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된 사나이

새 영화 〈파괴된 사나이〉에서 김명민은 상처 투성이인 채로도 스태미나가 넘치고, 숨구멍이 터질 듯한 격렬한 표정 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뜨거운 김명민 옆에 차가운 엄기준이 스릴러의 예민한 온도를 맞추고 있다.

엄기준이 입은 재킷은 제이신자켓, 셔츠는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 김명민이 입은 블랙 재킷은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 셔츠는 카루소. 두 사람의 하의는 앱솔루트 보드카 스페셜 커스튬.

김명민은 매번 스스로를 파괴했고, 새롭게 창조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연기 본좌’ 라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며, 자신을 ‘셀레브리티’라고 하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그는 패션쇼장이나 TV버라이어티쇼 녹화장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김명민은 자신을 ‘일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파괴된 고통의 지옥과 창조의 쾌락을 끝없이 반복하는 일하는 배우. 김명민이 걸어 들어왔다. 약속 시간 57분 전이었다. 월드컵 시즌에 어울리는 빨간 티셔츠를 입은 건강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매번 이런 식으로 ‘서프라이즈’처럼 만났다. 그가 드라마 〈하얀 거탑〉세트장에서멋진 블랙 수트를 입고 정치 의사를 연기할 땐 구내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불멸의 이순신〉을 촬영할 땐 굶주려서 군졸들이 바다 위의 빵으로 보였다거나), 와인 바에서 그가 이태원 스키복 가게에서 비정규 세일즈 점원으로 일할 때 무용담도 들었다(다들 친절한 명민 씨에게 몰려들었기 때문에 한 달 사이에 그의 급료는 정직원의 배를 넘었다). 수술 중 각성을 소재로 한 〈리턴〉이라는 영화를 촬영한 후엔 청담동 지하 갤러리에 비밀 수술대를 차려놓고 흥미로운 의료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복부에 검붉은 체리를 올려놓은 여자 모델과 함께). 김명민은 언제나 자신감과 에너지가 넘쳤고, 의사 표현이 명료 했으며, 유머러스 했다.

지난여름, 52kg의 해골 같은 몸으로 나타났을 때만 빼고. 그는 자신이 죽어야 영화가 끝이 난다, 는 메소드 연기의 정신적 이론을 시간 순서에 따라 몸으로 실험했고, 그 결과는 그의 육체를 심각하게 파괴시켰다. 루게릭 환자가 된 그의 장기 기능이 멈추기 직전에 영화 촬영이 끝났고, 김명민은 정서적으로도 심각한 공황 상태를 경험했다(그는 이 영화로 2009년 청룡영화제에서 송강호, 김윤석, 장동건, 하정우를 제치고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것은 사랑이 깊어질수록 혀와 몸은 굳어지는 ‘영화’ 같은 다큐멘터리인 동시에, 한 배우가 영화를 위해 어떻게 자신을 희생시키는가(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을 때까지)를 보여준 생생한 참극이었다. 당시에 나는 눈을 감고 흰 상자 안에 들어간 김명민을 촬영했고, ‘죽어야 사는 남자’라는 카피를 달았다. 그의 목은 너무 가늘었다. 나는 커다란 스크린에서 그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몇 kg나 나가시나요?” “66kg입니다. 딱 좋은 무게죠.” 그는 오전에 오랄비 칫솔 광고 촬영을 마치고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14kg을 찌우셨군요!” 담당 의사처럼 내가 말했다. 이제까지 김명민은 주로 건강과 생명과 공익 부문에 관련된 신뢰도 높은 광고 모델로 활약했다. “손해보험과 국제전화, 차량안전과 건강식품 같은 것들이죠”라고 그가 농담조의 말투로 말했다. “광고주들도 제 건강에 걱정이 많았어요. 〈내 사랑 내 곁에〉끝나고 찍은 광고가 요즘까지 나왔거든요.” TV광고 속에서 김명민은 약간 병약해 보여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건강식품 회사는 ‘홍삼과 함께 김명민이 회복된다’ 는 컨셉으로 광고를 내보내기도 했다. “모든 게 저의 회복에 포커싱이 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지금 완전히 회복됐습니다” 라고 그가 뽀빠이처럼 힘 있게 근육을 펼쳐 보였다.

다 지난 일이지만 그것은 영화 배우들에게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배우가 그렇게 혹사 당해도 되는가, 과도한 배우 정신이 대중들에게 존경을 넘어 공포를 준 것은 아닌가 등등. “알고 있습니다. 같은 배우들끼리도 배우도 사람인데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그랬죠. 하지만 그건 개인의 가치관 문제입니다. 왜 배우를 합니까?성공하려고? 유명세 때문에? 저는 제 만족 때문에 합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 성취감과 보람이 나의 힘이에요. 루게릭 역할도 그런 질병 영화를 만들기로 한 제작자가 문제지, 그 역할을 목숨 걸고 해낸 배우의 문제는 아닙니다. 눈 앞에 놓인 과제를 해내는 것이 순수한 제 일이에요. 그걸 넘지 못하면 다음의 나는 없으니까요.” 김명민은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다. 그것은 그의 명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떤 영화에서든 이 싸움에서 이겨야 다음 싸움에서 이깁니다.” 그렇다, 싸움이 끝나면 다음 싸움이 기다린다!

