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시대

어느 날 갑자기 야구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인생을 관전할 수 있을까? 2010년 역대 최대 관객수를 기록한 프로야구는 국내 프로 스포츠사상 최초로 1억 번째 관객을 맞았다. 바야흐로 야구의 시대다. 화이트 그라운드에 선 ‘야인’들에게 〈보그〉가 공을 던졌다. 첫 타석은 클리블랜드의 영웅, 추신수다.

젠틀한 네이비 컬러의 핀스트라이프 수트는 랄프 로렌 퍼플 라벨(Ralph Lauren Purple Label), 라이트 블루 셔츠와 베스트는 카루소 장광효(Caruso Chang Kwang Hyo). 송아지 가죽 슈즈는 발리(Bally), 보타이는 란스미어(Lansmere), 하트 프린트 행커치프는 리차드 제임스(Richard James by G.Street 494 Homme), 시계는 그랜드 까레라 워치 태그호이어(Tagheuer), 우산은 루이 비통(Louis Vuitton).

체크무늬 롱 코트는 벨 앤 누보(Bell&Nouveau), 캐시미어 니트 스웨터는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 시계는 그랜드 까레라 워치 태그호이어(Tagheuer).

깔끔한 라인의 네이비 울 재킷과 팬츠는 휴고 보스(Hugo Boss), 셔츠는 제이미 앤 벨(Jamie&Bell), 보타이는 란스미어(Lansmere), 행커치프는 리차드 제임스(Richard James by G.Street 494 Homme), 시계는 그랜드 까레라 워치 태그호이어(Tagheuer), 브렛(Brett)의 오렌지 컬러 배트와 암가드는 모두 야용사.


Shin-Soo is the Man!



하얀 구장에 추신수가 들어섰다. 유니폼 대신 멋진 블랙 수트를 입고 스튜디오를 찾은 그는 생각보다 훨씬 탄탄해 보였고, 인물은 더 훤했다. 아시안 게임이 끝난 후 친한형이 선물해줘 잘 때도 걸고 잔다는 불가리 목걸이, 이니셜이 새겨진 셔츠, 손목엔 고급 시계를 착용한 그라운드 밖의 추신수는 폭주 기관차가 아니라 호화 열차에 가까웠다. “옛날에는 옷도 까만색, 하얀색, 빨간색, 남색, 그 정도 색깔만 입었는데, 이제는 분홍색도 입고 초록색도 입습니다. 와이프가 코디를 해주거든요. 처음엔 ‘이거 아인데~’ 해도 자기가 사온 거니까 입어보라 해요. 막상 입어보면 제가 봐도 괜찮은 거 같아요. 흐흐. 그러면서 변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부산싸나이’가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메이크업 부스에 앉자 한숨 섞인 부산 사투리가 곧바로 흘러나왔다. “쑥스럽다고 해야 할까? 전 정말 운동할 땐 머리도 안 감고 세수만 하고 나와요. 원정 시합 떠날 때나 정장 입고 머리도 만지지… 남자가 무슨 화장입니까.” 그러고는 카메라 앞에 서서 야구보다 어렵다는 열연을 펼친다. 밖은 싸락 눈이 날리는 추운 날씨인데 굵은 땀방울까지 뚝뚝 흘려가면서.

