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방비한 소동극

현재 진행형인 산울림이라는 과거, 여전히 피 끓도록 말 달리는 청춘, 인디 신에 심폐소생술을 감행한 새싹. 김창완 밴드, 크라잉 넛, 장기하와 얼굴들이 질펀한 난장을 벌인다.

각자 마음에 드는 자리에 골라 앉았다. 제일 첫째 줄 왼쪽부터 이상혁, 박윤식, 이민우, 장기하, 한경록, 최원식, 정중엽, 이상면, 이민기, 김인수, 김창완, 하세가와 요헤이, 이상훈.

세상의 모든 뮤지션들 중에서도 ‘밴드’라는 집합은 모종의 냄새를 풍긴다. 그들은 넘치는 테스토스테론을 주체하지 못하고 수컷다움을 뽐내거나, 저희들끼리 의뭉스럽게 무언가를 작당모의 한다. 무대위에서는 음악이라는 본드로 철썩 달라붙은 듯 보이는 멤버들이 무대 아래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인 양 각자 벽 보고 딴청을 피우기도 한다. 물론 ‘평범하고 통제 가능한 남자들’이라는 인상을 풍기면 그건 매력 없는 밴드일지도 모르겠다. 의뭉스럽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들이 오로지 무대 위에서 음악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일 때 팬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거니까. 여기 세 팀의 밴드가 한자리에 모였다. 김창완 밴드, 크라잉넛, 장기하와 얼굴들. 미미시스터즈까지 포함하면 자그마치 16명이다. 누구는 촬영 시작부터 끝까지부처 같은 표정을 지으며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고, 누구는 계속 생글생글 웃으면서 호의적인 기운을 내뿜는다. 또 누구는 목소리가 워낙 커서 다른 이들이 대화할 때 덩달아 악을 쓰게 한다. 오는 7월 4일 막을 여는 조인트 무대인 ‘大規模公演(대규모 공연)’ 투어를 앞두고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 모인 16명의 사람들. 이곳은 웃음소리와 비명과 개성이 한데 섞인 난장이다.

“너희들… 오늘 끝나고 스케줄이 어떻게 되니? 아니, 오늘 다같이 연습하는 날이기도 하니까 끝나고 한잔 해야 되지 않을까… 뭐 곱창이라도.” 김창완이 운을 뗐다. 누가 질문했을 때 대답으로 뱉은 말, 혼자 중얼거리던 말, 옷은 어디서 갈아입냐고 물었던 것을 제외하고 그가 먼저 현장의 누군가에게 말을 건 첫 문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크라잉넛의 한경록이 우렁차게 맞받아쳤다. “아 걱정 마십시오! 촬영 끝나고 한 잔, 연습 끝나고 한 잔, 이렇게 쭉 마시면 됩니다!” 이 세 밴드가 이어진 것도 크라잉넛의 멤버가 김창완과의 술자리에 장기하를 데리고 오면서부터였으니까, 이들은 술로 맺어진 인연이 맞다. 크라잉넛 멤버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세 팀의 공통점이 있다면 다들 ‘말술’이라는 거죠. 이번 투어는 아주 죽어날 것 같아요. 어우, 일단 한번 시작하면 아침까지 가니까.” “계산은 김창완 선배님이 물론 자주 하시긴하는데… 사실 제정신으로 끝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요.

‘쿡쿡 찌르며 괴롭히는 학생과 괴롭힘 당하는 데 도가튼 학생.’교탁 앞에 서서 상황을 던지자,감 빠른 김창완과 이상면은 신들린 연기에 돌입한다. 말 잘듣는 학생들처럼 굴다가도 한번 발동이 걸리면 통제가안 되는 16명. 연기와 실제를 오가는 모습들을 촬영했다.그리고 여전히 표정 없는 언니들, 미미 시스터즈와 학교시험을 치르느라 진짜 지각한 장기하와 얼굴들의 김현호.

”크라잉넛과 장기하와 얼굴들에겐 대선배이자 술친구, 그리고 영원히 늙지 않을 ‘개구쟁이’인 김창완이 공연 한번 크게 해보자고 먼저 이들을 불러모은 건 아니다. “원래 서로들 호감을 갖고 있는 사이였고, 음악에 대한 뜻을 공유하는 사이기도 했어요. 비록 세대가 다르더라도 음악을 받드는 그 모습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모인 거죠. 우리는 음악의 명령에 따를 뿐이에요. 음악의 기치 아래 모이는.”

