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은 여자

엄지원이 영화 <불량 남녀>에서 빚독촉 전문 회사 우수사원으로 분했다. 우습게도 사랑은 빚을 타고 연체고객인 임창정과 로맨스도 나눴다. 부동산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가계 부채로 스트레스를 받는 2010년의 관객들이 돈과 연애로 유혹하는 엄지원의 이중 생활에 어떻게 반응할까?



네이비 시스루 반팔 톱과 트위드 소재의 롱 맥시 스커트, 클러치는 모두 펜디(Fendi)

반드시 시대를 반영해야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좋은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우리는 <인 디에어>를 보고 경제 공황으로 해고된 미국 실업자들의 구체적인 분노를 마주하고(이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가족들과 외식도 못하게 된다거나), <내 깡패 같은 애인>을 보면서 한국의 취업 준비생들의 눈물 나는 고군분투(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반지하방에서 사는)를 보게 된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한 자본주의의 초라한 뒷모습이다. 먹고 살기 빠듯한 남루한 일상에서도사랑이 있듯, 영화에서도 섹스가 있고 나른한 연애가 싹튼다.

영화 <불량남녀>의 원래 제목도 <사랑은 빚을 타고>였다. 엄지원은 연체 고객을 관리하는 카드사의 우수사원,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당해 본 ‘친절하게 염장 지르는’ 바로 그 여자다. “저는 전화로 사람을 잘 조리할 줄 아는 여자예요, 호호호.” 엄지원이 비음이 가득한 농밀한 소프라노톤으로 웃는다. “정해진 날짜에 입금을 받는 게 제일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뿐이죠. 맡은 바 할 일을 다 하는 프로페셔널이라고나 할까요. 오홍홍.” 그리고 그녀는 깜빡 잊은 듯이 더욱 요염하게 덧붙인다. “끝날 땐 항상 이렇게 말하죠. 고객님, 좋은 하루 되세요~~!” 대놓고 기분을 잡치게 하고는, 좋은 하루 되라는 그 후안무치한 낭랑 멘트는 얼굴도 모르는 교환원이 “사랑합니다, 고객니임~”이라고할 때보다 더 섬뜩하다. 휴가철의 카드 연체 이야기는 장마철의 반지하 이야기만큼 눅눅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분 전환 삼아, 그녀를 1950년대 한창 풍요로웠던 미국의 상류층 레이디로 변신시키기로 했다. 이름하여 ‘돈 많은 여자’. 복고풍 가발을 쓰고 붉은 립스틱을 꼼꼼히 바르고, 값비싼 보석을 잔뜩 두르고 자카드 소재 디자이너 투피스를 입고, 탐욕스럽게 먹고, 팁은 듬뿍 집어 주고도 주체할 수 없어 돈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여자. 하하하! 패밀리 세일에 목매고10% 세금에 가슴졸이고, 카드 고지서만 보면 손끝이 떨리는, 현실의 우리들이 얼마나 갈망하던 모습이던가!

세상을 두 부류로 나누자면, 두 가지 스타일의 여자가 있다. 돈을 아는 여자와 돈을 모르는 여자(돈에 무관심하더라도 돈 많은 남자에 눈을 뜬 진화적 돌연변이도 있고, 돈에 불을 켜지만 돈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마는 퇴보형 돌연변이도 있지만). 실제 자연인 엄지원은 돈에 참으로 무감각하다고 했다. 흔히 ‘전, 숫자 결핍증과 은행 알레르기가 있어요’라고 이야기하는 몽상적이고 초연한 부류라는 이야기다. “돈이 좀 많아 봤으면 좋겠네요”라고 엄지원이 여전히 돈 따위엔 관심이 없어 본 사람 특유의 소탈하고 어린아이 같은 투로 말했다. “살다 보면 쓴 만큼 메워지는 것 같아요. 전 교회에 십일조 헌금을 내고 있는데, 처음엔 아까워서 전전긍긍하다 나중엔 자연스러워져요. 정확할 정도로, 낸 만큼 다시 채워지더라구요.하하하.”

돈에 관심이 많은 나는 돈에 관심이 없는 그녀와 돈에 관한 몇 가지 대화를 나눴다. “그럼, 첫사랑에게 돈 빌려달라는 문자를 받는다면 어떻게 대응하시겠어요?” “오! 끔찍하군요. 그럴 땐 대응을 안 하는 게 좋겠죠.” “그럼, 연인 사이에 돈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요? 가령 영화 <멋진 하루>는 전도연이 옛 연인 하정우에게 빌려준 돈 3백만원을 받으러 차용증을 들고 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안 돼요! 연인 사이에 돈 거래는 절대 안 됩니다. 특히 여자가 빌려주는 건 결사 반대예요.” 결국 <멋진하루>는 물론 <불량 남녀>도 여자가 남자에게 돈 받으러 티격태격하다정이 든다는 귀여운 상상이 멜로화된 스토리지만, 그건 철없고 나태한남자들의 실현불가능한 백일몽이라는 얘기다.