1982년 프로야구 원년의 해에 태어난 추신수에게 야구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육상 선수 출신의 아버지와 얽힌 특훈 훈련들. 예를 들면 태어난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아 옷걸이와 철봉 매달리기로 손목 힘을 길렀고, 초등학교 때부터 담력을 기르기 위해 병원과 공동묘지에서 밤을 지새며 발에는 납덩이를 달고 다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은 ‘알대신 야구공에서 태어났다’는 정도의 허풍만 섞으면 신화 탄생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아직도 처음 야구공을 손에 쥐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일곱 살이었을걸요. 유치원 다닐 때. 외삼촌 보고 동네 야구부터 시작했죠. 야구를 내 직업으로 삼으리라곤 상상 못했습니다. 그땐 그냥 좋아서. 하다 보니 ‘이게 나한테 맞구나’ ‘이 길로 가야겠구나’ 생각하게됐죠.” 롯데의 ‘작은 탱크’ ‘악바리’ 박정태(現 롯데 자이언츠 2군 코치)가 그의 외삼촌이라는 건 이미 다 알려진 사실. “야구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워낙 어릴 때부터 해온 거고, 또 성격상 뭐든 한번 하면 잘해야 직성이 풀려서 지금까지 그저 매순간을 그렇게 계속해왔을 뿐입니다.” 커피잔을 드는 그의 두툼한 손은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 엄지 손톱 하나는 뭉그러졌고, 왼손 중지는 부러져 기형적으로 뒤틀렸다. 팔꿈치 주변에는 여전히 인대 수술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놀라서 묻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가 말했다. “흔한일이죠. 괜찮습니다. 이런 거는.”

2년 연속 3할 타율의 20-20클럽에 가입한 최초의 동양인, 미국야구기자협회(BBWAA) 클리블랜드 지회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선수, 천하장사 강호동도 들어 올리지 못한 100kg의 거구, 금메달로 병역 문제까지 완전히 해결된 그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을까? “귀신은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공동묘지에서도 못 봤습니다. 기다리는데도 안 오더라고요.” 그가 두려워하는 건 살아 있는 자기 자신과의 타협이다. 그는 스스로 뛰어난 재능을 갖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흔한 말이지만 1%의 노력과 99%의 노력입니다. 하지만 ‘나 열심히 했어’ ‘노력했어’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저는 자기가 자신을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3자가 판단을 하는 거고, 다만 저는 하루하루 후회 없이 야구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사람이라는 게 욕심이 끝이 없어서 아무리 좋은 성적을 거두고 야구를 그만둔다 하더라도 후회가 생길 거거든요. 그래도 음… 뭐든지 그렇게 생각하고 한다면 10 정도의 후회를 7이나 6 정도로 줄일 수는 있겠죠.” 야구 인생 최대의 승부수는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부산고등학교 최고의 좌완투수에서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 선수로 입단하면서 그는 포지션은 물론 타격 폼까지 바꿨다. “한국은 다리를 들고 치는 선수가 많잖아요. 그러면 파워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메이저리그의 공은 스피드가 빠르고 변화가 많다 보니까 다리를 들었을 땐 타이밍을 잡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한국 스타일로는 칠 수가 없거든요.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바꾸는 과정은 힘들었죠.” 그렇다고 지금 완벽한 타격 폼이 완성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완성은 없습니다. 완벽해지기 위해서, 더 완벽해지기 위해서, 완벽에 가서도 그 완벽을 넘어서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스스로 만족을 하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발전이 없어요. 끝이에요.”

처음 미국에 건너가 마이너리그로 지낸 3~4년 동안 자신의 말을 들어줄 친구가 없어 가장 외롭고 힘들었다는 추신수는 반대로 지금은 모두가 그의 말을 듣고자 해 고달프다. 더 이상은 비밀도 없다. “죽겠습니다. 뭐 다 물어보더라고요. 어린 시절부터 결혼, 살아온 이야기 전부. 물어보니까 다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가하게 음주 예찬론이나 펼쳤다. 그는 알아주는 술고래다. 한국에만 오면 무조건 폭탄주다. 그렇다고 지금껏 흐트러지는 법은 없었다. 소품으로 준비한 커다란 황금색 트로피를 보더니 심지어 술잔으로 하루만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과 부산에 있는 아내를 대신해 촬영장에 동행한 동생 추민기와 오늘도 술을 한잔 걸칠 모양이다. 뮤지컬을 전공한 그의 동생은 신인 배우로 활동 중이다. 추신수도 노래는 좀 한다. 이승철이 노래방 18번이고, 최재윤, 김범수가 그의 뮤직 넘버원이다. 경기 중 선수등장 시에 나오는 추신수의 테마송은 미국 가수의 노래다. 그는 제목을 기억 못했다. “3년 정도 틀었는데, 어떤 선수가 추천해준 거거든요. 화장실에 있다가도 그 노래를 들으면 ‘어, 추 나왔다!’ 이렇게 저를 떠올려야 하는데, 한국 노래를 하고 싶어도 그쪽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등장 음악으로는 힘든 부분이 있죠.” 대신 시합 전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질 때면 그는 마음속으로 혼자 애국가를 부른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말한다. ‘내가 최고다. 할 수 있다.’ 추신수의 주문이다.

