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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을 추억함

2016.03.17

by VOGUE

    장진영을 추억함

    장진영이 떠났다. 너무 이른 죽음이었기에, 그녀를 사랑했던 수많은 팬들은 한동안 비통에 젖어야 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여 배우 장진영은 죽음을 통해 ‘사랑과 우정’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마지막 생일 파티, 장례식, 그리고 우정의 고귀한 나날들.

    장진영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6월의 어느날, 별이 유난히도 초롱초롱했던 밤이었다. 논현동의 가든 레스토랑 헵시바(장진영의 아지트)의 정원수들은 온통 분홍 풍선과 리본으로 치장하고 돌잔치에 나온 피에로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그날은 진영의 서른여섯 번째 생일. 은빛 스팽글이 달린 미니 원피스를 입고 〈소름〉에서 선보였던 세련된 섀기 커트를 한 그녀는 3초마다 ‘으하하하!’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별처럼 싱싱하게 발광했다. 장작을 헤집고 은박지에 싼 뜨끈한 군고구마를 내오고, 비어 있는 샴페인 잔을 채워주느라 바쁜 그녀를 둘러싸고 우리들은 덩달아 ‘살아 있는 게 좋아 죽겠는 얼굴’이 되어 별것도 아닌 농담에 깔깔거렸다. “저는 과잉보호를 받고 있어요. 다들 오버해서 걱정들을 한다니까요. 전 정말 건강해요. 레스토랑에 나가서 점심도 먹고, 등산도 다니는 걸요.” 요즘엔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삶〉과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고 하나님과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며. 그녀의 잘생긴 남자 친구가 멋진 블랙 수트를 입고 함께했기 때문에, 생일 파티가 아니라 약혼식 파티에 초청된 것 같았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패션에 여전히 관심이 많은 진영이 〈보그 코리아〉를 집으로 받아볼 수 있겠냐며, 내게 주소를 적어주는 사이 남자 친구가 마당 한가운데로 나가 우리를 향해 사인을 보냈다. “모두 여기로 와주세요! 서프라이즈가 있어요.” 눈이 동그래진 장진영의 손을 붙잡고 달빛 아래 선 그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진영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하니… 홍콩으로의 꿈 같은 여행…, 그때 다투고 나서 네 눈물을 본 순간… 청천벽력 같은 암 선고를 받았지만,… 진영아! 너무너무 사랑한다. 나와 결혼해 줄 수 있겠니?” 만남의 환희와 고통의 흐느낌으로 읽어 내려간 편지는 마침내 청혼의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 여기저기서 휘파람을 불고 ‘브라보!’를 외쳤다. 진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물을 찍어내며 연인이 끼워 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너무나 아름다운 밤이었고, 살아 있다는 낭만적인 행복으로 몇 번이나 축배를 들었다.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녀는 혜성처럼 등장한 당대의 패셔니스타였다. 가슴 골까지 파인 화이트 면티셔츠에 부츠컷 진, 플레인우드의 그린색 모피 코트에 보헤미안풍의 롱 머플러를 두른 모습은 그대로 패션 슈팅에 들어가도 될 만큼 완벽했다. 당시에 통영에서 〈국화꽃 향기〉라는 영화를 촬영하다 서울 나들이를 왔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영화는 장진영의 미래를 예고하는 영화였다. 위암으로 인한 투병, 한 남자를 떠나간 짧은 결혼 생활을 담은 러브 스토리.
    치킨 샐러드와 햄&에그 샌드위치, 따뜻한 아쌈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장진영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극 초반부엔 강하고 자기 신념에 넘치는 여대생이었다가 후반부엔 병든 육체에 사랑하는 남자의 생명을 잉태한 운명의 여인이 되어야 하는 거죠. 그녀에게 닥친 모든 불행을 ‘상투적이지 않도록’ 연기해야 한다는 게 피를 말려요. 정말… 생각만 해도 너무 두려워요.” 아! 그녀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때 장진영은 사랑하는 남자를 이생에 두고 죽음의 문턱을 향해 걸어가기 직전, 마지막 휴가를 나온 그런 여자였다. 약간 야윈 채로 오로라 같은 빛을 뿜어냈던 마지막 생일 파티에서의 그녀처럼 말이다. ‘도시로 나온 유목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장진영을, 그렇게 불렀다. 청담동의 미완성 로프트 스튜디오에서 찍은 ‘마지막 휴가’의 사진은 정말 근사했다. 그녀는 괴팍한 사진작가의 지시에 맞춰 회중시계를 들고 물어뜯을 듯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미니스커트에 롱 부츠, 아방가르드한 집업 점퍼 주머니에 손을 깊게 찔러 넣은 채 나른한 패셔니스타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뒤로 장진영은 ‘가보로 남길게요’라는 예쁜 말로, 내가 그녀에 대해 쓴 모든 기사를 스크랩하며 깊은 감사를 표하기 시작했다. 장진영은 무척 꼼꼼해서 그녀가 나온 달의 〈보그〉뿐만 아니라 다음달의 〈보그〉 독자 코너까지 세세하게 읽고 코멘트했다. “독자 엽서 반응이 무척 좋던 걸요. 유목민 컨셉 정말 근사했어요!”

