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의 여신, 김지미와 장미희

한국 영화계의 1세대 여신이었던 김지미를 위해 제15회 부산영화제는 50년 영화 인생을 정리하는 회고전을, 에르메스는 영예의 ‘Director’s Chair’를 헌정했다. 그녀의 역사적인 대관식을 위해 〈보그〉는 또 한 명의 여신이자 2세대 주역인 장미희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날의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장미희가 입은 실크 블라우스와 스티치 디테일이 들어간 베스트, 볼륨감 있는 실루엣의 니트 스커트, 모자, 헤어 장식으로 연출한 실크 스카프, 버클 디테일 앵클 부츠는 모두 에르메스(Hermès), 김지미가 입은 레더 칼라 재킷, 베이식한 화이트 셔츠, 실크 넥타이, 스트레이트 핏 팬츠, 모자, 레이스업 부티는 모두 에르메스, 리미티드 라커드 버터플라이 클립은 모두 반 클리프 아펠(Van Cleef&Arpels) 제품.

매니시한 무드의 캐시미어 재킷과 사파리 스타일 셔츠, 스트레이트 핏 팬츠, 레더 벨트, 어깨에 둘러 연출한 실크 스카프, 앵클 부츠는 모두 에르메스(Hermès), 꽃송이를 형상화한 키클라데스 네크리스는 반 클리프 아펠(Van Cleef&Arpels) 제품.

가죽 의자는 에르메스가 직접 김지미의 이름을 새겨 헌정한 디렉터스 체어.

“영화가에서 여배우 중 가장 신의와 의리와 또 동정심이 있는 여성은 단연 김지미 양. 옛날의 부군 최무룡 씨가 제작자로 또 감독으로 활약하게 된 동기도 물론 김지미의 숨은 힘 덕분임은 사실. 김지미 양은 스타들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여배우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 스태프들까지 도와준 사실이 신화처럼 퍼져 있다. 도량이 넓고 이해심이 많은 김지미 양은 외면에서 풍기는 체취와는 전혀 다른 따스한 정이 가슴 속에 담뿍 담겨 있다. 한마디로 사내다운 박력을 가진 성격이다. 이왕 도와줄 결심을 하면 끝까지 뒤를 보살펴준다…. 그녀는 1천5백여 평의 어마어마한 저택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녀의 거실에는 호피가 깔려 있고 룸마다 서양식, 한식, 홍콩식 등으로 장치해놓고 손님을 맞이할 때 그 손님의 취미에 맞는 방으로 안내한다. 하지만 김지미 양의 가족은 단출하다. 딸 밍크와 운전사와 가정부 정도…”-〈영화잡지〉 1974년 3월호.

김지미, 장미희라는 당대 영화계의 여신이자 여걸을 함께 〈보그〉에 담아보자는 기획은, 아마 당대 패션지계의 ‘데빌’인 〈보그〉 편집장이 아니라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김지미와 장미희라니! 한국 영화사의 부흥기와 전성기, 역동적인 쿼터 파동과 르네상스를 관통하며 여배우로서, 제작자로서, 영화인 협회 이사장으로서 드라마틱한 71년 인생을 살아온 김지미, 그리고 그녀의 뒤를 이어 영화계를 리드하는 정통파 여배우로서 장미희의 계보는 한국 여배우라는 강인한 로열 패밀리, 그 순수 혈통의 시작이 아닌가. 김지미는 미모와 스캔들(감독 홍성기, 배우 최무룡, 가수 나훈아, 이종기 박사와의 결혼과 이혼)이라는 양날의 칼을 쥔 파격적인 행보 속에서도 인기를 유지한 채 성좌의 자리를 지켰고, 장미희는 독신으로 철저한 자기 관리 속에서 지적인 패셔니스타로 거듭나며 지금까지 흑백 영화 시절의 아우라를 이어가고 있다. 70대인 김지미가 온몸으로 부딪혀 리얼리즘적인 삶을 살았고, 사실적인 연기에 능했다면, 50대의 장미희는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동화된 채로 이상주의적인 삶을 살았고, 학구적이고 예술적인 애티튜드로 연기했다.