메이저리그 홈페이지는 추신수의 내년 시즌 연봉을 올해보다 10배 가까이 오른 4백만 달러(45억5천만원) 이상으로 예상했다. 동료들은 그를 ‘6툴 플레이어(tool player)’라고 부른다. 강한 어깨와 스피드, 수비력, 파워, 타격 센스에 더해 인간성까지 갖췄다는 뜻이다. 서른 살에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것 같은 이 남자에게 본인 인생의 타율을 물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한 다음 결국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제 시작이라고 봐야 되나? 어릴 때 꿈꾸던 제 모습이 이제야 조금씩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마이 멀었지. 최고의 성적을 올려도 그 다음에는 그걸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40홈런을 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 추추트레인’은 멈추지 않는다.


블랙 캐시미어 롱 코트는 휴고 보스(Hugo Boss), 수트와 베스트는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 셔츠는 막스 앤 스펜서 (Marks&Spencer), 보타이는 란스미어(Lansmere), 에나멜 소재의 블랙&화이트 오페라 슈즈는 카루소 장광효(Caruso Chang Kwang Hyo), 시계는 포티스(Fortis).

브라운톤의 고풍스러운 글렌 체크 재킷, 실루엣이 돋보이는 댄디한 팬츠 모두 카루소 장광효(Caruso Chang Kwang Hyo), 블랙 셔츠는 막스 앤 스펜서(Marks&Spencer), 보타이는 란스미어(Lansmere), 행커치프는 제이미 앤 벨(Jamie&Bell), 레드 컬러의 옥스퍼드 슈즈는 발리(Bally), 시계는 볼(Ball).


홍성흔의 명랑 야구



그는 초록 구장의 ‘연예인’이다. 야구와 노래, 코미디까지 다 해준다. 그 유명한 노래가사처럼 개인기와 신기한 이벤트로 항상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야구팬들의 영원한 연예인. 긴 금발머리 가발을 쓰고 그라운드를 누비는가 하면, 수염을 단 채 등번호 대신 ‘최다득표감사’가 적힌 유니폼을 입고 나와 홈런포를 쏟아낸 적도 있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다. 2010 골든 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3년 연속 수상에 이어 최다 득표의 영광까지 누렸다. 타격과 최다 안타, 타점에서 모두 이대호에 이어 2위에 올랐지만, 시즌 막판 손등골절 부상만 아니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윤석민 선수가 미안해 하는데, 부상도 실력이거든요. 제가 욕심이 과했던 것 같아요. 아쉽지만 내년엔 또 다른 목표가 생겼기 때문에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겸손함까지 갖춘 365일 미스터 올스타. 요즘 매일 TV에서 만나는 그는 ‘머리 숱 자신감’까지 생겼다.

촬영장에서 그는 거울 앞에서 타격 폼 대신 포즈를 연습하는 모델처럼 변화무쌍한 표정과 카메라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보여줬다. 우스꽝스러운 연기도 서슴지 않는다. “스태프들이 많으니까 빨리 끝내려면 제가 잘 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이것도 가만 보니 컨셉에 따라 요구하는 표정과 포즈가 있더라고요. 야구처럼 사진가가 뭘 던질지를 예상하고 쳐버리는 거죠.” 끼 많은 홍성흔이 한때 백댄서를 꿈꿨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야구를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했는데, 사춘기 때 방황하면서 잠시 춤에 빠졌어요. 박남정, 듀스, MC해머를 좋아해서 뮤직비디오 보면서 따라 하기도 하고. 지금은 실력이 많이 떨어졌지요.” 2009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는 3XL 사이즈의 근육질 몸으로 완벽한 ‘레이니즘’ 무대를 선보였다. 독창적인 배트 안무까지 섞어서 말이다. 춤 솜씨는 여전했다. 실제로 그는 비와 친하기도 하다. 지난 준플레이오프 경기 때 관중석에서 그의 아내와 비가 나란히 앉아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롯데팬이 된 여성도 꽤 있다. “월드 스타라 그런지 제가 형인데도 참 보고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예요. 나도 저런 욕심과 꿈과 야망이 있었다면 1위를 했을 텐데 싶죠. 저 때문에 야구에 관심을 갖게 된 거라 아직 야구를 잘 알지는 못해요.”

