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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으로 산다는 것

2016.03.17

by VOGUE

    강수연으로 산다는 것

    잔뜩 독이 올라 있는 표정이었다가 눈물이 날 만큼 격정적인 환희의 표정을 교차시키며, 때로는 흩날리는 파마 머리로, 알차게 쪽진 머리로, 석탄 같은 검은 삭발로 영화 포스터를 점령해온 강수연.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에서 그녀는 또 어떤 식물성 얼굴을 보여줄까?

    볼륨감 있는 원 숄더 드레스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영화 배우로서 강수연을 기다린 건 1998년〈처녀들의 저녁식사〉가 마지막이었다. 진희경, 김여진과 함께한 임상수 감독의 쿨하고 야한 성인 영화. 그때 강수연은 〈보그〉의 주선으로 후배 여배우 진희경과 나란히 지춘희 옷을 맞춰 입고 중국 레스토랑에서 식욕과 성욕에 대한 로(raw)한 대화를 나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음식을 집어먹는, 요사스럽게 예쁜 강수연의 흑백 포트레이트가 〈보그〉에 실렸다. 촬영 내내 강수연은 ‘내 몸은 덜 자란 것처럼 미숙한데, 요즘 애들은 국수 가락 뽑아내듯 다 늘씬하다”며 사랑스럽게 징징댔다. 키가 크고 육감적인 모델 출신 진희경과 비교하면 그렇겠지만, 그 전까지 강수연의 이미지는 미숙이라기보다 과성숙이었다. 몸이 또 하나의 언어였던 ‘육체파’ 배우로서, 강수연은 지금의 김혜수 같은 존재였다. 반듯한 계란형 얼굴에 윗선이 뾰족한 입술, 의학 기술의 세례 없이도 탐스럽게 여문 가슴.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아이가 뜻도 모르고 음란한 노래를 부르듯 싱그럽게 원시적인 성격은 또 어떻고.

    붉은 입술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스무 살의 그녀가 〈씨받이〉 과부촌의 들판을 종마처럼 뛰어다니던 장면을 떠올려보라. 양반네 조신한 처녀들에게 한껏 몸이 단 얼굴로 “니들이 남자 맛을 알아?”라고 교만하게 종알거리던 강수연의 입술은 물이 흥건히 고인 탐욕의 과일이었다. 반대로 임권택 감독의 드라이한 종교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에서 파랗게 머리를 밀고 인광이 일렁이던 비구니 강수연은 스스로 ‘성적 욕망’을 거세한 저잣거리의 과부, 한 덩이의 처연한 바위처럼 보였다. 1987년 〈씨받이〉로 그녀에게 여우주연상을 주었던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단이나, 1989년 〈아제아제바라아제〉로 여우주연상을 안겨줬던 모스크바영화제 심사위원단은 이 극단적인 ‘육체성’이 어떻게 한 여배우에게서 나왔는지 늦게라도 진상조사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강수연의 육체는 여전히 불가사의한데, 그녀가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이자 한지를 소재로 한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에 출연한다고 하니, 호기심이 일밖에. 한지를 닮은 강수연이라니! 그녀의 육체가 달빛 아래 풀 먹인 무생물의 한지로 되살아난단 말인가? 영화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 전주시의 후원으로 만들어지는 이 영화는 박중훈이 한지를 살리는 시청 공무원으로, 강수연이 한지를 취재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나온다는 정도만 알려졌다.

