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소년

물도 하늘도 아닌 곳을 부유하는 듯한 이 소년이 한번씩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그 싱그러움은 패션 필드 외의 사람들에게도 감지된다. 첫 영화〈 이파네마 소년〉으로 찾아온 배우 이수혁. 그가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서, 패션과 영화의 경계에서 유영하고 있다.

슬리브리스 니트 터틀넥은 앤 드멀미스터, 실크 팬츠는 랑방(at 무이).

모델은 긴 말이 필요 없는 직업이다. 무슨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온몸으로 자신이 ‘모델’이라고 선언한다. ‘모델 이수혁’도 선언과 함께 등장했다. 2006년 디자이너 정욱준의 론 커스텀 패션쇼로 데뷔. 이듬해 한국패션사진가협회가 주는 남자 모델 신인상 수상. 정욱준과 서상영과 김서룡의 사랑을 받고, 서울 컬렉션과 SFAA 컬렉션 무대를 오가며 최근 몇 년 새 가장 ‘핫’ 했던 남자 모델. 그런데 이수혁의 선언은 여느 남자 모델들과는 좀 달랐다. 팀 버튼 감독의 〈유령신부〉 남자 주인공 같은 외모를 지닌 이수혁은 ‘저 남자는 과연 어떻게 소리 지르고 어떻게 울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흰 피부에 도톰한 입술을 가졌지만 딱히 꽃미남이라 할 수도 없는 얼굴, 그러니까 이수혁은 그저 이수혁이 흘리는 몽롱한 기운으로 주변을 홀렸다. 그가 여자 친구인 김민희나 친한 친구인 지드래곤과 함께 있는 사진이 인터넷에 돌때면 사람들은 ‘비현실적이고 우월한 유전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나마 사랑과 우정이 개입된 남자의 모습에서는 땅에 발붙인 현실감이 조금 보였다.

어느 날 이수혁이 연기를 한다고 했다. 싸이더스 HQ에 들어갔단다. 소속사 없이 홀로 디자이너의 성문을 두드리며 톱 모델이 된 이수혁과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싸이더스 HQ라니. 게다가 그는 배우로 변신하면서 가명 이수혁을 버리고 본명 이혁수로 활동하겠다고 마음 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냥 다시 ‘이수혁’으로 살기로 했어요. 모든 사람들이 저를 ‘이수혁’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비록 2009년 어느 영화지 인터뷰 기사 제목은 “이제 ‘이수혁’안 할래요” 였지만. 이 비현실적인 이미지의 피사체가 배우로 불리고자 한다면, 현실에서 매 시간 사건과 함께 호흡하고 뒹굴어야 되는 극 속의 인물은 어떻게 구체화될까? “배우와 모델 모두 감정을 표현해야 하죠. 하지만 둘은 전혀 달라요. 모델은 딱 그 순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모습이에요. 영화를 찍어보니, 사진과 영상의 차이가 뭔지 확연히 드러나더군요.”

제1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고, 11월 초 개봉 예정인 영화〈이파네마 소년〉에서 그는 ‘배우’가 되기 위해 결코 무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관객은 외양(어쩔 수 없이 주어진 그의 재산이지만 배우로서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과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자 안쓰럽게 쩔쩔 매는 신인 배우를 볼 일은 없다. “스물세 살은 참 어중간한 나이인 것 같아요. 좀더 어렸으면 하이틴물을 했을 거고, 30대였으면 그에 맞는 멜로가 있을 텐데, 제 나이를 위한 청춘물은 별로 없잖아요. 이번엔 시작부터 운이 좋았죠. 남자 배우가 한번쯤 해보고 싶은 가장 순수한 감성의 캐릭터였어요. 그건 시작하는 단계인 지금이 아니면 해내지 못할 캐릭터예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유명한 곡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에서 따온 제목의 영화 〈이파네마 소년〉은 바다에서 시작해 바다로 끝난다. 소년이 잠에서 깨어 처음으로 바라보는 곳, 소년이 소녀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곳도 바닷가다. 그곳에서 소년과 소녀의 두 번째 사랑이 시작될 듯, 말 듯… 첫사랑의 기억은 두 번째 사랑의 시작 즈음에 절묘하게 오버랩 되는 법이다. 뭍에 나와 있을 때도 수영 팬티만 입은 채 촉촉히 물기를 머금고 있던 그 소년을 스튜디오로 불렀다. 과장된 패션을 덜어내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스모키 메이크업을 지워냈다. 그렇게 ‘벗겨내고’ 보니 이수혁은 ‘키 큰 소년’ 이었다. “영화를 씨디롬으로 구해서 보셨다고요? 아, 역시 〈보그〉는〈보그〉구나… 나한테도 영화 다시 안 보여주던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을 때 괜히 민망해서 중간 부분은 잘 안 봤거든요.” “어때요? 어땠어요? 여자들이 많이 좋아해줄 만한 영화인데. 좀 잔잔했죠?” “항공촬영 신이 있었어요. 비행기 기름 값이 비싸서 이착륙을 여러 번 못하니 저보고 계속 수영하고 있으라는 거예요, 그 망망대해에서.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무서운데 옆에서 고등어는 팔짝거리고, 전날 거제도에 식인상어가 나타났다는 뉴스도 생각나고….”




