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아름다운 윤정희

1967년〈청춘 극장〉으로 데뷔할 때부터 그녀는 신데렐라였다. 서울과 파리를 오가면서 윤정희는 여전히 아름답게 늙어갈 것이다. 시인과 소설가와 음악가와 영화 감독… 정통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내적인 우아함을 지닌 채. 이창동 감독의 새 영화 〈시〉로 돌아온 현역 여배우 윤정희를 만나보자.

구조적인 실루엣의 미니 드레스와 재킷은 모두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파리에 있는 윤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창동 감독의 〈시〉에 출연했다는 소식이 내 일처럼 기뻤다. 지구 저편에서 들려오는 변함없는 종달새 소리. “알로! 아, 〈보그〉… 네! 반가워요. 나 봄이 되면 서울에 가요.” 윤정희는 예나 지금이나 〈보그〉를 발음할 때, 파리지엔답게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어 V를 길고 멋지게 발음한다. 그녀가 입술을 길게 늘이면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지고 가느다란 단발 머리는 더 검게 윤기를 띤다.

윤정희가 걸어 들어온다.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이세이 미야케를 입고 옛날 여배우처럼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서. 결코 자신의 얼굴과 머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는 고집을 담은 결연한 얼굴로. “난 까다로운 사람 아니에요. 진짜. 그런데 내 얼굴과 머리는 너무 예민해서 남이 만지면 안 돼.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나는 드라이하는 게 싫어서 아침에 1시간 일찍 일어나서 말리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멋진 협업을 할 수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배우니까. 아름다움에 대해서, 창조적인 것에 대해서 마음을 열 수 있을 테니까. 이럴 땐 헤어 스태프에게 적당히 디렉팅을 하고 빨리 인터뷰를 시작해야 한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다 보면 자신이 능동적일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말하는 것.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만이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힘 없는 머리카락이 멋지게 가지를 틀고 아티스틱한 뼈대를 지닌 형태로 변해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년 반 전인가, 이창동 감독이 나를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잖아요. 정말 감동했어요. 그쪽도 알다시피 나는 15년 동안 좋은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 얘기를 들었으니 오죽이나. 그날 저녁 남편하고 영화 얘기로 잠을 못 이뤘어요.”

윤정희는 설득력 있는 묘사나 설명이 필요할 땐 습관처럼 ‘내 남편이’ 라는 또 다른 주어를 꺼낸다. 백건우는 윤정희에게 ‘나’를 부연하는 또 하나의 주어다. 두 사람은 끝말잇기를 하듯, 서로의 말을 받아 명랑하고 사려 깊으며 지적이고 활달한 대화로 완성해내곤 했다.

“처음 당신을 파리의 오페라 계단에서 봤을 때, 그때도 지금처럼 참 아름답고 활달한 아가씨였어. 난 그때가 첫 유럽 여행이었어요. 안다고 알아, 세상에 궁금한 게 너무 많다는 얼굴로 잔뜩 흥분해서는 발에다 고무풍선을 매달고 둥둥 떠다녔지. 걸음도 빠르고 아주 욕심이 많았어. 자기가 밑에서 죽죽 잡아 당기는 거 나는 다 느꼈어요. 그런데 그 시절 누가 파리를 보고, 세느 강을 거닐면서 흥분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1970년대였다구요. 호호, 난 당장의 변화와 발전보다 꿈과 환상을 좇아서 살았어요.”

윤정희가 종달새 같은 톤으로 ‘또로롱’ 하고 노래를 시작하면, 링거 병에서 떨어지는 수액처럼 느리고 조용하게 백건우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남편과 동행하지 못해서인지 그녀는 내가 보낸 질문지에 A4지 12장 분량의 답을 적어왔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기개가 느껴지는 글씨였다. 숙제가 어려웠다고 투덜대며,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 여기다 귀고리 하면 투머치죠? 그래요.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참, 불란서 사람들은 한국 영화를 아주 좋아해요. 김기덕의 〈빈집〉 하고 홍상수의 첫 작품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아주 매력적이에요. 이창동 감독은, 문학가였던 이태리 감독 파졸리니와 닮았어요. 파졸리니에게 ‘왜 당신은 영화인으로 전환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글은 한계가 있습니다. 나는 영상으로 나의 문학세계를 펼쳐 나가겠습니다’ 라고 했다잖아요. 이창동 감독도 영상으로 중, 단편 소설을 쓰고 있는 거죠. 이번엔 윤정희라는 도구로 시도 썼구요. 참 다들 훌륭해요. 불란서에서는 처음엔 일본 영화가 인기였어요. 오시나 나기사, 구로자와 아키라, 미조구찌 겐지 같은. 그 다음에 홍콩, 중국, 대만 영화 시대가 있었고, 그 다음에 한국 영화 시대가 온 거예요. 음악회 끝나고 파리에서 한국 대사와 저녁을 먹다가 들었는데, 파리에 한국 음식점이 많이 생기는데 그 이유를 아느냐고 물어요. 한국 영화에서 먹고 마시는 장면이 많은데, 그걸 보고 불란서 사람들이 찾는다는 얘기야.”

