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과 고원원, 사랑의 대화

사랑은 왜 운명처럼 다가오는가? 사랑에서 타이밍은 왜 중요한가? 격정적인 도시의 하늘을 배경으로 정우성과 고원원이 초현실적인 사랑의 초상화를 찍었다. 허진호 감독의 〈호우시절〉로 만난 한국과 중국의 톱스타가 이 가을, 알랭 드 보통 스타일의 사랑의 대화를 시작한다.

고원원의 골드 파워 숄더 원피스는 오브제(Obzéé), 시계 모티브의 볼드한 목걸이는 D&G

“원원! 내 첫사랑 이야기 들어볼래요? 옆집 사는, 공장에 다니는 누나였어요. 그녀가 밤에 공장에 나갔다 돌아올 때까지 나는 담벼락에 매달려 기다리곤 했어요. 누나가 나를 예뻐할수록, 나는 더 고통스러웠어요. 3년째 되던 해, 드디어 누나와 함께 잤어요. 왼쪽엔 친누나, 오른쪽엔 사랑하는 여자 사이에 누워서 밤새 잠이 오지 않더군요. 새벽녘에 벌떡 일어나 누나의 입술에 키스를 했어요. 쿵쾅쿵쾅, 아직도 그때 심장 소리가 기억나요. 중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그렇게 호된 열병을 앓았어요.”

“우성 씨. 내 첫사랑도 나이가 아주 많았던 남자였어요. 그때는 우러러볼 수 있는 한없이 큰 사람을 사랑했어요. 지금은 달라요. 나이가 드니까 동년배가 좋아요. 허진호 감독님이 그랬죠. 당신과 나는 사랑은 변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변해서, 헤어지고 다시 만난 사이라고. 타이밍이 어긋난 모습으로. 기억나요? 당신이 대나무 숲에 뛰어들어 가서 갑자기 나를 껴안고 키스하던 장면… 그렇게 갑자기. 의아해하는 내게 감독님이 그랬어요. 이게 현실의 사랑이라구. 갑자기 이유 없이 남자가 여자에게 확 다가오는 게….”

“그래요. 갑자기…, 꼬냑을 마시면 심장에서부터 뜨거운 숨이 확 올라오거든요. 사랑을 느낀 여자와 키스를 하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열기가 꼭 그래요. 사랑을 할 때는, 여자와 둘이 카페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찻잔과 찻잔 사이에 감정의 폭풍우가 휘몰아쳐요. 사랑은 생각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당신에게 ‘키스해도 돼?’라고 묻는 순간, 사랑은 오염되는 거예요. 사랑은 그냥 해버리는 거죠. 사랑을 위한 조건으로 ‘책임감’이 끼어드는 순간, 이미 그 관계는 버거워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가끔은 사랑 그 자체보다, 그 사랑을 지탱시키는 일상들이 더 애절하게 다가왔어요. 그래서 진호 형(허진호 감독)에게 질투를 느껴요. 그 자체로 완벽하고 행복한 일상에서 그 안에 사람이 얹혀져 있고 티격태격 하는, 그 아련함….”

정우성의 브라운 계열의 투톤 셔츠, 카키 브라운 수트는 모두 랑방(Lanvin).

만남에서 헤어짐까지 사랑이라는 건 참으로 빤한 것이다. 하지만 빤한 패턴은 언제나 마력이 있어 그것이 빤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빤함이 이상해, 정말 빤하다는 걸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빠지고 싶어진다. 그게 사랑이다.

“후후.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기억나요? 여자(심은하)가 나무 밑에서 하드 먹고 있는데, 남자(한석규)가 보고 있는 장면. 우성 씨, 나 그 장면이 참 좋아요. 남자가 죽을 걸 알면서도 친구들과 술 한잔 하고 가로등 켜진 언덕을 혼자 걸어오던 장면…, 그리고 누나랑 수박 씨를 툭툭 뱉으면서 먹다가, 누나가 동생에게 다가올 죽음에 복받쳐서 울음을 터뜨리던 장면들… 우성 씨와 나 사이에는 허진호 감독이 있네요.”