이를테면 김지미가 광물성의 저음으로 잡초처럼 세상을 떠도는〈명자, 아끼꼬, 쏘냐〉에 출연할 때, 장미희는 식물성의 고음으로 허무 적 찬가를 부르는 〈사의 찬미〉에 출연했다. 그리고 어느 날, 단 한 번도 같은 영화에 출연해본 적 없는, 70대와 50대의 두 여배우가 〈보그〉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장미희는 장안에서 가장 잘나가는 헤어,메이크업,스타일링 스태프와 함께, 김지미는 평생을 함께해온 에스모드 패밀리와 함께. 두 사람 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했고, 굽 낮은 단화에 수수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이제까지 장미희를 촬영할 때마다, 그녀의 사랑스러움보다 카리스마에 지레 긴장이 되곤 했었는데, 김지미와 함께 있는 지금은 그 고양이처럼 말랑말랑한 애교에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사장님’과 ‘장 교수’로 불렀지만, 그 호칭의 예우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애정을 감출 수 없었다. 사자와 호랑이의 만남을 예상했었지만, 모성애가 강한 개와 살가운 고양이의만남 같았다고 할까. 김지미는 예상과는 달리 조금도 권위적이지 않았다. 담배 한 대 피울 때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했고, 첫 패션 촬영인데도 스태프들에게 모든 걸 맡기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한국 영화에 대해 회고할 때는 단호하고도 자신감이 넘쳤다.


크로커다일 레더가 덧대진 저지 소재 롱 드레스와 롱 글러브는 모두 에르메스(Hermès), 전설 속의 극락조를 생동감 있게 표현해 화려한 역동성이 돋보이는 오와조 드 파라디 링은 반 클리프 아펠(Van Cleef&Arpels) 제품.

터틀넥 니트 톱, 레오파드 패턴 풀스커트는 모두 에르메스(Hermès), 다이아몬드와 옐로 다이아몬드가 그러데이션 세팅된 체리 블라섬 클립과 구겨진 듯한 질감이 돋보이는 뻬를리 커프는 모두 반 클리프 아펠(Van Cleef&Arpels) 제품.

지미 어젯밤에 긴장해서 장미희한테 전화를 해서, 난 아무것도 못하니까 선수인 네가 좀 끌어가 달라 그랬지. 나이 칠십하나 먹은 모델 봤어요? 2007년도에 에스모드에서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 사업회에서 박윤정 이사장님이 부탁해서 모델 한 것 빼고는 처음이라구.

미희 우리 선생님 너무 예쁘셔요. 그렇게 머리 하니까 꼭 프랑스 여자같애. 열여덟 살 때 찍은 흑백 사진은 정말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으셔요.

지미 장 교수, 그만해. 남들이 늙은이가 미쳤다고 그런다고. 배우니까 눈 딱 감고 변신하는 거지. 나는 나대로 명자라는 원래 모습이 있지만, 또 필요에 의해 변신을 하는 거니까 모든 걸 수용하는 거예요. 배우는 뭐든지 해야 하니까. 빨리 명예의 전당도 회고전도 마무리 짓고, 나는 사랑하는 자식 손자 있는 곳에서 이젠 쉬어야지.

낮게 긁히는 듯한 특유의 광물성 음색의 김지미와 구관조의 노래같은 장미희의 소프라노 톤 억양이 사랑스러운 멜로디로 연주됐다.

지미 여배우로 산다는 거, 그게 나뿐만 아니라 장미희도 힘들 거야. 대중들이 자꾸 관심 가지는 게. 식당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시선이 오면 뒤에서 쳐다봐도 알 거든요. 근데 알아보지 못하는 세계도 있으니까, 그 안 알아주는 행복감을 엔조이 하는 거야. LA에서는 집에서 추리닝입고 있다가, 마켓 가자, 그러면 애들이랑 손 붙잡고 그냥 가는 거야. 그런 행복이 있어요.

