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신은 배우를 창조했다

태초에 신은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다. 순수한 생명체였던 그들은 뱀의 유혹을 받아들여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순간 분노, 수줍음, 잉태, 노화를 직시하는 불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뱀은 발성학적 진화론으로 배우를 연상시키고, 뱀, 즉 배우는 영리한 괴물로서 우리 시대 ‘희로애락’의 산파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과 공간으로 둘러싸인 상자안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영화는 그 벽에 난 창문이다, 라고전설적인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말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다른 이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서서히 우리 자신을 배우의 캐릭터와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다면 관객들은 유체 이탈을 경험한다.

“그렇기에 배우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무대에 오를 때,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배우의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입니다. 슛과 컷 사이의 영겁의 시간, 카메라 안팎의 공간은 신성합니다. …스태프도 기자들도 그걸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쇼 무대의 백스테이지처럼 변한 방송국 분장실은 개탄스러울 정도지요”라고 배우 천호진은 말한다. 지금 TV에서 단련된 관록 있는 영화배우 천호진이 <보그>의 카메라 앞에서 영화 <데블스 애드버킷>의 사악한 악마 알 파치노를 연기하고 있다. 물론 그는 이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곳은 스튜디오일 뿐 진지한 영화 현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이 연출한 가족 드라마 <좋지 아니한가(2월말 개봉)>에서 자폐적이고 무덤덤한 아버지를 연기했다.

“<가족의 탄생>과 <바람난 가족>의 중간쯤에 있는 영화죠. 이 영화의 가족에겐 집착이란 게 없고 바로 그 점이 하이 코미디 적인 상황을 연출합니다. 배우들의 덤덤한 앙상블이컨셉이죠.” 천호진의 매력 중 하나는 관객들이 천호진을 믿고 좋아한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거친 사내의 이미지를 풍기는 인물이 섬세하고 부성애적인 행동을 보여줄 때, 관객들은 이 배우가 결코 이유 없이 나쁜 짓을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말죽거리 잔혹사>, <이중간첩>, <범죄의 재구성>, <주먹이 운다>에서 막다른 골목에서 쓰러진 불량 청소년, 이중간첩, 복서, 사기꾼… 온갖 비굴한 인생을 일으켜 주고 믿어주는 천호진의 아버지의 표정은 선보다는 악의 정서에의존하는 영화 장르의 경이로운 필터였다.

“전 영화 전체를 후시 녹음으로 촬영해 본 마지막 배우세대입니다. 먹고 살려고 이 일을 하고 있고, 그래서 가장 치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 박범신이 그러더군요. ‘나를 가장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유지해야 글이 나온다’라구요. 배우도 그렇습니다. 저는 영화학도가 아니라 프랑스 배우이름도, 연기 이론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린 스타들이 자신을 신처럼 천재처럼 착각하는 태도야말로 배우살이의 천적이라는 건 압니다. 우리 모두 프로가 되기 위해선 좀더 절박해져야 합니다.”

요즘의 몇몇 기획 영화들은 배우의 ‘절박한 연기’를 ‘개그화’ 시키고, 마케팅은 주제를 포괄하는 지적 능력이 결여돼 있다. 숏은 점점 짧아지는 반면 영화는 더욱 요란해지며, 특수효과가 배우의 연기를 대체한다. 관객들은 초특급 제작비를 투여해 만든 B급 충무로 특산품을 보기 위해 극장 앞에 장사진을 친다. 그런 면에서 고전적인 흑백 영화는 배우를 가장 위대한 구성물로 경배했다.


셔츠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스카프는 루이 비통, 모직 코트는 장광효 카루소.

한 편의 시처럼 연기를 건축하는 오광록. 셔츠와 보타이는 장광효 카루소, 턱시도 재킷과 팬츠는 루이 비통.

“배우는 오직 드라마 속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분장을 지우는 순간 존재는 사라집니다. 지금 저를 각색하시는 여러분 모두 죄책감을 느껴야 합니다.이런 촬영은 이미지에 불과하니까요.” 알 파치노가 나온 <시몬>이라는 영화엔 완벽한 디지털 배우가 등장한다. “그런 시대가 올 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는건 지옥입니다”라고 마지막 아날로그 배우 천호진은 읊조린다.

배우 오광록은 모든 움직임과 발성을 한 편의 시처럼 건축해낸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화물열차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의 눈은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오광록이 나온 영화 <복수는 나의 것>,〈올드보이>, <잠복근무> 등을 볼 때면 이 무중력의 사내와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든다. 지금 그는 <보그>의 카메라 앞에서 <리빙 라스베가스>의 알코올 중독자를 연기하고 있지만, 삶의 저편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으로 또 한 명의 선명한 도플갱어를 창조해냈다. 배우로서 그는 언제나 카메라를 바라보지만, 시인으로서 그의 눈은 모딜리아니의 주인공들처럼 4차원의 소실점을 응시한다.

“신이 배우를 창조한 이유는 인간들이 배우를 통해서 삶의 여행을 하길 바래서일 겁니다. 살면서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한 경계도 가르치구요.” 오광록은 <복수는 나의 것>의 엔딩 신에서 복수의 인과관계에 관련된 걸출한 폭력 장면을 연기했다“. 마지막에 송강호를 향해 칼을 찌르고 빼는 순간, 나 역시 내가 살해당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제 눈은 보이지 않는 제 자신의 살해 장면을 보고 있는 겁니다.” 신의 후예로, 한 인간으로, 배우들은 실패했고 또한승리했다. 영화 <우회>의 대사처럼 배우는 ‘당신이 어느 방향으로 방향을 꺾건, 숙명은 당신을 넘어뜨리기 위해 발을 불쑥 내민다’는 걸 상기시킨다.

