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소녀의 삶은 지속된다

〈보그 코리아〉와 플랜 코리아의 여아 인권 캠페인‘Because I am a Girl’을 위해 이미연이 네팔로 떠났다. 강간과 매춘, 노동과 조혼으로 희망을 잃은 제3세계 소녀들에게 ‘여자로 사는 행복’을 심어주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낮은 땅에 존재하는 소녀들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신이시여, 이렇게 계속 당신의 발을 만지며간절히 기도하오니, 저에게 딸을 주지 마시옵소서. 차라리 지옥을 주시옵소서….”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민요 중에서

이 나라는 먼지와 햇빛과 소음이라는 성분으로 이뤄져 있는 듯했다. 인천 공항이 유리로 지은 성이라면, 네팔의 카투만두 공항은 진흙으로 지은 간이역 같았다. 질서와 무질서의 중간지대, 친절과 무례의 중간지대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 경찰복을 입은 여자 검색원은 내 가슴을 만지며 킬킬거리며 웃었고, 남자 경찰들은 무자비하게 가방 속 지퍼까지 열다가 사탕을 나눠주자 손을 멈추고 반색했다. 얼마 전까지 반란군인 마오이스트의 폭동으로 혼돈을 겪었던 곳.

우리는 과연 여기 네팔에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겪을 것인가. 플랜 코리아에서 ‘Because I am a girl’이라는 캠페인을 설명하러 왔을 때, 나는 고통 받는 제3세계 소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강간과 매춘과 노동과 조혼으로 성장해야 할 희망을 잃고 주저앉은 소녀들, 인간 세상에서 가장 낮은 땅에 존재하는 불우한 약자들. 그들에게 ‘희망’을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왜 이미연이 떠올랐을까? 슬픔이 고인 호수 같은 눈과 분노로 호령하는 화산 같은 눈을 동시에 지닌 여자. 2001년 2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컴필레이션 앨범〈연가〉에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허공을 응시하던 서정적인 이미연과 2002년 무장한 일본군을 정면으로 쏘아보던 〈명성황후〉의 대쪽 같은 이미연은 같았다. 그것은 온몸으로 쏟아내는 오페라였다.

나는 이미연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상처 받은 연약한 소녀와 동시에 불의에 도전하는 거대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에게 ‘모성애’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누군가 그 궁핍한 나라의 상처 입은 소녀들을 가슴에 안아야 한다면 이미연이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지금 이 조도가 낮은 네팔의 입국 심사대에서 이미연이 서 있게 된 것이다. 노란 후드 티셔츠를 입고 배낭을 메고 있는 이미연은 한 그루 해바라기처럼 보였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해바라기. 화장기 없는 얼굴로 굽 낮은 검정 구두를 신은 노란 해바라기.



우리는 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네팔 남부의 지방 도시, 네팔에서도 오지라고 할 수 있는 순사리로 떠났다. “언젠가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이 그때인 것 같아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어요”라고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Because I am a girl’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연락을 취했을 때, 이미연은 다음날 바로 ‘떠나겠다’는 그야말로 시원스러운 전갈을 보내왔다. 여배우로서의 안전과 의전에 관한 과다한 요구, 캔슬과 딜레이, 번복과 같은 의례적인 일들은 없었다. 그녀는 먼저 항공편을 알아보았고, 미팅을 요청했다. 플랜 코리아 측은 이번 네팔 방문에 대해서는 모든 일정을 현지에서 준비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소녀와 만나게 될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했다. NGO단체와의 경험이 많았던 플랜 코리아의 홍보 담당자 금윤경이 ‘소녀들은 예쁜 걸 좋아한다’고 힌트를 줬고, 이미연은 그녀의 짐 가방을 자신의 옷 대신 핑크빛 머리핀과 학용품, 티셔츠와 초콜릿으로 가득 채웠다.

