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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2016.03.17

by VOGUE

    타인의 고통

    병원 드라마 <하얀 거탑>은 끔찍한 참사와 고통을 스펙터클로 전시하는 현대 사회의 미디어의 태도를 차용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역설적인 방식으로 ‘타인의 고통’을 성찰하게 만드는, 배우 김명민이 그 논쟁의 중심에 서있다.

    보통 사람에겐 생사의 갈림길이 되는 두렵고 신성한 병원. 이 병원이 생존을 위한 정치 비즈니스의 현장으로, 마침내 의료 분쟁의 법정으로 탈바꿈되는 드라마 <하얀 거탑>의 진정한 지휘자는 바로 카메라다. 3개의 장기를 동시 이식하는 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 수술 장면을 보라! 붉은 장기를 드러낸 한 인간은 고도로 숙련된 의료 기술자로 분한 김명민(장준혁)을 위한 최고급 재료일 뿐이며, 카메라는 그 광경을 다각도의 앵글로 화려하게 플레이 한다. 전망대 구조의유리 참관실, 어두운 회의실에 모인 심각한 의료진, 메디컬 이벤트를 특종으로 다루기 위해 모인 프레스룸의 기자들, 간호사들이 모인 병원 복도의 모니터로 각각 생생하게 중계되는 수술 장면과 다양한 ‘관객’ 반응의 몽타주는 그자체로 한 편의 ‘의료 퍼포먼스’다. 거기엔 ‘오열하는’ 환자의 보호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하얀 거탑>은 그야말로 병원에서 정치하는 드라마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1년 전에 역사적으로 가장 비정치적인 영웅이었던 이순신을 연기했던 김명민이 야망에 가득 찬 의료기술자로 돌변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김서룡 옴므, 제너럴 아이디어 by 범석

    여기는 <하얀 거탑>이 촬영되고 있는 경기도 이천의 촬영장. 수술실과 병원 복도, 입원실, 진료실, ‘정치 토크쇼’가 이뤄지는 와인바, 일식집, 출연진의 집 등 모든 실내를 재현한 거대한 개별 세트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말하자면 촬영의 99%가 이곳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배우와 스태프는 이 컨테이너 안에 몇 달간 유폐되는 것이다. <보그>가 만들어놓은 세트로 들어온 김명민은 탁월한 정치 기술로 국립대학 외과 과장으로 승진한 사람답게 약간 들떠서 말했다. “정치인 같죠? 이곳에 있으면 지진이 나도 모르죠. 밥 먹고 수술하고 정치하고… 지나치게 냉방 장치가 잘 된 이곳에서 세상과 단절되는 거예요.” 그가 단절된다는 하소연과는 반대로 <하얀 거탑>의 카메라는 김명민의 일거수일투족을 360도로 회전하며 보여준다. 흑백의 감정이 분할되는 눈동자, 비틀어지는 입술, 장기 위를 신출귀몰하는 손가락의 극단적 클로즈업과 함께.

    우리는 김명민을 진격의 함성과 동시에 외로운 등을 가진 남해 바다의 이순신으로 알고 있다. 아니, <꽃보다 아름다워>의 부유하고 현대적인 아웃사이더, 영화 <소름>의 소름 끼치는 과거를 가진 택시 기사로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터질 듯한 육중한 에너지로 ‘탈피’를 거듭했다. 2005년 남해 바다에서 이순신을 연기하면서 그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늘 배가 고팠다. ‘진주성에서 조선 군사 5천이 죽었다.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복식호흡으로 긴대사를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조선 수군들의 사기를 북돋는 연설을 하고 나면 심한 어지러움에 시달리곤 했다. 극적으로도 클라이맥스였던 명량해전 연설을 할 땐, 바다 위에 떠 있는 모든 군졸들이 빵으로 보였다.

    “연설을 하고 나서 저는 쓰러졌어요. 실제로 바닷물이 카메라 다리 위로 차오르는시간적 압박과 심한 허기로 생사의 절박성을 느꼈거든요.”

    2004년 <꽃보다 아름다워>의 복잡한 과거를 지닌 쿨한 젊은 남자를 연기하면서 김명민은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그는 신경 줄에 날이 선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엄마를 중심으로 모인 가족 중에서 저만 지나치게 현대적이었고 이방인이었어요. 노희경 작가의 팬이었지만, 저만 이 작품에서 소외된 것 같아 외롭고 힘들었어요.”

    2001년 술과 담배와 안개의 영화였던 <소름>에서 김명민은 비극적 운명을 가진 택시 기사 역을 맡아 아파트 복도를 유령처럼 배회했다. 그는 하루 종일 담배 피우는 장면을 찍다가 기절했다. 그때까지 그가 비흡연자라는 사실을 누구도 몰랐다. 수십 차례의 반복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동선을 유지하는 그에게 윤종찬 감독은 ‘컴퓨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지금, 인간의 고귀함과 비천함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얼굴에 새긴 그는 살인자든 영웅이든 심지어 스스로를 신으로 착각하는 야망의 희생자(<하얀 거탑>의 외과의사 장준혁)를 연기할지라도 완벽하게 그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진흙에 숨을 불어넣듯, 김명민이 캐릭터에 불어넣는 남성성의 육중한 호흡과 공기의 질감은 브라운관을 터지기 직전까지 꽉 채운다.

