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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의 온기

2016.03.17

by VOGUE

    여배우의 온기

    김혜자는 환갑이 넘어서도 아이처럼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연극 <다우트> 무대에서도 아이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서 있는 그녀. 꽃보다 아름다운 이 여배우에게 무대란 세상처럼 여전히 경외롭다.

    수식어는 여럿이지만, 그래도 김혜자는 천상 여배우다. 사진 촬영을 끝내고 앉은 자리에서 거울을 꺼내 들었다. 보통 10분 전에는 반드시 연습실에 도착한다는 그녀지만 그날만큼은 한 시간 정도 늦어 미처 얼굴을 살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연극하면서 나, 너무 고민을 많이 했나 봐요. 몸도 힘들었고. 그래도 이렇게 굵은 주름이 생기다니,너무하지 않아요?” 김혜자가 난처하게 웃는다. 하지만 여배우란, 환갑을 넘어서도 아이처럼 웃을 수 있는, 고운 얼굴의 섬세한 결이 풍경처럼 잡히는 존재다. 아직도 ‘여배우’라는 수식에 부끄러워하는 그녀가 연극〈다우트〉(2월 23일~5월 20일, 학전블루소극장)로 또 다른 배우의 초상을 그린다. 지난 12월 아쉽게 짧았던 열흘간의 공연은 7천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그 중에는<신의 아그네스>의 연습을 마치고 맥고 모자를 올려 쓴 채 종종 걸음으로 온 배우 박정자도 있었고, 삶이 곧 연극이고픈 이름 모를 주부도 있었다. 그 힘으로, 웬만한 속편이나 연장 공연에는 출연하지 않는 김혜자가 수녀복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한번 강팍한 삶을 사는 무표정의 엘로이셔스 수녀가 되어 보기로 했다.

    “오늘도 달력을 보고 세었어요. 어머나, 20일밖에 안 남았구나….” 지난 8월 중순부터 이 지하 연습실을 드나든 여배우는 요즘 별 게 다 무섭다. “감정 다른 편에 있는 상대 배우가 바뀌면 리액션도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작품과 같아요. 게다가 이번엔 솜털까지 보이는 소극장이잖아요. 무서워 죽겠어요….” 엘로이셔스 수녀였다면 지금 1백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서서 떨고 있는 아이 같은 김혜자를 꾸짖었을지 모른다. 단호하고 도덕적 결벽증에 사로 잡힌이 원장 수녀는 플린 신부와 한 흑인 남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그때부터 엘로이셔스 수녀는 의혹의 늪에 빠지고, 내내 괴로워한다. “여러분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라는 주술 같은 물음으로 객석을 동요시키는 날선 연극 한 중간에 메마른 몸, 창백한 얼굴의 김혜자가 있다. 엘로이셔스 수녀는 울지도, 웃지도 않고 잔뜩 감정을 웅크린 채 관객들을 지적 함정으로 몰아붙인다. 당신이 <다우트> 무대에서 김혜자가 웃는걸 보았다면, 딱한번, 커튼콜 때 환희에 찬 표정일 것이다.

    그녀가 <다우트>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김혜자라는 배우 특유의 신뢰성이 ‘의혹’을 제2의 주인공으로 삼은 이 연극과 어떻게 조우할지 궁금했다. <다우트>의 대본은 그녀를 ‘의혹’으로 몰아넣었다. 좋아하는것, 맞는 것, 싫어하는 것, 맞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었다.“처음엔 이 여자가 싫었어요. 난 누굴 의심하고 그러지 않아요. 그런 사람 같으면 가까이 하지 않고. 내가 피곤하잖아요? 좋게 넘어 갔으면 좋겠는데…. 아마 내가 불행해질 거라 생각했어요. 배우도 연기하면서 즐거워야 하잖아요?”

    김혜자의 마음을 돌린 것은 원작자인 존 페트릭 쉔리가 서문에 남긴 메시지였다. 무언가를 확신하는 감정을 경멸하라,는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맺혔다. 5년 전 <셜리 발렌타인> 무대에 오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무대를 책임지는 외로운 욕심쟁이 같은 모노드라마를 고사하던 그녀는 대본 구석 작가의 낡은 흑백 사진에 눈이 갔다.

    “그런 느낌 있어요. 아! 내가 이 연극을 하게 될 것 같다는. 그건 연기 욕심이나 갈증과는 또 다른 거예요.”

    또 그 10년 전, <19 그리고 90>때에는 어땠나, 그녀는 기억하려 애써주었다.〈다우트〉는 2005년 퓰리처상, 토니상 등을 수상한 화제작이다. 게다가 아시아 초연이라 더욱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자신만의 방식대로 연극과 인연을 맺어온 김혜자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얘기들. “재미있게도 <다우트>는 생각을 자극하는 연극이에요. 배우 골탕먹이는 법을 아는 똑똑한 작가라니까요. 이 대본엔 지문이 딱 두 개뿐이죠.‘ 미소 짓는다’와 마지막쯤에 ‘감정적으로 몸을 구부린다’. 엘로이셔스가 웃지도 않고 감정적이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거죠. 배우가 찾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너무 얄미운 거 있죠? 호호호….”

    김혜자는 요즘 연기 공부가 재미있다. 남명렬, 윤다경, 우명순등 실력 있는 배우들과 함께 캐릭터의 심리를 토론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곧 연습이다. “같은 대사라도 생각에 따라 음영이 생기죠. 얼마 전, 연출 선생님이랑 얘기했는데, 난 이 여자가 나가서 자살했을 것 같다고 했어요.” 결말도, 결론도 없이 끝나는 형식도 중견 배우에게는 신선했다. 그리고 쪽대본도, 밤샘 벼락치기 촬영도 없는 이곳의 자유는 ‘평생 처음 내가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었나’ 회의를 느끼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5년 만에 로 연극 무대에 서는 그녀에게는 '위대한 무심'같은게 있다. 옳다고 믿고 좋아하는 일에 신념을 다할 수 있는.

