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액트리스> 여배우 6인 인터뷰

당대의 여배우 6명이 모였다. 예측불허의 자아도취 유전자를 지닌 지상 최고의 여자들이 모이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분노와 질투로 카메라 렌즈를 녹여버리거나, 유혹의 속눈썹으로 장미꽃 가시를 만들어내는, 고혹적인 6인의 여배우와 함께한 풍경.

LEE MI SOOK검정 베일이 달린 모자에 40년대 스타일의 뉴 룩을 멋지게 소화한 이미숙. 잘록한 허리 라인이 돋보이는 회색 스커트 수트는 디올(Dior).

LEE MI SOOK
처음에 그녀를 대면하면 흘깃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나를 집어삼켜서 파시스트적인 소화효소로 분해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조금만 인내력을 발휘하면, 그녀가 상대를 이 명예로운 전쟁터의 스파링 파트너로 초대하고 있으며, 그녀 방식으로 친절하게 길을 열고 열을 세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숙은 연기를 할 때도, 일상에서도 상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직시한다. “내가 얼떨결에 팔자에 없는 <보그> 화보를 찍었네. 근데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 줄 몰랐어. 대체 무슨 작당들을 한 거예요?” 오십인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재미있고 신랄하며 강렬하다. “나는 항상 화려했어요. 지금도 화려하고, 어릴 때는 어린 대로, 나이 든 다음엔 나이 든 대로 화려했어요. 한 번도 화려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욕망이 늘 나를 화려하게 해. 한 치의 긴장도 늦출 수가 없어서, 아침에 일어나면 당장 나가서 스태프들을 닦달하고 싶다구. 장총을 준비할까, 비비탄을 준비할까 고민하면서 말이지.”

연기의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장 혀를 잘라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이미숙. 쾌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연기를 하는 건 패륜이라는 듯.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고결하며 위대한 종족이 여배우이며, 그녀는 여배우의 순결한 피를 유지하기 위해 50년째 전쟁중이다. 그녀는 60이 넘어서도 도자기처럼 희고 탄력 있는 가슴과 엉덩이로 우아한 베드 신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결혼과 이혼 이후 두 편의 영화 <정사>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이미숙은 이재용 감독의 부름에 주저 없이 달려왔다. “6인의 여배우들이 모인다는 데 그게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여배우의 특성상사심 없이 자기를 던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사람들은 여배우들이 별나게 사악한 희생자라고 생각한다. 그 누구보다 그들 자신에 의해, 그러니까 더 젊고 화려한 여배우들에 의해 희생될 뿐이라고. 그리고 여배우들이 모인 처지는 허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진절머리 나게 보여주는 한 편의 연극이 될 것이라고. 과연 그럴까?“

우리가 어설픈 1등이었다면 힘들었을 거야. 진정한 1등이면 섞일 줄 알고 화합할 줄 알아야 되는 거거든. 앞자리에서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만든 이미숙과 뒤에서 지긋하게 바라봐주는 윤여정과 용감하다는 게 뭔지를 보여주는 고현정과, 능력 있으면서도 뻔뻔하지않은 최지우와 시대의 아픔과 생기를 기성 세대와 어우러져 보여주는 민희와 여배우로서 사춘기의 성장의 갈등을 겪는 옥빈이가 만나서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배우라는걸 발견해 가는 거야. 그렇게 서로 가지치기를 해가는 게 너무 아름다운 거지. 나는, 나는말이지 남자를 그렇게 존경하지는 않아. 때로는 남자라는 존재에 의해 내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한계에 부딪힐 거라는 걸 알아. 내가 받는 고통보다 상대가받는 고통이 더 클 거야. 그보다 여배우이고 싶은 욕망이 크고, 여자이고 싶어서 질투가많아. 그래서 나는 노화라는 암과 싸우고 있어. 여자라는 타이틀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방사선 화학 치료도 거부하고 아날로그로 투병 생활을 하는 환자라고.”

나는 이미숙처럼 유머러스하게 히스테릭한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배우는 점점 만들어지고 있고, 그래서 어쩌면 점점 더 배우는 사라지고 있다고, ‘잔다르크’처럼 배우의 갑옷과칼과 휘장이 필요하다고 연설하는 여배우 웅변대회의 그랑프리 수상자 같은 이미숙.