    어쨌든, 여배우로서 90년대까지 놀라운 작품 편수를 자랑하며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강수연이 2000년대 들어서는 드라마 〈여인천하〉의 정난정과 강우석 감독의 극우애국영화 〈한반도〉의 명성황후로 명맥을 유지했다. 최고의 상점이 문을 닫은 것이다. 신세기 들어 김혜수, 이영애, 이미연 등의 다채로운 뉴페이스(물론 지금은 그녀들도 40대 배우가 됐지만!)의 등장, 연예매니지먼트의 활황으로 여배우 공급 과다현상이 일어난 것도 있지만, 그녀와 함께 전성기를 누렸던 9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의 몰락이 큰 이유였다. 한 세기를 풍미했던 여배우와 함께 영화 창작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장선우, 박광수, 곽지균, 이현승, 장길수… 생각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리하여 어쨌든 너무 오랜만에 한 시대의 영상 문화를 풍미했던 ‘월드 스타’를 만나게 되니,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 안부를 나눠야 할지 난감했다. 23년 전 베니스 얘기를 해야 하나, 21년 전 모스크바 얘기를 해야 하나, 9년 전 드라마 〈여인천하〉 이야기를 해야 하나, 박중훈과 대학생으로 나와 농구공처럼 통통 튀던 〈철수와 미미의 청춘 스케치〉를 이야기해야 하나,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이문열 원작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나 모더니즘 계열의 〈베를린 리포트〉 〈경마장 가는 길〉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혹은, 90년대 페미니즘의 문을 열었던 스타일리시한 영화 〈그대 안의 블루〉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곽지균 감독의 유미주의적인 비극 〈장미의 나날〉이나 이명세의 동화적이고 남루한 연애담 〈지독한 사랑〉을 이야기해야 하나.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잇다 보니 이 대목에서 그녀에게 상을 주고 싶어졌다. 오랫동안 영화계에서 버텨낸 여배우에게 주는 상. 아! 그녀는 80년대와 90년대 청운의 꿈을 안고 메가폰을 쥐었던, 지식인 남자감독들에게 최고로 다정하고 발랄한 연인이 아니었던가. 매니지먼트의 손때가 묻지 않은 채, 감독이 채굴하는 대로 인심 좋게 원석을 드러내며, 제 나름의 현대적인 낙천성을 온몸으로 퍼덕이던 강수연. 여배우란 어떤 존재인가. 필름 위에 현상된 가장 아름답고 잔인한 피사체며, 여배우의 몸은 그 자체로 영화사를 전시하는 경이로운 박물관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스크린 속에서 인생만사 다 겪은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가 이토록 청정하고 깨끗할 줄이야. “어릴 때 영화 보면 내 목소리가 카랑카랑 했는데, 목소리도 늙는 것 같아”라고 순진하게 지저귀며.

    조금 전까지 그녀는 선배 영화인 김지미 회고전에 들어갈 다큐멘터리 멘트를 땄다. “선배님! 당신은 가장 사랑 받는 현재진행형의 영화인입니다”라고 꼭 차돌에 참기름 바른 것처럼 또랑또랑한 내레이터 목소리로 말을 해서 한번에 오케이를 받아냈다. 그러고는 그 나이 든 영화인들과 한 명씩 어깨동무를 하고 기념 촬영까지 했다. 남의 사진 촬영장에 들어와 한참이나 여배우를 독차지한 눈치 없는 외부인이 얄미워 누구냐고 물었더니 〈씨받이〉를 촬영했던 카메라 감독이라고 했다. “20년도 더 됐어요. 얼마 전에는 임권택 감독님 회고전에 같이 앉아서 영화를 봤는데, 내가 저럴 때가 있었나 싶어요. 참 아름다운 시절이다… 그 나이 때는 어른들 속에 사느라 나이가 주는 예쁨을 몰랐는데… 그때는 감독님, 스태프, 배우들… 모두 다 잘 어울렸던 것 같아요. 영화는 나만 잘나서 되질 않으니까. 영화야말로 진짜 하모니거든요. 임 감독님과 〈달빛 길어 올리기〉로 오랜만에 작품 했는데, 그런 어울림이 있는 현장이 너무너무 소중하고 고맙고….”