순사리는 멀고도 험했다. 천식이 있는 이미연은 먼지 나는 도로를 달릴 때 마스크를 꺼내 써야 했다. 도로는 포장이 되지 않았고, 중앙선과 신호등은 없었으며, 맞은편의 트럭 뒤에서 튀어나오는 오토바이와 릭샤 때문에 클랙슨이 비명처럼 울려댈 때마다 이미연은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차 안에 앉아서도 마치 서부 개척시대 마차 안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차창 밖엔 쓰레기를 뒤지는 소, 죽은 듯이 누워 자는 개, 좌판 위에서 창자를 드러낸 돼지, 도살을 기다리는 염소, 파리 떼가 들끓는 생선,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뒹굴며 구두 닦는 소년, 재봉틀을 돌리는 소녀들로 네팔의 거리는 휘청거렸다. 비행기를 두 번 갈아 타고 흔들리는 차를 세 번 갈아 탄 후, 밤이 이슥해져서야 순사리의 작은 호텔에 도착했다. 침대만 덩그러니 놓인 컴컴하고 허름한 숙소였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이미연은 플랜 네팔 사람들과 함께한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다정했다. 사진작가 조선희가 자신과 이미연을 ‘Very famous photographer, more famous Korean actress’ 라고 소개해 순진한 네팔의 ‘ 새마을운동 지도자’ 들을 웃겼다. 네팔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자존심이 강했고, 한국인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대단했다. 이미연은 자신이 여기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 네팔 사람들은 솔직했다. 그들의 딸이고 어머니인 소녀와 여자들의 힘든 인권 상황(결혼 지참금이 부족하면 살해당한다거나, 산모 사망률이 높다거나, 유아 인신 매매가 사라지지 않고, 소녀 식모들이 성적으로 괴롭힘을 당한다거나)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미연에게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세상에 알려줄 것을 부탁했다.

세계 176개국 중 빈민 서열 136위에 오른 나라.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사는 사람이 31%나 되는 나라. 글을 읽을 수 있는 여성이 34.9%밖에 안 되는 나라. 무엇보다 인도와의 국경 지역에 자신의 어린 딸을 내다 파는 나라… 이미연은 프레젠테이션을 듣다가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 가족들은 그 일이 나쁜 일이라고 말리지 못하나요? 왜 그 애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나요? 왜 그 애들이 공부하면 희망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해주지 못하나요?” 나는 이미연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분노였다. 나는 언젠가 영화 〈집시의 시간〉을 본 적이 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유랑하는 집시의 삶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담은 그 걸작 영화는 마을의 어린 소녀가 사기꾼 매춘 브로커에 의해 국경 지대에 팔리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브로커들은 순진한 마을 사람들을 속이고 소녀를 빼돌린다.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는 ‘유아 인신 매매’라는 끔찍한 사건을 고발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들의 답변도 비슷했다. 네팔에는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린 딸들이 브로커에게 팔려간다는 것. 80%가 학교에 가지만 40%가 그만둔다는 것. 소녀들이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아동 결연이 절실하다고 했다.

가슴이 진흙으로 가득 찬 것처럼 답답했다. 어쩌면 이것은 극과 극의 세계다. 우리는 이미연이 여고 시절에 출연한 영화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를 떠올렸다. 영화 속에서 꿈 많던 소녀는 학업 성적 스트레스로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목숨을 끊는다. 대체 인권이란 무엇일까? 요즘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어린 소녀들을 성형시키고 섹슈얼한 룩을 입혀 쇼무대에 판매하는데. 이미연은 생각이 복잡해진다고 했다. 새로운 세계로 안내되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또한 나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것이 비교 우위의 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베풀거나 동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나누기 위해서 여기 온 것이다.