<보그>의 패션 배우로 거듭날 때 가장 많이 고통스러워 했고, 패션 에디터와 헤어&메이크업 스태프의 애간장을 태웠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무성영화 시대의 여배우처럼 슬프면서 평온하게, 그러면서 위력적으로 포즈를 취해버린. 갑자기 그녀가 커브를 튼 듯 말했다. “결혼은 했나? 아이는…, 아이를 낳지 않은 건 잘한 거야. 왜냐면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싫거든.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까? 나는 여배우인데, 여자인데, 그런데 애들이 끔찍하게 좋으니까, 그게 또 싫은 거야.”

그녀와 헤어질 때쯤 돼서 나는 이미숙의 눈동자에서 리얼리즘과 고독함을 보았다. 그리고 여배우들과의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그녀는 하늘로 쏘아 올려진 신호탄처럼 가장 먼저 눈물을 터뜨렸다.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눈물짓던 <겨울 나그네>의 이미숙이나 6.25 전쟁을 오뚝이처럼 살아냈던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의 이미숙이나 <정사>의 가슴을 에이는 불륜, <스캔들>의 요부까지 이미숙이라는 드라마는 끝이 없다. 스스로 여배우라는 아름다운 행동철학자에게 사로잡힌 꾸밈없고 순진한 이상주의자 이미숙.


GO HYUN JUNG그 누구보다도 아방가르드한 룩들을 시크하게 소화해낸 고현정. 헐렁한 화이트 셔츠 블라우스와 블랙 팬츠, 그리고 멋스럽게 착용한 버클 장식의 가죽 코르셋과 투박한 블랙 부츠는 모두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매니시한 디자인의 트렌치코트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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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이와 펜을 집어 들기만 하면 타인의 생각을 복제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왜 고현정만 만나면 그런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지길 바라는 걸까? 고현정은 늘 화장기 한 점 없는 얼굴에, 머리를 감고 청결한 물 냄새를 풍기며 스튜디오로 들어선다. 어떤 무기도 없이, 항상 검은 옷을 입고 ‘이게 다예요’라는 미소를 가득 담은 채.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왜 고현정이 여배우들과 모여서 과감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냐구요? 세상엔 직업의 군상이 많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여자’라는 게 붙으면 특별해지고 편견이 많아지잖아요. 그래서 여자들한테 말해주고 싶었어요. “외로워 말라”고. 당신이 기쁠 때 우리도 기쁘고, 당신이 슬플 때 우리도 슬프다고. 저는 배우를 안 할 때, 오히려 연기한다고 오해를 받았어요. 24시간 연기하고 있다고 질책을 받았어요. 내가 아무리 집에서 혼자 그림 보고음악 듣는 게 내 모습이라고 해도, 그게 나를 보는 사람들이 원하는 내 모습이 아니라면, 그건 실패예요. 그래 진짜 모두가 행복해지는 캐릭터를 잡아 연기를 해보자, 그랬어요. 내 기질을 작정하고 바꿔보자. 사람들이 <여우야 뭐하니?> 때부터 진짜 고현정 같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때부터 진짜 내 안에서 나를 찾는 연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해변의 여인> 때부터 술도 마시고 진상처럼 굴기도 하고, 생면부지의 사람한테도 먼저 말을 걸고… 그랬더니 편해요. 정신 치료도 되고 건강해지는 느낌이에요.”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그녀는 힘든 시기를 견뎌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놀랄 만큼 통렬한 수양으로 ‘자기 방어 기재’를 모두 걷어냈다. 그녀는 최악의 경우가 생겨도 놀라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도, 일상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진실해서 연기인지 실제인지구분이 안 될 정도다. 이 말은 그녀가 지금 대중들과 놀라운 커뮤니케이션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타고난 성격을 갈고 닦고 유지하면서 사는 사람은 행운아예요. 저는 타의에 의해서 변형된 삶을 살다 보니 고유의 저를 잃어버렸어요. 엄마의 삶, 시어머니의 삶… 이제는 나답게 살려고 해요. 그래서 어쩌면 진짜 고현정의 연기가 시작되는 건지 몰라요.” 우리는 모두가 고현정이라는 여배우의 관객이다. 이건 흥미로운 인터랙션 게임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도 고현정을 보지만, 상류사회의 제3자의 눈으로도 그녀를 본다. 가끔은 고현정을 보면서 사람의 인생에서 부모와 배우자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토록 대단한 것이었나 놀라게 된다. 그녀가 하는 말, 그녀가 하는 대사는 모두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인지 고현정의 출연작을 볼 때마다 항상 ‘연기’라는 매체를 아주 품위 있게 사용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래시계>의 기나긴 신화를 지나 <봄날>에서 마침내 실어증을 깨고 처음 입을 열던 날, <여우야 뭐하니?>에서 자궁 모형을 끌어 안고 자기 연민에 펑펑 울던 날, <해변의 여인>에서 “왜 지랄이야?”라고 처음 욕하던 날,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 만큼만 얘기해요”라고 우리를 향해 냉소를 날리던 날, <선덕여왕>에서 “천하의 미실이 둘일 수 없으니 이 미실을 베면 될 것 아닙니까?”라고 호령하던 날. 매 순간을 변론하면서 인생은 내게 공정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던 나는 몇몇 대사의 위력에 눌려 눈앞이 깜깜해졌다. 여배우의 눈동자에 비친 세상, 여배우가 표현하는 감정, 대사와 대사 사이에 은밀하게 감춰져 있는 고현정이라는 실체의 생략과 비약 때문에.

