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소설가의 화장법

2016.03.17

by VOGUE

    소설가의 화장법

    엄정화는 17년 동안 스테디셀러였다. ‘배반의 장미’ 를 부를 때나, 〈베스트셀러〉에서 강박적인 소설가를 연기할 때나 그녀는 누구도표절하지 않는다. 엄정화는 매번 새롭게 화장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나타난다.

    화이트 드레스는 암살라(Amsale), 트렌치코트는 개인 소장품.

    레이스 장식의 뷔스티에 톱과 쇼츠, 삭스와 메시 소재의 힐은 모두 디올(Dior).

    네이비 컬러의 롱 드레스는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DVF).

    VOGUE 새 영화 〈베스트셀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창조했나요?
    엄정화 저는 제 작품에 열정과 애정을 가진 소설가예요. 제 이야기가 표절이 아니라고 증명해 보이려고 하다가 사건에 휘말리죠. 전 베스트 셀러 작가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VOGUE 작가가 된다는 건 비극적인 일입니다.
    엄정화 네, 제 입장에서는 극심한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면에서요.
    VOGUE 읽히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도 비극적이고,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다는 것도 비극적이지요.
    엄정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전 작가의 고통을 연기했지, 창작의 고통을 느낀 건 아니거든요. 하지만 가수가 노래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할 거라고 상상은 해봤어요.
    VOGUE 어떤 점이 두려웠나요?
    엄정화 창작의 고통으로 바스라질 것 같은 몸을 만드는 게 두려웠어요. 시나리오 지문에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앙상하게 드러나는 척추뼈…’ 저는 한 번도 말라본 적이 없거든요. 저는 아주 건강해요. 채소와 유산소 운동, 반신욕으로 견뎠습니다.
    VOGUE 창작의 고통으로 비만이 되기도 합니다. 〈살인자의 건강법〉에 나오는 저명한 작가 프렉테스타 타슈처럼요. 어쨌든 지금은 몹시 마르셨네요. 김명민 씨처럼 살을 뺄 작정이었나요?
    엄정화 그럴 자신은 없었어요. 늙어버릴까 봐 겁도 났어요.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릴지도 모르죠. 〈오로라 공주〉를 할 때는 부기를 빼는 이뇨제를 먹고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어요.
    VOGUE 베스트셀러 작가 ‘백희수’가 아닌 게 행복하시겠군요.
    엄정화 자장면을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요.
    VOGUE 끝없이 이야기가 샘솟아서 매일 글을 쓰지 않으면 뇌가 쓰라린 질병을 앓는 프랑스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는 아시나요?
    엄정화 아주 좋아합니다. 특히 〈살인자의 건강법〉은 독특했어요.
    VOGUE 네, 처음부터 끝까지 괴팍한 소설가와 안절부절 하는 기자의 인터뷰로 구성돼 있죠. 마지막에 유능한 여기자가 그를 엿먹이는 반전이 통쾌해요. 〈적의 화장법〉이라는 소설도 근사하죠. 그래서 말인데, 저는 오늘 당신과 〈살인자의 건강법〉스타일의 인터뷰 게임을 해보고 싶은데요.
    엄정화 놀라운 제안이군요. 특히 노통브의 최근 소설 〈왕자의 특권〉에 보면 어떤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서 자기 집 거실에서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 사람의 화려한 신분을 훔쳐서 사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래서 나도 그런 상상을 해봤죠. 엄정화가 아닌 딴 사람으로 산다면 명예를 갈구하지도 않고 욕심도 없어지는 걸까?
    VOGUE 기자의 신분을 훔쳐서 살아보시는 건 어떤가요? 저한테 여배우의 신분을 빌려주시구요. 매달 마감 때문에 뇌가 폭발할 겁니다.엄정화오!그건 싫어요. 전 제 직업이 좋아요.
    VOGUE 당연한 말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는 읽어보셨나요? 거기엔 소녀의 이야기를 대필해서 소녀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준 남자가 나오죠. 그리고 이야기의 세계가 현실에서 펼쳐집니다.
