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로서의 하정우

화가 하정우가 3월 6일부터 4월 4일까지 닥터박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밤에는 나홍진 감독의 〈황해〉에서 살인자를 연기하고, 아침엔 캔버스 액터로 변신해온 하정우. 영화 촬영 후 능동적인 잔업으로 만들어진 이 특별한 합성물로 하정우는 ‘배우 화가’ 라는 새로운 장르의 창시자가 될지도 모른다.



VOGUE 산속에 숨어 지내다가 나온 빨치산 같군요. 불안하고 사회성도 몹시 없어 보이네요.
하정우 사람 눈도 맞추기 힘들어요. 말도 더듬습니다.
VOGUE 밤낮이 뒤바뀌었기 때문인가요? 내게 전화했을 때 압구정동 어딘가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죠?
하정우 네. 밤엔 강남 골목에 숨어들어 연기를 하고, 아침엔 집으로 들어와 그림을 그리죠. 요즘엔 아침에 막걸리를 마시고 잠이 듭니다.
VOGUE 〈비스티 보이즈〉나 〈추격자〉를 보면 당신은 지하세계의 곰팡이 같더군요. 지금은 곰팡이보다 더한 것 같아요. 국적도 불분명해 보여요.
하정우 조선족이죠. 처음엔 삭발도 했어요. 저는 요즘 말도 없고 웃음도 없고 추위에 떨고 주눅 들어 있어요. 상대역도 없이 혼자 갇혀서 한 달이 넘게 살인을 준비하고 있어요.
VOGUE 그렇다면 우리는 나홍진 감독의 〈황해〉에서 하정우가 살인을 준비하다가, 와서 그린 그림을 보는 셈이군요.
하정우 혼자 연기를 하다 보니, 절실한 감정이 듭니다. 그 감정을 집에 가지고 와서 그림을 그려요. 밤에 건물 배관을 타고 탈출하는 장면을 찍다가 집에 와서는 뭉크 스타일의 절규하는 얼굴을 그리는 식입니다. 이번 겨울 영화 현장은 유난히 길어요. 막막한 전쟁을 치르는 기분입니다. 1막은 하정우 스토리, 2막은 김윤석 스토리, 그리고 3부는 서로 최후를 맞게 되는 이야기죠.
VOGUE 치료 효과가 있겠네요. 어떻게 작업하고 있나요?
하정우 흰 캔버스에 바탕을 먼저 칠합니다. 물감을 몇 번 먹여서 비비드하게 만들지요. 질감이 완성되면 무엇을 그릴까를 생각합니다. 캔버스와 팽팽히 맞선 대결의 순간이지요. 결국은 아무 거나 그립니다. 그리다 보면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알게 되지요.
VOGUE 모든 그림이 백지를 공격하다 만든 우연의 산물이란 말인가요?
하정우 무언가를 그리기 위해 시작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나무를 그리고 싶어서 나무를 그립니다. 잎사귀로 풍성한 느낌을 만들다 갑자기 로버트 드니로가 생각납니다. 그러면 뿌리 아래 드니로의 모든 출연작들을 빼곡히 적어 넣는 거죠. 〈성난 황소〉부터 〈더 팬〉까지.
VOGUE 의식의 흐름 기법이군요. 나머지 그림의 탄생 설화를 설명해주시죠.
하정우 저 그림은 소를 그리고 싶어 단번에 붓으로 완성했습니다.
VOGUE 가장 맘에 듭니다. 시간은 얼마나 걸렸나요?
하정우 10분이요. 하지만 그런 행운은 한 번뿐이에요. 잭슨 폴록처럼 물감을 뿌려대는 건 정말 시간과 체력의 소모가 많죠. ‘로커’는 엘리자베스 페이톤의 영향을 받았어요. 일단 검은색과 붉은색의 스트라이프를 그리고 그 위에 여자를 그리고 싶었는데, 여자의 선이 나오질 않더군요.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로커를 그렸어요. ‘동상이몽’ 은 살바도르 달리의 영향을 받았어요. 바탕에 있는 패턴은 키스 해링도 믹스가 됐죠. ‘촛불’은 촛불을 그리려다 문득 촛불을 들고 가는 사람까지 합세를 하고, 그 옆에 개까지 카메오로 출연하게 됐죠. ‘리본을 쓴 여자’ 는 여자를 그리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다리를 그렸다가 지웠어요. 그리고 위스키에 대한 설명을 적었는데 콤플렉스와 패러독스가 꼭 여자의 특성을 설명한 거 같더군요. 내 그림의 탄생 설화는 주로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입니다.
