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고 진지한 뮤지션

진지한 사람은 많다. 엽기적인 사람도 많다. 하지만 엽기적이면서도 진지하기는 쉽지 않다. 대체로 헐렁하고 가끔 제정신을 찾는 아티스트의 ‘진지한 순간’ 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오늘은 에픽하이의 진지한 순간이다.

미쓰라의 블랙 재킷은 닐 바렛, 슬리브리스 티셔츠는 아디다스, 배기 팬츠는 제너럴 아이디어, 목걸이는 H&M. 타블로의 셔츠는 라인 오어 서클, 베스트는 시스템 옴므, 핀턱 하프팬츠와 레깅스는 제이브로스, 모자는 도미닉스 웨이, 신발은 모두 닥터 마틴.

“우리는 굉장히 진지한 사람들입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앉은 자리에서 종이컵에다 낙서만 하던 미쓰라가 말했다. “우리가 괴짜라고요? 평범한데… 기자님, 제 선물 받으세요.” 타블로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이들의 낙서에 따라 종이컵 속의 일러스트는 엽기 버전으로 변해 있었다. 촬영 날, 미쓰라는 요즘 심취해 있다는 〈추노〉의 성동일을 성대모사하는 데 빠져 있었고, 타블로는 손에서 아이폰을 놓지 않았다. 에픽하이와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선 당연히 음악 얘기를 해야 한다. 음악 얘기를 하려면, 먼저 지난해 이들이 밟았던 흔적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타블로와 DJ 투컷은 결혼을 했다. 타블로와 같은 달에 결혼식을 올린 투컷은 결혼하자마자 군에 갔다. 어떤 아티스트에게는 독이 되고, 어떤 아티스트에게는 득이 되기도 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사회적 시스템. 이 불안정하고 수상한 기운을 지닌 힙합 뮤지션들과 결혼의 조합이 왠지 낯설다. “이 세상사의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들은 모두 결혼한 사람들이었어요. 존 레논이 만든 최고의 곡은 ‘Imagine’ 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노 요코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아내가 있었고, 물론 자식도 있었죠.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의 옆에 있는 사람, 누군가가 입고 타고 있는 것과 사는 곳 등등을 가지고 그 사람의 내면을 파악하려고 하는데, 그건 안 돼요. 특히 아티스트를 대상으로는 안 돼요. 아티스트의 내면은 작품으로만 표출돼요. 물론 결혼이 작품에 영향을 끼칠 순 있겠죠. 하지만 아트의 질과는 상관이 없어요.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오면 몰라도.”

그 ‘영향’ 에 대해서 말하자면, 타블로는 술을 끊었다. 끊게 됐다. 타블로가 고른 단어는 ‘진화’ 다. 그는 결혼 후 예술적 더듬이가 무뎌질지 모른다는 일말의 공포감을 갖기보단 더 진화하고 있다. “제가 결혼을 안 했으면, 강혜정을 안 만났으면, 일 하는 시간 외에는 멤버들 만나 술 마시고 또 술 마시고 그랬겠죠. 아티스트가 술에 취해 놀기도 많이 놀면 영감이 생기면서 더 좋은 음악이 나올 것 같죠? 그건 미화된 환상이에요. 술 마시면 그냥, 취해요. 취하면 잠 들어요. 잠 들면 모든 일이 느려지고, 뇌가 빨리 안 돌아가서 바로 작업을 못하죠. 목소리 회복하는데 이틀 걸리고. 이게 현실이거든요. 지금 저는 작업에 열중하는 시간도 늘었고, 음악에 더 포커스를 맞출 수 있어요. 더 맑아요. 그리고 저는 다행히 아티스트와 결혼했기 때문에 영감을 얻기 위해 다른 곳을 바라볼 필요가 없어요. 예전엔 그냥 제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이젠 누군가와 나누고 있으니 예술적으로도 더 풍부해졌죠.” 물론 멤버 3명 중 2명이 결혼하는 ‘사태’ 로 인해 우리의 홀로 남은 싱글 미쓰라가 샤방한 기운을 전수 받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좋다.“저는 예전부터 제 패턴대로만 살던 사람이거든요.”

미쓰라의 티셔츠와 배기 팬츠는 제너럴 아이디어, 블랙 베스트는 도미닉스 웨이, 스카프는 칩 먼데이(at Daily Project). 타블로의 레오파드 티셔츠는 릭 마이 레그스(at Daily Project), 베스트는 제이브로스, 배기 팬츠는 체인지, 손목 시계는 모두 타이멕스.

타블로와 투컷의 결혼보다 시간을 좀더 앞으로 돌려보면, 에픽하이는 2003년 데뷔 이후 쭉 몸담았던 기획사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맵더 소울’ 이라는 둥지를 만들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앨범 〈에필로그〉는 독자적인 둥지를 만들었던 그들이 최근 다시 예전의 기획사로 돌아와서 낸 스페셜 앨범이다. 독립해서 활동하는 동안 에픽하이는 유통사를 끼지 않은 단독 유통을 시도했고, 직접 본인들의 음반을 홍보했다. 북치고 장구치고 저희들끼리 다 했다.“회사에 몸담고 있을 때 할 수 없는 것들, 스스로 책임지는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1년 동안 해보고 싶은 건 다해봤어요. 북앨범이라는 특이한 형식의 앨범도 만들었고, 해외 진출도 했죠. 유튜브와 아이튠즈와 트위터의 덕을 좀 봤어요. – 타블로”