다음날 네팔 사람들은 우리를 가장 먼저 여성보호센터로 안내해주었다. 미연이 들어서자 소녀들이 달려들어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주고 꽃다발을 걸어주며 방긋방긋 웃는다. 식모로 일하거나, 캐빈이라고 불리는 매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소녀들, 가정 폭력을 피해 숨어든 소녀들이지만, 그늘 없이 너무 밝고 예뻤다. 미연이 나눠준 핑크빛 머리핀을 머리에 꽂고 천진하게 그녀 주위를 맴돌면서. 네팔로 떠나기 전에 미연은 걱정했었다. ‘내가 선물로 준 머리핀이나 립글로스를 바른 모습이 그곳 남자들에게 유혹적으로 비쳐지면 어쩌지?’ 하지만 이곳은 보호소니까 괜찮겠지, 라는 눈빛으로 그녀는 내게 눈으로 동의를 구했다. 사실 나는 이미연이 그토록 당황해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곳은 시나리오의 세계가 아니었고 그녀는 특정한 배역을 부여 받지 못했다. 마더 테레사? 오드리 헵번? 오! 아니다. 그녀는 어머니도 아니고, 어머니의 이미지를 가진 전사도 아니었다. 이미연은 소녀 시절에 연기자가 됐고, 너무 일찍 결혼했으며, 여자로 꽃피던 시절에 이혼했다. 그리고 불후의 명작인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연기했다. 그녀는 그저 이미연이다. 이곳은 네팔의 오지 마을인 순사리. 말도 통하지 않는 상처 입은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그녀가 먼저 한국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안녕? 나는 이미연이야. 너를 만나서 기뻐. 우리 악수할까?” 그녀 안의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제비꽃잎이 열리듯 아이들의 마음이 열렸다. 알파벳이 흩어지는 네팔어들이 여기저기서 꼬물꼬물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도 통역이 와서 미연은 몇 명의 소녀들과 작은 방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벽에는 소녀들의 남편이나(이곳엔 열네 살에 결혼한 조혼 여성들이 많다), 일터의 사장이 부당하게 착취할 때의 대처법이 적혀 있다. 엄마와 함께 매춘 레스토랑인 캐빈(분홍 조명이 밝혀진 실내에서 접대와 매춘이 이뤄진다)에서 일하다 구출된 열한 살 쥬띠는 마스카라를 진하게 바른 채 웃지 않았다. 너무 많은 불행을 흡수한 눈에 가슴이 저렸다. 열일곱 살에 결혼해서 얼마 전에 아들을 잃은 버드마는 아직도 캐빈에 나가고 있다. 병원에 데려가 보지도 못하고 아들이 죽었다고, 남편의 괴롭힘으로 다시 캐빈에 나갈 수밖에 없었노라고, 버드마는 분해서 울먹였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집을 나와 친구 따라 캐빈에 들어갔다는 메두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했다. 열아홉 살 리사는 다섯 살 딸과 함께 캐빈에 다녔다. 리사는 딸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했다. 플랜의 보호소가 소녀들의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쥬띠는 마지막까지 웃지 않았지만, 초콜릿을 주는 내게 손을 저으며 미연의 사진을 한 장 달라고 부탁했다.

당장 소녀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줄 수는 없었다. 얼마간은 불행에 익숙해져 있지만, 행복할 수 있는 의지를 저버리지 않도록. 이미연은 가슴속에 밀려드는 슬픔을 가만히 꺼내 보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왜 왔을까? 그리고 미연은 이곳에 왜 왔을까? 어쩌면 사진작가 조선희를 포함하여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지도 모른다. 그들처럼 우리에게도 희망이 필요했다. 이미연은 곧 시작할 KBS 대하사극 〈거상 김만덕〉의 촬영을 앞두고 네팔에 왔다. 30부작 드라마를 찍기 위해 정신적 육체적 체력을 비축해야 할 시점에 그녀는 플랜 코리아와 〈보그〉의 제안으로 낯선 땅으로 들어왔다. 물론 제안은 캐스팅이 발표되기 전에 이뤄졌다. 극중 이미연이 연기하는 김만덕은 전 재산을 기부해 가뭄에 굶주리는 제주도민을 구휼, 당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했던 실존 인물이다. 버려진 고아소녀에서 최초의 여성 CEO로 거듭난 여자. 그녀는 지금, 리얼리티와 드라마의 경계에 서 있다.