VOGUE 피카소처럼 점잔을 빼지 않아서 좋군요. 유머, 바보스러움, 천박함, 코미디… 어쩌면 화가로서 당신의 가장 큰 재능은 유머 감각일지도 모르겠어요. 사춘기적인 매력도 있구요. 어쨌든 바스키아와 살바도르 달리를 비롯해서 많은 선대 예술가들이 당신을 감독하고 있군요.
하정우그런 셈입니다. 저는 화가들이 나오는 영화를 정말 좋아해요. 〈누가 앤디 워홀을 쏘았는가〉와 〈바스키아〉와 〈잭슨 폴록〉. 특히 바스키아가 악기를 연주하다가 노숙을 하고, 케첩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제 인생에 큰 영감을 줍니다.



VOGUE〈프란시스 베이컨〉과 〈클림트〉 영화도 훌륭하죠. 바스키아에 대한 오마주가 거의 확실한 저 ‘발’ 그림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하정우 발 X-ray 사진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특히 발 주변에 숫자들을 채워 넣는데 굉장한 에지가 들어갔어요.
VOGUE 숫자는 뭘 의미하죠?
하정우 이건 내 옛날 차 번호, 중국집 번호, 매니저의 전화번호, 동생의 집주소… 의미가 없는 건 아무것도 없죠.
VOGUE 누가 당신을 특별히 격려하고 있습니까?
하정우 고현정 씨요. 그리고 그녀가 준 화집 엘리자베스 페이톤과 루이스 부르주아의 영향도 받았어요. 김혜수 씨와 유해진 씨도 격려가 됩니다. 유해진 씨는 설치미술까지 한다더군요.
VOGUE 여자 친구인 모델 구은애 씨는 당신의 예술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하정우 우리는 캔버스를 같이 주문하고 같이 그림을 그립니다. 이 그림은 은애가 그린 그림을 내가 뒤엎은 것이죠. 어느 날 은애가 그린 몽환적인 꽃 패턴을 내가 다 뒤엎어 칠하고 그 위에 키스 해링풍의 눈꺼풀 기호를 새겨 넣었죠. 이 눈꺼풀 안에 희미하게 남은게 그녀의 흔적이에요.
VOGUE 여자 친구가 굉장히 화를 냈겠군요.
하정우 제가 위로했죠. 봐, 여기 눈동자 안에 너의 흔적이 남았어.
VOGUE 어떤 특별한 개인이 당신의 그림을 원한 적이 있습니까?
하정우 원했는지는 모르지만 주고 왔습니다. 얼마 전 이사 오기 전에 화장실 문에다 그림을 그렸어요. 변기에 앉아 무심히 문을 바라보다가 문득 문이 너무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파란색 바탕을 칠하기 시작했죠. 패턴을 그린 추상화인데, 이사 올 때 문짝을 떼어올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물로 줬죠. 부디 그 사람이 내가 간 후에 문짝을 흰색으로 칠하지 않았길 바랄 뿐입니다.
VOGUE전시회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 우연한 컬렉터가 반드시 문짝을 사수하겠군요. 누가 처음 당신 그림을 전시할 생각을 해낸 거죠?
하정우 휴대폰에 찍어놓은 제 그림을 보고, 전시회 경험이 있는 영화팀의 작가가 적극 추천했습니다. 큐레이터를 만나보라구요. 그리고 어느 날 닥터박갤러리의 큐레이터들이 집을 방문해서 그림을 보고는 저를 ‘하정우 선생님’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VOGUE 그들이 ‘하정우 선생님’ 이 진짜 화가인가 의심하지는 않던가요?
하정우 1층 비즈니스룸에서 그림을 찬찬히 보더니 작업실에서 실제 물감을 보여달라고 하더군요. 팔레트를 보고 난 후에야 100호 사이즈의 그림 5개를 더 그려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저는 신인 작가이기 때문에 그림 판매는 5:5로 계약을 하자더군요. 그런데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건가요?
VOGUE 지금 저한테 물으시는 건가요? 국제미술계의 거상인 씨킴을 초대해보시죠. 그가 관장으로 있는 아라리오 갤러리 소속 작가가 되면 국제 무대에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림에 대해서도 닮은 점이 있어요. 그 사람은 토마토를 그림에 던져 부식시키기도 하죠.
