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라는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야구 선수. 삶 자체가 드라마의 연속인 여배우. 그라운드와 스크린에서 서로 다른 드라마를 써내려 가는 이택근과 윤진서, 이 시작하는 연인의 사랑 이야기.

“진서가 나오는 작품들을 보면서 늘 묘한 매력이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진서와 우연치 않게 처음으로 만난 날, 스크린 속에서만 보던 여배우를 맞닥뜨리니까 갑자기 진서의 이름이 생각 안 나는 거예요. 아, 저 친구 누구더라? 분명 아는 얼굴인데? 이러기만 했죠. 저는 진서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하게 됐어요. 진서도 첫만남 때부터 저에게 호감을 가진 것 같아요. 진서는 아니라고 하지만, 왜사람 느낌이란 게 있잖아요.” “어머, 내가 오빠를 처음 봤을 때 어땠다고? 아니라니까, 물론 무의식중에 내가 좀 잘해줬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명색이 여배우인데, 어떤 여배우가 그렇게 남자 전화를 쉽게 받아주겠니?” “그거야 오빠를 소개시켜준 사람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니까 예의는 지킨 거지.” “아니야, 네 성격에 싫으면 싫다고 분명히 했을 거야. 자기도 마음 있었으면서….”

여러분은 지금 연애 5개월 차에 접어든 두 남녀의 시시덕거림을 보고 있다. 만남의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을 진술하며 아옹다옹하는 것 마저도 즐거운 싸움이 되는 연인. “친한 오빠 동생 사이예요” 연막을 치기보다 “우리 지금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세상에 커밍아웃한 여배우와 스포츠 스타. 윤진서와 이택근(히어로즈. 외야수)은 그들의 사이를 ‘공개’한 이후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함께 섰다. 가을비가 내리는 흐린 오후였다. 사진가에게는 카메라의 렌즈를 사수해야 하는 궂은 날씨지만, 연인에게는 커다란 우산 안으로 단 둘만 숨어버릴 수 있는 더없이 포근한 조건.

또 하나의 ‘여배우—스포츠 스타 커플’이 탄생했음을 알린 모든 언론은 이들이 지난 봄,윤진서가 진행하는 케이블 TV의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게 됐다고 보도했다. 그때 이 프로그램의 패널인 남성지의 에디터가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출전 선수들의 화보를 촬영하는 현장이 방송됐고, 뭣 모르는 인터넷 뉴스들은 윤진서와 이택근이 ‘진행자와 출연자’로 만나 ‘눈이 맞은 것’으로 얘기했지만, 윤진서는 스튜디오에서 VTR을 보며 진행하는 MC였다. 이들이 직접 만나게 된 건 방송 후 어느 술자리를 통해서다. “술자리에 함께했던 분을 통해서 제 연락처를 알아낸 오빠가 나중에 전화를 했더라고요.” “글쎄, 저는 기억이 잘….(웃음)” 영화 속 캐릭터에 빠져 민감한 날들을 보내던 어느 여배우의 진짜 삶속에선 이렇게 새로운 챕터가 열리기도 한다. 이택근을 만나기 전 윤진서는, 몇달째 미스터리 멜로물인 〈비밀애〉의 촬영장에서 남편의 쌍둥이 형제에게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껴가는 여자로 세팅된 상태였다. 현실에선 친한 친구의 자살이라는 슬픔이 겹쳐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이기도 했다. “지난 주에야 촬영이 끝났어요. 남편의 쌍둥이 동생을 만나고나서 지금까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동생이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여자예요. 이미 마음속으로 뭔가가 폭발은 했지만 표현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 자신을 그냥 놔버릴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요. 처음 오빠를 만나던 때는 제가 잘 웃지도 않았어요. 촬영이 끝나갈 때쯤 제가 슬슬 변해가니까, 오빠가 ‘너 원래 이랬니’ 하면서 놀라더라고요.”