“카드 연체도 빚이라면 현대 사회에서 빚을 안 져 본 사람은 없는것 같아요”라고 엄지원은 동의를 구한다는 듯이 말했다. “살면서 돈 걱정은 안 해 봤나요?”라고 내가 물었다. “전 걱정이 많은 A형이에요. 걱정을 안 하려는 걱정을 할 만큼 걱정이 체질화된 사람이죠. 그런데 신기하게 돈 걱정은 안 해요.” 그리고 오히려 돈에 무사태평이라 통신료가 연체돼 재산압류 통지를 받기도 했고, 고지서를 챙기지 않아 도시가스가 끊기기도 했다고 첨언한다. “배우들은 한 작품이 끝나면 다음 작품이 들어올 때까지 실업 상태예요. 다음 작품이 안 들어오면 끼리끼리 모여 ‘돈 없는데 어떡하지?’라고 걱정하기도 해요. 물론 다른 동료들이 그렇다는 얘기예요.”

엄지원은 3년 전 <스카우트>라는 야구 영화에 이어 임창정과 두번째로 호흡을 맞췄다. 당시에도 그녀는 임창정의 코미디 감각을 영리하다고 치하했다. 철거촌 삼류 깡패로 분했던 <1번가의 기적>에 이어 연체를 밥 먹듯 하는 신용불량 형사 역할까지, 임창정의 연속된 ‘헝그리’ 이미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엄지원은 ‘그건 그의 행이자 불행’이라고 잘라 말했다. “배우의 다양한 캐릭터를 인정해줘야하는 건 관객과 투자자, 그리고 만드는 우리의 역할이에요. 하지만 다들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만 선호하죠. 창정 씨는 자신만의 특별한 컬러가 있어요. 그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봐요.” 엄지원 자신도 故 이은주와 함께한 <주홍글씨>이후 몇 년간 비운의 여성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다. 드라마 <매직>과 <폭풍 속으로>, 그리고 멜로 영화 <가을로>까지. 감독과 제작자들은 배우를 탐구하고 이야기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보다 배우가 이미 해놓은 작업들을 보고 골라 쓰는 안전한 방식을 선호했다. 흰 얼굴에 붉은 입술을 가진 그녀는 파리하게 맥을 놓고 쓰러지는 연약한 여자 연기만 반복하다가 그녀 표현대로 ‘뽀로롱’ 마술처럼 홍상수 감독을 만나게 된다.

엄지원을 이야기하면서 영화 <극장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홍상수 영화에서 여자 캐릭터는 <극장전>에 나온 엄지원을 기점으로 점점 쿨하고 멋있어진다고 할까. 남자 팬과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치근덕거리는 그를 향해 “당신 재미 봤으니, 이제 그만뚝~!”이라고 상큼하게 호통치는 <극장전>의 명대사는 그야말로 황홀하다. 엄지원은 친절하고 냉철했으며, 결과적으로 함정에 빠지지 않았고 자기 세계로 홀연히 돌아간 미지의 여인이었다. 그건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남편인 늙은 화가 몰래 바람 피우고 해변가에 앉아 도망가자는 젊은 남자에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 딱 아는 만큼만 얘기해요”라고 독설을 날리던 고현정이나, 바람 피우던 장면에서 덜미를잡힌 애인을 향해 여관 뒷마당에서 “나 한번만 엎어줄래요? 그냥, 심심해서”라고 억양 드센 통영 사투리로 요구하던 문소리의 엉뚱함으로 명랑하게 진화했다.

실크 소재의 슬리브리스 원피스는 프라다(Prada), 커다란 스톤 장식의 반지들은 모두 스와로브스키(Swarovski).

언젠가 나는 촬영장에서 중년 배우가 후배들을 모아 놓고 TV출연료를 떼이지 않는 법에 대해 조언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만큼 배우에게 출연료는 중요하지만, 엄지원은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당시 그녀가 쓴 영화제작일기에서 나는 아주 천진난만한 문구를 발견했다. “감독님, 그럼 출연료 대신 저 하루에 과자 값 만원씩 주셔야 돼요?” “그럼, 지원이 너는 내가 특별히 3만원씩 줄게.” 하지만 여전히 그 돈을 못 받고 있다는 사랑스러운 징징거림으로 끝나는 일기였다.