    강수연은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에 출연했지만, 정작 자신이 몇 번째 영화에 출연했는지는 모른다. “네 살 때부터 너무 일찍 배우를 시작했으니까… 셀 수가 없어요.” 자신에겐 청소년기가 없었고, 그래서 오히려 지금 철없던 시절로 돌아가서 아이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그녀가 너무 일찍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조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구나. “너무 일찍이요? 아니요. 저는 시대를 잘 타고 났어요. 제가 아역 할 때는 문예 영화 시절이라 어린이를 꼭 썼어야 했어요. 방화의 쿼터를 제가 다 채웠던 것 같아요. 청소년기엔 〈고교생 일기〉 같은 청춘물을 했고, 20대와 30대는 한국의 대표 감독들과 함께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체로 시작해서 아역과 청소년, 성년과 중년기를 넘어왔잖아요. 아역에서 성인으로 넘어갈 때만 우울을 겪었어요. 어린애가 야한 거 한다고 욕을 먹었지만, 그것도 상을 받아서 잘 지나왔어요.” 임권택 감독은 인터뷰집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에서〈씨받이〉(1987)에 강수연을 캐스팅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18세 철없는 애부터 씨받이로 가서 한 1년을 그렇게 갇혀서 모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데, 그거를 거기서 1년 후든 2년 후든 나이와 관계없이 엄청난 체험의 세계를 살고 났을 때 연기가 저 앞하고 뒤가 전부 커버될 만한 충분한 기량을 가진 배우는 강수연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수연의 미모를 얘기하자면, 나는 〈아제아제바라아제〉의 삭발 컷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좌우가 완벽한 현대적 균형. 김태희나 송혜교가 삭발을 했다고 해도 그런 아우라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삭발했을 때의 기분이요? 시원하죠. 두통이 깨끗이 없어졌어요. 그러고 보면 머리 무게가 엄청난 거예요. 김지미 선생님의 〈비구니〉가 촬영중간에 엎어졌으니까, 한국 영화에서 머리를 깎은 여배우는 제가 유일무이할 거예요. 왜냐하면 영화계엔 여배우가 머리 깎으면 안 된다는 징크스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얘길 깎은 다음에 들었어. 호호호.”

    그래서일까? 혹은 모든 성장의 중심에 일이 있었기 때문에, 눈깜짝할 사이 흔한 말로 ‘혼기’가 지났다. 한국 사회는 결혼 안 한 여자라는 틀이 너무 견고하고, 그녀처럼 모든 걸 내놓는 직업을 가진 여자에게 더욱 관대하지 않다. 결혼 대신 영화라는 ‘업적’을 세우지 않았느냐고, 그대들이 면사포를 쓰고, 아이 낳아 키우며 삶의 배역을 연기하는 동안, ‘강수연적 창녀’ ‘강수연적 씨받이’ ‘강수연적 조선시대 새댁’ ‘강수연적 아낙네’ ‘강수연적 팜므파탈’을 살아내느라 바빴다고 항변하며. 영화는 그녀에게 생활보다 더 사실적인 드라마였다. “결혼하자는 남자가 없어요. 난 일부러 안 하는 게 아닌데. 편안하고 따뜻하고 자기 세계 확실한 그런 남자가 흔치 않아요. 나도 애 다섯 낳고 남편 닥달하며 살아보고 싶은데. 어느 날 그냥 나도 모르게 나이가 먹어버린 거예요.”

    워싱 처리된 레이스업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진태옥(Jintéok),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의 오가닉 소재 재킷은 데무 박춘무(Demoo Parkchoonmoo).

    그런데 어떤 남자가 감히 세상을 호령하는 ‘명성황후’를 ‘장녹수’ 를 ‘ 장희빈’을 ‘정난정’을 아내로 맞을 생각을 했을까? 그 자신의 것이라기 보다는 스크린의 통역자 같았던 삶을.

