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낫 데어

가을날 지저귀는 새의 독창 같은, 인간 본래의 말, 인간 본래의 화성으로 어우러진 ‘천진한 아우성’산울림. 한번도 괴짜이거나 영웅인 적이 없었던, 그 자체가 안간힘의 ‘기행’이었을 ‘보통’ 천재 김창완.<The Happiest>를 들고 돌아온 이 역설적인 행복주의자를 만나보자.

셔츠와 팬츠, 재킷은 모두 디올 옴므, 부츠는 루이비통

전설적 포크록 가수 밥딜런의 전기 영화 〈아임 낫데어〉에는 수수께끼 같은 캐릭터가 펼쳐진다. 비난 받는 록스타, 사랑받는 포크 가수, 회심한 가스펠 가수, 시인, 선지자, 목사… 무려 7명의 서로 다른 밥 딜런은 비전통적인 여행을 하며, 관객을 목적지에 데려다 놓는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나는 거기 없다.”

김창완을 인터뷰하려고 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건〈아임 낫 데어〉였다. 미국의 대중 음악이 밥 딜런 이전과 이후로 나눠지는 것이라면, 한국의 대중 음악 또한 김창완이 만든 밴드〈산울림〉이전과 이후로 나눠도 무리가 없다.
1977년 김창완이 그의 두 동생들과 ‘아니 벌써’라는 곡을 들고 나왔을 때, 그런 음악은 대한민국에도, 그 시대 월드 팝의 주류시장에도 없던 것이었다.아무도 그들처럼 노래하지 않았다. 그것은 직설의 저항도, 은유의 도피도 아니었으며, 스타일의 변증법이나 실험정신, 진화된 악성도 아니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 삶의 맑은 틈새를 비집고 눈을 뜬 원형의 기지개 같은 것, 산 정상에서 터지는 벅찬 함성 같은 것, 가을날지저귀는 새의 독창이나 여름날 울려 퍼지는 매미의 중창 같은, 인간 본래의말, 인간 본래의 화성으로 어우러진 ‘천진한 아우성’이었다.“시작은 그 당시 기성 가요에 대한 반란 같은 거였어요. 난 그때 노래들이, 1970년대 감정들이 과대포장돼 있는 게 불편했어요. 과도하게 문화적인 인간들이 넘쳐났죠. 객관성이 결여돼 있고, 문화적인 척 하는 게 거북했어요. 그 시류에 발 담그기 싫어서 물을 보는 고양이 같은 태도로 노래를 했어요.”

김창완과 산울림은 그렇게 딴청을 피우듯 청춘이나 고독, 사랑의 일상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각설이’처럼 걸쭉한 목소리로 내장을 헤집으며 갈증을 호소하는 히피 한대수나 반항적인 장르 음악의 세계에서 깊은 숨을 터뜨리는 로커 신중현과도 달랐다. ‘아니 벌써’나‘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너의 의미’‘청춘’ ‘산할아버지’등의 노래는, 그 노랫말을 이루는 단어들 예컨대 ‘, 벌써’나‘어렴풋이‘’산할아버지’등이 제 스스로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원래의 성격대로 소리내거나 숨죽이는 노래들이다.‘벌써’는 깜짝 놀라고 있고,‘어렴풋이’는 미지근한 우유처럼 풀어지고,‘산할아버지’는 웃으며 껑충거린다. 그의 노래 속에서 단어들은 태어난 소명대로 어울리며, 인간 안에 깃든 그리움과 동심을 연주해냈다. 그렇게 그의 노래는 그 시대에 머물지 않았고, 어쩌면 그는 거기 없었다. 그는 저항과 정치와 디스코로 점철된 70~80년대에 대항해 싸우거나 투항하는 대신 달동네 골목, 한강다리에 앉아서 기타를 튕기며 장 자크 상뻬나 생 텍쥐페리 같은 음조로 삶의 속살을 들여다보았다.



열일곱 살에 서울대에 들어간 형 김창완, 둘째 김창훈, 전화번호부를 두드리며 리듬을 타기 시작한 막내 김창익의 ‘삼형제 밴드’는 그렇게 13장의 밴드 앨범, 4장의 동요 앨범, 독집 앨범을 포함해 총 30여 장의 앨범을 펴내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리고 2008년 1월 막내 김창익의 죽음으로 산울림의 메아리가 끝났다. 2008년 11월 말 발매한 산울림 전집 소책자에 김창완은 이렇게 썼다.

“모든 색은 합쳐져 단 하나의 작고 검은 마침표가 되었으며, 모든 빛은 합쳐져 수억 겁의 미래로 가버렸다. 산울림, 그들의 노래는 화석이 되었다.”