하정우 그분을 제가 초대해야 하나요?
VOGUE 당연히 그래야겠죠. 당신은 신인 화가니까요. 어쨌든 인생에서 화가라는 첫 배역을 맡았는데, 이번 전시회에서 어떤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질까요?
하정우 글쎄요, 셀레브리티를 대거 초청해야 하나요?
VOGUE 그건 좀 우스운 해프닝이 될 거예요. 당신은 신인 작가니까요.
하정우 그렇죠. 전 신인 작가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죠. 전시회는 시사회장하고는 다르니까요. 유머러스하게 가야 할지, 진지하게 가야 할지… 조르지오 아르마니를 입어야 할지, 청바지를 입어야 할지…, 내 그림을 설명해줘야 하나요? 쭈뼛거리고 수줍어 하고 어눌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상냥하고 젠 체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지….
VOGUE 앤디 워홀을 참고하세요. 그는 평론가들에게 냉소로 일관했죠. ‘저는 그저 캠벨 수프를 그렸을 뿐이에요….’ 그러면 평론가들이 알아서 ‘자본주의 산업사회 대량 생산의 쿨한 정서를…. 이렇게 한껏 떠벌여 준답니다.
하정우 마치 우디 앨런 영화 같군요. 어쨌든 요즘엔 이젤 밑에 청바지 한 벌을 깔고 그려요. 자연스럽게 튄 물감이 점점 근사해지고 있어요. 전시회 날이 되면 컨셉추얼한 청바지를 입을 수 있을 거예요.
VOGUE 역시 준비가 철저하군요. 실제 당신 그림은 훌륭해요. 게다가 많은 현대 작가들이 그 안에 즐겁게 둥지를 틀고 있죠. 하정우가 연기한 바스키아, 하정우가 연기한 키스 해링….
하정우 제 그림을 본 첫 느낌이 어떤가요?
VOGUE 일단 갖고 싶어요. 마음을 움직이고 천진한 캐릭터도 있으며, 애너그램과 의식의 흐름을 활용한 스토리텔링도 풍부하죠. 세련된 외국 친구를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아주 긍정적인 꿈을 꾸는 거리의 청년 아티스트 같기도 해요. 중요한 건 현대성이 있다는 점이에요. 어떤 신성함을 향해 달려간다기 보다 암시하는 수준에서 영리하게 멈췄죠. 많은 화가들을 인용한 것도 적절해요. 당신의 그림은 내가 참석하고 싶은 파티예요. 당신은 오랫동안 훈련된 배우였어요. 두 발로 중심을 단단히 잡고 벌처럼 잽을 날리는 모던한 연기를 하죠. 〈용서받지 못한 자〉를 할 때부터 〈추격자〉나 〈멋진 하루〉나 〈국가대표〉를 연기할 때까지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흔들림이 없어요. 당신의 감정은 당신 개인의 것이라기 보다 대중 기호의 최적의 샘플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당신은 놀라운 균형 감각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하정우의 그림은, 캔버스 위에 펼쳐낸 하정우의 마임이고 대사고 실험이죠. 매번 영화의 잔여 감정과 영화 촬영 후 능동적인 잔업으로 만들어진 특별한 합성물이랄까요. 한편으론 하정우 안의 캐릭터와 현대 화가들의 뇌가 합성되어 잘린채 떠 있는 ‘기억의 조각’ 같기도 해요. ‘초현실주의 화가’ 처럼 당신은 ‘배우 화가’ 라는 새로운 장르의 창시자가 될지도 몰라요. 어찌보면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나 기예모르 델토르 감독의 영화 같기도 하군요.
하정우 전 한 번에 여러 개의 그림을 그려요. 거실에 몇 개의 캔버스를 펼쳐 놓고 그려대죠. 굉장히 즉흥적이기 때문에 설명을 하기도 어려워요.

블랙 니트는 돌체 앤 가바나, 슈즈는 컨버스.

VOGUE 그림에 대해 뭔가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하정우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이 있어요. 불안과 결핍.
VOGUE 그건 예술가들에게 행해지는 일종의 고문이죠. 불안과 결핍이 없었다면 예술가들은 무력해졌을 거예요. 그것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거예요.