    엄정화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해변의 카프카〉를 좋아해요.
    VOGUE 베스트셀러를 읽지 않는다는 얘기인가요?
    엄정화 네. 저는 판타지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향수〉나 〈백년 동안의 고독〉〈돼지〉같은 소설.
    VOGUE 〈돼지〉라니요?
    엄정화 예쁜 창녀가 점점 돼지로 변해가는 소설이에요. 나중엔 꿀꿀거리는 백돼지가 되죠.
    VOGUE 카프카의 〈변신〉같은 소설을 좋아하시겠군요. 한강이라는 소설가의 작품에서도 아내가 나무로 변해가는 이야기가 있어요.
    엄정화 사람이 나무가 된다구요?
    VOGUE 네. 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을 어떻게 연기하시겠어요?
    엄정화 껍질을 붙이고 저는 점점 사라져야겠죠. 저는 이야기가 주어지면 무엇이든 표현해요. 그 과정이 괴로운데 또 아주 재미있어요.
    VOGUE 당신은 출세주의자인가요?
    엄정화 아니요. 저는 명예주의자예요. 엄정화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을 때부터요. 제 연기와 아우라로 칭송 받고 싶어요.
    VOGUE 세상에 널리 이름을 날린 성공한 배우의 삶은 어떤 건가요?
    엄정화 전 성공 가능성이 있는 여배우일 뿐이에요.
    VOGUE 겸손하시군요. 그럼 성공한 여배우는 누구죠?
    엄정화 전도연이나 이영애. 그들의 이름을 떠올릴 때 최고의 연기가 떠올라요. 최고의 감독들이 그녀들을 찾고 시나리오를 쥐어주니까요.
    VOGUE 작가주의 감독은 왜 당신에게 시나리오를 주지 않을까요?
    엄정화 물어봐 주시겠어요?
    VOGUE 어느 정도 알고 계실 텐데요. 감독들은 자신이 새롭게 채색할 수 있는 백지 같은 여배우를 원하지요.
    엄정화 가수와 대중 스타로서의 제 이미지가 방해가 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것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존재도 역시 감독이죠.
    VOGUE 그 대단한 역할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엄정화 이창동 감독이요. 힘들어서 제 가슴이 까맣게 타서 죽는 한이 있어도 이창동 감독님과 하고 싶어요. 저는 신인 감독과 첫 작업을 많이 했죠. 물론 이번에 〈베스트셀러〉로 데뷔한 이정호 감독님도 좋아요. 저는 신인 감독들의 첫사랑이 되는 영예를 누렸죠. 〈싱글즈〉도 〈호
    로비츠를 위하여〉도 〈오로라 공주〉도 〈결혼은 미친 짓이다〉도….
    VOGUE 점점 감상적이 되시는군요. 어쨌든 작가주의라는 말을 원초적으로 해석한다면 신인 시절에 애송이 감독이었던 유하의 초기 작품에 이미 출연을 했던 셈이군요. 그리고 이제는 소설가 출신인 이창동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니, 당신은 정말 작가주의 여배우군요.
    엄정화 네. 하지만 역시나 그분들은 작업하기 쉬운 분들이 아니에요. 유하 감독만 해도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할 때, 머릿속에 떠다니는 이야기가 설명이 안 돼서 몹시 힘들어했어요.
    VOGUE실례지만, 현재 주연급 여배우 중에 가장 고령이시죠?
    엄정화 이미숙 선배를 잊었군요. 저는 연령 미상입니다. 얼마 전에 〈사랑은 너무 복잡해〉라는 영화를 봤어요. 메릴 스트립은 여전하더군요.
    VOGUE 여배우가 메릴 스트립을 좋아한다는 이야긴 좀 진부하죠.
    엄정화 아뇨.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대단해요. 〈줄리 앤 줄리아〉도 그렇고, 여자의 이야기는 나이에 상관없이 끝없이 만들어질 수 있어요.
    VOGUE 지난해 다작을 하셨더군요. 〈해운대〉〈오감도〉〈인사동 스캔들〉등등. 혹시 불안하셨나요?
    엄정화 안 해야 될 이유가 없었죠. 최고의 작품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릴 순 없으니까요. 저는 영화 촬영장에 있을 때가 행복합니다.
    VOGUE 작가들은 보통 ‘백지 공포증’을 느낍니다. 내가 대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당신도 그 공포를 느꼈나요? 내가
    대체 어떤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엄정화 너무 잘 알죠. 캐릭터가 가까워지지 않으면 벽에 머리를 쿵쿵찧죠. 〈인사동 스캔들〉이라는 영화를 할 때가 특히 힘들었어요. 물질적 명예욕과 자기를 치고 오는 사람을 가차없이 짓밟는 인사동의 거물급 큰손이었는데, 그런 모습이 내게 없었어요. 그래서 그때는 촬영장에서 행복하지 않았어요.