최근 홍성흔은 롯데의 새로운 주장이 되었다. 감독도 바뀌었다. “어깨가 많이 무겁죠.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어요. 최악의 경우에 4위라 생각하고 시즌에 임할 겁니다.” 두산 시절에도 그는 주장을 맡은 경험이 있다. 포수로 활동할 때였다. 진갑용, 박경완과 더불어 공격형 포수로 이름을 날리던 국가대표 포수에서 부상 후, 지명타자로 변신했지만 지금도 팬들에겐 어쩔 수 없는 ‘홍포’다. 그리고 FA이적 두 해 만에 단타자에서 홈런을 치는 거포로 다시 한번 변신에 성공했다. “감독님과 타격 코치, 그리고 제 아내 빼고는 전부 다 반대를 했어요. 3할 7푼도 엄청나다. 무모한 짓 하지 마라. 그런데 저는 너무 허전했어요. 타격 2위에 팀 출루율은 좋아도 저는 그냥 별볼일 없는 선수인 거예요. 길게 보기로 했죠. 올 초 시범 경기까지는 완전 슬럼프였지만, 꿋꿋이 하다 보니 순간 팡 터지는 게 있더군요. 성취감이라는 야구의 참 맛을 또하나 알았어요. 내년엔 외야수도 도전을 해봐야죠. 홍성흔이 언제든지 외야 나가도 밥값은 해준다는 인정만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야구요? 아직 모르겠어요. 야구는 어려워요.”

그리고 야구는 즐겁다. 적어도 ‘오버맨’ 홍성흔에게는 그렇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정말 명랑하고 바르고 최선을 다했던 선수로 남는 게 제 꿈입니다. 팬이 없는 야구는 노동이죠. 저희는 어떻게 보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직원이거든요. 많은 분들이 표를 사서 들어와 선수들에게 감정을 이입해 경기를 지켜보며 희로애락을 느끼고, 또 스트레스를 풀잖아요. 팬들의 아바타라고 할까? 물론 타이틀도 중요하고, 야구도 어느 정도 잘 해야 가능한 거지만, ‘이 선수를 보면 정말 즐거웠다’고 기억되고 싶어요.” 홍성흔에겐 타석이 무대다. 저 멀리 관중석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오면 지금도 온몸이 짜릿해진다. 뭔가 한 방을 기대하는 설렘과 박수 소리. 그는 그 기대감에 보답하기 위해 치고 달린다. 2011년, 또 한 번의 ‘홍성흔 쇼’를 기대하라.


체크무늬 재킷과 셔츠, 팬츠는 모두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보타이는 랄프 로렌(Ralph Lauren), 행커치프는 갈리에니(Gallieni at LaFigura), 스웨이드 슈즈는 토즈(Tod’s).

스트라이프 셔츠와 도톰한 니트 카디건, 치노 팬츠는 모두 랄프 로렌(Ralph Lauren), 시계는 구찌(Gucci).


천하무적 스마일맨



강민호는 넉살 좋은 제주 청년이다. 베이징 올림픽 주전포수였던 그가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퇴장 명령을 받고 포수 마스크와 미트를 집어던졌을 때, TV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그래서 깜짝 놀랐다. 9회 말, 당시 스코어는 3:2로 우리는 한 점 앞서고 있었다. 1사 1, 2루 위기를 맞아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의 숨막히는 상황. 공이 날아왔다. 스트라이크처럼 보였다. 그러나 심판은 바깥쪽으로 낮게 들어온 공을 볼로 판단했고, 그는 딱 두 마디로 항의했다. “Low Ball?” 곧바로 퇴장 당했다. 다행히 그날 한국 야구팀은 금메달이었다. 9전 전승이었다. 2009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와 지난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영양 만점 백업포수로 준우승과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맨얼굴을 드러낸 천하무적 스마일맨은 그제서야 울고 웃었다.