“혼자인가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타운>에서 사립탐정은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는 대답한다. “누구나 그렇지 않소?” 자신들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뛰어다니는 와중에 다른 여배우들의 비밀을 캐내야 하는 연예계 인간형의 대부분의 특징은 고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현정은 다르다. 그녀는 스스로 고독을 선택한 쪽이다. “사람들이 솔직하다고 얘기할 때, 그건 아주 이기적인 거예요. 갈고 닦지 않은 진흙 웅덩이 같은 진심을 드러내 보이면서, 솔직하다고 징징대면 그것만큼 비참한 게 없는 거예요. 정 이해 받고 싶을 땐 정직하게 얘기하는 게 좋아요. 공정하게 내 입장이라고 하는 게 맞아요. 솔직하긴 쉽지만 정직하긴 어려워요. 그래서 아이들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냥 잘 모르겠어요.큰 틀은 있지만 이미 애들이 많이 자랐고, 일단은 내가 건강하게 살자,가 최선인 거예요.”고현정은 이번 영화에서 대단히 많은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그건 여러분들이 여배우의 삶에서 훔쳐보고 싶은 모든 것들의 총합이라고 할 만하다. 고현정이 연기하는 고현정은 스스로를 풍자하고 과장하며 위험한 수위를 넘나든다. 강박적으로 거짓말을 해대고 절망을 감추려고 부질없이 노력하는 나약한 개인은 없다.

일주일의 절반을 <선덕여왕>의 미실로 밤을 새우고, 나머지 절반을 <보그>의 촬영을 위해 그 치약 거품 같은 웃음을 날리며 청담동으로 돌아오던 날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그녀는 과로로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링거 바늘을 빼고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와 트렌치코트와 화이트 셔츠로 갈아입으면서 “<보그>가 얼마나 옷을 멋지게 입히는 줄 아세요?” 파리해진 안면근육으로 또 한번 사력을 다해 미소를 짓던 고현정. “<선덕여왕>에서 사극을 해보니까 그 상투성 안에서 또 마음껏 가볼 수 있는 자유가 있어요. 현대극은 저와 캐릭터를 왔다 갔다 하지만, 사극은 분장을 끝내고 나면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는 것 같고, 미실이라는 캐릭터 안에서 시원하고 기분 좋게 노는 거예요.” 언젠가는 연령대별 여배우들을 모아놓고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에너지의 칼이 창창창 부딪히는 거죠. 진짜 칼 빼고 했을 때 등수가 나오지 않겠어요? 그런 팽팽한 연기대결 속에서 기쁨도 참담함도 창피함도 우월감도 다 가져갈 수 있는 거예요. 어떤 게 독이 되고 약이 될지는 또 인생에서 두고 봐야죠.”

인터뷰 마지막에 그녀가 내뱉은 진짜 대사는 상처를 치유하고 질서를 복원하는 셰익스피어 스타일의 대사였다. 언제나 그렇듯 기사에 쓸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 말의 핵심은 ‘용서’였다.


CHOI JI WOO80년대의 섹시한 디바로 변신한 최지우. 디스코 볼을 연상시키는 언밸런스한 디자인의 스팽글 메시 드레스와 반짝이는 스키니 팬츠와 공격적인 싸이하이 부츠는 모두 구찌(Gucci).