홍상수와 엄지원의 청산되지 않은 채무 관계야말로 감독과 여배우를 이어주는 아름다운 끈일지도 모르겠다. 난감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통속적으로 돌파해버리는 엄지원은 홍 감독과 늘 익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만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극장전>에서 극중 배우 오영실 역할을 할 때는 잘 몰랐던 대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록새록 삶을 파고드는 것도 재미있다고 했다. “내가 연기했던 인물이 오래 남아서 내삶에 영향을 미친다고나 할까요? 서울타워를 보면서 ‘쟤는 아무데서나 다 보이네?’라고 중얼거렸는데 일상에서 정말로 그렇다는 걸 발견한다거나, 영실이 대중들을 향해 ‘전, 드라마 무시하지 않아요’라고 했던 대사들을 내가 하고 있다거나(최근에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출연했다), 그리고 극중에서 소개할 때 ‘배우 오영실입니다’라고 했는데, 어느새 저도 뻔뻔하게 ‘배우 엄지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거죠. 뒤늦게 배우의 삶을 살면서 먼저 살았던 영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게 재미있어요.”

속물적인 돈 이야기와 지적인 홍상수 감독의 이야기를거쳐 우리는 일상적인 관심사와 소통에 대한 대화를 이어갔다. 엄지원은 요즘 농사 짓는 ‘위팜’이라는 스마트폰 어플에 푹 빠져서 지내는데(해바라기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나무를 사고, 감자 고구마를 캐느라 바쁘다!), 점점 더 공적인 TV뉴스나 인터넷 가십에는 관심이 없어진다는 것. “세상이 너무 빨리 돌아가서 이젠 중요한 가치 기준이 없어진 것 같아요”라고 그녀가 푸념했다.

대신 우리는 혼자 브런치를 먹고, 책을 들고 나가 카페에서 읽고, 저녁엔 골목을 걸어 다니며 작은 동네 족발집과 초밥집을 탐방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를 공유했다. 놀라운 점은 그녀는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화제를 공유할 공평한 ‘여지’를 준다는 점이다. “전,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에요”라고 그녀가 눈을 맞추고 다정한 친구 같은 말투로 말했다. “제 주변 사람들은 다 스스로가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해요. 남의 말을 잘 안 들어요. 연예인이든 아니든요. 그럴 경우 대부분 기선 제압을 위해 목소리가 커지죠. 그 풍경에서 똑같이 데시벨을 올리기에는 제가 너무 게을러요. 한번은 배우 친구와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녀가 혼자서 셀카만 찍어 깜짝 놀랐어요. 풍경과 친구를 사진에 담아야하는 거 아니에요?” 엄지원은 소셜 미디어 때문에 모두가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가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우리 모두 상대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질문을 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마음을 볼 수 있는 질문을 하고, 귀를 기울여 들어주고,가식 없이 얘기하고, 상처 받았다는 것도 솔직하게 내보이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삶. 엄지원은 서른 넷인 지금 인생이 쉬워졌다고 한다. “한때 영화가 전부이던 시즌이 있었어요. 영화진흥위원회와 시네마테크를 다니며 재능 있는 영화 감독, 작가들과 고차원적이고 예민한 예술적 대화를 나누길 좋아했죠.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나는 여배우라면 누구나 그런 시기를 겪는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정말이요? 배우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동물적이고 원색적인 거 같아요.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눈치도 정말 빠르고… 그런데 살다 보니까 20대 때는 잘 산 사람이나 엉성하게 산 사람이나 큰 차이가 없는데, 30대 이후에는 진짜 삶을 살아야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엄지원이 돈은 많지 않지만, 향기가 깊고 풍부한 질감을 가진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여배우들처럼 그녀도 메릴 스트립이나 케이트 윈슬렛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들은 셀레브리티가 아니라 일반인의 삶을 살죠. 현실에 발붙여서요.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지혜로운 연기가 나올 수가 없잖아요.”

화장기 없는 하얀 얼굴로 동네 슈퍼 문을 열듯이 <보그>스튜디오문을 열고 들어온 엄지원. 그녀가 스스럼 없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꼭 <접속>같은 느낌일지도 몰라요.” 물론 <접속>도 텔레마케터가 여주인공이지만, 그 통화 내용이 사랑의 밀어가 아니라 가공할 빚독촉인데도 수화기에서 애정의 싹이 틀까? 글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호기심 많고 사랑스럽고 돈 욕심 없는 코맹맹이 아가씨, 엄지원이라면 한번 기대해볼 일이다.

울 소재의 볼레로 재킷과 코르셋, 풀스커트, 리본 펌프스와 클러치백은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목걸이는 오르시아(Or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