    “전 굉장히 내성적이고 유쾌하지 않은 성격을 타고났지만, 바꿔야 했어요. 현장에서 언제나 막내였으니까. AB형, 사자자리, 태양인, 백마띠, 강씨, 옹니, 곱슬 머리… 우리 엄마는 아빠더러 고집 세고 지긋지긋한 당신 만나서 결혼했는데, 그보다 더한 딸을 만났다고 그러시지만. 오히려 일에서는 타협하고 비굴해지고, 반대로 생활에서는 만날 고집 피우며 사는 거죠.” 요즘엔 집안에서 주인 행세하는 개와 고양이들이 더 여배우 같고, 시중 드는 자신은 ‘언년이’ 같다고, 배달된 김밥을 오물거리며 그녀가 웃었다.

    청춘을 반납한 삶이라는 것, 소풍도 수학 여행도 못 가본 여자 애가 남보다 먼저 성장판이 열리고 몸이 자라 ‘불가사의한 어른’으로 안내되었다가 튕겨져 나오기도 하고. 그건 자의식 이전의 경험의 세계. 스스로가 소비되는지도 생산되는지도 자각하지 못할 스피드로 시차도 주말도 없는 채로, 비현실적인 영화 세상 안에 있었지만, 놀랍게도 단 한 번의 스캔들도 없었다.

    “임권택 감독님과는 추억이 많죠. 최고의 스승이자 친구였고 아버지였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받아들여주고, 내가 고민이 있을 때는 제일 먼저 달려가서 안길 수 있는 사람. 늘 연기 못한다고 나를 꾸중하시는 끝이 없는 스승….” 이번 영화에서도 강수연은 임권택 감독에게 많이 혼났다. “너, 그거밖에 못해? 다시 해라!” 101번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40년 동안 연기해온 여배우를 나무랐다. “그런데 20번쯤 테이크가 가야, 그제서야 감독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되는 거예요. 아! 내가 그동안 멋모르고 배우 했구나.” 너무 또렷한 발음, 입술도 작고 동글동글해서 그 자신, 뭘 해도 강수연 같아서 걱정이라는. 그 더도 덜도 아닌 오롯한 느낌. 앞으로 40년은 더 연기할 생각하면, 마음이 더 조급해진다고 몸 달아 하며. 강수연은 김지미를 향해 ‘현재진행형의 영화인’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건 그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앞가르마를 탈지, 옆가르마를 탈지, 머리카락 한 올의 선이 38선경계보다 더 신중한 게 여배우다. 때로는 살이 쪄서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다고 툴툴대다가도 자신이 아방가르드한 옷을 잘 소화하고 있는지 걱정하고, 오랜만의 촬영에 조명의 광량을 신경 쓰는 강수연. 미숙과 과숙 사이에서 모던한 열정을 유지했던, 이름만으로 ‘레이블’이 되었던 우리의 월드 스타. 14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다는 부산영화제에서, 그녀가 올해도 어김없이 안성기, 박중훈과 나타났다. 덧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사진 잘나왔어요?”를 묻는데, 너무나 천진난만해 보여서, “그럼요. 죽이게 예뻐요”라고 해줬다. 실제로 사진이 잘 나왔는지 못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영화 감독이었다면 그녀의 어떤 얼굴을 잡아야 했을까? 겨울잠을 앞두고 잔뜩 독이 올라 있는 표정이었다가 눈물이 날 만큼 격정적인 환희의 표정을 교차시키며, 때로는 흩날리는 파마 머리로, 알차게 쪽진 머리로, 석탄 같은 검은 삭발로 영화 포스터를 점령해온 강수연. 사진첩이 따로 필요 없을 만큼 많은 영화를 발표하면서 늘 극찬을 받아온 그녀가 여배우의 얼굴은 흰 도화지 같아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무엇이든 흡수하는 흰 도화지, 그렇다면 여러분이 보고 있는 강수연은 지금 이대로 충분히 아름답다. 그리고 어디서든 그녀를 보게 되면 그렇게 말해 달라.

      에디터
      김지수
      스탭
      스타일리스트/최희승, 헤어/신동민, 메이크업/ 박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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