CHOI JI WOO
잉그마르 베리만은 말했다. 사람의 얼굴은 영화의 위대한 소재다. 모든 것이 다 그 안에 담겨 있다. 최지우는 참 최지우처럼 생겼다. 언제 그녀가 이자벨 아자니 닮은꼴 선발대회에 나왔었나 싶다. <박봉곤 가출 사건>에서 붉은 고기 덩어리를 싹뚝싹뚝 썰어대던 벙어리 정육점 여자를 연기할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비명을 지르며 <올가미>에서 히스테릭한 시어머니 윤소정에게 끌려 다닐 때도 나는 ‘말하는’ 최지우를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이 말은 빈정거림이 아니다. 최지우는 그 자체로 초현실적인 현실의 여배우다.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처럼 그녀는 외모만으로도 타고났다. 그건 김희선이나 황신혜처럼 자로 잰 듯 황홀한 비례를 이루었다거나, 심은하나 이영애처럼 여운이 많아 더 애가 닳는 그런 미모가 아니다. 동그랗고 단순하고 오똑하고 정직한, 그러니까 여고 시절 점심 시간에 그 학년 전체에서 가장 예쁜 아이를 몰래 보러 갔을 때의 그런 친밀한 경외감을 준다고나 할까.

그리고 ‘지우 히메’라는 별명처럼 그녀는 타고난 공주다. 우리가 그녀를 처음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녀의 연기가 비범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최지우라서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세월이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번 영화를 함께하면서 그 비밀을 알았다. 최지우는 거친 리얼리즘 세계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싶은 팅커벨 같은 존재다. 실제로 최지우는 주변 사람들을 맑고 순하게 만든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그녀의 동화적인 삶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절로 든다. 심장이 썩어 들어간 팜므파탈로 그녀를 보고 싶은가? 상처투성이가 된 잔다르크의 수난으로 그녀를 보고 싶은가? 실존의 변방에서 떠도는 유령 같은 얼굴의 최지우를 보고 싶은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로마의 휴일>과 <티파니에서의 아침>의 오드리 헵번이 영원하듯, <겨울연가>와 <스타의 연인>에서의 최지우가 아직은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

일본 팬들이 ‘지우 히메’를 위해 정성스럽게 만들어 온 현장 도시락을 먹을 때도, 그녀가 이미숙, 고현정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틈날 때마다 소파에 앉고 싶어 할 때도, <보그>화보 촬영을 위해 어떤 옷을 입게 될지 궁금해할 때도, 곧 떠날 여행지 알래스카나 사랑하는 교토의 벚나무에 대해 꿈꾸듯이 얘기할 때도 그녀의 얼굴은 기쁨으로 희게 빛이 난다. 그녀의 입술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 열리는 법이 없다.

“제 어렸을 때 꿈이 영부인이었어요. TV 보면 예쁜 옷 입고 비행기 트랙에 올라가면서 손을 흔들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이는 거죠. 그런데 배우가 되고 보니 그게 바로 내가 어릴 적 보던 영부인의 모습이었던 거죠. <겨울연가>가 끝나고 7년인데, 그 오랜 시간 동안 팬들이 저를 바라봐 준다는 게 신기해요. 냄비 같은 사랑이 아니라 뚝배기 같은 사랑이된 거죠. 전 아직도 엄마 아빠와 같이 살아요. 2층 내 방에 올라가서 정원을 내려다볼 때가 가장 좋고… 인생에 굴곡도 없고 살면서 사고도 없었고, 내 이야기를 듣고 울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래서 처음 여배우들이 모인다는 얘기 들었을 땐, 그 안에서 픽션과 논픽션이 교묘하게 넘나든다는 게 정말 매력적으로 들렸어요. 내가 언제까지 틀에 박힌 사람으로 살 수도 없고, 미숙 언니 말대로 “지가 언제까지 공주 역할만 할 거야? 알을 깨고 나와야지.” 그 알을 나 혼자 힘으로 가 아니라 같이 깨주신다니까 좋은 거죠.”

인류는 흥미롭지 않지만 개개인은 흥미롭다. 그리고 여자는 여배우는 더더욱 흥미롭다. 최지우는 예측 가능한 범주 안에서 움직였고 그게 우리에겐 안도감을 주었지만, 그녀는 한류라는 에덴의 한가운데서 이른바 ‘선택 받은 자의 불안’을 느끼면서, 그녀만의 방식으로 공주의 성인식을 치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것이 <보그>와 함께라서 기쁘다.


YOON YEO JEONG트위드 수트를 입고 마드모아젤 샤넬처럼 우아한 포즈를 취한 윤여정. 블랙과 화이트, 그린이 절묘하게 섞인 트위드 수트와 화이트 러플 네크 장식은 모두 샤넬(Chanel), 블랙 비즈 장식의 힐은 슈콤마보니(Suecomma Bonnie).

