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톤 프로젝트, 박새별, 네온스

각자의 자리에서 창의적 조물주가 되어 우주를 만들어가는 음악인들이 있다. 노래하고, 쓰고, 자신의 음악에 자신이 윤기를 내는 젊은 싱어송라이터셋.에피톤 프로젝트, 박새별, 네온스가 있어서 우리의 귀와 심장은 행복하다.

재킷은 본(Bon), 니트 카디건과 허리끈에 태슬 장식이 있는 아이보리색 배기 팬츠는 엠비오(Mvio), 셔츠와 보타이는 시스템 옴므(System Homme), 화이트 스니커즈는 케즈(Keds).


EPOTONE PROJECT


감성의 씨를 심는 뮤지션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즐거움 대신 가슴 한 켠에 잦아드는 섬세함으로 다가온다. 위로와 안정이 필요한 우리의 귀는 그런 음악을 귀신처럼 잡아챈다. 파스텔 뮤직의 컴필레이션 음반들이나 EP를 통해 드문드문 자신의 존재감을 흘렸을 뿐인데도, 지난 5월, 에피톤 프로젝트가 정규1집을 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사람들은 ‘구매 예약 리스트’에 그의 음반을 올렸다.

우리에겐 90년대부터 이런 식으로 취향의 공통분모를 형성해온 대표적 뮤지션들이 있다. 자신의 이름 자체를 스타일리시한 장르로 확립한 윤상, ‘객원 보컬’ 이라는 신선한 형식을 도입해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이별을 음악으로 대변한 공일오비, 이른바 ‘토이 감성’으로 아기자기한 감각을 주무르는 경지에 있어선 ‘본좌’ 에 등극한 토이 등.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현재 가요계 곳곳에 포진해 있는 일부 젊은 싱어송라이터들에게 유산처럼 물려졌다. 에피톤 프로젝트를 말할 땐 그 따끈한 유산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는 윤상의 팬이다. 윤상의 음악을 들으며 팬으로서 열광했고, 같은 뮤지션으로서 선배가 일찍이 이룬 기술적 성취(미디 음악을 하는 사람의 귀에는 번쩍하고 꽂히는)에 감탄했다.

“제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특정 음악들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복고를 지향하는 건 아니지만, 음악을 만들 때 90년대의 어떤 정서에서 빌려오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그때의 음악은 들으면 짠한 게 있었어요. 요즘의 음악은 작업 방식이나 가사 면에서 키치적인 면이 강해졌죠.”

‘그 시절’의 음악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는 동안, 에피톤 프로젝트는 ‘현재’ 의 감성을 대변할 수 있는 차세대 주자로 떠올랐다. 〈유실물 보관소〉, 이제서야 나타난 그의 정규 1집이다. 웅장한 스트링 편성과 프로그래밍으로 촘촘히 짜인 사운드의 연주곡 ‘유실물 보관소’ 로 시작하는13개의 트랙은 켜켜이 쌓여 하나의 이미지를 이룬다. 그가 연출하고 타루가 불렀던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같은 애잔한 발라드들, 〈이하나의 페퍼민트〉에서 매주 한 코너의 배경음악으로 쓰였던 ‘봄날, 벚꽃 그리고 너’ 같은 연주곡들이 집적되어 꼼짝할 새 없이 어떤 이미지로 몰아붙이는 음악들이다.

“그것이 어떤 기억이나 경험이 됐든, 제 음악을 듣고 그 기억과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아, 이런 일이 있었지, 하고 되새길 수 있다면 성공이에요.” 개개인의 삶을 써 내려간 시나리오가 존재한다면,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은 그 시나리오의 여정을 따라가는 동안 흘러나오는 BGM일지도 모르겠다. 에피톤 프로젝트가 세련된 감성으로 우리의 기억 저장소를 툭 건드릴 때, 흐릿해진 기억은 바로 지금 눈앞의 감정으로 구체화될 수도 있다.

자신의 욕심만 생각한다면, 그는 30분 동안 물 소리나 대나무 바람 소리만 흐르는 음악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앰비언트 음악 중에서도 극단적인 장르, 한마디로 채집에 가까운 음악도 그가 그리는 음악 중의 하나다. 장르가 음악을 담는 형식이라면 뮤지션의 기억과 감정은 음악의 재료가 된다. 그의 아버지는 벽장 하나를 LP판으로 채우고 다양한 취향의 음악을 골라 듣는 남자였다. 아버지의 ‘아카이브’속에서 그는 폴리스, 스팅, 크라프트 베르크, 쇼팽, 심지어 ‘자연의 소리’까지 섭렵하며 자랐다. 아버지의 음악과 라디오에서 흐르는 윤상은 한 뮤지션에게 자양분으로 축적되고, 그 뮤지션의 음악은 우리에게 각자의 감정으로 축적된다. 이런 일이 무수히 반복되면, 감성은 자라고 대물림 되어 어떤 취향으로 뭉친 음악의 바다를 이룰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아카이브에 축적될 감성은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과 더불어 자라고 커진다.