    와 장진영이 함께했던 순간들.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언제나 빛났다. ‘도시로 나온 유목민’이라는 별명을 좋아했고, 일상 속에서도 롱 머플러와 반다나로 보헤미안 스타일을 연출했던 매력적인 패셔니스타였다. 여배우로서 그녀가 가장 행복해 보였던 순간은 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다. 울음과 웃음이 범벅된 채 입을 가리고 시상대로 올라가던 장진영. 트로피를 쥔 그녀의 강한 손. 영화보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당대의 여배우와 함께했던 그토록 아름다운 나날.

    사실 배우는 정지된 순간이 아닌, 생각과 감정의 과정에 의존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종종 스틸 카메라 앞에서 몸이 굳어버린다. 하지만 장진영은 여배우로서도 모델로서도 카메라 앞에서 놀랄 만큼 생동감 넘치는 피사체였다. 〈싱글즈〉를 마치고 엄정화와 레즈비언 컨셉으로 촬영을 할 때는 음악에 맞춰 〈시카고〉의 캐서린 제타존스처럼 섹시한 춤을 춰서 디바인 엄정화를 기죽였다. 그리고 그 해 〈싱글즈〉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지춘희의 서정적인 도트 프린트 드레스에 머플러를 휘날리며 등장했던 2002년에 이어 에지 넘치는 턱시도 드레스로 성장하고 레드 카펫을 밟은 장진영은 시상식 직전 국립극장 2층의 샴페인 파티에서 만났을 때, 털털하게 말했다. “에이~ 아시잖아요. 이번엔 제가 아니라는 거.” 하지만 2001년 〈소름〉의 여우주연상에 이어 2003년 여우주연상에 〈싱글즈〉의 장진영이라는 이름이 호명되자, 그녀는 당황해서 정신을 잃을 것처럼 보였다. 영화계와 대중들은 장진영에게 넘치는 사랑을 부어주었고, 그것은 우리가 그녀에게 준 가장 근사한 선물이었다. 배우로서 그때만큼 그녀가 행복해 보였던 적은 없었다.

    내가 알기로 장진영은 아주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일상적으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저는 소통이 미숙해요. 어떤 술자리에선 마치 100% 서로 통한 것 같아서 미친 듯이 감격하고 즐거워하죠. 다음날 아침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어색한 하루가 시작되구요. 하지만 요즘엔 그런 생각을 해요. 환상을 채워주는 한순간이 있기 때문에, 다시 나를 믿고 사람들을 믿는 게 아닐까.” 우리는 종종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곤 했는데, 장진영은 그때마다 오랜 시간 머물지 않았고 가장 먼저 자리를 뜨곤 했다. 장진영의 임종을 지켰던 그의 분신 같은 친구 에이엠 엔터테인먼트 김옥현 이사(장동건, 현빈, 신민아 소속)와 학창 시절 이야기를 나눌 때 그녀는 가장 즐거워했다. 전주에서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던 그녀들은 장소팔과 고춘자처럼 주거니받거니 만담으로 주위 사람들을 웃겼다. 두 사람은 학교 통학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면서 친해졌는데, 둘 다 죽을 둥 살 둥 아웅다웅 버스에 매달리는 것이 싫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투병생활을 하던 장진영과 그녀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간병하던 김옥현을 보면서 친구들은 ‘진정한 우정’에 대해 숙연해지곤 했다. 장진영의 투병 말기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옥현의 어머니가 뇌종양에 걸려 같이 투병 생활을 시작했는데, 진영은 옥현의 어머니를 위해 밑반찬과 된장찌개를 끓여다 주곤 했다. 그때 우리가 일부러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말이 ‘위암 환자가 뇌종양 환자 걱정한다’였는데….