미희 전 요즘 〈인생은 아름다워〉 때문에 2주에 한 번씩 트렁크 2개 가득 옷이며 가방이며 짐을 싸서 제주도엘 가요. 한 신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많이 필요해요. 근데 제가 배를 못 타는데 통통배 타고 들어가야 돼서 위가 예민해졌어요. 오늘도 링거 맞고…, 아! 그래도 힘내서 선생님이랑 사진 찍어야지. 얼마나 기념비적인 사진인데.

지미 내 목소리가 걸걸한 걸로 유명하잖아. 장미희랑은 완전히 반대지. 그래도 꾀꼬리 같진 않아도 참 ‘섹시 보이스’다 그랬다구. 가만 우리가 같이한 작품이 있었던가?

미희 저랑 같이 찍으신 작품은 없어요. 저희 어머니가 절 임신하셨을때 〈황혼열차〉를 보러 갔었죠.

지미 지금 배우들이야 1년에 몇 개도 못하지만, 나는 1년에 수십 편씩 했어, 7백 편이 넘지. 그때 열 일곱에 김기영 감독이 명동 다방에서 “학생! 영화 한번 해볼 테야?” 사춘기 때니까 호기심에 한번 해볼까, 그래서 〈황혼열차〉를 했는데, 그게 50년이 된 거야.

미희 따져보면 선생님이 〈성춘향전〉으로 2대 춘향이셨고, 제가 6대 춘향이었어요. 여배우들이 거쳐가는 작품들…, 〈황진이〉도 상황이 비슷했죠.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작, 기획, 여주인공을 하셨던 게 〈명자, 아끼꼬, 쏘냐〉였는데, 그때 저는 〈사의 찬미〉를 했어요. 제가 선생님 영화 〈을화〉를 좋아했는데, 저는 TV에서 〈을화〉를 했죠. 전 선생님 작품 중 〈토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지미 나는 다작했지만, 미희는 저 출연할 것만 골라서 딱딱 했거든. 나는 〈티켓〉하고 〈길소뜸〉이 참 좋은 영화였던 거 같애. 옛날에는 영화인들이 기능공이나 다름 없었어요. 배우는 이거 때우고 저리 가서 또 맞춰주고 그랬는데, 그 영화가 감독의 능력과 배우의 연기력이 딱 맞아떨어진 거야. 〈장희빈〉을 여럿이 했지만, 그래도 평론가들이 평론할 때 김지미의 장희빈이 최고다 그럴 때 기뻐요. 팜므 파탈 하면 김지미를 꼽았다더구만.

미희 선생님은 남성, 여성 다 떠나서 한 인간으로 그릇이 크고 배포가 크셔요. 이루려고 하는 목표 지점이 크고 원대하신 거죠. 여배우로서 남성 영화인들을 압도한 대표적인 배우세요. 그렇게 존재감이 큰데도 이면은 아주 소탈하시죠.




지미 나는 자연인 김명자와 배우 김지미를 다르게 살았어요. 내가 촬영하던 때의 사진이나 트로피가 하나도 없어, 집에는. 창고에 있지. 그게 다 가족들에게 위화감이거든. 엄마의 사회적 위치를 과시할 것도 없지. 일 끝나고 들어가면 엄마고 언니인 거지.

미희 그런데 이분이 얼마나 다감하시냐면, 겨울에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무슨 농축액 병을 꺼내시더니 그걸 손으로 한참을 비벼서 따뜻하게 덥히시는 거야. 그러고는 어서 마시라고. 너무 다정다감하신 게 밥먹을 때도 숟가락 위에 반찬 올려주시잖아요. 어디 해외 촬영이라도 가면 인솔자는 당연히 선생님이셔요. 당신이 나서서 여권 챙기시고, 데스크에 가서 발권도 한꺼번에 하고 먹을 것도 다 챙겨오셔요. 뭐든 누구 시켜서 하시는 법 없이 당신이 직접. 한번은 같이 일하다가 시간이 2시간 비니까, 그 사이 집에 가서 장을 담그셔요. 음식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게 잘 하시는지. 선생님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해야 될 책임은 꼭 다 하는, 누가 뭐래도 떳떳하신 분이세요.