블랙 베스트는 쟈니 해잇 재즈(Johnny Hates Jazz), 프린지 장식의 슬리브리스는 칩먼데이(Cheap Monday), 배기 팬츠는 봄빅스 엠 무어(Bombyx M. Moore), 크리스털 목걸이는 H.R, 가죽 뱅글은 탱커스(Tankus), 블랙 힐은더슈(The Shoe).


PARK SAE BYUL


평범하고 품위있게 음악하는 법
최근 몇년 새 ‘노래하는 여자들’ 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가요계의 한 켠에서는 아이돌 걸그룹이 쏟아졌고, 또 다른 한 켠에서는 보컬리스트로서의 역량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색깔도 갖췄을 거라고 믿고 싶은 여자 가수들이 등장했다. 그 또 다른 한 켠에 박새별이 있다. 레코드 숍들 안에서 박새별의 음반은 박쥐처럼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며 짠하고 나타난다. 어느 곳에서는 ‘R&B 발라드’ 틈에 들어가 있고, 어느 곳에서는 ‘포크’나 ‘인디’ 틈에 섞여 있다.

혼란을 줄이기 위해 정리하자면, 박새별은 ‘팝적인 가요’를 부른다. 어떤 가수들에게 음악은 음악 자체라기보다 자의식의 표출이다. 그들은 아티스트적인 미덕을 갖춘 대신 마니아를 낳거나, 외면 당한다. 박새별에게 음악은 ‘그저 좋아서 하는 일’ 이다. 음악이라는 도구로 자신을 표현하되, 자신만의 자리에서 지독하게 1인칭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려는 가수. “저는 뮤지션으로서 그렇게 자의식이 강하지 않아요. 그냥 평범한 가요, 혹은 웰메이드 팝을 지향합니다. 잘난 척 하는 음악이 아니라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거든요. 2008년에 EP를 내고 이번 음반을 준비하면서, 제가 생각하는 음악적인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선을 지키려고 했어요. 제가 만들어놓은 여러 곡들 중에서 이번 음반에 실린 곡들은, 뛰어나서라기보다 가장 평범해서 선택된 곡들이에요.”

지난 4월 안테나 뮤직의 뮤지션들인 유희열, 정재형, 페퍼톤스, 루시드 폴 등이 ‘대실망 쇼’라는 공연을 했을 때, 박새별도 이 틈에 있었다.30초 만에 전석 매진되는 기록을 세운 이 공연은 파리 13지구 차이나타운의 로맨티스트(정재형)와 옹알이 창법의 ‘엄친아(루시드 폴)’ 등이 가장 실망스러운 보컬의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인, 유쾌한 팬 서비스였다. 그러나 망가지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법. 신인인 박새별은 진지하게 건반을 치며 노래했고(비록 ‘축농증 소녀, 비음의 세레나데’ 라고 소개됐지만), 결국 가장 정상적이라는 이유로 ‘꼴찌’ 를 차지했다. 그녀는 집안에 악기 하나 못 다루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음악과 친한 환경에서 자랐다(그녀의 할아버지는 한국 전쟁 때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박새별을 ‘발탁’한 유희열은 그런 박새별에게서 매끄럽게 다듬어진 보컬리스트의 모습 대신 한 소녀의 가능성을 보고 흥미로워 했다. 직접 연주하고 노래 부르는 가수는 흔하지만, 멜로디에 자기만의 옷을 입히는 편곡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신인은 흔치 않으니까.

‘이 정도로 편곡을 해낼 줄 알면 분명 자기만의 색깔이 있을 것’이라는 유희열의 판단은 박새별 1집 〈새벽별〉에서 어느 정도 드러났다. 단 한 번의 EP 발매 이후 노래하고 편곡하고 프로듀싱 하는 모든 과정을 혼자 힘으로 해냈다는 것은 탁월함도 미숙함도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박새별은 신인의 치기와 소심함 사이, 그녀 말대로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대중이 받아들일 만한’ 음악들을 완성해냈다. 프로듀서 박새별은 세 없이 곡을 꾸미고 멋들어진 코러스를 연출할 줄 안다. 노래할 때의 박새별은 햇살 아하는 소녀처럼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다가(‘사랑인가요’ ), 이내 젖은 목소리로 나를 잊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 ‘물망초’ ).