미연은 식당에서 일하면서 두 동생을 부양하고 있는 열세 살 수니타의 손을 잡았다. 다른 소녀들보다 유난히 얼굴이 검고 수줍음이 많은 소녀가장 수니타는 무엇엔가 홀린 듯이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다. 수니타의 집은 집이라기보다는 움막에 가까웠다. 마르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배불뚝이 아이들은 이곳 순사리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3평 남짓한 움막은 기대는 것만으로 벽이 움푹 파일 정도로 약했다. 침대 옆 흙바닥에 장작 몇 개와 쌀 바구니, 양배추 한 덩이와 물통이 살림의 전부였다. 수니타는 흙벽에 붙은 포스터를 가리켰다. 모델과 레슬러 사진이 거기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의 꿈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때가 꼬질꼬질한 동네 사람들이 이미연을 둘러싸자, 수니타는 마치 스타 언니를 둔 동생처럼 기가 살아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반짝거렸다. 미연이 수니타에게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었다.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러니까 너는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다시 여기 올 때 훌륭한 아가씨가 되어 있는 거야. 알았지?” 함께 물을 긷고 쌀을 고르고 헤어지면서 미연은 가슴뼈가 뻐근해질 정도로 힘차게 아이를 끌어안았다. 우리가 떠나면 이 아이는 또 얼마나 사람의 가슴뼈가 그리울까? 소녀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 자동차 와이퍼처럼 반듯하게 손을 흔들었다. 차창 밖으로 때묻은 고사리 손들이 자일 에 의지하듯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아우성쳤다. 한 달에 3만원의 후원금으로 저 아이가 먹고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다니 다행이다.




오후엔 학교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무하는 두 소녀 수스미따와 몬쿠마리를 만나러 학교로 가는 길의 차창 밖으로 기묘한 풍경이 펼쳐졌다. 소녀와 여인들이 머리에 엄청난 나무 더미를 이고 허리에 손을 얹고 줄을 지어 도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바싹 말라 그대로 건조되어버릴 것 같은 가녀린 체구의 소녀와 머리 위 거대한 가시 덤불…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치면 무릎이 접히고 목이 꺾일 것만 같았다. 그것은 동정과 동시에 경이를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몸 어디서 저토록 무시무시한 생명력이 뿜어져 나오는 걸까? 그런데 왜 나무짐을 지는 남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걸까? 어느 나라든 못사는 나라일수록 여자들이 고된 삶을 감내해야 한다.

사실 미연은 ‘Because I am a girl’이라는 캠페인을 위해 네팔에 오면서 정서적으로 많이 힘들어 했다. 그건 집을 지어주거나 식량을 나눠주거나 우물을 파는 일이 아니라, 가슴으로 소녀들의 흔들리는 눈과 부서져 가는 육체를 안아주는 일. 그녀를 보면서 나는 배우가 참으로 힘든 직업이라는 걸 알았다. 보통 사람의 감정의 데시벨이 10이라면, 그녀의 데시벨은 100이었다. 스스로 배우라는 걸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여자의 경이로운 집착. 무엇보다 그 눈빛. 안타까움과 사랑과 어찌할 바 모름과 결심과 브랜디 같은 따뜻함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이미연의 눈빛.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데, 두려웠어요. 아이들의 잔상이 남을 테니까. 봉사도 계속 해나가야 할 텐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오히려 돌아와서 할 일이 있다는 게 다행처럼 여겨졌다. 아무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이미연은 콧물이 말라붙어 파리 떼가 얼굴에 붙어도 쫓지 않는 아이들의 손도 잡고 그들을 안고 볼에 입도 맞추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몰라 울상이 되기도 하고, 역한 냄새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고, 사람과 동물과 자동차가 한 통속으로 뒤엉킨 거리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그래도 온통 핑크빛으로 꾸민 소녀들을 만날 때나 엄마 등 뒤에 업힌 아기의 맑은 눈만 보면 속절없이 반해버렸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온 날 저녁, 미연은 태권도 사범이 꿈이라는 열 살 소녀 몬쿠마리의 집을 찾아가고 싶다고 했다. 이마가 동그랗고 치아가 고른 몬쿠마리는 아역 탤런트를 해도 될 만큼 선이 고왔다. 그 아이가 나무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전혀 난방이 되지 않은 호텔에서 파카를 껴입고 자느라 척추 마디마디가 시렸지만, 그녀는 일찍부터 시장을 가자고 우리를 졸랐다. “아이와 브로콜리와 감자를 삶고 카레를 해먹으면 좋지 않겠어요? 귤하고 토마토도 사다 주면 좋겠어요.” 미연의 장보는 솜씨가 썩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모처럼 아이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손과 발이 건반 위를 구르는 것처럼 경쾌했다. 네팔 소녀들의 집에서 장작을 피우고 밥을 해먹는 일은 약간은 어른들의 소꿉놀이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온 동네의 축제가 됐다. 동네마다 아이들이 넘쳐났다. 작은 마을에서 끝도 없이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상하게도 문명 세계에서 온 우리들보다 맨발로 뛰어다니며 닭과 돼지와 염소 떼와 허물없이 뒤엉키는 아이들이 더 행복해 보였다. 하늘은 너무 맑았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유년을 누리고 있었다.