지미 미희는 정말 노력하는 배우야. 정열적이기도 하고. 배우의 자존심과 긍지를 갖고 연기하니 내가 제일로 좋아해. 섣불리 아무 데나 나다니고 그러질 않는다고. 자기 포지션이 어딘 줄 알아서 아주 천재적으로 잘 해요. 배우로서 갖출 걸 다 가졌어. 성품, 미모, 학식… 나는 안 가졌던 부분을 미희는 다 가졌어. 자기 상품을 자기가 잘 관리하는 거야. 그게 중요하지. 쇼윈도 안에서 조명 받고 멋지게 있는 게 배우인데, 그 가치를 안다고.

두 사람의 이야기엔 극명한 대조가 있다. 장미희가 누군가 그 이야기를 꼭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조근조근 설명한다면, 김지미는 통제되지 않는 증기 기관차처럼 멈출 줄 모르고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약간 쉰 듯한 메마른 듯한 목소리가 전해주는 현실성, 그 감정은 듣는 이의 심연에 호소력 있게 와 닿았다.

지미 한국 영화사가 100년 못 되는데 내가 50년 이상 영화를 했어. TV에 나와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관객이 극장에 날 보러 오도록 해야지. 한국 영화계가 갑자기 생긴 게 아니고, 과거가 있고 선배가 있다는 거 그게 중요해요. 나운규 선생이 〈아리랑〉 만들면서 한국 영화가 시작됐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거잖아. 요즘은 참 화려하고 풍부하고 여유롭지만 60,70,80년대는 전쟁을 겪고 난 후 황폐해졌을 때 영화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구. 그런 과정을 지켜보다, 다 털고 떠났는데 부산영화제 김동호 위원장이 미국에 와서 그러시더라구. 한국 영화 지켜줬으니, 당신이 떠나실 때 회고전 꼭 한번 해야겠다고. 그래서 왔더니, 할 일이 많아요. 영화인 복지재단에서는 양수리 종합 촬영소 명예의 전당에 내 흉상을 만들어서 전시하겠대. 그래서 또 그걸 하느라 힘들었어요. 〈보그〉까지 찍느라고 신경이 바짝바짝 타네.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니까 연연하지 않아요. 나는 평생 배우로 살아왔고, 근자에는 활동 안 하고 7~8년 공백기를 가졌잖아. 그런데 눈에 안 띄면 또 쓰잘데기 없는 루머가 생기고 억측과 소리들이 나오는 거지. 미국에서의 생활은 너무 좋아. 가족들하고 미국에서 사는 건 생활, 여기서는 생존. 지금은 여기에도 참여할 일이 없으니까. 영화인협회, 진흥위원회, 복지재단 활동하던 거 다 정리하고, 지금은 신경 안 쓰고 나대로의 삶을 즐긴다고. 그동안 가족이라는 개념도 없이 50년간 생활했으니까. 내가 한국에서 생활할 때는 딸들을 한 평생 무릎에 앉혀본 적이 없어. 옛날에 집에 가면 꼭 하숙생 같았다구. 뽀뽀해주고 엉덩이 한 번 두드려 주고 나왔는데, 딸들이 서운해도 불평 한마디 없었어요. 그렇게 살아준 가족이 고마웠어요.


제 15회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많은 프레스들이 몰렸던 ‘김지미 회고전’. 에르메스에서 영예로운 디렉터스 체어를 헌정했다. 제주도 드라마 촬영장에서 달려와 품에 안긴 장미희, 예지원과 강수연.

김지미와 장미희는 성격이 대조적인 부부 같기도 하지만, 만약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면 어울리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김지미는 하이힐을 신을 때마다 부축을 받아야 했지만, 반 클리프 아펠의 철창 같은 목걸이와 브로치를 어떻게 매치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장미희는 헤어&메이크업을 몇 번씩 바꾸느라 지쳐 있었지만, 카메라 앞에만 서면 마임을 하는 무용수 같은 그림을 그려내곤 했다.