산울림의 정신을 이어가는 김창완 밴드의 정서는 여전히 펑크다. 김창완은 음악이 갖고 있는 힘 자체를 믿는 사람이다. 앞으로 뭘 하겠다고 다짐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자신들을 옥죄는 음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음악을 더 자유롭게 넓혀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사람들은 김창완이 여전히 ‘무엇’이길 원하지만, 그와 밴드 멤버들은 ‘무엇’인 것을 거부한다. “장기하는 나한테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 또한 장기하 안에서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 독특하기만 한 것 같은 가사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아주 섬세해요. ‘싸구려 커피’는 음악적인 면이 놀랍다기보다 그런 정서를 노래하겠다는 태도가 좋았죠. 록은 태도라는 얘기가 있듯이, 무엇을 노래하느냐 보다 어떻게 노래하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어요.”

시간이 흐르자 교실 안에서 그룹이 나뉘었다. 장기하가 김창완과 크라잉넛 멤버들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대충 흥얼거린다. 산울림의 ‘내가 고백을 하면 깜짝 놀랄 거야’와 ‘싸구려 커피’를 한 곡처럼 이어 부르기 위해 ‘싸구려 커피’의 키를 좀더 높여 부른다. 잠시 후, 촬영 대기 중에 왁자지껄 놀고 있는 한 무리를 보니 김창완이 ‘싸구려 커피’의 랩(이라고 하기엔 중얼거림에가까운)을 연습하고 있었다. 슬쩍 끼어들어 물었다. “랩도 하시는 건가요?”“네.” 다소 무성의한 목소리로 돌아오는 김창완의 단답형. 벌써 지친 건가 싶어 기색을 살피는데, 그가 딴청을 피우며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한다.“뭐…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 비가 내리면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완창’을한 김창완이 그제서야 씩 웃었다.

교실의 다른 편에서 어슬렁거리던 크라잉넛의 보컬 박윤식에게 ‘대규모공연’에 대한 힌트를 달라고 하자, 눈을 반짝이며 아이디어를 툭 던진다. “우리가 미미 시스터즈를 한번 쟁탈해 볼까 합니다.” 크라잉넛은 무대 위에서나 아래서나 좀체 꾸밈이라는 게 없다. 김창완 밴드가 피터팬과 그의 친구들의 모임이라면, 크라잉넛은 영원히 철 들지 않을 악동들이다. 순도 100%의‘리얼 딴따라 정신’으로 무장한,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룩, 룩, 룩셈부르크! 아, 아, 아리헨티나!” 같은 노래를 내지르는 록 신의 악동들. 크라잉넛은 올여름, 5집 〈OK목장의 젖소〉 이후 3년 만에 새 음반을 들고 나온다. 하지만크라잉넛의 말마따나 그들은 컴백하겠다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싱가포르에서, 마카오에서, 그리고 그들의 자궁인 홍대 클럽들에서 늘 공연을 했다.‘대체 지금 여기서 놀지 않으면 어디서 놀겠다는 건가’라는 자세로 무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공연 말이다. “김창완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우리는 다 음악에 대한 의리가 있는 사람들이죠. 자기가 좋아하거나 믿고 있는 신념들을 끝까지 갖고 가겠다는 사람들.(이상면)”




초등학교 교실에는 몇 가지 부류의 학생들이 있다. 시끄러운 학생, 공부잘하는 학생,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학생, 남한테 시비 거는 학생 등. 선글라스 안에 감춰진 눈으로 오늘은 무슨 시비를 걸어볼까 궁리했을 크라잉넛의 ‘몸집 큰 초등학생’ 김인수가 멀쩡히 지나가던 ‘진짜 초등학생’을 붙잡고 물었다. “너 크라잉넛 알아?” “모르겠는데요.” “크라잉넛을 몰라? 너 안 되겠다, 소녀시대 사인하고도 바꿀 수 있을 만한 형들이야.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여쭤봐. 그럼 혹시 장기하는 아니?” “…….”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마냥 완전히 썩었던 장기하는 다행히도 하루하루 신나게 별일 없이 산다고 했다. 달랑 세트랙으로 구성됐지만 배가 불렀던 장기하와 얼굴들의 싱글 ‘싸구려 커피’는 붕가붕가 레코드에서 애초에 50장 정도만 찍었었다. 음반사 관계자와 친지들에게만 돌려도 모자를 개수다. 지금은 남에게서 강탈하지 않는 한 구할 길 없다는 그 싱글은 총 1만3~4천 장 정도에서 정점을 찍으며 절판됐다. 그리고 싱글의 세 곡이 포함된 정규 1집 〈별일 없이 산다〉는 현재 3만5천 장 정도가 팔렸다.