윤정희는 참 예쁘다. 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으면, 저렇게 예쁘게 평생을 꿈꾸며 살도록 허락했을까 싶다. 1967년 강대진 감독의 〈청춘 극장〉으로 데뷔할 때부터 그녀는 1200:1의 경쟁률을 뚫고 50만원의 개런티를 받은 신데렐라였다. “내가 이창동 감독을 좀더 빨리 만날 걸 그랬어. 지금이 그 양반 5번째 작품인데, 매번 배우들을 해체해서 새로 만들어냈잖아요? 이번엔 몇 백 편으로 이미 만들어진 배우를 다시 만들어냈어. 참 감격적이야. 그래서 한 컷 찍고 포옹하고 그랬지. 정말 철저한 사람이야. 나는 그저 철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참 ‘포우이틱(Poetic)’ 해요. 그래서 그 사람이 고통이 있어도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을 인물을 만들어낸 거예요.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매력 있어. 그 여자.”

화이트 레더 재킷은 더 로우 바이 분더숍(The Row by Boon The Shop), 블랙 슬리브리스 점프 수트는 DKNY.

윤정희는 문학적인 감독들과 함께했다. 그건 그녀가 문학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희, 남정임과 트로이카 시절에 70년대 잡지들은 경쟁적으로 그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했다. 당시 여배우들이 미용실에서 무엇을 하나,라는 기사에는 남정임은 수다를, 문희는 사색을, 김지미는 흡연을, 그리고 윤정희는 독서를 한다,라고 쓰여 있다.

“김승옥 씨는 천재 소설가였어요. 김승옥의 〈무진 기행〉을 〈안개〉라는 영화로 만들어서 내가 출연했는데, 아주 모던한 유럽풍 영화였어요. 김승옥 씨가 〈장군의 수염〉이라는 영화도 각색하고 김동리의 〈감자〉라는 영화로 감독 데뷔도 했거든. 〈야행〉이라는 영화도 김승옥의〈서울 1964 겨울〉을 각색한 작품인데 참 좋아요. 내가 영화를 하던 때는 문예 영화의 전성기였어요. 난 문학가를 아주 좋아해요. 최인호 씨하고도 친하고, 미당 서정주 선생님 부부와는 아주 가깝게 지냈어요. 난 사학하고 영화를 전공했지만, 학교 다닐 때는 책에서 꿈을 찾았어요. 우리는 톨스토이, 도스트예프스키 같은 러시아 작가를 좋아했는데, 내 남편이 음악회를 러시아에서 할 때 톨스토이 손자하고 저녁을 먹었다니까. 그때 톨스토이 별장도 갈 뻔했다구. 호호. 기쁘지. 난 삶이 늘 여행 같고 영화 같아요. 아! 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 아파요.”

여전히 메이크업 테이블 위에는 그녀의 초록색 메이크업 박스와 빗이 따로 올려져 있다. 첫 번째 컷을 찍는다. 김아타가 무당 김금화를 찍었던 사진과 애니 리보비츠가 무용수를 찍었던 사진을 머릿속에 넣고 그녀에게 포즈를 지시했다. 무릎을 세우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라고. 언어와 서사, 의식 밑바닥에 깊숙이 감추어진 맨홀의 뚜껑을 열고 그 소용돌이 치는 검은 뇌수의 한가운데를 들여다보고 있는 깊은 눈으로.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연기를 해왔던 대여배우가 신인 여배우처럼 지시를 잘 따라주다가 조금씩 포즈를 바꿔갔다. 윤정희가 쓰는 시는 훨씬 부드럽고 여성적이고 낭만적이었다. 파올로 로베르시가 찍은〈게이샤의 추억〉 속의 공리 같은 무드가 풍겨 나왔다.