YOON YEO JEONG
장마 기운까지 더해 가만 있어도 땀구멍으로 소금물이 차오르는 한여름청담동 915번지 스튜디오에 윤여정이 나타났다. 2억8천 만원짜리 거대한 세이블 코트를 입고.“밍크 아니에요. 세이블!”이라고 그녀가 예의 와인 냄새 나는 똑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63년 동안 한번도 따분해 본 적이 없었을것 같은 여자. 자기 안에 깃들인 고상함이나 추잡함에 대해서 언제든 거칠 것 없이 단어를 튕겨 올릴 수 있는, 타자기 같은 혀를 가진 여자 윤여정. 얼마전 줄리엣 비노쉬와 아크람 칸의 무용 공연에서 그녀를 만났다. 공연 후 샴페인 파티에서 그녀는 줄리엣에게 다가가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눈가에 얹힌 동그란 은테 안경과 진주목걸이, 디올의 뉴 룩 스타일 원피스를 입은 윤여정은 근대의 신여성처럼 보였고, 그래서 40대의 프랑스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나 60대의 한국여배우 윤여정은 경중을 가릴 수 없이 아름답게 빛나 보였다. 내가 그녀의 고급스러운 이미지에 대해 얘기를 꺼냈더니 윤여정은 내 말을 정정하고 싶어 했다.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아니라, 내가 고급스러워요. 하하하.”

자, 그럼 고급스러운 윤여정의 밍크 코트, 아차 세이블 코트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다. 그녀가 왜 이 삼복더위에 집 한 채 값의 털옷을 입고 숨가빠 하고 있을까? 그건 한국 영화계의 스타일리스트 이재용 감독 때문이다. 아니 한국 영화계의 모더니스트 임상수 감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 좀더 뿌리를 찾으면 1970년대 전설적인 누벨바그 델리키스트 김기영 감독 때문이다. 감독들은 항상 동시대의 어떤 관습적인 지점에서 독특하고 삐죽하게 팽창한 여성, 자기 욕망에 솔직한 채 기존에 없던 윤리를 툭 던지듯 내놓는 모던한화법의 여자로 윤여정을 원했다. 김기영의 <화녀> 시리즈에서는 초기 산업사회에서 이촌 향도한 가정부로 주인 남자와 바람을 피워 가족을 붕괴시켰고(그녀는 스물 세 살에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는 아들 부부에게 “나, 만나는 남자 있다. 가끔 섹스도 해”라고 담배 연기 뿜어내듯 단숨에 선언했다. 그리고 지금 이재용 감독은 그녀에게 대한민국의 톱 여배우들과 함께 픽션과 논픽션이 결합된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독특한 화법의 영화를 제안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대의 여배우들이 <보그>의 표지와 화보 촬영을 위해 모였다. 독 안에 든 쥐처럼 하룻동안 스튜디오에 갇힌 그녀들은 과연 서로에게 어떻게 반응할까? 손톱을 세운 채 서로를 할퀼까?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어딘가로 숨어들까? 가슴을 부비며 서로를 끌어안을까?

“이재용 감독이랑 현정(고현정)이랑 셋이서 와인 먹다가 프랑수아 오종의 <8인의 여인들>얘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스타일로 한번 가보자,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지. 요즘엔 인터넷이 모든 걸 까발리잖아. 신비주의도 웃기는 거지.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나서서 리얼한 여배우의 모습을 보여주자 이거였지. 난, 원래 여배우답게 조신하질 못해서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어요. 그냥 늙었지만 젊고 예쁜 후배들하고 하는 게 재밌잖아.”

한 사람의 인생을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가 여자가 일생을 통해 누리는 행복과 불행의 전조를 미묘하게, 그러나 완벽하게 포착해내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하지만 2주 동안 사운드 레코딩 때문에 선풍기조차 틀 수 없었던 화염 드럼통 같은 스튜디오에 갇혀 함께 지내면서 윤여정이야말로 진짜도 가짜도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이 투명하고 위용 있게 드러나는 근사한 ‘모던 레이디’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때로는 과장되게 그려진 아이라인에 ‘진시황제’ 같다고 기겁을 하다가, 꼼 데 가르쏭 스트라이프티셔츠를 어떻게 구입해야 할지 부탁도 하고, 가끔은 혼자 핸드백에서 슬림한 담배Vogue를 꺼내 고독하게 연기를 내뿜는. 그녀는 자신을 낭만적으로 치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가 전성기 시절 얼마나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자기 욕망에 못견뎌 하며, 자가당착에 빠져 파멸에 이르는 얼굴을 연기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에겐 오로지 윤여정의 목소리만 들린다. 가끔 연민과 호기심으로 동그래지는 눈이나 관용적으로 길어진 인중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명랑한 타이피스트나 빈틈없는 회계사 같은 목소리로 술집 엄마나 수녀, 정치인의 마담뚜나 연속극의 맹맹한 물김치 같은 시어머니를 연기할수 있을까 궁금증은 든다.