오랫동안 깊은 실의에 빠져 있던 김창완은 김창완 밴드라는 이름으로 첫앨범〈The Happiest〉를 발표하고 무서운 속도로 일을 시작했다.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젊은 밴드들이 산울림을 오마주하는 곡을 쓰고 노래를 시작했다. 그의 노래들이 너무 모던했기 때문에, 2000년대의 젊은 가수들은 그의 ‘천재성’을 해석하고 샘플링하는 데도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새 앨범에 수록된 곡 중 지게차에 숨진 막내동생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곡 ‘Forklift-지게차’는 영어 가사로 된 아름다운 컨추리 포크송이다. 그리고 그 노래는 김창완이 삶을 대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촬영을 위해 가죽 재킷과 팬츠를 입고 20대처럼 움직이던 김창완은 셔터와 셔터 사이에 중얼거렸다. “저 노래는 후주가 참 슬퍼요.” 막내 김창익을 보내고 그는‘내 청춘을 잃었다’라고 했었다. 김창완은‘포크리프트’라는 곡이 김창완 밴드를 만든 동력이 됐다고 설명한다.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다가 너무 억울해서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미친놈처럼 노랫말을 썼어요.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내 동생만 데려갔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게차만 보면 나는 발길질을 해대지….’그렇게 연필로 휘갈겨 쓰면서 애처럼 엉엉 울다가 잠을 잤어요.” 그 다음날 그의 외아들 신화에게 노랫말의 영역을 부탁했다. “영어 가사가 나오자마자 곡을 썼어요. 내가 나를 위로하고 싶었고, 그 방식이 너무 비감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일사천리로 여기까지 왔어요. 이 노래의 위로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를 대체할 아무것도 없었을 거예요.” 슬픔이 눈물에 다 씻겨 내려갈 때 즈음, 또 한번의 깨달음이 있었다. 2008년은 김창완의 삶을 왜곡시킨 한해였고, 또한 반전시킨 한해였다.“나는 내 인생이 이렇게 굴절이 있을지 몰랐어요. 하지만 죽음을 통해서 그동안의 표류하던 삶이 방향성을 찾기도 했어요. 제가 끔찍한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 드릴게요.”

그는 예의 맑고 명료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생명의 명령이라고나 할까요. 어느 날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신문지에 파가 싸여 있어요. 근데 그 신문지가 꼭 수의 같았어요. 수의 속에 반으로 잘려진 파가 있었는데, 파가 죽음의 냉장고 안에서 손톱만큼 자라 있는 거예요. 엄청 무서웠어요. 그때 느꼈어요.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게 있구나. 죽음 속에서도 생명이 움트는구나. 그리고 미친 듯이 일했어요. 공연, 드라마 녹화, 디제잉… 그 바쁜 일상의 힘이 나를 몰아가요. 그리고 회복되는 거예요.”

일종의 인터뷰의‘통과제의’를 거친 후, 우리는 음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존 레논과 믹 재거, 밥 딜런에 대해. 그가 수염을 길렀을 때의 어떤 사진은 존 레논과 꼭 닮아 있다.“그 사람들은 노래한다기 보다는 생명을 살아낸 것 같아요. 최근에 롤링스톤즈 영화〈샤인 어 라이트〉도 봤지만, 그들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의식을 못했거나, 일부로 안 했을 거예요. 그들은 자기로부터 늘 달아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체감했던 그 얘기를 했다. 그들은 시대가 그들을 규정짓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이 시대를 앞질러 가버렸다. 김창완은 어떤가.“처음에 산울림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우리 음악을 변종으로 생각했어요. 산울림은 한국 포크록의 원조였고, 이제야 그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해요. 밥 딜런 영화의 제목이 〈아임 낫 데어〉잖아요. 나는 평생을 내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살아왔어요. 이게 나다, 싶으면 바로 피해버렸어요. 같은 자리에 두 번 자리 깔지 않는 유목민처럼 살았어요. 나는 늘 거기 없었어요.”

사람들이 그를 가수다, 라고 패턴화했을 때, 그는 갑자기 드라마 연기자로 도망갔고, 라디오 DJ로 영토 확장을 해갔으며, 심지어 자전거를 타는 환경주의자로 정의 내릴 즈음,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도로를 질주한다.“내가 음악 하던 시절은 불행했어요. 곡을 끝까지 검열 당했고 전면 수정 당하기도 했어요. 비정한 시기에 태어났고 그 불행한 환경도 환경으로 받아들였어요. 연기도 다르지 않아요. 벌써 연기 생활도 25년이 됐어요. 그동안 소시민적인 캐릭터가 나와 걸맞다는 오해를 받았죠. 나는 그것도 불행한 음악 환경과 다르지 않다고 봐요. 그런데 점점 감독들이 다른 걸 발견해 주더라구요.”2007년 드라마〈하얀 거탑〉에서 김창완은 정치적 권모술수에 능한 병원장을 연기해 그의 안경알 너머로 소박한 백열등이 아닌 램브란트 시대의‘어두운 램프’를 반사해냈다. 나는 아직도 김명민이 비장한 악역을 성공적으로연기해낸 건, 김창완이라는 놀라운 반사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건 일상을 제대로 살고, 냉엄하게 관찰해낸 자만이 낼 수 있는 권위와 자력이었다.“저는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밋밋한 A4 같은 일상이야말로 변화를 느끼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캔버스 같은 거예요.”