“여섯 살 때부터 음악과 무용 속에서 살았어요. 성당에서는 성가를 불렀고. 난 음악을 너무 좋아했어요. 내가 영화 배우로 막 활동할 때는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서 카세트테이프가 많이 없었는데, 일본 로케이션 가면 바흐, 슈베르트 테이프 사오는 게 큰 즐거움이었어요. 조명하고 세트 바꿀 때 나는 차 안에서 클래식을 들으며 책을 읽었어요. 문학사상, 사상계, 현대문학 같은 것들. 나는 그렇게 어릴 때부터 음악하고 문학이 좋았어요. 내 동생도 메조소프라노 성악가고, 막내 동생도 피아노를 치죠. 남편과는 너무 자연스럽게 만났어요. 나는 남편이 연습할 때 그 소리를 듣는 걸 너무 좋아해요. 딸이 바이올린을 하니까 우리 집은 꼭 콘서트홀 같아. 나는 남편이 연습할 때 변화하는 과정을 재밌게 즐겨요. 처음엔 한숨 쉬면서 계단을 내려오죠. 며칠 있으면 너
무 잘 된다고 뛰어내려와요. 연주회 직전엔 내가 많은 청중을 대신해서 마지막으로 들어요. 너무 행복하죠. 백 선생은 브라암스 콘체르토 1번 녹음하고 에디팅하고 파리에 있다가 며칠 후 들어와요. 다음에 중국 연주 스케줄이 있으니까. 우린 날마다 1시간이 넘도록 통화해요.”

남편 들어올 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적어준 아이라이너를 사오라고 해야겠다며, 벌써부터 선물 받을 소녀처럼 입가에 명랑한 미소가 번진다. 두 번째 컷을 찍는다. 윤정희의 몸은 마치 보통 사람들보다 중력을 덜 느끼는 사람처럼 가벼워 보였다. 겨드랑이에 작은 날개를 감춘 사람 같은 특유의 걸음걸이. 하지만 무언가를 많이 참아본 사람의 손. 불현듯 내 손을 뻗어 크기와 온기를 재보고 싶었던 윤정희의 손.

“〈시〉를 첫 촬영할 땐 두 번 만에 오케이를 받았어요. 이 할머니는 꿈 속에 사는 여자예요. 순식간에 자기 감정에 도취되는 거죠. 나랑 닮았어요.난 항상 영화를 떠나 있지 않았어요. 청룡 영화상 심사위원을 10년을 했고, 대한민국영화제 조직위원회에 있었고, 영화인들과 함께 어울렸어요. 〈시〉를 만난 건 행운이죠. 사람들이 요즘 ‘시’ 가 죽었다, 그러지만 시를 사랑하는 사람을 이번에 참 많이 만났어요. 나는 시하고 인연이 많아요. 오래전에 미당 선생의 〈화사집〉 50주년 때도 남편하고 나하고 일을 꾸몄어요. 남편이 스크랴빈 곡으로 피아노를 치고, 내가 낭송을 해서 민음사에서 시낭송 테이프를 만들어서 팔았어요. 25년 전쯤인가. 불란서에서 음악 페스티벌을 할 때도 미당 선생 시를 낭송했어요. 나하고 진희하고 같이 불란서 말로 번역을 했는데, 그게 참 어렵더라구. 호호. 가만 있자, 나 화장 너무 진한 거 아니에요? 남편이 옆에 있으면 내가 컨폼을 받는데, 없으니 괜찮은가 모르겠어.”

프랑스 여배우다운 기질이 있는 윤정희는 아이 라인 하나 그리는데도 결심이 필요했다. “남편이 항상 나한테 얘기하는 게, 우리가 불행하다면 그건 죄가 된다고. 우리는 꿈을 갖고 살았고, 이렇게 끝까지 갈 수 있을 거 같아. 대신 직업에 대한 욕심은 철저해요. 둘이 경쟁적일 정도예요.” 화제는 다시 70년대로 넘어갔다. 70년대는 윤정희의 전성기였지만, 한국 영화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나는 당대의 모던 보이 감독들 하고 함께했어요. 김수용 감독이 참 멋쟁이였어요. 우린 그때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작품 얘기도 문학 얘기도 했죠. 스무 작품을 같이 했어요. 그분은 아는 게 많고, 흥분이 있고, 연출할 때도 배우에게 부담을 안 줬어. 얼마 전에 〈야행〉을 보니까 요즘 영화보다 더 세련됐어. 내가 럭키한 게 신상옥, 유현목, 이만희 감독들하고 일하고 또 훌쩍 뛰어 넘어서 이창동 감독이랑 작품을 했잖아. 영화제 심사위원 하면서 동시대 한국 영화를 보면서 같이 살 수 있어서 행복했어.”

사람들은 여배우들이 별나게 사악한 희생자라고 생각한다. 그들 자신에 의해, 더 젊고 화려한 여배우들에 의해 희생될 뿐이라고. 윤정희는 ‘여배우’라는 작위조차 성실하게 지적으로 해석해 갔다. “나는 여배우이기 때문에 한국 여배우 역사를 주제로 삼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석사 논문으로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 여배우 연구〉를 썼죠. 〈월하의 맹세〉의 이월하부터 최은희까지. 한국 영화의 계보도예요. 불란서 가서는 대학교부터 다녔는데, 석사 학위까지 십몇 년을 보냈어요. 원래 나는 미국으로 가려다가 72년도에 뮌헨 올림픽 갔다가 신상옥 감독하고 같이 파리를 들르면서 파리로 바꿨어요.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영화 매체를 만든 곳이 이곳이다 싶더라구. 영화 배우 딱 7년을 하고 갔어요. 파리에. 생각해 보면 내가 참 당돌했어요. 하루는 남산어린이극장을 빌려서 프랑스 대사관 직원들을 초청해서 내 영화를 상영한 거야. 그러고는 “대사님! 저 장학금 좀 해주세요” 그랬어요. 그때 대사가 그랬어요. “당신은 한국의 톱스타인데, 내가 장학금 해주면 그건 스캔들입니다.” 장학금 대신 받은 에어프랑스 1등석을 타고 윤정희는 파리로 갔다.