하정우〈대부〉 OST 들으실래요? 이런 대화를 할 땐 이 음악이 제격이죠. 저는 연기력이라는 것도 제것이 아닌 것 같아요. 젊음이나 생명도 썩어 없어지는 것처럼, 재능도 왔다가 사라지는 불완전한 것이죠. 연기를 하면 할수록 중심을 잡기가 어려워요. 어떤 사람은 10점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100점이라고 하죠. 저는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VOGUE 당신의 그림은 그 불안에 순응하기 때문에 오히려 쿨해졌다고 볼 수 있어요. 당신의 그림에는 더 완벽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나 강박이 없어요. 캔버스 자가정화 장치랄까요. 스크린과 캔버스라는 두 가지 자아 분출 장치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당신은 행운아예요. 그 점에서 당신의 그림은 화가 강익중이 말한 ‘배수구’가 뚫려 있는 그림이랄 수 있어요. 천진성과 배수구를 갖춘 그림이죠.
하정우 그림을 그리고 나면 저는 운동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흠뻑 땀을 낸 것처럼, 완벽한 집중과 배설 후의 쾌감이랄까요. 요즘엔 오일 파스텔로 어린아이처럼 그려요. 캔버스 위에 천 조각을 덧붙이기도 하죠.
VOGUE 메레 오펜하임처럼 커피 잔을 모피로 싸보는 것은 어떤가요?
하정우 아니요. 저는 그런 클래식한 작업보다는 쿨한 사진을 찍는 게 더 좋습니다. 가령 촬영장에 배달 온 코카콜라를 종이 쓰레기통에 쌓아두고 찍는 것 같은 거요.
VOGUE 아버지는 당신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정우 아버지는 화가 오치균을 좋아하세요. 저는 대학 시절부터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VOGUE 아버지를 참으로 사랑하시는군요. 화가로서 앞으로 당신은 어떤 삶을 살까요?
하정우 내가 묻고 싶어요. 화가로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다음 챕터는 무엇일까요?
VOGUE 작업실부터 마련해야 될 때가 아닌가요?
하정우 맞는 말씀이군요.
VOGUE 앤디 워홀의 팩토리를 재현해보는 게 어때요?
하정우 안 그래도 그림과 공연과 비디오 아트가 있는 작업실을 만들려고 해요. 술도 마시고 음악도 듣는 놀이터죠.
VOGUE 영화계 사람들은 배우 하정우가 아닌 화가 하정우를 어떻게 평가하죠?
하정우 저는 유난히 미대 출신 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했죠. 김기덕 감독도 프랑스에서 그림을 그렸죠. 김진아(〈두 번째 사랑〉) 감독도 서울대 서양화가 출신이고, 〈구미호 가족〉의 이용범 감독도 홍대 미대를 나왔고, 나홍진 감독도 한양대 공예과 출신이에요. 미술애호가인 윤종빈 감독과는 마티스에 대해서 아직도 토론 중이에요.
VOGUE 마티스에 대해서 어떤 부분이 쟁점이죠?
하정우 파란 바탕에 흰 점 하나를 찍은 마티스 그림을 두고 윤종빈 감독은 엄청난 계산후에 나온 것이라고 했고, 저는 전작의 히스토리가 쌓여서 위대해 보일 뿐이라고 했죠.
VOGUE 둘 다 맞는 말이에요. 내가 보기엔 감독과 배우가 자신의 창작 기법을 말한 것뿐인데요. 나홍진 감독은 당신 그림을 보고 뭐라고 하던가요?
하정우 아프리카 원주민이 그린 그림 같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는데 가령 피카소 전시회를 하면 그 많은 작품을 다 어떻게 구하는 건가요?
VOGUE 주최한 미술관이 피카소 작품을 많이 보유한 다른 나라의 여러 미술관과 컬렉터들에게 렌트를 하는 거죠. 화가 하정우의 작품이 이번 전시회에서 많이 팔린다면 그 작품의 컬렉터들에 대한 정보는 모두 갤러리에 남아요. 진부한 질문이지만 당신 그림이 어떻게 보이길 바라나요?
하정우 그냥 내 그림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VOGUE 어쨌든 당신의 이 시대의 예술 노동자 중에서 가장 악착스러운 일벌레 같아요. 끊임없이 쉬지 않고 하정우라는 존재를 발효시켜 나가고 있는 듯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