“여배우의 가장 큰 매력은 자기 성격이에요. 난 배우가 돼서는 잘한다,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근데 나는 그것보다 순간순간 연예계에서 ‘딜’ 해야 하는 상황이 견딜 수 없었고, 시집을 갔던 게 그런 이유들이 컸어요. 그때는 결혼해서 미국에 가면 영영 못 올 것 같이 그러던 시절이라, 애 낳고 자연적으로 연기를 못했어요. 결혼 파경 맞으면서(조영남과의 이혼) 다시 하게 됐을 때, 그때부터 철이 들었던 것 같애. 나는 행복이란 것도 잘 못 느꼈는데, 첫아이 낳고 병원에서 퇴원해 품에 안고 젖을 먹이면서 ‘참 행복하다’ 그렇게 말했었나 봐. 생각해보면 배우로 사는 게 행복하다, 그렇게 느낀 건 60이 넘어서야. 늙으니까 이제 진짜 나로 가는 거 같고, 심술 맞지 않게 곱게 늙고 싶어.” 그녀는 다른 여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도 격식을 갖추고 상냥하게 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이가 들었든 젊었든 간에 윤여정만큼 남을 지배하려는 에너지가 없는 성숙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는 동안, 윤여정이라는 여자도, 그리고 여배우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분 좋다. 윤여정이라는 신여성을 기다리는 그 다음 감독은 홍상수다.


KIM OK BIN강렬한 붉은 번아웃 벨벳 드레스에 투박한 낚시 장화로 클래식한 아름다움을 뽐낸 김옥빈. 미니 드레스와 가죽 벨트, 투박한 가죽 소재의 낚시 장화는 모두 프라다(Prada).

KIM OK BIN
김옥빈처럼 에너지가 변화무쌍한 여배우는 처음 보았다. <박쥐>에 출연한 후 처음 만났을 때도 나는 그녀가 송강호보다 무서웠다. 영화를 보기 전이었는데 송강호가 뱀파이어라는 것은 알았지만, 얌전했던 그녀가 나중에 송강호보다 더 피에 굶주리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식욕과 성욕의 힘도 걷잡을 수 없이 세져서 도시의 지붕 위를 펄쩍펄쩍 날아다니다, 바닷가 절벽에서 해를 보고 검은 뼛가루로 사라질 거라는 걸 몰랐는데도…, 나는 그녀가 외계 생명체처럼 더 무서웠다. <박쥐>는 에밀졸라의 <테르즈라깽>의 번안이었고, 그 영화의 주인공은 나쁜 피의 희생양으로 시험에든 사제 송강호가 아니라 시시한 암컷으로 지루한 삶을 살다 제 멋대로 욕망에 날뛰고 짐승의 본능을 분출하는 ‘테르즈라깽’, 즉 김옥빈이었다. 그리고 현실의 김옥빈에게서 ‘테르즈라깽’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녀 안엔 대체 얼마만큼의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는 걸까? 어쩌면 신경증이면서 순진무구한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밤마다 도시의 빌딩을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옥빈이라는 버튼을 누를 때마다 시시각각 사춘기 소녀, 빈혈기 있는 여자아이, 우월감과 자기 비하가 뒤섞인 여배우, 순한 양, 고집 센 염소, 자궁에서 웅크리고 하품 하는 태아, 관념을 항해하는 교양인… 수많은 세포들이 두서 없이 튀어나오려고 아우성을 친다.

“처음에 이재용 감독님이 저의 우울한 면을 보고 <다세포소녀>에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라는 궁상맞고 엉뚱한 캐릭터를 만들어 주셨어요. 눈에 다크서클 내려온 것도 좋아하시고, 별 거 아닌 것에 슬픔이 가득한 그런 얼굴을 발견해 주셨죠. 박찬욱 감독님도 불안정하고 들쭉날쭉한 면을 재미있어 하셨어요. 그래서 베드 신 찍을 때도 제가 몇 번이나 더 가자고 그랬어요. 알몸으로 있었는데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더 하자고, 더 달리자고 제가 그랬어요. 여배우는 그럴 때 감독이 죽이고 싶도록 밉다고 그러지만, 저는 밥만 제때 먹으면 헤헤 웃고 그랬어요. 그래서 별명이 ‘밥빈이’였어요.”

