서울예대 연극과를 갔다가 제 발로 다시 나왔어요. 리포트도 열심히 쓰고 그랬는데 당시엔 교수님들에게 제 열정이 짓밟히는 느낌이었어요. 그러고는 〈올드보이〉의 오디션 현장으로 걸어갔죠.”

“강혜정 선생님과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라고 마흔한 살의 신현준이 스물 여덟의 강혜정을 향해 너스레를 떤다.“ 타고난 연기 천재와 연기 둔재가 만나서 땀이 났습니다. 하하. 강 선생의 연기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권에서도 스페셜합니다.”“선배님이 제게 선생님이라고 하실 때마다 저는땅을 파고들어 가고 싶어요.”강혜정이 공손하지만 격의 없이 대꾸한다.

그와 그녀는 영화를 사랑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강혜정이 작가주의 감독의 선별된 영화(심지어 카메오로 출연한 영화도〈남극일기〉였다)에 출연해왔다면, 신현준은 1987년〈장군의 아들〉부터 시작해서〈달마야 서울 가자〉〈가문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26편의 대중 영화에서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천차만별의 캐릭터를 구사해왔다(그가 카메오로 출연한 영화도〈천군〉이다). 강혜정이 근본적으로‘자기애’라는 목표를 향해 카메라 앞에서 열정적으로 몸을 던진다면, 신현준은‘이타주의’의 열정으로 카메라 밖의 영화 현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저는 현장에서 피곤해서 잠을 자면서 혼자 에너지를 비축하는데 반해서, 신현준 선배님은 스태프들이 춥고 졸릴까 봐 계속 웃기고 농담을 하면서 에너지를 나눠주는 식이죠.”

“어릴 때는 좋은 영화 한 편이 오래간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영화 현장의 친구들과 과정을 즐기고 행복하게 일하는 가가 더 중요합니다. 인정받기 위해서 일했다면 20년을 일할 수 없었을 겁니다.”하지만 신현준의 영화 선택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지가 많다. 관객들은 드라마〈천국의 계단〉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장님이 되는 신현준의 사랑에 감동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달마야 서울 가자〉에서 머리 깎고 승복 입은 조폭을 마주해야 한다거나,〈 맨발의 기봉이〉에서 시골길을 달리는 바보 신현준의 웃음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마지막 선물〉에서 철창에 갇힌 사형수가 된 그를 보고 비장해져야 했다. 한마디로 뒤죽박죽 캐릭터 칵테일이랄까. 성악가가 테너에서 바리톤 사이를 왔다갔다할 수 있는 경우 광대한 음역을 지녔다고 말한다. 하지만 배우라면 다르다.“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어요. 캐릭터의 흐름을 계산하면서 가면 내가 마치 기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전 그냥 철이 없는 상태로 행복한 모험을 즐기고 싶을 뿐이에요. 전 위인전 같은 모범적인 발자국은 거부하고 싶어요. 이렇게 좌충우돌 미완의 형태가 좋거든요.”

신현준의 행동이 숭고한 영화예술가로서는 적합하지 않지만, 이젠 관객들도 그를 바라보는 시점, 진지하고 성실한 대중 배우로서의 정서적 풍류에 적응을 한 듯하다.‘판타지 로맨스에서 조폭 코미디까지. 저 재미있고 격의 없는 이웃집 청년(짙은 눈썹과 높은 코의 훤칠한 외모를 스스로 아랍인으로 희화시켜버린!)이 이번엔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사실 어떤 배우는 예술적, 도덕적 금기를 넘나들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호흡이 멎을 정도의 존경을 유발시키지만, 어떤 배우는 사랑스러움과 친밀함, 쉽고 친절한 메시지로 편안함을 퍼뜨리기도 한다.

어쨌든 그와 그녀의 공통점은 모두 장애인을 연기한 적이 있다는 것. 〈허브〉와〈웰컴 투 동막골〉과〈맨발의 기봉이〉. 강혜정과 신현준은 인간 본성의 약점을 조롱하기 보다 인간 본성의 결점을 사랑하는 배우로서의 정신적 육체적 특혜를 마음껏 즐겼다. 조승우의〈말아톤〉이 정상인의 눈으로 본 뇌성마비 장애아의‘성공담’이었던 데 비해, 다행히도 캐릭터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삼을 정상인이 이 영화들에는 없다. 그리고‘상은’이나‘여일’처럼 기존에 그토록 사랑스러운 바보를 연기했던 여배우가 없었듯〈(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심혜진 정도), 신현준의 바보 연기는 조승우, 차태현 등 젊은 배우들의 감성 연기와는 달리‘기봉이’를 신체적 반어법과 정공법으로 동시에 뚫고 간다.