“한 군데에 집중을 안 하고 여기저기 일을 벌였어요. 우리가 직접 티셔츠를 디자인해서 팔기까지 했으니까. – 미쓰라”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에픽하이는 뉴욕, LA,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도쿄, 고베 등을 돌며 투어도 했다. 이들이 차린 회사의 이름이자 온라인 커뮤니티의 이름인 ‘맵 더 소울’ 은 영어 버전으로도 돼 있기 때문에 어느 나라 사람이든 에픽하이를 지켜볼 수 있었다. 3월 9일 출시된 〈에필로그〉는 발매 다음날 아이튠즈 힙합 차트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힙합 색으로 따지면 변방의 나라인 한국의 에픽하이가 이뤄낸 쾌거다. 바로 얼마 전까지 가수이자 회사의 간부로 직원들을 고용했던 에픽하이는, 그러면서도 2009년 한 해 동안 정규 앨범과 리믹스 앨범을 포함해 총 3장의 앨범을 냈다. 어느 날 번개에 맞아 창작열이 샘솟지 않은 한 불가능한 일이다. “안 놀면 가능해요. 아침부터 새벽까지, 주말이 따로 없었어요. 음악을 어떻게 하면 재밌게 만들면서 놀아볼 수 있을까에 치중하다 보니 비즈니스적인 면으로는 약한 점도 분명 있었어요. 우리끼리 일하니까 마케팅과 홍보 능력에선 아무래도 부족했던 거죠. 하지만 우리한텐 필요한 시간이었어요. 에픽하이는 계속 히트곡을 내야 한다는 공식이 생긴 것 같았거든요. 부담스러워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 타블로”

한동안 히트곡 배출이 잠잠해진 상태에서 세상에 나온 이번 앨범은, 그렇기에 마음의 부담을 조금은 덜어낸 채 만들 수 있었다. 아무리 도망쳐봐도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이들에게 바치는 찬가, 타이틀 곡 ‘Run’. 에픽하이를 만나서 걸고 싶은 딴지는 하나였다. 지긋한 데뷔 8년 차, 대중적으로 성공한 팀이고 두 멤버는 가정까지 꾸렸다. 더 이상 배고픔에 손가락 빨던 예전의 에픽하이가 아닌데 이들은 왜 아직도 돈이 없어서 악기 하나 못 사던 때를 얘기하고 있을까? 아직 미래가 막막하기만 한 20대를 소재로 삼는 것이 대중에게 먹힐 만한 길이라고 판단한 걸까? “지금의 내가 그런 것들의 결과니까요. 지금의 우리와 과거의 우리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가난했다가 가난을 벗어나면 더 이상 가난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무엇을 겪어보고 벗어난 사람보다 그걸 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나요? – 타블로”

랩 하나로, 비트 하나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날 거라는 꿈을 싣는 장르, 힙합. 그 어떤 장르보다 정제되지 않은 거칠음으로(에픽하이의 경우처럼 언어의 나열이 아닌 문학에 가까운 랩을 만들어내야 하는 과정을 제외하면) 울분을 토할 수 있는 음악이 힙합이기에, 화려하지 못했던 래퍼의 태생적인 상황은 곧잘 힙합의 소재가 된다. 대중적인 힙합을 하는 에픽하이의 취향은 대개 날것의 터프한 힙합보다는 지금처럼 희망을 노래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셈이다. 그것이 에픽하이의 코드다. 에픽하이의 말마따나 드렁큰 타이거가 힙합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멋있고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인물이라면, 에픽하이는 힙합을 즐기는 사람들의 지평을 넓혀준 예다. 그들의 음악적 코드가 마침 이 시대의 히트상품인 ‘희망’ 과 맞아떨어지니 얼마나 운이 좋은가. “우리팬 페이지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 일반화시킬 수 있고 정형화된 사람들이 아니에요. 팬인데도 불구하고 안티 같은 이들도 있어요. 우리가 이만큼 쌓아놨으니까 이젠 됐어,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도 긴장 놓지 말고 쭉 열심히 해야 하는 거고요. – 미쓰라”

멤버 한 명의 부재 속에 출시된 이번 앨범은 ‘정규 앨범’ 이 아닌 ‘스페셜 앨범’이란 타이틀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다음 정규 앨범은 이들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음반이 될 확률이 높다. 당분간은 앨범 출시가 없을 것 같다는 뜻이다. 그러나 타블로가 콧구멍에 빨대를 꽂고 사진을 찍어도, 미쓰라가 〈치욕! 꽃미남 아롱사태〉에서 그랬듯 정신줄을 놓은 채 엽기적 행각을 보여준다 해도, 에픽하이가 음악을 향한 진지한 끈을 쥐고 있는 한 뮤지션으로서의 생명력은 보존된다. 대체로 헐렁하고 가끔 제정신을 찾는 아티스트의 ‘진지한 순간’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그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는 태도와 표정으로, 타블로는 말했다. “우리 정말 열심히 하거든요, 순수한 열정으로. 우리가 하는 일이 긍정적인 뭔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해서 때로는 우리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런데 대중들 구미에 맞춰가면서 음악 하기는 싫고, 또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해 일하는 것도 싫고… 그냥 알아서 좀 알아줬으면 싶을 때도 있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