지미 내가 57년에 배우 됐는데, 나는 17세부터 에스모드 박윤정, 미스박 테일러 것만 입었어요. 나는 평생 한 디자이너 옷만 입었다니까. 지금 입은 것도, 영화제 행사가 있을 때도, 다 그분이 해주셨어.

미희 전 작품할 때 옷을 많이 사는 편이에요. 캐릭터에 맞는 옷이나 소품을 예측해서 작업 재료로 사는 거예요. 그래야 무장한 군인이 되고 디테일을 소화할 준비가 되는 거죠. 대본 읽다가도 소품 구하러 나갔다 오게 돼요. 이럴 땐 보테가 베네타 부채랑 내가 프랑스에서 사온 레이스 부채를 섞어야지, 카드 꺼내는 지갑, 사인하는 펜 하나도 다 준비해요. 데이 베드 캐시미어, 실크 가운, 와인이랑 글라스까지 다 챙겨요. 에르메스 백도 몇 개나 샀고.

지미 에르메스는 내가 대한민국에서 처음 접했을 거야. 60년에 파리에서 촬영할 때 제일 처음 입었으니까. 부산영화제에서 특별히 회고전을 해준다니까, 에르메스에서 의자도 만들어주고…, 고맙지.

미희 그런데 이번에 선생님께서 강의 다닐 때 들라고 쓰시던 요만한 에르메스 악어백을 또 물려주셨죠. 호호. 저한테 집도 물려주시고(10년 전 김지미의 집을 장미희가 구입했다).

지미 물려줬다는 건 우스운 거고, 내가 정들었던 집에서 장 교수가 살아주면 고맙지. 내가 몸을 묻고 살았던 집인데, 나는 거기서 시작해서 깨졌지만, 미희는 시집갈 줄 알았어. 그런데 첫날 옷걸이에 달랑 옷 두벌만 들고 오는 걸 보고, 내가 짐작은 했어.

미희 호호. 선생님께서 이 집이 복을 주는 집이다, 그러셨는데 정말 그랬어요. 선생님은 사랑을 해야 연기가 잘 된다, 그러시지만, 저도 그건 알지만… 난 남자가 있어도 만약에 결혼해도 그냥 이웃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독립된 곳에 있으면서 뭉쳤다 헤어졌다 하면서. 난 이상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요. 그래서 결혼이라기 보다 데이트를 한다 그러면 가능하죠.

지미 인생이 뭐가 정답이라고 얘기할 수 있나?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거지.

미희 사랑과 연애는 잘 모르겠어요. 전 사랑에 모든 걸 쏟아 붓는 타입이 아니에요. 그렇게 되는 걸 오히려 절제해왔고, 그 사랑을 영화 예술에 쏟아 부었어요. 단 한 사람을 사랑하는 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그게 저한테는 안 중요했어요. 드라마에서도 저는 엮이는 게 없으니까 되게 편해요. 아빠는 제주도 사람, 엄마는 일본인, 이혼녀에 성격도 밝고 자유롭고…, 제 드라마 첫 대사가 “전 아무것도 안 해요”였어요. 아! 이건 천재적인 인물 설정이잖아, 그랬어요. 저는 대중들이 웃고 즐거워하는 장미희라는 캐릭터의 뉘앙스를 알아요. 귀여움, 오버 액션, 천진함, 관능, 발레 배울 때 평균대 다루듯이 그렇게 균형을 맞추면서 감칠맛 주는 게 좋아. 난 작가 선생님한테 나 자신을 상상력의 재료로 던져주는 게 좋아요. 드라마에서 평생 떨 애교를 다 떨었어요. 저도 평생 멜로만 해왔으니까, 다시 주특기가 발휘되는 거죠. 나는 이 여자를 새라고 생각해요. 관능적일 때는 꼬리가 긴 새였다가, 귀여울 때는 폴짝폴짝 뛰는 새…. 나랑 비슷해서 내가 너무 노력을 안 하는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선생님은 실제 사랑에 있어서도 정말….