“정규 1집은 대형 공장제로 찍은 음반이에요. 장기하와 얼굴들이 소규모수공업으로 음반을 만들다가 돈 좀 벌어가지고 이제는 공장에서 만드는구나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 원래 우리 레이블의 전략이 그래요. 싱글은 소규모로 만들고, 정규 음반은 공장에서 만들고.(장기하)” 원래 수공업 음반이라는 건 누구나 부담 없이 낼 수 있는 음반의 형태다. 일단 내 본 다음, 레이블 내에서 반응이 괜찮은 음반이 나오면 거기서 얻은 자본을 바탕으로 공장제로 향하는 게 순서다. 그런데 소규모 수공업으로 제작된 장기하와 얼굴들의 싱글이 ‘초대박’ 나버렸다. 외부 사람들의 시선은 물론, 레이블 내부에서도 수공업 음반 역시 좀더 퀄리티를 갖춰야 하지 않겠냐는 기대가 생기는게 사실이다. 어느 날엔 붕가붕가 레코드의 모든 사람들이 달려들어 하룻동안 음반 2천8백 개까지 만들어낸 적도 있다. 이대로 가다간 근육이 마비되고자폐 증상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민 끝에 나온, 이들의 ‘지속 성장을 위한 신 사업 전략’ 그 첫 번째. “장기하와 얼굴들의 공연 실황 DVD를 만들었어요. 이거는 구매자가 멋대로 케이스를 조립할 수 있는 키트로 제공되는거예요. 직접 라벨 붙이고 케이스 접으시고 하면 됩니다.(붕가붕가 레코드 홍보실장)” 이 키트를 어떻게 조립하고 만드는지 장기하가 직접 시연을 보이는 영상까지 만들었다. 이거 참 시크하다고 해야 하나. 하기야 ‘토 나올 정도로’수공업 음반 몇 백 장 안 만들어봤으면 말을 하지 말지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정중엽이 혼자 기타를 튕기면서 분위기 있는 BGM을 깔아주는 동안, 크라잉넛의 김인수는 아코디언을 주무르며 복도를 누볐다.미사리의 포크 카페와 서커스 유랑단의 공연장이 신경전이라도 벌이는 듯 공존하고 있을 때, 김창완 밴드와 크라잉넛의 멤버들 몇 명은 저희들대로 MT촌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아직 고학년들이 수업 중이니까 되도록 조용히 촬영해 주세요”라던 초등학교 관계자의 외침은 이미 악기 소리와 노래 부르는 소리에 묻혀버린 지 오래다. 김창완의 말마따나 이 중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장기하가 제일 ‘애늙은이’ 같고 묵묵하다(대신 그는 무표정으로 한번씩 날려주는 ‘진지한 개그’를 몸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제가귀로만 듣고 노래방에서나 불렀던 선배들의 음악을 그들의 연주에 맞춰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게 좀 어리둥절하면서도 좋죠. 어느 팀이나 형식적인 새로움은 추구하지만 그 팀의 본질을 밀고 나가기는 쉽지 않아요. 그런데 김창완 밴드와 크라잉넛은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요.”

이들은 ‘대규모 공연’ 투어 때 두 팀씩 함께 무대에 서는 장면을 연출한다. 김창완 밴드와 크라잉넛, 크라잉넛과 장기하와 얼굴들, 그리고 장기하와 얼굴들과 김창완 밴드가 서로의 음악을 주고받으며 판을 짤 것 같다. 현재진행형인 산울림이라는 과거, 여전히 피 끓도록 말 달리는 청춘, 인디 신에 심폐소생술을 감행한 새싹이 뒤엉킨 소동극. 오늘의 자리는 이 ‘대다수 무방비한 남자들’의 ‘무방비한 쇼쇼쇼’ 예고편쯤으로 해두자. 물론 예고편과 소동극이 막을 내린 후 남는 것은 질펀한 술판이다. 오늘의 결론도 이거였다. 먼저 퇴장하던 김창완의 마지막 외침.“아, 그러니까 이따 밤에는 홍대 곱창으로…갈래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