“스물일곱 살 때인가, 〈비트〉를 끝내고 〈8월의 크리스마스〉 시나리오를 봤어요. 마당에서 파를 씻으려고 물이 잠긴 다라이에 파를 담궈 놓았는데, 그 물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는 그런 대목이 있었어요. 원원! 나는 남녀의 감정이 투닥투닥 오가는 장면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물에 잠긴 파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 그 일상의 인서트가 훨씬 강렬해요. 일상의 한없는 아름다움…, 깨고 싶지 않고, 깨질 수 없고, 영원하진 않지만 영원할 수도 있는…, 원원! 이해해요? 그 느낌 때문에 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할 수가 없었어요. 그건 그때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사랑이 좀더 익어가요. 당신과 나의 〈호우시절〉, 우리는 10년 만에 만나잖아요. 10년 전엔 얼마나 감정이 간절했는데, 그때 붙들어두지 못하고 지나가던 감정들이… 절실했던 그때 이후 10년이 지난 후 아무렇지도 않은 추억이 될 때. 바다 위의 태풍이었던 감정들이 호수 위의 잔물결처럼 다가올 때….”

“그랬군요. 우성 씨, 20대 초반에는 난 사랑을 주는 법을 몰랐어요. 이제 10년이 지나 30대가 되니까 내 사랑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 조금씩 알겠어요. 우리 첫만남 기억해요? 난 〈무사〉로 〈놈놈놈…〉으로 당신을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당신이 좀 무뚝뚝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당신이 환하게 웃으면서 성큼 다가왔어요. “How are you?”하면서. 키다리 아저씨처럼. 당신, 참 진심 어리고, 자상한 남자예요.”

“난, 나는… 남자예요. 〈클로저〉에 나오는 주드 로와 클라이브 오웬처럼 양면성을 가진 남자. 여자 앞에서 한없이 우유부단하면서 한쪽은 동물적인 마초성도 있는, 그게 남자의 두 얼굴이에요. 사랑은 저를 강하게 만들지만, 저는 이제까지 결정적인 순간에 사랑 앞에서 우유부단했어요. 사랑이 너무 슬퍼질 때가 있어요. 내 눈 앞에서 헤어짐을 감지하고 어린아이처럼 우는 여자에게 어떤 미래도 얘기하지 못하고 그 눈물만 닦아주고 있을 때.”

정우성의 블루 셔츠, 페이즐리 문양의 베스트, 그레이 스트라이프 수트, 브라운 벨벳 스카프, 블랙 벨벳 로퍼는 모두 D&G. 실버 반지는 마코스아다마스(Macosadamas). 고원원의 옐로 뷔스티에, 플라워 시폰 롱 스커트는 모두 D&G. 볼드한 목걸이는 랑방(Lanvin).

사랑이 다할 즈음엔 주인공의 죽음을 기다리던 독자처럼 상대가 저지르는 작은 실수들을 숨죽여 기다린다. 언젠가부터 그는 내 가방을 들어주지 않고, 식당 카운터 뒤에서 머뭇거리고, 젓가락을 이상하게 쥐고, 옷을 애들처럼 입는다. 사랑이 습관의 페달을 돌릴 때 불꽃은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정우성이 낮게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흥얼거린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원원! 사랑이 쓸쓸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사람인 거예요. 내게 주었던 감정, 내게 했던 말, 그게 다 거짓이었었나, 아프게 복기하지 말아요. 오래 지속되진 않았더라도 그 찰나에는 온전했다는 것을 믿어요.”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 알죠? 우성 씨, 그 남자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대사 기억해요?”

“원원, 사랑은…, 변해요. 내가 사랑을 그만큼이나 줬는데, 나한테 이제 와서 왜 그래? 라는 질문은 참 덧없어요. 사랑이 위대한 건, 둘이서든, 혼자서든 서로 성숙하게 진보해 나간다는 거잖아요.”

“그래요. 사랑만큼 우리를 성장시키는 게 있을까요? 시작하고 끝날 때면 우리 모두 성장한 거겠죠. 처음엔 〈봄날은 간다〉가 남자들에게 성장을 가르치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이 들고 다시 보니, 그건 여자에게 성장을 가르치는 영화였어요. 스물네 살 때,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갑자기 순정 어린 남자를 내친 이영애가 이해가 안 됐어요. 서른이 돼서 다시 보니 이해가 돼. 내가 그 여자 같은 선택을 하진 않겠지만, 과거에 아픈 경험이 있으면(여자의 결혼 사진), 행복을 잡을 수 있는 용기가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사랑을 통해 인생을 배워요. 허진호 감독님의 〈외출〉이나 〈행복〉에서도, 그렇게 인생에 금이 갈 때, 우리는 사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원원, 허진호 감독은 멀리서 여자를 들여다봐요. 그런데 결국은 여자의 퍼포먼스가 남자를 끌고 가요. 나는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가 잘 이해가 안 됐어요. 왜 저렇게 소리에 집착할까? 음향기사라서 그럴까? 아, 그 남자가 사랑에, 결혼에 너무 집착하는구나, 그랬어요. 얼마 전에 친구 장동건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우리의 결론은 결혼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결혼할 시기에 옆에 있는 사람과 하게 된다는 거예요.”