“제가 처음〈기봉이〉를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많이 비웃었어요. 니 키에 니 몸에 니 코에 그게 되겠니? 하지만 전 정말 행복했어요. 수십 년간 제가 가지고 있던 몸의 근육을 없애는 고통, 밀가루와 식초를 먹으면서 뼈와 살을 재조형하는 극한까지 갔어도 좋았어요. 겨울에 맨발로 허리를 뒤틀면서 양재천을 뛰어다닌 덕에 죽을 때까지 관절염을 안고 사는 허리병신이 됐지만, 그래도 이건 행복한 훈장 같은 거예요.”

신현준에게‘신체 변형’이 보이지 않는 훈장으로 남아 있다면, 강혜정에게‘외모 변형’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조승우와 촬영한 〈도마뱀〉의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은 매력적으로 돌출된 강혜정의 턱이 사라진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터넷은 한동안‘강혜정 성형 수술’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로 들끓었다. 조승우와의 이별, 성형 실패로 음독 자살을 기도했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우울함, 상처, 절망… 그런 기분이었죠. 어떤 형태가 됐든 건강과 치료의 과정을 겪은 건 저고, 그 누구보다 당황스러웠던 게 저인데, 그 사실을 다시 해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어요. 내가 대체 왜 이러고 있나? 아무도 내 손을 들어주지 않는구나.”

최진실의 죽음처럼 때로 네티즌들은 익명의 테러리스트가 된다.“ 전 연기를 오래 해서 살아남고 싶었어요. 지금도 당당하게 늙은 여배우로 살아남고 싶어요.”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정신력이 강한 강혜정은 〈허브〉에서 자신의 변형된 얼굴을 영화적으로 멋지게 소화하며 슬럼프에서 빠져 나왔다.“ 외모가 변했다고 해서, 영화를 대하는 제 자세가 변한 건 아니랍니다.”

그리고 지금, 그 어떤 배우보다 마음이 열려 있는 강혜정과 신현준은 〈보그〉가 마련한 피터그리너웨이 스타일의‘다이닝 호러’영화 한 편을 훌륭히 마무리했다. 식탁 위의 탐스러운 제물이 되기 위해 모두가 초연하게 죽고 죽이는 이〈보그〉식의 초현실주의적인 풍경 속에서 강혜정은 밧줄을 목걸이처럼 걸고, 신현준은 식탁 위 거대한 횟감이 되어 바다 속에 잠긴다.‘사랑’처럼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두 명의 초현실주의자들의 해프닝은 썩은 오리 냄새와 생선 비린내, 시큼한 석류 냄새 속에서도 쉬지 않고 계속됐다.

그리고‘연애잔혹사’로 시작된 그와 그녀의 인상적인 두 편의 주연작 〈올드보이〉와〈은행나무 침대〉의 정신에서 그들이 한 발짝씩 진화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올드보이〉와〈은행나무 침대〉는 관객들의 무의식적이고 구태의연한 사랑의 태도를 공격했다. 여전히〈올드보이〉만큼 불온하고 혼란스러우며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영화〈, 은행나무 침대〉만큼 집념이 넘치고, CG에 의해 사랑이 박제로 전락하지 않은 영화도 드물지만.

“그 이후 전 좀더 성숙해가고 있어요. 아버지와 자거나, 튕기다가 불륜 비슷한 연애를 하거나… 그러니까 무조건 날 위해서 했던 사랑, 지르는 사랑, 미쳐서 갔던 연애보다〈허브〉에서처럼 엄마를 위해 참을 줄 아는 사랑, 깊은 사랑을 깨달아가는 거 같아요.”-강혜정.

“저는 항상 영화에서 사랑을 했어요.〈 킬러들의 수다〉〈블루〉〈가문의 위기〉〈지상만가〉〈사이렌〉…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서 그렇지 다 사랑이 있었어요. 영화가 추구하는 근본은 모두 사랑이고, 배우들의 가장 중요한 본분은 ‘사랑의 낭만’을 전파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꿈이 크지 않아요. 지금처럼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굴곡이나 시행착오도 웃으며 받아들이고 다시 사랑하는…, 그게 제가 가진 배우로서의 달란트였으면 좋겠어요. ”-신현준.

신현준과 강혜정은 영화에서나 사생활에서나‘혹독한 연애’로 단련된 고귀한 인간, 고귀한 배우들이다. 배우로 잘 늙고 싶다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곧 눈보라 칠 겨울엔 비록 연애가‘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배신’을 앞뒤로 꿰맨 벙어리 장갑 같은 것이라도 한번쯤 꼭 껴보고 싶다. 겨울이 지나 장갑을 벗으면, 두려움과 떨림을 감내한 대가로, 어떤 외로운 타인의 손을 다시 잡아 줄 수 있을 만큼 크고 따스한 손바닥을 선물처럼 갖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