    VOGUE 마돈나를 경배하시나요?
    엄정화 네, 그녀를 만나면 기절해버리고 말 거예요. 몇 년 전 〈미스터 로빈 꼬시기〉라는 영화 촬영 중에 뿌리칠 수 없는 스케줄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시카고 공연장으로 달려갔답니다.
    VOGUE 기절하셨나요?
    엄정화 우연히도 그녀와 같은 호텔에 묵었지요. 마돈나와 같은 천장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 기절할 지경이었어요. 무대에서 그녀가 내가 있는 객석을 향해서 웃었는데, 꼭 내가 그녀를 웃게 만든 것 같아 황홀했답니다. 그리고 내 고국의 무대와 관객들에게 더 감사하게 됐어요.
    VOGUE 엄정화라는 지치지 않는 전설은 누가 만든 걸까요?
    엄정화 제가요. 제 꿈이 그렇게 만들었지요.
    VOGUE 괴로움은 없었나요?
    엄정화 제가 나이 들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쾌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괴롭지 않습니다. 나이 든 엄정화는 발라드만 불러야 한다는 생각은 재미없죠. 저는 그런 편견에 굴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야한 옷을 입고 춤을 출 수 있어요.
    VOGUE 너무 오래 늙지 않는 건 인조인간이죠.
    엄정화 그렇다면 전 인조인간이 되고 싶어요. 하하.
    VOGUE 당신이 모든 게이들의 이상형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나요?
    엄정화 일본 어딘가에는 엄정화 나이트가 있다더군요. 제 춤과 노래와 의상을 따라하는 날도 있대요. 게이들은 최고의 트렌드세터죠. 그들이 나를 선택했다는 건 영광이죠. 그런데 왜 게이들은 저를 좋아할까요?
    VOGUE ‘배반의 장미’나 ‘포이즌’ 시절의 당신을 보세요. 당신은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베스트셀러였어요. 강하고 섹시한 완벽한 쇼걸!혹시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엄정화 아니요, 혼수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죠. 전 요즘 결혼보다는 행복에 대해 생각해요. 혼자 있는 행복감에 빠져 있어요.
    VOGUE 사교계를 멀리 하시나요?
    엄정화 아니요. 아니에요. 시끌벅적하고 따뜻한 친구들 속에 둘러싸여 있고 싶어요. 다만 혼자 있어도 행복하다는 걸 알게 됐다는 거죠.
    VOGUE 누군가의 연기를 표절하고 싶은 욕망이 든 적이 있습니까?
    엄정화 네. 표절의 욕망이 있어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잭 니콜슨. 그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리고 송강호 씨의 연기도 너무 좋아서 그냥 만나서 수다만 떨어도 황홀하겠어요.
    VOGUE 여배우는 없군요.〈디 아워스〉의 니콜 키드만은 어떤가요?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를 연기했죠. 〈더 리더〉의 케이트 윈슬렛은 어떤가요? 그녀는 책을 읽을 수 없는 문맹을 연기했구요.
    엄정화 오! 정말 놀라워요. 이재용 감독과 〈더 리더〉를 보고 어쩌면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부러워했어요.
    VOGUE 이재용 감독은 그래서 〈여배우들〉이라는 이야기를 실험했군요. 당신 생각에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엄정화 천지 창조와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야기.
    VOGUE 당신을 고문하는 이야기는 어떤 책인가요?
    엄정화〈죄와 벌〉〈좁은 문〉같은 명작은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VOGUE 이 세상에 모든 책을 불태워야 하고 단 세 권만 남길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구하시겠습니까?
    엄정화 첫 번째 성경. 두 번째, 〈어린 왕자〉. 세 번째, 영화 시나리오.
    VOGUE 앞으로도 오래 당신이 스테디셀러가 되리라 믿어요.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홍장현
      스탭
      헤어 / 이혜영, Makeup| 고유경(Y.K. Go), 스타일리스트/이윤경
      기타
      RETOUCH BY 99 DIGITAL(JANG WON SEUK)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