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희, 블랙의 여신

블랙은 신비로움과 침묵의 결집으로 다가온다.장미희가 블랙의 여신으로 변신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완벽한’블랙에 휩싸인 채, 장미희가 열사의 밤을 일으키는 뜨거운 바람처럼 천천히, 그리고 드라이하게 변해갔다.

조형적인 실루엣이 돋보이는 드레스는 질 샌더(Jil Sander).

레더와 시폰 소재가 콤비된 롱 베스트와 두 줄을 엮어 브레이슬릿으로 연출한 크리스털 네크리스는 르 베이지(Le Beige).

미니멀한 케이프와 이너로 입은 매시 소재 톱은 르 베이지, 실버 네크리스는 크리스 루스(Kris Ruhs at 10 Corso Como).

튜브톱 드레스로 연출한 롱 스커트는 이상봉(Lie Sang Bong), 볼드한 실버 체인 브레이슬릿은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 at 10 Corso Como).

장미희는 한 번도 장미희가 아닌 적이 없었다. 블랙이 천 가지 다른 방법으로 여자를 증명하듯, 장미희는 지난 30년 동안 천 가지 다른 방법으로 그녀가 장미희임을 증명해왔다. 우리가 마지막 본 장미희는 작년 8월 〈보그 코리아〉 창간기념 화보에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데빌로 변신한 장미희. 당시 그녀는 〈엄마가 뿔났다〉의 ‘고상하고 악마적인 시어머니’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블랙 셔츠와 팬츠, 그리고 블랙 선글라스를 낀 그녀는 너무나 미인이었고, 불쾌하리만치 날씬했다. 패션 피플이 가진 최상의 것이 그녀 안에 들어 있었다. 은발의 메릴 스트립으로 변신해서, 명품 백을 집어 던지고, 순진한 기자들을 가차없이 짓밟고, 홀로 피흘리는 스테이크를 먹는 그녀는 요즘 최신 유행어인 ‘에지’가 도달할 수 있는 정점, 그러니까 ‘우아한 파시스트’로서의 장미희였다. 나는 아직도 〈엄마가 뿔났다〉에서의 대사를 잊을 수 없다. 계층이 다른 김혜자가 복잡한 식탁 매너를 비웃으며 ‘귀족놀음 하는 거 같애요’라고 했을 때, 장미희는 입술을 최소한으로 움직여서 차갑게 말했다. “귀족놀음이 아니라, 난 진짜 귀족이에요.”

내가 그 말을 꺼내자, 장미희는 명랑하게 그 기억을 끄집어냈다. “완전히 푹 빠져 지냈어요. 지난 여름은 여배우로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였죠. 혼신을 다해 연기했고, 그래서 저 자신도 대중들과 함께 즐거웠어요. 그 뒤로도 많은 대본이 들어왔지만 혼연일체가 될 캐릭터를 다시 만날 때까지, 당분간 쉬기로 했죠.” 쉬는 동안에도 훈련은 계속된다. 트레이너와 협업해서 팔다리의 근육을 길게 뽑아내고, 칼로리를 계산해서 몸의 지방을 컨트롤하는 일 같은 것. 일을 안 할 땐 예비군, 일을 할 땐 전투병이라는 장미희. “저는 그런 게 일상이에요. 평생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힘들어요.”

지난번 〈보그 코리아〉의 화보 컨셉이 할리우드 스타일의 ‘Devil Returns’이었다면, 이번엔 프렌치 스타일의 ‘Madame Noire’라고 하자, 그녀가 은쟁반에 푸른 강낭콩이 튀는 웃음소리를 냈다. “호호호호호. 마드모아젤이 아니구요? 난 결혼도 안 했는데…?” 가끔 이렇게 장미희 식의 어린아이 같은 애교를 만날 때 즐겁다. 유지인, 정윤희와 함께 70년대 트로이카 붐을 일으켰던 그녀가 여전히 카메라의 앙모를 받는다는 사실이 어리둥절하기도 하지만(그녀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 나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이제는 그녀가 오페라 가수 같은 목소리로 나를 ‘부장님~’이라고 부르다니!).

“누아르, 블랙… 개인적으로 블랙을 정말 좋아해요. 어떤 컬러도 블랙 앞에서는 색이 안 되죠. 모든 욕망 혹은 절망, 인간이라는 개체가 가진 관능의 힘을 다 갖고 있어요. 한국 영화가 뜰 때도 저는 필름 누아르의 팜므파탈을 못 해봤어요. 〈깊고 푸른 밤〉이 제일 누아르적인데, 그것도 최인호 원작과 〈물 위의 사막〉을 믹스해서 시나리오를 만들었거든요. 배창호 감독하고 최인호 감독이 상의해서, 제 캐릭터 이미지를 만들어줬어요. 배우는…, 여전히 배우는 수동적이에요. 장미희라는 여자의 실체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저의 얼굴, 저의 손, 저의 몸, 저의 목소리…, 작가가 그런 이미지들을 조합해서 판타지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전, 그래서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 좋아해요. 트뤼포 감독이 만든 〈줄 앤 짐〉에서 잔 모로, 이자벨 위페르나 까뜨린느 드뇌브를 보면 성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성숙한 철학이잖아요.”

