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애, 사랑스러운 퍼스트레이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수애는 이제까지 명성황후가 지녀온 전설적인 카리스마와는 대조적으로, 죽기 직전까지 사랑받았던 퍼스트레이디를 그려냈다. 반가 출신의 야심 많은 여성이 국모가 되는 과정은 정윤희를 닮은 산동네 아이가 여배우가 되는 과정과 오버랩 됐다.

섬세한 자수가 돋보이는 레드 컬러의 실크 레이스업 베스트는 진태옥, 꽃무늬가 프린트된 연핑크색의 면 레이스 치마는 차이 김영진.

내추럴한 소재가 돋보이는 오픈 칼라 디테일의 원피스는 진태옥, 내추럴한 실루엣을 돋보이게 하는 단솟곳은 차이 김영진.

실크 소재의 레드 컬러 말기가 돋보이는 짙은 녹색 치마는 김혜순 한복, 자연스러운 볼륨 실루엣을 돋보이게 해주는 단솟곳과 내추럴한 삼베 치마는 모두 차이 김영진.

“무명이 없이 혼자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으면 무서웠을 거예요.” 수애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침착하게 말했다. 군대 간 조승우를 떠올리며 하는 말이다. 새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수애는 ‘명성황후’ 민자영 역을 맡았고, 조승우는 그녀를 사랑하는 호위무사 무명이 되어, 150년 전 경복궁의 참혹한 현장으로 들어갔다. 그 해 가을, 1895년 10월 8일, 무명은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 낭인의 칼을 가슴에 꽂은 채 고꾸라졌다. 뒤이어 무명의 날카롭게 벼린 칼의 호위를 받은 채 명성황후의 몸도 그 위에 차갑게 포개졌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그 자리에서 불태워졌고, 다음날 국모를 잃은 백성들은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촬영 전에 저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어요. 이렇게 불운한 여자가 있다니! 하지만 촬영이 끝나고, 제가 무척 행복한 여자라는 걸 알게 됐지요.” ‘민비시해’ ‘여우사냥’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역사적 비극 속에 그녀는 대체 어떤 황홀경을 발견한 걸까?

〈불꽃처럼 나비처럼〉이 크랭크인 되기 일 년 전, 나는 수애를 만났었다. 당시 우리는 창간 12주년 특집으로 영화 패러디 화보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수애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명성황후를 퓨전사극으로 풀어낸 〈보그〉의 클래식한 패션 무비 〈The Queen〉의 주인공으로 열연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촬영은 순조롭지 못했다. 2컷 정도 찍었을 때 그녀는 촬영을 접고 스튜디오를 나가 자신의 밴으로 들어갔다. 당시에 개봉 예정이었던 〈님은 먼 곳에〉의 컨셉과 맞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저는 재연 배우가 아닙니다”라고 그녀는 울분을 참듯이 말했다. “제 안에 아직 〈님은 먼 곳에〉의 순이가 있는데, 여왕이나 왕비를 연기할 수는 없습니다.” 스토리와 함께 서서히 감정을 충전시키는 영화와는 달리, 담배를 피우고 떠들어 대는 스태프들 앞에서 ‘포즈’ 연기를 하는 것도 괴롭다고 했다. 우리는 그녀를 위해 천장까지 높은 담을 만들어주었고, 대하드라마의 몇 장면을 포기했다. 그때 수애의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수백 만원의 세트비와 수천 만원의 보석과 수만 볼트의 카리스마로 무장한 스태프가 모인 〈보그〉의 화보 촬영을 중간에 스톱시키고, 스스로 ‘스토리보드’를 수정한 여배우는 여태까지 없었다. The Queen, You Win!”

그런데 오늘, 일 년 전과는 전혀 다른 수애가 나타났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따로 떨어져 혼자 밥 먹고 혼자 조깅하던 수애, 화보 촬영장에서 낯선 스태프를 만나면 어쩔 줄 몰라 어깨를 움츠리던 수애, 사람들에게 천장보다 높은 담을 치던 수애가 아니라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타인을 만나는 설렘으로 가득 찬 수애가 나타난 것이다. 사이더스 FNH의 김미희 대표는 수애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 내게 열심히 설명했다. “여배우라는 존재에 대해 함께 고민했어요. 현장에서 함께 어울리고 영화 전체를 책임지는 영화인으로서의 모습… 이번 영화에서도 대원군 역을 맡은 천호진 씨와의 연기 대결이 정말 팽팽했어요. 그 강렬한 대결 구도가 멜로 라인에 방해가 돼서 많은 부분을 들어내야 했지요. 요즘엔 뮤지컬 제작에서 큰 재미를 못 본 저를 위해 수애가 만날 때마다 밥을 삽니다. 여배우가 제작자에게 밥을 산다구요. 하하.”