    나는 그녀가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으며, 그녀가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걸 들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걸스카웃 같은 모범생이었다는 얘긴 아니다. 그녀에겐 어리숙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장진영은 빈틈이 없었고, 자신의 삶과 커리어를 잘 통제했다. 가장 가슴 아팠을 때는 조선 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을 그린 〈청연〉을 끝내고 만났을 때였다. 그녀가 복엽기 조종석에 앉아 ‘으아아악~’이라는 복성을 내지르며 하늘로 비상하는 순간, 나는 거의 얼어붙을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또 해냈구나! 〈소름〉에 이어 윤종찬 감독과 또 한번 끝까지 갔구나! 하지만 개봉 10일 전에 인터넷에서 ‘제국주의의 치어걸, 누가 미화했는가’라는 폄훼 기사가 뜨면서 ‘〈청연〉 안 보기 운동’이 벌어졌고, 그녀의 명연기는 제대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청연〉을 하면서 느낀 건, 인간에게 한계가 없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한정 짓는 대로 목표하는 대로 그릇이 만들어진다는 신념 같은 거. 사람에게 운명이 있듯, 작품에도 운명이 있어 언젠가 저주가 풀리면 빛의 세례를 받겠죠. 명절마다 TV에서 틀어주고, 내가 할머니가 돼서 손녀와 같이 볼 줄 누가 알겠어요?”

    이젠 할머니가 된 장진영을 상상할 수가 없다. 장례식장에 갔을 때 그녀는 사진 속에서 국화꽃처럼 맑고 단아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장진영과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친구들은 울다가 웃으며 기나긴 밤을 보냈다. 나는 내가 며칠 전 보낸 〈보그〉가 그녀의 집 우편함에 놓여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다시 한번 국화꽃 앞의 장진영에게 걸어가다가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울먹이다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주었다.

    “여고 시절 교련 시간에 배운 것처럼 진영이가 숨쉬기 편하게 팔을 위로 길게 들어올려줬어요. 그랬더니 ‘엄마, 나 이제 더 이상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 그래서 내가 노래를 불렀어요.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우리 애기한테 그 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손톱으로 꾹꾹 눌러서 마사지 해주면 얼마나 좋아했는데….” 의사들이 카운트다운을 했고, 제로를 외치는 순간 진영의 얼굴이 우윳빛으로 뽀얗게 변했다. “너무 예뻤어. 우리 애기 태어날 때처럼 너무 예뻤어요.” 마지막 숨이 멎기 전, 진영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고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옥현은 내게 오페라 한 곡(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고현정이 듣고 열흘을 울었다는 펠리티시 로트 스타일의 노래)을 들려주었다. “진영이가 우리 가슴에 있으니, 우리 슬퍼하지 말자.” 전주로 가는 길, 진영과 마지막 가을 여행에서 함께 들었다는 그 곡이 차 안에 장중하게 메아리 쳤다.

    문득 내가 그녀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생각난다. 나는 진영에게 “약속해줘요. 더 건강해지면 〈보그 코리아〉에서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 화보를 찍겠다고”라고 기분 좋게 취한 채로 추궁했고, 서프라이즈 청혼에 한껏 들뜬 진영은 “그래요, 알았어요. 당장 내일 인터넷뉴스에 나오는 건 아니죠?”라며 껄껄껄 웃었다. 코트 위로 경쾌하게 반동하는 농구공 같은 웃음 소리, 그순간 열리는 그녀의 분홍빛 목젖에 홀려서 친구들은 그녀가 아프다는 진실을 까먹었다. 그리고 아직도 장진영이 하늘로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36년 동안 장진영은 전염성이 강한 소년 같은 열정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그녀의 영화보다 더 아름다웠다. 진심으로.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김보하, 이건호, 오중석, 조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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