깊은 밤 바다에서 달빛 아래 탐스럽게 퍼덕거리는 갈치 한 마리를 잡았는데, 손에 쥐어보니 낚싯바늘과 함께 채인 것 같은 섬뜩한 천진함. 은빛 비늘을 휘날리며 허공으로 높이 솟구쳐 오르다 피투성이로 좌충우돌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스스로 바늘을 빼고 넓은 바다로 다시 유유히 돌아가는 김옥빈. 그래서 김옥빈은 영화라는 푸른 스크린에서 더할 일이 많아 보였다. 함께 모인 여배우들 중에서 가장 어렸고, 가장 삐죽이 나와 있었고, 그 속절없이 아름다운 환담 속에서도 고요히 혼자 독서를 하던, 촬영 기간 내내 가장 지루하고 슬픈 표정을 띠었지만, 순간순간 입을 옆으로 길게 늘여 가지런한 치아가 다 보이는 가장 가식이 없는 보석 같은 웃음을 보여주던 매혹적인 김옥빈.

다 큰 여자들 사이에서는 영원히 완벽히 이해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고, 아이처럼 모두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 완벽히 보호 받을 때만 신이 나서 떠들고 싶지만, 그러나 여배우로 나이 들어간다는 건 신동이 자기 초능력을 조절해 가는 것처럼 내면에 기나 긴 참회와 절제와 눈물의 습자지를 쌓아두는 일이라는 걸 그녀는 배웠다. 스타일리시한 김민희 때문에 이 영화를 할까 말까 가장 많이 망설였다는, 미니스커트도 부끄러워 입을 수 없었다던 그녀가 프라다의 근사한 붉은 벨벳 미니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을 때 우리 모두 따뜻한 박수를 쳐주었다. 나는 마지막 촬영 때 그녀에게 이번 촬영을 위한 마지막 내레이션을 해보라고 부추겼다. “여배우들이 다 모였다. 그 오만 가지 기운을 모두 흡수했으니, 이만 끝~!” 옥빈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드문드문 이어지던 새된 웃음소리는 점점 속력을 내더니 연신 새로운 리듬을 타며 음정을 높여나갔다. 세포들이 기뻐 아우성치는 소리였다.

KIM MIN HEE커다란 토끼 귀를 달고 섹시한 바니 걸이 된 김민희. 토끼 귀와 루즈한 캐시미어 스웨터, 그리고 반짝이는 팬츠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레이스업 부츠는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KIM MIN HEE
김민희가 바니걸스의 토끼 모자를 쓰고 돌아 다닌다. 김민희가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셀카를 찍는다. 김민희가 구찌와 돌체앤 가바나와 샤넬과 이브 생 로랑이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행어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다 영원히 제로가 되지 않는 마법의 크레디트 카드라도 든 것처럼 깔깔깔 웃는다. 꽂히는 옷을 만나는 순간 대상에 몰입한다. 마치 새 학기가 되어 새로운 교과서를 받은 듯. 그 순간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옷은 아무리 좋아해도 성병도 안 걸리고 간통죄로 감옥에도 안가고 상처 받을 일도 없다.

패션 유토피아라는 이상한 나라에 사는 평범한 소녀 김민희. 김민희가 거울 앞에서 옷을 들고 취하는 미미한 제스처, 하이힐에 발을 집어넣을 때의 나른한 경련은 옷에 관해 여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우화적인 판토마임. 잃어버린 패션 낙원의 귀중한 단편에 이르게 하는 통로, 스타일이 곧 인격이라는 ‘일시적인 열반’에 빠져들어 가게 하는 일종의 은밀한 발레.