    “저는 하나님께 연기의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존심과 성실성은 저의 무기입니다.”

    김서룡 옴므, 제너럴 아이디어 by 범석

    김명민의 부친의 별명은 ‘시계’였다. 호텔에서 일하셨던 김명민의 아버지는 6시 정각이면 퇴근했고,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로 그 날의 시간을 가늠했다. 평생을 집과 교회와 호텔만을 오갔던 규칙적인 신사와 반듯한 모성애를 지닌 어머니 사이에서 김명민은 크리스마스 때면 교회 무대에 올라 베드로와 예수 역을 소화하는 성실하고 자존심 강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직업 의식을 강조하는 기독교 집안의 청년답게 그의 성실성은 눈부셨다. 대학 시절에 그는 이태원의 지하 스키복 가게에서 일명 ‘삐끼’로 일했다. 한 달이 지나자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했던 그의 급료는 정직원 급료의 배를 넘었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 스키복을 사길 원했기 때문이다. “20벌을 갈아 입어도 웃으며 친절을 베풀었죠. 그랬더니 대학 스키팀까지 몰려들었어요.” 성실성이 지나쳐 인근 파출소 소장님까지 못 알아보고 호객했던 그는 마침내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됐다. “유치장에서 폭행범, 잡범들과 함께 KFC 핫윙을 나눠먹으면서 보낸 하룻밤이 한 달 같았어요. 제 연기적 상상력의 좋은 토양이 됐죠.”

    김명민은 1996년 탤런트 공채 시험을 통해 배우가 됐다. 촬영 당일 의상을 들고 성취의 쾌감에 들떠 들어간 방송국 분장실에서 배역이 교체돼 통분에 젖기도 했다. “그럴 땐 저에겐 엄청난 오기가 자생합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시대적인 운’을 타고나 얼떨결에 스타가 되고, TV 카메라 앞에서 몇 가지 매뉴얼화된 연기 ‘포즈’로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팬시적인대사, 잘게 쪼갠 카메라 워크… 배우 스스로가 아날로그적인 운동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해선 ‘고독하고 성실한 시간’이 필요한 데도 말이다.

    “저는 종종 제가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요. 연기할 때는 남편이고 아빠라는 사실이 버겁습니다. 배우에겐 나쁜 피가 흘러요. 눈밭에서 무릎을 꿇고 온몸이 얼어붙어서 연기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트랙터에게 “내가 끝낼 때까지 멈춰서 기다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성을 지닌 존재가 배우입니다. 다시 세팅하면 모든 에너지가 제로가 돼니까요.” 그렇게 하찮고 비열한 인간이라도 ‘벌집처럼 다층적인 무게’를 채워 넣는것은 그 만의 재능이다.

    김명민은 거대한 스케일의 휴먼 드라마이자 인간 구원의 드라마인 <쉰들러 리스트>와 <미션>을 좋아한다. 그는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예수가 그랬듯이, ‘타인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고 대행해낸다. 천재 외과의사의 일생을 통해, 의료계와 교수 사회를 적나라하게 해부한 메디컬 드라마 <하얀 거탑>은 도발적으로 편집된 수술 몽타주 장면으로 시작했지만, 마침내 매 순간 살인자와 구원자의 경계에 선 의사의 정체성에 본격적인 질문을 던지며, 연옥과도 같은 의료 분쟁 상황을 이끌어낸다. “권력의 맛을 본사람이라면 그것이 마약보다 중독성이 심하다는것을 알 겁니다. 그리고 권력자는 자신의 직관적인 선택을 맹신합니다. 제가 맡은 외과의사는 환자의 회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질병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돌진합니다. 그 점 때문에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죠. 저는 장준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뱃속 깊숙히 젖은 모래가 서걱거리는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김명민은 내게 연기자 선배인 정애리가 보내준 휴대폰의 문자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그리고 의학 정보 프로그램인 <닥터스>의 진행자로서 사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닥터스>를 진행하면서 ‘얼굴을 잃어버린 분’을 만났어요. 침샘암에 걸린 여자분인데, 임신 7개월 때 암세포가 발견돼서 항암치료를 거부했어요. 아기를 위해서였죠.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대신 엄마는 코와 입을 잃어버렸어요. 너무 존경스럽고 가슴 아파요.”

    만약 <하얀 거탑>의 천재 의사 장준혁이었다면 태아와 엄마의 얼굴을 동시에 살린다는 명목으로 위험한 수술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이른바 ‘재난의 상상력’으로 야망을 달성하려는 현대인들을 향해, 김명민은 낮게 읊조린다. 전장의 북소리처럼, 가죽으로 된 목울대에서 공명하는 그 둔중한 목소리로. “인간은 존엄합니다. 저는 그걸 말하고 싶습니다.”

    에디터
    김지수, 손은영
    포토그래퍼
    김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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