가끔은 사랑의 목표는 결혼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랑의 절정으로서의 결혼, 사랑의 만기로서의 결혼, 사랑의 권태로서의 결혼, 사랑의 습관으로서의 결혼, 결국엔 짝짓기의 경쟁과 피로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결혼… 내 편을 만들기 위한 결혼. 정우성은 사랑에 대한 책임과 상대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 얘기했다. “우리는 태어남 자체가 완전함인데, 상대를 소유하려 들고 사용하려 들면서 점점 불완전해지는 건 아닐까요? 결혼을 포함해서 자기가 원하는 어떤 상태를 상대에게 강요해선 안 돼요. 서로가 어떤 의무를 수행할 때, 고맙다는 표시가 사랑이잖아요. 상태에 대한 강요보다, 배려가 더 앞서 있어야 하잖아요. 아내는 밥을 차리고 남편은 가장의 역할을 하고, 꼭 그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나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사랑이라는 평행선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할까? 남녀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한다고 증명할까? 남녀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생의 기나긴 불안을 견뎌나갈까? 언제까지 해가 지면 각자의 불 꺼진 집으로 들어가야 할까? 언제까지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한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할까? 언제까지 젖을 먹여보지 않고 무등을 태워보지 않고, 엄마 혹은 아빠라는 자부심 없이 진짜 어른이 될까?

“우성 씨, 〈호우시절〉에서 4박 5일 동안 어떤 사랑을 한 걸까요?”

“당신과 나는 사랑의 추억을 더듬었죠.”

“나는 과거를 숨기고, 망설이고, 두려워했고, 당신은, 참 이상적인 남자의 모습을 보여줬어요. 당신 때문에 우리는 〈타이타닉〉 같은 사랑이 아닌데도, 소박하게 빛나는 연애를 했어요.”

“내가 허진호 감독 영화 중에서 가장 평범한 남자였어요.(웃음)”

“우성 씨, 지금 혹시 사랑하고 있나요?”

“옛날엔, 사랑했었어요. 사람들이 다 내 사랑을 알았죠. 지금은 준비만 잔뜩 하고 있어요. 땅, 하면 달려 나갈 준비가 돼 있어요.(웃음)”

“나는…, 나는 사랑하고 있어요. 그 남자를 처음 만난 건 10년 전인데, 우리가 사랑하게 될 줄 몰랐죠. 각자 자기 자리에서 성장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타이밍이 왔어요. 때를 알고 내리는 비, 〈호우시절〉처럼.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에요.”

“사랑하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원원! 얼마전에 노트에 이런 글을 써놨어요. 세상에 어떤 사랑도 틀릴 수 없다. 후회할 사랑이란 없다. 우리는 평생 이상형을 찾는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두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여행은 계속된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함께 발가벗고 씨름하는 단순한 일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나트륨아미드라는 말만큼 낯설고 어려운 화학 용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의 정밀화를 그려보려고 시도해 보지만, 결국은 퍼즐 같은 여러 장의 초상화만 남는다. 붙어서 마주 보거나, 함께 앞을 보거나, 어깨에 기대거나, 각자의 자리에서 바라보거나… 연인에게 사랑의 자리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 사려 깊은 사랑의 사색가 정우성과 볼수록 눈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고원원을 촬영하는 동안 가을 하늘의 구름은 계속 바뀌어서 매번 새로운 풍경화를 보여주었다.

정우성의 아이보리 리본 셔츠, 블랙 니트 더블 베스트, 블랙 롱 재킷은 모두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그레이 시보리 팬츠와 블랙 앵클 슈즈는 모두 이브 생 로랑(YSL at Koon). 고원원의 그레이 튜브 원피스는 폴 스미스(Paul Smith), 블랙 볼레로는 앤 드멀미스터, 스트랩 슈즈는 지미 추(Jimmy Choo).

레드 체크 셔츠, 와인 벨벳 재킷, 레드 보 타이, 화이트 행커치프는 모두 란스미어(Lansmere). 그레이 팬츠는 존 바바토스(John Varvatos), 브라운 퍼 베스트는 베르사체(Versace at 10 Corso Como).

정우성의 화이트 러플 셔츠는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벨벳 소재의 블랙 턱시도 코트는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at 10 Corso Como), 블랙 스키니 팬츠는 D&G, 실버 반지는 모두 마코스아다마스(Macosadamas). 고원원의 블루 비즈 재킷과 언밸런스한 튤 스커트는 모두 니나 리찌(Nina Ric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