아! 민희를 보면 그 올빼미처럼 커다란 눈과 근사한 커브를 이룬 눈썹과 세모꼴로 뾰족하게 치켜 올라가는 윗입술과 직각으로 곧게 떨어지는 어깨와 휘청거리며 걷는 가녀린 다리를 보면 지나치게 튼튼한 내 두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녀는 눈보라 치는 크리스마스아침에 태어났을 것 같다. 천상의 아름다움이 지상의 아름다움 위에 내리치던 날, 이 붙임성 있는 눈부신 처녀가 태어났을 거라는 건 모두의 생각이다. “참, 민희는 어쩜, 어쩜…. 쟤는 어쩜 저렇게 예쁠까?” “민희야~! 민희야 뭐해? 이 옷 좀 입어봐.” “민희야, 너는 어떻게 인형처럼 땀도 안 흘리니?” “민희야~ 어젯밤 뭘 했길래 눈이 보얗게 부었어?” “우리 민희, 샴페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 흐느적거리는구나.” 사람들은 멀리서 김민희만 보이면 자동적으로 입이 귀에 걸리고, 마치 최신 뽀빠이 바지와 토끼 인형을 안고 뒤뚱거리는 손녀의 재롱이라도 본 듯이 신이 나서 죽으려고 했다. 말리지 않으면 용돈이라도 쥐어주고 싶을 태세였다.

“저는요, 예전엔 패셔니스타라는 타이틀을 피하고 싶었어요. 갖고 가고 싶지 않았어요. 김민희라는 배우가 너무 패셔너블한 걸 단점으로 보니까. 근데 지금은 다 갖고 가고 싶어요. 내가 패션을 알고 스타일리스트들이나 에디터들과 얘기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환상적이잖아요. 전 <몽상가들>이나 <녹색광선>처럼 환상 속에서 살고 싶은 맘이 있어요. 그래서 수혁 씨랑(모델 이수혁) 앤디 워홀, 에디 세즈윅 그런 화보도 같이 했잖아요. 수혁 씨는 예술적으로 내가 놓치는 부분을 알려주고 그래서 만남이 지루하지 않아요. 이번 여배우들이 모여서 하는 프로젝트도 그 친구가 더 기뻐했어요. 내가 일을 하고 싶어하는 걸 아니까. 두려움도 있었지만, 좋은 게 훨씬 컸어요.”

김민희는 자기가 감독이라면 이 멋진 배우들과 좀 야릇하고 섹시한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고 했다. 끈적거리지 않고 저속하지 않지만 야하게 아름다운. 천성적으로 갖고 태어난 게 너무 많아 샘이 나는 최지우와 볼수록 궁금해지는 김옥빈을 모델로 직접 패션 화보도 진행하고 싶어 하고, <뽕>과 <정사>를 대표작으로 내놓은 이미숙을 진짜 여자라고 느끼고, <두려움 없는 사랑>이나 <모래시계>의 고현정을 동경하고(우리 엄마는 현정 언니만 나오면 왜 이렇게 이쁘니? 그러세요), 윤여정처럼 멋있게 나이 들고 싶은 김민희.

“그런데 저는 질투는 없어요. 질투를 하면 내가 작게 느껴지니까 그런 건 억제하나 봐요. 전 근사한 여배우이고 싶고, 그래서 예쁜 마음, 자유로운 영혼, 유혹, 그러니까 누군가를 유혹하는 힘? 이 세 가지는 꼭 갖고 싶어요.”

어릴 적 이재용 감독과 <순애보>를 찍었고, 사진 작가인 김용호와는 그의 사진 소설 <소년>을 위해 인천 용유도에서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하하하 웃으며 뛰어다녔던. 그 소녀가 자라서 <굿바이 솔로>라는 노희경 드라마를 찍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얘기도 낳고 싶었고 결혼도 하고 싶었지. 근데 친구야, 언니야. 내가 원하는 걸 하는 게 사랑이 아니야. 그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게 사랑이지.”

그런데 민희야, 민희를 보면 사람은 매일 조금씩 늙는 게 아니라, 10년이고 20년이고 늙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별다른 이유 없이 2시간 만에 20년쯤 늙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민희라면 네가 마흔 즈음 접어들었을 때 어느 날 저녁, 거울을 보며 속엣말을 하겠지. ‘맙소사, 한 나절 만에 십 년을 늙어버렸네.’


6인의 여배우들이 〈보그〉의 패션 카메라와 영화 〈액트리스〉의 동영상 카메라 앞에서 동시에 연기를 선보였다. 마드모아젤 샤넬로 변신한 모던 레이디 윤여정, 40년대 그레타 가르보처럼 우아한 멋을 보여주는 이미숙, 남자를 상징하는 트렌치로 분방한 애티튜드를 표현한 고현정, 빅 헤어와 관능적인 목선이 돋보이는 디스코 퀸 최지우, 달콤한 바니 걸 김민희, 클래식과 아웃사이더의 경계에 선 김옥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