    “프라하 사람들이 히틀러에게 이 도시만 파괴하지 않으면 항복하겠다고 했다면서요. 그 얘기를 듣고 보니 프라하를 오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어요. 돈은 없어도 되지만 예술은 있어야 해요. 그래야 마음이 높은 데서 살 수 있어요.” 왜 그녀가 굳이 힘든 연극을 택했을까, 했던 궁금증이 풀리는 것 같았다. 김혜자에게는 ‘위대한 무심’ 같은 게 있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한켠 버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옳다고 믿고 좋아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 비슷한 연배의 중견 여배우들이 코미디를 하고, 영화로 흥행 배우가 되고, 신드롬의 주인공이 될 때, 그녀가 택한 것이 작은 연극이었고, 그 전에는 아이들을 돕는 일이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대면하다 보면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맘이 생기거든요. 안달복달했던 고민들이 허접쓰레기처럼 느껴지죠. 그늘지고 습한 곳에서 가장 먼저 수선화가 핀다는 거 아세요? 작년에 제가 아프리카에 심은 건데 이만큼 자란 걸 본 후 며칠 내내 행복했어요.” 모 시사 주간지가 선정한 ‘우리시대의 얼굴’ 중 한 명인 그녀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엄마이기도 하다. 인세가 모두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데 쓰인다는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와 봉사활동을 빼놓고서는 김혜자를 설명할 수 없다. <사랑이 뭐길래> 직후 처음 그곳에 다녀온 그녀는 구름 떼처럼 모인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지만, 이젠 일상이 되었다. 지금은 아이들을 만나러 갈 힘만 빼놓고 연극에 매달리고 있다. 말을 많이 하면 기운이 빠져서 두 번 공연이 있는 날엔 사람도 안 만난다는 그녀는 이미 3월 연장 공연 후 아프리카에 갈 계획을 세워 두었다.

    오늘 안 사실이지만, 김혜자는 달변가다. 느린 말투는 정겨운 타박처럼 다가오고 말의 행간에는 여운이 있다. 정성껏 연극을 설명하는 김혜자를 보고 있자니, 외람되지만, 나이 든 여자도 이렇게 예쁘고 귀여울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은 광대라지만, 그녀에게는 들척지근한 느낌 대신 섬세함과 단호함, 속을 알 수 없는 폐쇄성과 이를 무마하는 여린 천진함이 공존한다. 큰 눈망울은 입보다 먼저 무언가를 말하는데, 가끔은 너무 솔직해서 말문이 턱 막힌다. 어쩌면 그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풍요로운 감성의 조각일지 모르겠다.

    사회부 차관을 지낸 그녀의 아버지는 시 ‘님의 침묵’을 읽어주며 ‘님’이 누굴 뜻하는지 알려주시는 분이셨다. 배우가 되겠다는 똑똑한 고명딸에게 “공부 많이 해서 좋은 배우가 되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바람대로 김혜자는 좋은 배우가 됐다. 방송국 연기대상을 몇 번 거머쥐고, 불멸의 한국 어머니상으로 각인된 사실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무대란 매일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관객들을 만나야 하는 현장. 팔팔한 배우들에게도 힘든 노동의 현장이다. “오늘 몰랐던 것을 내일 더 잘 알 때가 있어요. 그럼 어제 관객에게 너무 미안해져요. 다시 모셔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요. 첫 공연을 앞두고 연출 선생님한테 물었어요, 지금 막을 올려도 되느냐고. 난 아직 완성이 안 된 것 같은데….” 연극이 완성되는 시점은 막이 오를 때가 아니라 배우가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줄 때다.

    “사람들은 ‘테레비’를 많이 보나 봐요. 요즘 왜 드라마 안 나오냐며, ‘좋은 일만 하시나 봐요?’ 이래요. 어떤 사람들은 그것조차 몰라 ‘요즘엔 뭐하세요?’ 물어요. 그럼 난 그냥 ‘아무것도 안 해요 (무척 수줍은 느낌으로!)’ 그래요. 뭘 하고 사는지 알아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뭘 하고 사는지가 중요한 거랍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넉넉치 않았기에, 나는 점점 초초해졌다.매일 밤 늦도록 거듭되는 연습 스케줄, 예의 바른 시선으로 우릴 주시하는 홍보팀, 엘로이셔스 수녀만 기다리며 연습 대기 중인 배우들…. 그 사이에서 김혜자는 “연출 선생님 오실 때까지 더 있어도 된다” 고 오히려 끌어 앉혔다. 그러고 그녀는 결국 우리를 안아주며 보냈다. 포옹이 키스보다 강렬하고 악수보다 미덥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김혜자의 인사법은 사람 마음을 데웠다. 을씨년스러웠던 늦겨울의 토요일 오후, 더운 밥 한 그릇 얻어 먹고 온 듯 한 여배우와의 만남. 세상 힘 없는 아이들을 만나며 무언의 메시지를 남겨 온 그녀가 무대를 향한 순진한 열정으로 또 다른 체온의 위로를 선사한다. 진짜 여배우는 카메라 뷰파인더 밖에서 더욱 오롯이 찬란하다.

    에디터
    윤혜정
    포토그래퍼
    신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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