“멘토인 유희열 오빠가 ‘가수이고 싶냐, 피아노 연주자이고 싶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전 노라 존스 얘기를 했어요. 노라 존스를 떠올릴 때 보컬리스트인지 피아노 연주자인지 구분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럼 곡을 쓰고 내 노래를 직접 부르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해주셨어요. 앞으로도 너무 컨셉추얼한 음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저 지나가던 사람이 제 노래를 듣고 좋다고 생각하면 그게 좋은 거예요.” 그저 무심하게 음악을 대하는 것 같지만, 음악을 하고 싶어서 매일 우는 꿈을 꾸던 소녀의 심장이 무심할 수는 없다. 박새별의 재주는 딱히 외면할 요소가 없는 뮤지션의 미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니트와 니트 베스트는 엠비오(Mvio), 데님 팬츠는 리플레이(Replay), 러버밴드 시계는 리바이스 와치(Levis Watch), 스트라이프 스니커즈는 프레드 페리(Fred Perry).


NEONS


조금 다른 별에서 온 음악
패션계만 80년대를 그리워한 것은 아니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뮤지션 중에도 80년대의 기운으로 음악을 만드는 이들이 있다. 네온스는 록 밴드 ‘몽구스’의 리더, 몽구의 솔로 프로젝트다. 몽구스는 록을 하는 밴드들 중에서도 80년대의 일렉트로닉한 사운드로 버무린 유쾌한 록을 들려준 친구들이다.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모던 록 앨범’ 을 수상하며 록 팬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은 몽구스는 세 명이 만든 성이었다. 그 몽구스의 음악에서 록을 걷어내고 오직 전자음악에만 포커스를 맞춘 음악이 네온스 한 명의 성이다. 포터블 플레이어라고 하기엔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붐박스, 우주 어딘가로 신호를 보내는 듯한 전자음, 펫 샵 보이스 와 신스팝으로 설명할 수 있는 80년대. 그 음악은 복고적이라고는 하지만 모두 ‘전자’로 창조한 것들이다. “신디사이저를 사랑하는 이유는 만지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에요. 노블을 조정함으로써 조수간 만의 차를 조정하고, 구름이 더 많아야 되겠다 싶으면 노이즈를 넣는 식이죠. 내가 기후를 창조하는 기분이에요.”

그렇게 네온스가 창조해낸 음악은 몸을 살짝 흔들 수 있을 정도의 템포지만 애수를 띤다. 네온스의 표현에 의하면 ‘라디오 헤드같이 처절한 우울함’이 아니라 ‘해질녘의 파도를 보는 것 같은 우울함’이다. 네온스는 여기에 음악의 이미지를 글로도 풀어낸다. 앨범 〈a—809〉의 커버를 열면, 네온스가 쓴 소설이 먼저 보인다. 네온스가 ‘네오니쉬’라고 이름 붙인 종족이 등장하고 우울한 청춘이 떠도는 소설. “음악에 대한 아이디어는 물론 글에 대한 아이디어도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거예요. 네온이라는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음악과 글, 둘 사이를 유기적으로 묶어보려 했어요. 네온사인을 보고 있으면 낭만적으로 느껴져요. 동시에 퇴폐적이기도 하고요. 이제 LCD 위주의 세상이라 그런지, 네온사인이 주는 느낌은 지금 여기의 것이 아닌 저 너머의 세상 같아요.”

그는 여기저기서 수집한 옛날 전자악기를 가지고 음악을 만들지만, 그 음악은 거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철저하게 과거를 그리워하는 21세기 사람이 만든 소리다. 그래서 낭만과 엉뚱함과 다른 별에 대한 향수가 있는 네온스의 음악은 황당무계하기보다 귀엽다. 사운드는 깔끔하고 정제됐다. 비슷한 일렉트로 팝을 하는 다른 가수들과 달리 안락하게 다가오는 것도 네온스만의 매력이다.‘파도 아래 감춰진 우리 약속의 비밀은 별빛처럼 반짝이네’ ‘서울의 인구밀도는 전세계 6위라는데/ 왜 난 혼잣말만 하는 걸까’ 같은 가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번 앨범에 실린 ‘별의 노래’가 드라마 〈트리플〉에 삽입됐던 것이나, 그가 드라마 〈커피 프린스〉의 음악 작업에 참여했던 것은 네온스의 음악이 80년대를 겪어보지 않은 요즘의 청춘(실제로 그 역시 90년대 문화를 수용하며 자란 나이)과도 통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그룹이나 밴드 활동을 하다가 솔로 프로젝트를 내는 뮤지션은 비로소 자기 내부로 시선을 돌려 음악적 세계를 넓혀간다. 바닥부터 기둥, 벽지, 타까지 네온스가 고르고 쌓아간 네온스의 성을 찾아갈 때는, 우리가 매주 가요 프로그램에서 듣는 곡들만이 이 세상 음악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만 알면 된다. 이제 벽지가 궁금한 사람은 벽지를 만져보고, 문을 열어보고 싶은 사람은 문을 열어봐도 좋다. 누군가가 그저 들여만 본다고 해도, 네온스는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