셔츠는 제스 by 박성철, 팬츠는 레주렉션 by 주영, 레더 재킷과 부츠는 길옴므.

54년의 인생을 물 흐르는 대로 살아온 것 같은 김창완. 매 순간 놀라운 집중력으로 핵심을 관통해내면서, 그냥 보통 중년처럼 늙어가고, 가끔 소년처럼 딴청을 피우듯 눈을 반짝이는 남자. 나는 그에게 대중들과 한번도 불화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일상의 천재로 살아간다는 게 힘겹지 않은가를 물었다. 그가 그 질문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나는 다시 물었다.“천재라고 생각하시나요?”“사람들이 제가 천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걸 쑥스럽게 생각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요.”“네? 무슨 말씀이신가요?”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그러시다면 천재로 사는 기분이 어떤가요?”“우쭐해요.”“오만하시군요. 항상 이겼나요?” “글쎄요, 대중들은 저의 그런 오만함이 착각이길 바라는 거 같더군요.”그는 대중들이 김창완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에 대항하기 보다 휩쓸려 살았다고 말했다. 그것조차 오만일지도 모른다고 첨언하면서.

54년 인생을 살면서 깨달은 가장 큰 깨달음은 ‘생각은 의외로 인생보다 너무 단순하다는 것.’ “사람들은 생각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생각만큼 단순한 게 없어요. 보고 만지고, 이런 감각과 경험은 너무나 복잡해서 생각의 상상력이 따라갈 수가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많은 얘기를 해도 이렇게 손한번 잡는 거를 못 따라가요. 저는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건 어떤 노래도, 어떤 삶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살바도르 달리와 톰 매카시 감독을 사랑하고, 하루에 4 ~5리터의 물을 마시고, 가수가 꽃 키우는 사람, 배 짓는 사람과 함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많은 가수들에게 그걸 배웠어요. 존 레논의 절규, 핑크 플로이드의 거대한 록의 성, 에릭 클립톤의 일상성… 그러면서 표현의 목표를 너저분하게 예시하지 않으려는 습관이 생겼어요. 무엇이든 직접적으로 정면돌파 해요, 나는.”들어보면 그의 노랫말이 그렇고, 보다 보면 그의 연기가 그렇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쓴 가장 진실된 가사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김창완 밴드 1집의‘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를 흥얼거렸다.“… 미리 알 수 있는 것 하나 없고 후회 없이 살 수 있지도 않아….”

요즘엔 스타일적으로도 로커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는, 젊은 애들한테 우리나라에도 록의 성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꿈에 부푼, 새롭게 일렉트로닉에 빠진 행복한 김창완.

고전적인 정신 분석 방법은 치료를 받는 사람이 긴 의자 디방(Divan)에 누운 채로 자신의 꿈을 구술한다. 김창완의 디방은 노래와 기타였다. 그는 꿈에서 본 대로 기타로 오토바이를타고, 시로 노랫말을 쓰고, 앨범 재킷에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막내동생의 죽음으로 총 정리된〈산울림 전집〉과 ‘포크리프트’가 따뜻한 브릿지처럼 들어간 김창완 밴드 1집〈The Happiest〉를 양 손에 쥔 채. 앨범 재킷에는 키스 해링풍의 낙서화 느낌으로 5명의 남자가 앉아 있다. 어느 날 꿈에서 소년들이 놀다가 “어, 우리가 언제 어른이 됐지?”하며 깜짝 놀라더라고. 앨범의부제는‘행복, 너 길 잃으면 전화해.’ 김창완의 말을 정리하자면,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출발이다. 행복은 위에도 아래도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없다. 그것은 바로‘느낌표’를 가진 인간의가슴 한복판에 있다.“

그랜드캐년을 구경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예요. 그 중에하나가 한 지점에서 일출부터 일몰까지를 보는 거예요. 우리가일상을 감상하려면 움직이면 안 돼요. 빤히 지켜봐야 돼요.”54년 동안 한번도 괴짜이거나 영웅이거나 스타인 적이 없었던, 그자체가 안간힘의‘기행’이었을‘보통’ 천재, 가장 현실적인 초현실주의자 김창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