실제 수애는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설명하면서 제일 먼저 “이 영화의 총제작비는 90억, 순제작비는 65억이 들었어요”라고 운을 뗀다. “투자를 받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그만큼 제 책임이 크다는 얘기죠. 이제까지 저는 모든 상황에서 한 발을 빼고 있었어요. 약간의 방관자랄까요. 제가 아는 게 적고 시야가 좁았기 때문에 늘 걱정스러웠어요. 열심히 해놓고도 말을 하면 분산되어 날아가버릴 것 같아서 늘 입을 다물고 있었죠.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럴 수가 없어요.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죠.”

수애는 서까래 모양을 한 원시적인 침대 기둥과 눈처럼 하얀 침대를 보고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웃었다.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니까 저만 잘하면 되는 거죠.” 오늘 처음 보는 스태프들과 어울려 맥모닝 세트와 원두 커피 한 잔을 마시던(1년 전만 해도 혼자 샐러드만 먹었는데!) 수애는 마치 혼자서 상경한 씩씩한 소녀가장처럼 보였다. 〈님은 먼 곳에〉의 순이를 연기할 때만 해도 이준익 감독을 비롯해 정진영, 엄태웅 등 든든한 남자 배우들에게 기댈 수 있었지만,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

“군대에 간 조승우 씨 몫까지요. 하지만 괜찮아요. 나라의 운명을 등에 졌었고, 모두의 지지를 받았고, 그만큼 시기를 받았고,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어요. 조승우 씨는 저를 정말 섬겨주었어요.”그녀는 조금도 불안해 하지 않았다. “오늘은 혼자서 베드 신을 연기해야 될 텐데 괜찮겠어요?” “그럼요, 영화에서는 아주 복잡한 삼각 베드 신도 연기했는걸요. 이름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자객이 황후가 되기 전의 민자영을 보고 반해서 궁으로 들어왔어요. 가질 수 없으면 지키겠다,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베드 신…, 부군인 고종을 섬기는 잠자리에서 저는 문 밖에 서 있는 무명의 몸을 느꼈답니다.” 그건 황후를 품고 있던 왕도 마찬가지. 몸은 자신이 품었으나 정작 마음은 갖지 못한 고통스러운 정사라고나 할까. “많이 슬펐어요.” 사랑을 받은 여자와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는 그 존재감이 다르다. 사랑을 받은 여배우와 사랑을 받지 못한 여배우의 존재감도 천지 차이다. 이제까지 수애는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을 갈구하는 쪽이었다. “〈가족〉에서는 전과3범이었고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탈북 처녀였고, 〈그 해 여름〉에서도 이병헌 씨와 소심하게 이뤄질 수 없는,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게 저한테서 참 멀리 있었어요. 〈님은 먼 곳에〉에서는 나를 피해 떠난 남편을 구하러 전쟁터까지 찾아가잖아요. 저는 이제까지 남자의 진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혼자서 씩씩하게 험한 세상을 헤쳐갔던 셈이에요.” 단호하고 씩씩한 우리의 여배우 수애. 그녀가 ‘황후’가 된 게 전혀 낯설게 여겨지지 않았다.

수애는 얼마전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랩을 선보였다. 그녀가 여배우가 되기 전에 4인조 여성 그룹의 멤버로 가수를 준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는 노래와 춤 담당이 아니라 랩 담당이었거든요.” 연예계를 동경했던 소녀는 우연히 잡지 모델로 사진을 찍었고, 그당시 만났던 예쁜 친구들 무리와 함께 작곡가에게 발탁돼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실력도 운도 따르지 않았다. “가족들의 반대도 심했어요. 저를 무척 따르던 남동생도 ‘노래도 못하는 니가 무슨 가수냐’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렇고 그런 연예인 지망생에 불과했던 소녀 밴드는 어느날 이를 가엾게 여긴 작곡가의 주선으로 청담동 카페에서 매니지먼트 사장을 만났다. 그리고 지금의 스타제이 사장이 수애를 지목했다. “다른 친구들이 저보다 훨씬 예뻤어요. 저는 스물한 살 때 무척 뚱뚱했거든요.” 수애가 약간 기운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그 뒤 수애는‘정윤희를 닮은 고전적인 여배우’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랩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얼마나 다행인가!), 질감이 풍성한 목소리는 그녀를 브라운관에 부드럽게 안착시켰다. “그때 친구들을 다시 만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친구들이 저를 안 만나줘요. 몇 번 제가 매니지먼트 미팅을 주선했는데, 잘 안 됐어요.”