화이트 롱 재킷은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나는 배우가 거만하고 건방진 게 싫어. 노우! 정말 싫어. 어릴 때부터 우리 아버지는 거지한테도 인사하라고 가르치셨어요. 거만하진 않지만 예술에 대한 자존심은 있어요. 그래서 15년을 기다릴 수 있는거지. 남정임, 문희하고 같이 트로이카라고 하던 시절에도 거만한 기질은 없었어요. 그리고 그 친구들은 나보다 선배였어요. 나는 첫 작품부터 우연한 기회에 주연 여배우가 됐거든. 여배우는 타인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난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처음으로 배우를 해도 될지에 대해서 신부에게 물었다고 했다. “그때 신부님이 ‘테레사! 너무 좋아. 네가 가톨릭 신자라서 자랑스럽다’ 그러셨어요. 그래서 나는 벗는 연기는 안 했어요. 〈장군의 수염〉이라는 영화를 할 때 이성구 감독이 ‘미스 윤, 속치마 끈을 요만큼만내려’ 그래서 ‘저 그거 아니라도 할 거 많아요’하고 버텼지. 당시엔 가이다마라고 대역 배우가 부분 노출은 대신 해줬거든. 신상옥 감독하고 〈내시〉를 할 때는 감독이 자꾸 끈을 더 내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조금 내리고는 병풍 뒤에 가서 엉엉 울었어요. 이장호 감독이 써드를 할 때였는데, 나를 한참 달래줬어요.”

언젠가 감독과 여배우 명콤비를 뽑는데, 신상옥과 최은희, 장미희와 배창호, 문정숙과 이만희, 윤정희와 김수용 감독이 후보였다. 그 중에서 윤정희와 김수용이 영예의 트로피를 받았다. 당시에 우연히 만난 팬이 1백 편이 넘는 그녀의 영화를 줄줄 꿰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그 사람이 주축이 돼서 팬들이 40주년 배우 기념식을 해줬어요. 난 잉그리드 버그만, 오드리 헵번, 그레타 가르보, 캐서린 헵번 그런 기품 있는 여배우들을 좋아했어요. 유럽에선 잔 모로하고 까뜨린느 드뇌브가 최고였는데, 〈줄 앤 짐〉 같은 영화 보면 여배우가 참 대단한 존재야. 나도 한국의 잔 모로가 될까 싶네. 호호. 아직도 아름다움, 꿈, 희망을 가진 여인상을 연기하고 싶어.”

서울과 파리를 오가면서 윤정희는 아름답게 늙어갈 것이다. 시인과 소설가와 음악가와 영화 감독들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내적인 우아함을 지닌 채. 남편과 두 손을 꼭 붙잡고. 서로의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아 새들이 가슴 털을 비비듯 서로에게 심장을 부비면서. “난 내 남편의 팬이에요. 그것이 내 인생의 역사가 되고 있어요. 베토벤, 브람스, 라헬, 쇼팽, 라흐마니노프… 우리는 진짜 명콤비라서 휴대폰 하나로도 충분해요.” 과연 저렇게 잘 농익은 60대 여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들어 있는 걸까. 낭만적으로 늙어가는 여자, 파리의 젊은 여자, 사춘기 소녀, 눈 틔워주기를 기다리는 씨앗으로, 열매의 비밀로 존재하는 여배우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이제까지 이창동 감독이 창조한 여성의 원형은 그 인간의 원형 안에서 얼마나 가혹했던가. 〈오아시스〉에서 문소리는 사랑스러운 몸짓도 혐오로 변주되는 뇌성마비 환자였고, 〈밀양〉에서 전도연은 신에게 대항하는 처절한 나르시시스트였다. 이창동의 영화에서 여자는 크게 울부짖지도 못하고 혼자서 창자를 끌어 안고 ‘끙끙’ 신음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창동은 행간이 불연속적인 아른하며 동화적인 ‘시’라는 페르소나를 만들어 냈다. 윤정희는 그 ‘시’를 연기한다. 삶이 곧 시였고 샹송이었던 여자에게 알맞은 배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