윤진서는 그녀가 맡은 캐릭터의 개성이 일상성에서 벗어나 있을수록 매력을 드러내는배우다. 〈올드 보이〉에서 아련한 환상 속의 여인이었을 때도, 장률의 〈이리〉에서 이리역 폭발사고가 났을 때 엄마 뱃속에 있다가 일찍 세상에 태어난 ‘동네 미친년’이자 ‘학대 받는 성녀’였을 때도, 혹은 〈바람피기 좋은 날〉이나 〈비스티 보이즈〉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젊음이었을 때도 윤진서는 또래의 배우들과 살짝 결이 다른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드라마 〈돌아온 일지매〉의 황인뢰 감독은 윤진서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전에 〈한뼘 드라마〉로 윤진서와 작업해본 적이 있는데, 그때 가진 이미지는 어린 나이답지않게 알 수 없는 멜랑꼴리한 느낌이 있다는 거였다. 일지매의 여자 월희는 티없이 밝음의 구조가 필요한 역이라 캐스팅 초기에는 망설였다.” ‘멜랑꼴리’한 기운이 깔려있는 그녀가 그 작은 입, 비음이 강한 목소리로 남자 친구에게 투정도 부리고 칭얼대는 장면. 남들앞에서는 ‘새침한 얼굴’을 지어 보이는 여배우도 사랑을 하면 그 생얼굴을 다 내보이는 여자가 된다. 이택근은 윤진서와 연인이 되기 전에 이미 웬만한 윤진서의 작품을 다 본상태였다. 영화 〈비스티 보이즈〉 속의 윤진서가 순간순간 흘린 표정과 몸짓 등의 뉘앙스는 그의 기억에 가장 매력적으로 남아 있는 배우 윤진서의 모습이다. “〈비스티 보이즈〉는 제 친구가 추천해줘서 봤는데, 영화 보고 나서도 친구에게 진서가 매력적이라고 얘기했었어요. 얼마전 친구에게 바로 그 윤진서와 사귄다고 하니까 그러더라고요, 거짓말 하지 말라고.(웃음)”

감정 기복이 심한 삶을 살아야 되는 배우의 세계가 복잡다단하다면, 운동 선수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단순함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어렸을 적부터 집과 훈련장과 시합장을 오가는 동선 속에 산 운동 선수는 경기 중엔 치열하게 몸과 뇌를 가동하지만, 생각의 가지치기에서 오는 무게감을 떨쳐낸 채 살아야 선수로서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소속팀 ‘히어로즈’의 블루칩이자, 일정 나이가 지나면 선수에 대한 기대치가 어느 정도 정해지는 스포츠계에서 드물게도 해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통산기록과 인지도 모두) ‘택근 브이’ 이택근은 모범생과의 선수다. “저는 안 좋은 건 빨리빨리 잊어버리려고 해요. 야구 경기는 거의 매일 있기 때문에, 한번 안 좋은 기운에 빠지기 시작하면 다음 기회들을 계속해서 놓치게 되거든요. 야구는 공식이에요. 공식대로만 하면 되는 운동을 기분이나 심리 때문에 망쳐버릴 수는 없잖아요. 원래부터 낙천적인 사람이었다기 보다는 낙천적이려고 노력하는 쪽이에요. 프로야구 생활 7년차에 접어드니 절로 그렇게 돼요.” ‘부산 갈매기’로 유명한 야구의 땅에서 인생을 시작해, 야구 하나에만 매진하며 산 남자. “오빠는 전형적인 부산 남자예요! 물론 오빠는 배우와는 좀 다른 성격의 예민함을 갖고 있어요. 시합 전에 피자를 먹었는데 그날 성적이 안 좋으면 피자를 기피한다든지.(웃음) 기본적으로는 운동 선수의 와일드한 면이 더 깔려 있죠. 저는 아무래도 예술적 성향을 가진 남자들을 많이 보고 살잖아요. 저도 그런 아티스트 타입의 남자를 좋아하던 때가 있었지만,이제는 그저 같은 일을 하는 동료로서 매력을 느낄 뿐이에요. 어렸을 때는 그들과 대화하고 뭔가를 나누면서 배울 필요가 있었는데 이제 그런 건 나 혼자 해도 되는 때가 온 거죠. 예술적으로 교감한다는 건 작품 속의 캐릭터 혹은 사물과 한다는 거지, 사랑은 좀더 직접적인 관계잖아요.”

이제 야구 선수와 본격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윤진서는 야구 보는 맛을 아는 여자가 됐고, 베이징 올림픽과 WBC 출전으로 국내 야구붐을 일으킨 스타들의 대열에 합류했던 이택근은 ‘품절남’이 됐다. 직접 경기장에 가서 스포츠를 보는 여자들은 크게 세부류로 나뉜다. 그냥 남들 손에 이끌려 가서 분위기 자체를 즐기는 여자, 좋아하는 선수가 있는 경기나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는 여자, 경기의 룰을 알고 보는 여자. 그리고 극소수의 ‘선택 받은’ 여자들이 있다. 바로 ‘지금 그라운드에서 뛰는 저 오빠의 여자’ . ‘오빠’를 응원하러 경기장을 찾던 여자는 조금씩 스포츠 자체의 매력과 룰도 알아가게 되고,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다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경기를 대한다. 비로소 운동 선수의 여자가 됐다는 걸 실감하는 때가 온 것이다. “어느 날은 시합 명단에 오빠 이름이 빠져있더라고요. 이상해서 전화를 걸어봤더니,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는데 응급실이라는 거예요. 한번 다치는 걸 보니까 또 다칠까 봐 무서워서 경기를 잘 못 보겠어요. 선수들은 자잘한 부상을 당하는 일이 참 많아요.”