지미 사랑이란 뭐냐? 흰 종이야. 거기다 그림을 그리는 것 뿐이라구. 장미꽃을 그렸다가 시들면 없어지고, 다시 들꽃을 그리는 거지. 나는 특이한 성격이에요. 나는 끝까지 가버린다구. 어떻게든 그 사랑을 완성해야 하니까. 거기에 대단한 노력을 남들 몇 배씩 쏟아버리니까 그게 대담한 스캔들이 되는 거지. 나는 내 사랑에 자신만만했어.

미희 그 부지런함은 제가 못 따라가요. 사랑하니까 사랑해서 책임지고, 부인으로서 역할을 다 하고. 여배우인데도 제작자로 나서서 영화계 살림을 다 하셨어요. 저랑은 다르셔요.

지미 나는 숨기질 못하고 살았어. 유리집에서 사는 거랑 같았어요. 시집 몇 번 갔다고 난리들인데, 나는 숫자 개념이 없어서 몰라. 남들은 열심히 따지고 계산하더라만. 나는 내가 살아온 사실이 그랬고, 사람들은 어떤 면에선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는가 봐요. 한국 영화 100년이면 내가 50년을 버텼어요. 언제나 대중들 곁에 있었다구.


레오파드 패턴 실크 드레스와 스터드 디테일 레더 벨트, 레더 블루종, 슬림 핏 팬츠, 레더 브레이슬릿, 모자, 앵클 부츠는 모두 에르메스(Hermès), 네 잎 모티브로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뻬를리 브레이슬릿, 화이트 골드 뻬를리 브레이슬릿은 모두 반 클리프 아펠(Van Cleef&Arpels) 제품.

미희 저는 온전히 개인으로 내 시간 가지고 지내는 걸 좋아하고, 꼭 해야 될 부분만 나서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안 그러셔요. 한번은 영화계 일 때문에 갑자기 높으신 분, 영부인을 만나러 가게 됐어요. 그때 너무 당당하게 우리를 이끌고 할 말을 다하시는 거예요. 나와서 선생님은 어려운 분이 누가 있어요? 그랬더니, 대뜸 아무도 없어.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걸 성취했기 때문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들 눈치 볼 게 없는 거죠.

지미 나는 이 세상에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어요. 충만하게 현재까지 살아낸 거, 그걸로 잘살았구나, 생각해요.

미희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게 제일 아름다운 거 같아요. 어제보다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거, 겸허해지는 거, 아름다움, 추함, 거침과 연약함이 다 섞여 있는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거, 내가 얼굴 붉어질 일 하지 않으면서. 선생님처럼요.

지미 사실 여배우끼리도 만나서 시간 보내기 어려워요. 그래도 항상 제일 많이 봐야 해, 우리는.

미희 그런데 기억나세요? 선생님이 제작한 영화 중 〈불의 나라〉에 제가 출연을 했어요. 그때도 액세서리나 소품 같은 걸 다 가져와서 보여주셨죠. 촬영장에서 제가 목욕을 하는 신인데, 물통에 직접 물을 받아서는 물 온도를 재시고, 이제 딱 맞으니 들어가라, 그러곤 조용히 가시는 거예요. 그런 세밀한 정이 무수히 점들처럼 모여 김지미를 받치는 힘이 되는 거예요.

지미 사람을 알려면 시간을 오래 가져봐야 해요. 장 교수도 그렇고 강수연도 그렇고 영화계를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 돼요. 여배우가 살아나가고 버티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거, 그거 참 장해요. 중년 여배우들이 무너지면 안 돼. 저 무르익은 연기를 못 쓰면 영화계에 엄청 손해야. 버텨라! 견뎌라! 그러면 너의 소중함, 귀함을 한국 영화계가 알아줄 거다. 익지 않은 과일과 곡식은 맛이 없어. 좋은 연기하고, 당당하게 자존심은 있는 대로 부려라, 그래요.