한쪽 어깨가 크리스털로 장식된 니트 드레스는 발맹(Balmain), 와이드 뱅글은 구찌(Gucci), 싸이하이 부츠는 체사레 파초티(Cesare Paciotti).

블랙은 색채를 능가하는 색채이자 스스로를 두드러지게 표현해주는 색. 그녀가 어떻게 블랙을 사용하는가를 보자. 작년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그녀가 입었던 옷은 마르탱 마르지엘라. 살색 보디 수트에 블랙 팬츠, 블랙 재킷이었다. 반전은 바로 가슴 위의 블랙. 살색 보디 수트의 가슴 위에 그려진 검은 안경은 브래지어처럼 보였고, 그래서 언뜻 보면 블랙 브래지어 차림으로 레드 카펫을 밟은 듯한 쇼킹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가슴에 검은 안경이 달려 있었죠. 판타스틱 영화제라서 그런 시도를 했어요. 대종상이라면 또 달랐겠죠. 저는 대담하면서도 쿨한 그런 스타일이 좋아요. 마르탱 마르지엘라가 의도한 건 안경이었는데, 그게 가슴에 있으니까 ‘브라’처럼 환각을 일으키고… 난 그래서 벨기에 디자이너들이 잘 맞아요. 그들은 옷만을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어떤 관점을 창조해요. 왜 책을 달이라고 부르지 않고, 책이라고 부를까? 그런 천진한 발상에서 시작해서 ‘검은 선글라스를 쓴 가슴’이라는 유머가 나오는 거죠. 옷을 입는 방식도 바꾸고, 소매나 어깨를 해체해서 재해석하고, 그런 상상력이 대중들에게 호평을 받든 혹평을 받든 혼자 외롭게 견뎌나가는 게…, 꼭….” 꼭, 장미희 같다. 70년대 데뷔 초에는 패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공부했고(앙드레 김 드레스를 입고 〈내셔널지오그래피〉에도 나오면서), 80년대에는 파리에서 프렌치 시크를 배웠다. “제가 키는 프랑스 여자들보다 컸어요. 그래서 검은 머리, 노란 피부를 가진 동양 여자인 내가 유니버셜한 공간에서 어떻게 아이덴티티를 찾을까, 그걸 탐구했어요. 그래서 〈깊고 푸른 밤〉에서의 시크한 블랙 라인들이 나왔고.” 90년대는 외국에서 공부한 것들을 응용해서, 작품 안에서 마음껏 놀기도 하며. “〈사의 찬미〉 시대 영화 의상들은 지금도 무척 모던하잖아요?” 그리고 마침내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자기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내 생각대로 입으면서, 패션 컬렉터로서의 길을 찾을 수 있었어요.”

오랜 시간 배우로 살아와서, 이제는 자신이 누구인가 정의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장미희. 가끔은 떠다니는 자신의 모습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실제의 장미희가 끼어들 틈이 없어 슬퍼지기도 하고. 그래서 엄마와 강아지 목욕도 시키고, 친구들과 제주도로 용평으로 여행도 떠나는 지금의 휴식 같은 일상이 한없이 소중해진다. “저는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요즘엔 나무를 닮아가고 싶어요. 몇 십 년이 지나도 땅 속 깊숙이 검은 뿌리를 내리는 나무 같은 여자.” 그렇게 스스로를 끝없이 진화시켰던 검은 불사조, 장미희. 그녀가 스튜디오라는 무대에 뿌리내리자, 대지는 침묵으로 텅 비어버렸다. 아니, 텅 빈 것이 아니다. 드라이하게 탈색된 누아르 조명 앞에서 잠시 그녀의 검은 망토가 서걱이거나, 검은 머리카락이 파시시하게 부서지거나, 검은 마스카라가 경련하거나, 검은 릭 오웬스 코트가 어깨 위에서 꿈틀댄다. 화가나 음악가처럼, 여배우도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완벽한 ‘블랙’을 연기할 수 있다.

화려한 주얼 장식 드레스와 브라톱은 미우미우(Miu Miu), 레더 글러브는 발리(Bally), 체인 브레이슬릿은 베라 왕(Vera Wang).

러플 디테일의 튜브톱 미니 드레스는 D&G, 화이트 셔츠는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독특한 꼬임 형태의 볼드한 링은 이본느 바이 베로(Yvonne by Vero at So’salt).

볼륨감 있는 실루엣의 코트는 릭 오웬스(Rick Owens at 10 Corso Como), 이너로 입은 깃털 장식 코튼 톱은 제인 바이 제인 바이 자인 송(Jain by Jain Song), 회화적인 페인팅의 스커트는 모스키노(Moschino), 볼드한 메탈 뱅글과 링은 로에베(Loew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