삶 자체가 드라마의 연속인 여배우. 그라운드 위에서 한 편의 드라마를 써내려 가는 스포츠 스타. 시작하는 연인들이 그렇듯, 윤진서와 이택근도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하는 여자와 가족, 자신이 만들어 가는 구성원들에게 존경받는 삶 같은 이상적인 미래의 이미지에 대해서 자주 얘기한다. 평생 영화와 관계된 일을 하며 살고 싶은 그녀는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이 많은 20대다. “그냥 영화인으로 머물고 싶지는않아요. 우리나라에 일본 영화 마니아 시장은 있는데, 왜 한국 영화 마니아 시장은 없는지 모르겠어요. 작든 크든, 우리 영화의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는 일에 뭔가 역할을 하는일원이 되고 싶어요. 꼭 주류 영화가 아니더라도 영화와 관련된 일을 벌여보자고 얘기 나누는 사람들도 있고요.” “저도 진서가 계속 영화와 관련된 고민을 하면서 치열하게 사는 모습이 좋아요. 그게 배우 윤진서의 큰 매력이겠죠. 저는 20년 가까이 야구만 했기 때문에 삶의 모든 패턴이 운동에만 맞춰져 있었는데, 배우를 연인으로 두면서 좀 다른 폭의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도 있어요. 그 중의 하나는… 아, 이런 걸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웃음). 제가 힘든 부분도 있어요. 여자 친구가 상대 배우와 러브신을 촬영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것도 일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마음은 참….” 마음은 참, 쓰리고 착잡할 것이다. 머리 따로 가슴 따로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게 연애할 때의 모습이니까.

이 둘은 잠시, 윤진서의 키스 신으로 인해 ‘48시간의 냉전’을 벌였던 때를 회상했다. 여자친구가 일의 현장에서 다른 남자와 친밀한 교감을 나누기도 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야하는 우리의 택근 브이. 그의 괴로움은 서로 말없던 이틀이 지난 후, 여자의 “해야 하는건데 그럼 어쩌겠어!” 한 마디에 스르르 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시네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여자, 윤진서. 솔로가 자기 취향과 삶의 패턴을 고수해 간다면, 연인이 있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상대에게 물들여지고, 혹은 상대를 물들여 간다. 이 커플을 보자면 당장은 윤진서에게 좀더 변화가 생긴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이 웬만하면 잘 찾아보고 듣지 않는 영화와 음악을 즐겼던 윤진서는 요즘 난해한 작가주의 영화보다 웰메이드 작품이, 슬픈 영화보다 행복한 영화가 끌린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음악을 좋아하던 귀는 요즘 들어 대중가요를 찾는다. “사랑에 빠지니까, 같이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걸 찾게 되나 봐요.” 한 작품이 끝나면 몇 개월 동안 훌쩍 떠나버리곤 했던 여자는 이제 함께할 수 있는여행 생각에 들떠 있다. “20대 초반 때 수험생처럼 미친 듯이 영어, 불어, 일어를 공부하던 때가 있어요. 그 나라의 언어를 알면 여행이 더 재밌어지잖아요. 소리와 시각에 다 민감한지라 파리 사진 하나 걸어놓고 학습용 테이프를 틀어놓고 있으면 제 방이 바로 파리가 되고, 어느 거리가 돼 있더라고요.” “저는 여행이란 걸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요. 한 시즌이 끝나면 그 다음엔 국가대표 시합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게 끝나면 다시팀으로 돌아와 다음 시즌에 돌입하는 식이었죠. 외국이야 전지훈련 때문에 해마다 나가지만, 훈련하는 시간 외에는 거의 숙소에 처박혀 있어야 했고요. 요즘 진서가 ‘우리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에 신이 나 있어요.”

그 누군가를 만나서 들뜨고, 신나고, 아프고, 비로소 심장의 위치를 알게 되는 일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리바이벌되는 불멸의 스토리. 그라운드와 스크린 위에서만큼은 특별했던 존재들도 사랑을 할 땐 이 스토리를 리바이벌하는 ‘보통의 남자와 여자’가 된다. 그리고 우리 시작하는 연인들은, 그 사랑의 느낌을 자각하기엔 너무나 눈 먼 자들이다. 감정은 그저 표정과 억양으로 나타날 뿐. “선수가 경기에 집중해야 하는 시즌 기간이 있듯이, 배우는 영화에 매달리는 몇 개월이 바로 시즌이잖아요. 이제 오빠와 저의 한 시즌이 끝났으니 곧 함께 떠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