소녀들은 이미연의 손을 잡고 자기들만의 비밀 놀이터로 데려갔다. 그리고 가장 큰 아이가 집으로 달려가서 상자를 가져다가 이미연 앞에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소꿉놀이 한 세트였다. 10명이 넘는 소녀들은 소꿉놀이 한 세트를 가지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정답게 나누어 놀았다. 우리는 왜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났을까?

아홉 살만 되면 이 소녀들은 나무를 져다 팔아 가족의 생계에 보태야 한다. 여자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가도 그만두는 일이 많다. 학교에서 돌아온 몬쿠마리는 숲의 처녀처럼 하늘거리는 원피스로 갈아입고 우리를 기다렸다. 망태를 메고 낫을 든 소녀가 우리를 숲으로 안내했고, 죽은 나무를 골라 내리쳤다. 팔뚝에 파르르 힘줄이 일어섰다. 미연은 아이를 도우려 했지만, 낫을 들고 나무를 내리치는 몬쿠마리 앞에서 우리는 연약한 어른에 불과했다. 미연은 열한 살 된 네팔 소녀 몬쿠마리에게서 굉장한 에너지를 얻은 듯했다. 아이에게서는 생명력이 넘쳤고,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의지가 있었다. 물론 그녀가 계속 학교에 다니려면 후원이 절실하지만.

그날 저녁을 먹고 우리는 조혼 피해를 입은 열네 살 꾸스무라이와 열일곱 살 거비다 모모토를 만나기 위해 깜깜한 도로를 5분 정도 걸어 여성구제센터에 도착했다. 전기가 약해서 밤에는 온 도시가 어둠에 휩싸였다. 그 어둠 속에서도 여자들은 이마에 붉은 점을 찍어 축하 인사를 하고, 방문자들을 위해 커피와 쿠키를 내왔다. 램프 몇 개를 놓고 그들과 마주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지구 어딘가에 낯선 언어와 문화로 살던 사람들이 한쪽은 자신의 피해를 알리기 위해, 한쪽은 그걸 듣기 위해 무릎을 마주 모아 앉았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두 소녀는 자신들이 당한 사연을 2시간에 걸쳐 이야기했다. 그것은 국경을 넘은 유기와 공권력의 방기, 강간과 폭력과 사기와 협박이 점철된 여성 피해의 대하드라마였다. 사회는 이 다부진 소녀들을 함부로 해쳤고, 부모는 소녀들을 전혀 보호하지 못했다. 꾸스무라이와 거비다 모모토는 자신들은 더 이상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지만(세상에 스무 살도 안 됐다!),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온 우리들이 ‘고맙다’고했다. “당신들처럼 이야기를 듣고 전하는 사람이 되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질문도 해가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램프처럼 어디에든 희망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카투만두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 사이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미연은 현재 ‘꿈 ing’ 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CEO였고, 22년째 연기를 해온 관록의 배우였으며, 열아홉 살 된 첫 조카‘현진’이의 이모였다. 그녀는 조카의 사진이 붙은 수첩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격려가 될 만한 한마디만 써주시겠어요?” 그것은 이름하여‘희망 노트’였다. “많은 사람이 응원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외로울 때 이걸 펼쳐보면 힘이 될 거예요.” 나는 그 순간, 이미연과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울로 돌아와서 다시 만났고, 몇 시간에 걸친 대장정의 인터뷰를 했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새로운 결혼에 대한 생각들, 영화계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의 소회, 기사에 쓰면 특종이 될 만한 이야기들. 하지만 이 한마디만 기억난다. 고두심이 전화를 걸어 했다는 이야기. “미연이 니가 〈명성황후〉를 해서 알겠지만, 김만덕은 제주도의 대통령 같은 사람이다. 김만덕은 나눔의 여운이 있는 여자다. 내가 보기엔 너도 여운이 있는 여자다.” 나는 이미연이 김만덕을 연기할 때 그 가슴 어딘가에 네팔 소녀 수니타와 몬쿠마리와 꾸스무라이가 함께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