내추럴한 느낌의 오가닉 소재의 단솟곳과 버선은 모두 차이 김영진, 버슬 스타일로 연출한 플리츠 주름 디테일의 볼륨 있는 망사 스커트와 레드 컬러의 실크 소재 원피스는 모두 진태옥.

수애가 다시 과거 속으로 우울하게 침잠해 들어가려 했기 때문에, 나는 화제를 급하게 전환했다. “정윤희 씨가 얼마나 멋진 배우였는지 알아요? 가장 아름다웠을 때 은퇴한 후 다시는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나는 아직도 일간지 1면에 실렸던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기억나요. 아내가 있던 남자를 사랑했는데, 간통죄로 기소됐었거든요. 당대의 톱 여배우가 유치장에 갇혀 마녀사냥을 당했는데, 그모습조차 창백하게 예뻤어요.” “그 남자와는 어떻게 됐어요?” 제2의 정윤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함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던진 거죠. 대신 한 번도 그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어요. 정말 배우답죠.” 어릴 때부터 정윤희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는 수애는 배우가 되고서야 처음으로 〈뻐꾸기 몸으로 울었다〉라는 작품을 봤다고 했다. “정말 경이로운 여배우더라구요. 미모도 연기도. 측근을 통해 전해 들었는데, 정윤희 씨가 저를 되게 재미있어 하신대요. 앞으로도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하하.” 그녀는 ‘사랑에 몸을 던진다’라는 표현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저도 가슴에 야망과 사랑을 품은 여자였어요. 무명과의 사랑도 말 그대로 불꽃 같았고 나비 같았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황후’라는 위치가, 그 자리에서 사랑을 한다는 점에서 여배우와 비슷한 맥락이 있는 거 같아요. 여배우는 현실적으로 사랑을 하려 해도 그게 참 힘들어요. 저도 요즘엔 아낌없이 주고 또 주는 불꽃 같은 사랑을 꿈꾸는데…, 그분은 참 용감했네요.”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말끝마다 ‘제가 장녀인데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잡초처럼 강인함을 꿈꿨다’고 첨언했기 때문이다. “부유하지 않다는 건 어느 정도인가요?” “그러니까… 단칸방에 네 식구가 살았어요. 봉천동 산동네에서. 이런 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저는 그런 기억이 부끄럽지는 않구요, 오히려 연기 생활에 도움이 돼요. 지금도 5시에 산동네로 지던 석양,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한 식구처럼 지내던 기억이 나곤 해요. 지금은 재개발이 돼서 갈 수 없지만요.” 사춘기 시절에는 엄마의 배려로 화려한 복층의 친척집에서 한 살 터울의 사촌언니와 지냈다. ‘더부살이’는 입주 과외교사 같은 면이 있다. 수애는 그런 기억들이 자신을 강하고 단호하게 키웠다고 했다.

한동안 수애의 스타일링을 조언했던 패션 스타일리스트 임희선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수애에겐 고전적인 기품이 있어요. 어떤 공간도 그녀가 들어서면 클래식하고 진지해져요. 그녀는 절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황과 동기가 마련되면 80년대 여배우 정윤희도 될 수도 있고, 16세기 여왕이나 19세기의 황후도 될 수 있어요.”

오늘 수애와 처음 만난 스태프들도 그렇게 느꼈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수애는 이제까지 명성황후가 지녀온 전설적인 카리스마와는 대조적으로, 죽기 직전까지 사랑받았던 퍼스트레이디를 그려냈다. 반가 출신의 야심 많은 여성이 국모가 되는 과정은 정윤희를 닮은 산동네 아이가 여배우가 되는 과정과 오버랩 됐다.

안동포 소재의 말기가 돋보이는 꽃 문양의 면 자수 레이스 치마와 이너로 입은 넉넉한 볼륨의 단솟곳은 모두 차이 김영진.

은은한 빛깔의 생초 오합 무지기 치마와 연보라색의 모시 치마, 비즈 장식이 들어간 모본단 깃의 레이스 저고리는 모두 차이 김영진.

노란 실크 베스트에 섬세하게 수 놓은 자수가 돋보이는 베스트와 망사 소재의 튀튀 스커트는 모두 진태옥, 내추럴한 실루엣의 단솟곳은 차이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