그는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와 모니터가 있는 자리를 적당히 왔다 갔다 했다. 이수혁은 오늘처럼 꾸미지 않은 컨셉트로 잡지 촬영을 해보는 게 처음이라고 했다. 모니터에 뜬 자신의 모습을 짧고 깊게 바라보다가 말하길, “아, 나 이렇게 찍어도 괜찮구나. 그런데 왜 다들 저만 보면 그렇게 실험을 하려 들었죠?”이수혁이 순간적으로 내비친 진심이 뭔지 아는 스태프들은 빵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패션계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아방가르드한 옷과 여자 친구의 44 사이즈 옷도 어울리는 몸, 두꺼운 메이크업으로 가면을 씌워 보고픈 얼굴을 지녔으니까. 준지(Juun.J)의 룩 북 촬영을 위해 마네킹에도 시도하기 힘든 ‘솥뚜껑 머리’를 했을 때조차 그 얼굴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이수혁은 밝음보단 어둠, 웃음보단 무표정, 보편적인 쪽보단 마니악한쪽에 가까워야 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은 모델로 비춰진 그런 컨셉추얼한 이미지를 멋쩍고 쑥스러워 했다. 그런 비주얼 속에서 자신의 마스크는 너무 이상하게 생긴 것처럼 보이고, 가끔 이목구비가 다 ‘찌그러져’ 있어 차마 못 봐주겠다고도 했다(그 ‘찌그러진’ 코를 두고 어떤 이는 “이수혁의 코가 도저히 한국 사람의 것 같지 않던데, 그거 수술한 거 맞죠?”라고 네이버 지식인에 질문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물도 하늘도 아닌 곳을 부유하는 듯한 이 소년이 한번씩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그 싱그러움은 패션 필드 외의 사람들에게도 감지된다. 송지나 작가는 드라마 〈왓츠 업(내년 방송 예정)〉을 준비하면서 지인의 추천으로 별 생각 없이 이수혁을 만났다가 바로 그를 위한 캐릭터를 써내려 갔다. 뮤지컬 학과를 배경으로 하는 이 캠퍼스 드라마에서 이수혁은 실력 있고 시크한 작곡가 역할로 찾아온다. 그녀가 이수혁에 대해 트위터에 올려놓은 멘트. “이따금 태어나기를 민간인같지 않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나 보다. 처음 추천 받을 때만 해도 ‘ 일단 연기 테스트 해 보고…’ 하면서 시큰둥했었는데, 실제 만나보는 순간 ‘아니 뭐 이런 존재가…’라고 생각된 친구다.”

차승원, 강동원 등 모델 출신 배우들은 저마다 자신의 축복 받은 강점을 노련하게 잘 컨트롤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뭐 이런 존재가…’ 싶기만 하던 유전자들이 분명 진짜 배우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었다. 이수혁은 이제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서, 패션과 영화의 경계에서, 안착할 어느 지점을 향해 유영한다. “영화 개봉 앞두고 얼마 전부터 지면 촬영을 시작했어요. 오랜만에 하려니까… 어우, 영 또 어색하더라고요.” 이렇게 패션 필드는 또 하나의 ‘물건’을 가깝지만 먼 동네로 떠나 보내고 있다.

니트 카디건은 사카이(at 10 꼬르소 꼬모), 실크 셔츠는 재희 신, 팬츠는 디올 옴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