미희 선생님이 영화를 한 편이라도 더 하신다면 저는 어떤 역할이든 할 수 있어요. 뭘 하든 그건 대한민국 영화사에 남을 기념작일 거예요.

지미 나는 언제나 내가 제일이다, 하는 생각이 있었어. 배우는 인기 떨어지면 끝인 줄 알지만, 한 작품 잘 하면 또 일어서는 거야. 모두들 시간을 이기는 힘찬 배우가 되라구. 항상 자기 시간을 갖고 충분히 잘 충전을 해서 일 있을 때 멋지게 터뜨리는 거야. 그런데 난 이렇게 사진 찍는 거 죽을 때까지 다시는 못해. 네버. 절대 네버.

미희 선생님 다시 찍으실 일 없을 거예요. 그리고 우린 이렇게 완벽한 미인은 다시 못 볼 거예요. 당시에 촬영 감독들이 다 감탄했대요.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그림이 된다고.

김지미와 장미희는 며칠 후 부산영화제 김지미 회고전에서 다시 상봉했다. 김지미는 에스모드 박윤정 이사장이 칠순 때 미국으로 보내준 하늘색 가운 드레스를 입고 천상의 여신처럼 등장했고, 장미희는 며칠 전 〈보그〉 촬영 때 입었던 에르메스의 가죽 베스트와 모피 달린 스커트를 입고 발랄하게 나타났다. “이 옷이 맘에 들어 〈인생은 아름다워〉 촬영 때 입었다가, 옷도 못 갈아입고 제주도에서 여기로 왔잖아요.못 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공항에서 갓길로 질주해서 왔어요.”

김지미 회고전은 한국 영화사의 원로들이 모두 참석한 감동적인 ‘리스펙트’ 의 자리였다. 김동호 위원장과 이용관 공동 위원장이 그녀를 에스코트하자 김수용 감독, 임권택 감독, 정지영 감독을 비롯해 한국 영화사를 이끌어 온 수백 명의 영화인들이 그녀를 뒤따르고 에워쌌다. 여왕의 대관식이 이처럼 영예롭고 찬란할까 싶었다. 원로 영화 평론가 김종원의 설명으로 김지미의 필름 몽타주가 상영되고, 눈부신 다큐멘터리 코멘터리가 이어졌다. 남자들을 욕망의 포로로 만드는 치명적인 매혹, 영혼이 맑고 감성이 솔직하고 인간애와 자존심이 강했던 여배우, 30년 전부터 동남아시아에 한류를 전파했고, 스태프들과 가장 친했던 여배우, 그렇게 김지미야말로 사회에서 배우를 광대시하던 시절부터 스타를 인식시킨 최초의 여배우였다는 헌사가 이어졌다. 에르메스 코리아 전형선 사장이 김지미의 이름이 새겨진 디렉터스 체어를 헌정했다. 김지미는 여왕처럼 의자에 앉아 이제껏 그녀와 함께했던 감독, 배우, 시나리오 작가, 조명 기사까지 모두 무대에 세워 감사를 표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분들은 저를 위해 희생해주신 분들입니다. 나를 아름답게 가꿔주신 촬영 감독들입니다. 기다려준 나의 동료들입니다… 내가 겹치기 출연할 때 함께 싸우던 분들입니다… 여러분, 이분들을 위해 박수를 부탁 드립니다.” 김지미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지금은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나는 장미희에게 샴페인 잔을 건네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밤이네요!” 모두가 감격에 겨워 흥분된 채 밤이 깊어갔다. 문소리와 예지원, 강수연이 함께했고, 윤여정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다 돌아갔다. 김지미는 수많은 인파를 뿌리치고 장미희의 손을 붙잡고, 아래층 카페테리아로 내려갔다. “우리 미희 밥 먹여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영화제에서 그랑프리 수상한 것 같은 기분이라던 우리 김지미 여사는, 마지막에 그 걸걸한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바보 같은 놈들이, 내 뺨에 뽀뽀하는 사내가 하나도 없어.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