이번 싸움은 딸을 빼앗은 유괴범과의 싸움이다. 〈파괴된 사나이〉의 티저 포스터가 인터넷에 뜨던 첫날부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새 영화 속에서 그는 상처 투성이인 채로도 스태미나가 넘쳐 보였고, 세포의 결까지 감정으로 고양된 터질 듯한 표정 연기를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그는 알맞게 회복되었다. 나는 그에게 항상 더 센 자극을 원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물었다. 마치 매년 새로운 기록이 갱신되길 바라는 올림픽 선수처럼 스스로가 더 높은 연기적 목표를 세우고 장대 높이뛰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요. 저는 메조키스트가 아닙니다. 변태도 아니구요.” 하지만 이제까지 그가 창조한 인물들을 떠올려보라! 거룩한 전쟁 영웅, 죽어가는 천재 의사, 폭언 폭탄을 투하하는 괴팍한 지휘자, 사랑에 빠진 루게릭 환자… 그가 창조해낸 인물의 스케일은 너무 거대하고 장중하며, 그 운명은 너무 아름답고 비참해서 마치 고통과 구원을 다룬 문학 작품을 보는 것 같다. 언젠가 온몸의 질서를 파괴한 후 다시 재조립하는 김명민의 연기 과정이 TV 다큐멘터리로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그 제목도 ‘그 사람은 거기 없었다’였다. 어쩌면 그의 연기는 보는 사람에게도 고도의 집중과 경외를 요구한다.

김명민이 입은 재킷은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 팬츠는 디젤 진. 오른쪽 엄기준이 입은 셔츠는 돌체 앤 가바나.

“창조 작업은 늘 고통스러워요.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들어요. 너무 벅찹니다.” “그 창조의 레일 위에서 내려오고 싶지는 않은가요?” 라고 내가 유혹하듯 물었다. “아니요. 그 창조의 작업이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걸요. 그건 원초적인 설렘을 줍니다. 시나리오가 다가오는 순간을 아세요?” 그가 허공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초등학교 때 눈을 감고 있으면서 짝궁을 기다리는 느낌이에요.” 특히 이번 영화는 더욱 설레었다. 매 순간이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시간들이었다. 미국에서 한 달 동안 요양을 마치고, 등산을 병행하면서 마침내 몸무게가 60kg을 넘겼을 때, 모두가 기다리던 〈파괴된 사나이〉의 크랭크 인이 시작됐다.

첫 촬영은 동두천 경찰서에서 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피 묻은 옷가지를 바라보는 신이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딸아이의 옷을 바라보는 영화 속 ‘주 목사’를 상상하면서, 나는 윌리엄 폴 영의 소설 〈오두막〉을 떠올렸다. 유괴된 막내딸 때문에 거대한 슬픔에 빠진 채 신에게 냉담해진 주인공이 4년이 지나 그 유괴 현장인 오두막으로 신의 부름을 받는다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오두막〉을읽으셨나요?” “아니요. 이 영화는 신앙이 연루되지 않습니다. 오직 유괴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예요.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신보다 딸을 더 사랑했던 사내의 타락에 관한 영화입니다. 한 인간이 딸을 찾기 위해 달리는 거죠.” 김명민은 종교와 영화의 문제를 분리하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시험에 든 부성애는 과연 어디까지 포효하며 달려갈까? 〈올드 보이〉에서 딸을 유괴해서 키운 냉혈한 앞에서 혀를 자르고 울부짖는 최민식의 부성애, 〈괴물〉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달리는 바보 같은 아버지 송강호의 부성애, 〈그 놈 목소리〉에서 유괴범을 향해 돈을 들고 뛰며 눈물 섞인 주기도문을 외우는 설경구의 부성애… 김명민은 또 어떤 종류의 부성애를 창조했을까?

“영화 속에서 아내인 박주미 씨는 딸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어요. 하지만 저는 포기하죠. 딸을 포기하면서 제 인생도 포기해버립니다. 현실과 타협하고 아주 세속적인 사람이 돼버리죠. 그런데 8년이 지난 어느 날….” 어디선가 누군가의 전화 벨이 울리고. “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안 후, 저의 질주가 시작됩니다.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수면으로 올라오고, 유괴범과 사투를 벌이는 거죠.”

어쨌든 김명민은 아니라고 해도, 나는 감독들이 그에게 매번 무거운 짐을 지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혹시 김명민을 ‘육백만불의 사나이’ 쯤으로 가정하고 그에게 점점 더 가혹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글쎄요, 시나리오 10개 중 7개가 스릴러입니다. 그럴수록 더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죠. 그 중에서도 현명한 누군가는 또 저를 셜록 홈즈와 맥가이버를 뒤섞은 코믹한 캐릭터로 쓸 거예요.”