오늘날 배우가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거나 연예전시에 포트레이트를 제출하거나, 모델이 되거나 오디션에 참가한다. 오광록은 배우예술원 1기 출신으로 그의 스승들 중 생존해 있는 연기 구루는 지금 99세다. “저는 무대에 맨발로 들어선다는 그 느낌이 좋았습니다. 산다는 건 모두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전 낯선 대로 인생을 놓아두면서, 25년을 연기했습니다.” 전문화된 스타시스템 속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스크린 배우들은 억대 개런티를 받지만,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사장과 웨이터의 1인 2역으로 출발했던 오광록은 한 때 1만원이 든 고결하고 가난한 봉투를 받은 적도 있다.

“배우로 살면서 나는 나를 카피하거나 패러디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내가 시인이기 때문입니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배우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는 건 너무 지겨워서 때론 눈을 뜨는 것조차 진부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배우는 늘 낯설고 신선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시와 닮은점입니다.” 그리고 오광록은 얼마 전 시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권용국 감독의 데뷔작 <파란자전거(2월 8일 개봉)>에 출연했다.

최초의 배우는 고대 그리스의 테스피스(Thespis)였다. 몸을 유달리 잘 움직이고 목소리가 크고 낭랑한 사람들은 부족을 대표로 노래하고 춤을 췄다. 그들은 코러스(Chorus)라고 불렸다. 어느날 코러스의 일원인 테스피스가 무리에서 뛰쳐나와 무대 위에 혼자 올라섰고, 사람들은 이에 화답했다. 무대에 올라선 한 명의 배우가 합창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이 더 박진감 있게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최초의 배우가 탄생했다.

한 편의 시처럼 연기를 건축하는 오광록. 셔츠와 보타이는 장광효 카루소, 턱시도 재킷과 팬츠는 루이 비통.

셔츠는 루이 비통, 트렌치코트는 제너럴 아이디어 by 범석, 헌팅캡은 폴로.

“찰리 채플린 시대에는 배우가 모든 걸 할 수 있었습니다. 독재자 히틀러에서, 산업사회의 기계형인간까지. 신이 왜 배우를 창조했을까요? 그건 배우가신도 되고 악마도 되고 예수도 될 수 있기 때문이죠.하나님도 솜씨 좋은 사람들의 재롱을 보고 싶으셨을테구요.” 배우 김병옥이 빛날 때는 세파에 찌든 웃기는 피해자 혹은 잔혹한 가해자 역을 할 때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영애에게 ‘너나 잘 하세요’라는 면박을 받는 전도사나, <짝패>의 비굴한 청년회장, <오래된 정원>의 변절한 386세대로 분할 때 지금 김병옥은 <보그>의 카메라 앞에서 흑백 영화의전성기였던 누벨바그 시대로 돌아갔다. 자전거, 돈가방, 트렌치코트, 권총과 뉴스보이캡… 김병옥에게 ‘배우’는 심심해 하는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준 선물이다. 하지만 영화세계에서 신은 감독이다.

“이 세상에 피 묻지 않은 시나리오는 없다고 합니다. 감독은 경외스러운 존재죠. 감독의 피조물이되기 위해 배우는 끝없이 자기를 정화하고 수련해야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인간 본성이 파렴치하다는 사실을 스타일리시하게 보여줬다. 김기덕 감독은 매순간 시지프스적인 자세로 영화를 만든다. 봉준호 감독은 소시민을 경시하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군상을 사랑했다. 김지운 감독은 꿈에서나 볼 듯한 유머러스하고 선병질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해냈다. 때때로 감독들이 편집에서 삭제한 장면은 배우에겐 살점을 도려내는 것과 같지만, 이런 창의적인 감독들의영화 속에서 위대한 배우는 어떤 배역을 연기하더라도 그 자신 특유의 스타일과 철학을 보여준다.

셔츠와 스카프는 루이 비통, 베스트는 제너럴 아이디어 by 범석, 헌팅캡은 보살리노.

“저는 <피와 뼈>, <철도원>, <파고>, <저수지의 개들>같은 영화를 좋아합니다. 심오할 뿐더러 배우를 위한 영화들입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심오한 영화를 싫어합니다. 개개인의 삶이 힘들고 어려우니까요. 후세인 처형이 동영상으로 보여지고, 환경 재앙이 현실화되고, 개인 파산이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영화적인 비극이 일상이 된 지금, 배우는 과연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과 용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위로하고 달래줄까요?” 김병옥의 반문은 마치 <햄릿>의 독백처럼 들렸다. 그러고는 쌍꺼풀이 굵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는 리어 왕이나 시저,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를 연기할 때 제가 신이 된것처럼 황홀경을 느낍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진짜 신이라면 저는 저를 웃기고 즐겁게 해줄 배우를 창조하겠습니다. 그게 답이겠죠.”

신은 태초에 아담과 이브를 빚으면서 천지창조의 신화를 완성했지만, 배우는 아직도 끝없는 노동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있다. 그리고 배우들은 언제나 전화를 기다린다. “이 시나리오의 배역을 꼭 당신이 연기해 주세요”라는 황홀한 전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