엄기준이 입은 블랙 재킷은 길 옴므, 왼쪽 김명민이 입은 셔츠는 돌체 앤 가바나.

엄기준은 미니멀하고 쿨링 시스템이 좋은 남자다
엄기준의 눈은 햇빛 아래 면도칼처럼 날카롭고, 입은 얼음 조각을 문 것처럼 쿨하다. 그는 자신이 조금도 바쁘지 않다고 했다. 그는 대선배이자 육중한 카리스마로 빛나는 ‘연기 본좌’ 김명민 앞에서 절대로 주눅 들지 않으며, 작은 목소리로도 명랑하게 이야기한다. 김명민이 바리톤으로 유머 섞인 연설을 한다면, 엄기준은 테너로 속삭이듯 노래한다.그를 보면 이 영화가 아주 절묘한 캐스팅으로 이뤄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얼굴에서는 〈살인의 추억〉에서 용의자였던 박해일의 항변하는 듯한 수수함과 〈그 놈 목소리〉에서 유괴범이었던 강동원의 억눌린 무참함이 풍겨 나왔다.

김명민이 드라마의 선이 굵고 뜨거운 사나이라면, 엄기준은 아주 미니멀하고 쿨링 시스템이 잘 된 사나이다. 그가 출연한 드라마가 모두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렸기 때문에(〈히어로〉4%, 〈그들이 사는 세상〉7%, 〈잘했군 잘했어〉의 조기 종영), 우리는 영화 캐릭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맡은 유괴범 최병철은 죄의식이 없는 살인자죠. 아이도 죽이고, 택배 기사도 죽이고, 필요 없으니까 죽이고, 돈 받았으니까 죽이고….” 즉, 〈공공의 적〉의 이성재나〈추격자〉의 하정우 같은 사이코패스라는 말이다. 늙은 부모도 죽이고, 힘 없는 매춘 여성도 죽이고… 하지만 ‘유괴’라면 좀 달라진다. 가정을 이룬 사람은 알겠지만, 유괴는 가장 끔찍한 범죄다. 문득 왜 8년의 시간 동안 유괴범이 아이를 데리고 있었을까, 가 궁금해진다. 나는 차분하게 취조하듯 물었다. “8년의 시간 동안 아이는 어떻게 된 건가요?” 그순간, 그는 면도칼을 씹고 웃는 것처럼, 그러니까 정말 자기가 한 짓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전혀 없는 것처럼 씨익 웃었다. “혜린이와 저의 관계는 모호해요. 그러니까 그 아이는 제 동료에 가까워요. 그 아이와 함께 다른 아이를 유괴하는 거죠. 우리는 점점….”

오! 그만!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다. 빨리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목소리에서 한석규 같은 느낌도 나네요. 눈과 얼굴 그늘에서 김강우 같은 건강함도 느껴지구요. 뮤지컬 배우 출신으로 거대 매니지먼트 사이더스의 후광을 입으니 좋으시죠?” “감사하죠. 동료들도 부러워하구요.” 엄기준은 1995년에 데뷔해 2000년도에 뮤지컬 첫 주연을 맡았다. 〈사랑은 비를 타고〉〈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김종욱 찾기〉〈몬테 크리스토 백작〉등등. 〈사랑은 비를 타고〉는 영화 캐스팅까지 이어졌고, 첫 영화가 불발된 이후에도 그 인연은 2006년 사이더스 입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댄디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연기자 엄기준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나는 그에게 행운의 사나이라고 덕담을 했고, 그는 순하게 그렇다고 수긍했다. “저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뮤지컬이 하고 싶었어요. 게이부터 바람둥이까지 많은 역할을 했죠. 앙상블 생활도 오래 했고(처음엔 50만원을 받고, 작품이 생기면 조금 더 받으면서), 그동안 원래 테너였던 목소리 톤을 베이스로 낮췄어요. 안정감 있는 중저음이 있어야 다양한 연기를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뮤지컬은 절정의 순간에 연기 대신 노래를 해버려요. 그래서 2004년에 〈남자 충동〉이라는 연극을 시작했어요. 나를 찾고 싶어서. 그리고 지금까지 왔죠.”

15년의 연기 경력은 그에게 주눅 들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분명 그는 좌절보다는 작은 성공들을 더 많이 기억하는 사람이다. “저는 스물 다섯 때부터 무대에서 메인을 했어요. 무대는 내가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면 안 되죠.” 인생이든 무대든 어쩌면 똑같다. 프로들은 균형감각이 좋고, 주눅 들지 않으며, 잘 물러서는 법을 알고, 슬쩍 힘을 뺀다. “저는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를 좋아해요. 배우는 유연해야 돼요.” 문득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숀 펜을 좋아하는 김명민과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를 좋아하는 엄기준이 매우 다른 스타일의 배우라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엄기준은 김명민을 존경한다. 특히 김명민이 자신을 쓰러뜨리고 딸을 구한 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아주 진지하고 경이롭게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