그리고 무거운 포수 장비를 벗고 말쑥한 재킷에 보타이까지 맨 강민호는 “사람은 역시 꾸미기 나름”이라며 싱글거린다. 수줍음 많다던 총각은 촬영장에 도착한 지 30분 만에 사라지고, 덩치 좋고 호쾌한 47번 포수가 씩씩하게 질문에 답했다. “어릴 땐 포수가 야수들에게 지시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어요. 이런 로보캅 같은 장비를 차고 있다는 것도 멋지고. 아, 지금 보면 참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싶죠. 크크크.” 처음 야구를 시작한 초등학교 6학년, 3루 선수가 공을 못 잡아 친구 대신 3루로 가야 했을 땐 ‘포수를 안 시켜주면 야구도 안 하겠다’고 울며 떼썼다. 그리하여 ‘강포’의 수난시대. 포수란 매 경기마다 수십 차례 앉았다 일어서야 하는데다, 투수 공을 받았다가 맞았다가 던졌다가 홈 베이스로 뛰어오는 선수를 블로킹하다, 벤치 사인, 코치 사인, 이런저런 사인 받고 타자로 뛰는 일까지 시합 내내 쉴 틈이 없다. 그래서 또 그라운드의 감독이다. “내 손에서 사인이 이뤄지고 내 손에서 투수가 던지니까 이겼을 때 기쁨은 두 배인 거 같아요. 반대로 졌을 땐 두 배로 힘들죠.” 체력은 기본이고 부상은 당연하다. “부상을 두려워하다 보면 오히려 플레이가 소극적으로 되더라고요. ‘될대로 되라’로 뛰고 대신 잘 먹고. 전 삼계탕 자주 먹거든요.”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는 그에게 크나큰 걱정거리다. 하루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이유도 요약해보면 결국 첫째는 아침밥, 둘째는 저녁밥이다. “경기도 경기지만, 혼자 사는 친구들의 고민은 항상 그거예요. 야구장 갈 때면 서로 ‘뭐 먹을래?’ 통화하고 ‘그래, 거기서 만나자’ 끊고. 경기 끝나면 또 ‘오늘은 뭐 먹을까?’ 메뉴는 한정되어 있고 직접 만들 능력은 안 되고. 크크.”

강민호는 일찌감치 눈에 띄는 선수였다. 2006년, 스물한 살에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처음으로 전 경기 선발 출전한 후, 줄곧 승승장구였다. 유난히 그와 궁합이 잘 맞았던 前 롯데 감독 덕분이기도 했다. 로이스터 감독의 ‘두려움 없는 야구’는 신인 포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두 사람은 한때 포토제닉 상까지 받을 만큼 절친했다. 요즘은? “헤이 제리! 오케이 빠이? 크크. 연락은 하고 싶은데, 말이 안 통해요. 훈련할 때는 통역이 있고, 경기할 때도 3년 동안 감독님 영어를 들어 익숙한데다 야구 용어가 섞여 있어 이해는 했는데 말은 잘 못하는거죠.” 좋은 수장을 통해 야구를 즐기는 법을 배웠다면 2009년의 팔꿈치 부상은 진지한 자세로 야구를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시즌 그는 출전을 못했다. 대신 관중석에 앉아 야구를 지켜봤다. “두해 연속 계속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인기도 많아지고, 저도 모르게 안주했던 거예요. 혼자만의 ‘자뻑’에 살고 있었던 거죠. 한번은 해설하는 분들 박스에 앉아서 경기를 봤는데, 스무 살 때가 떠올랐어요.” 프로에 처음 입단해 2군에 머물 때 그는 경기가 끝나면 PC방으로 가던 동료들과 달리 매일 그라운드에 앉아 야구를 보며 꿈을 키웠다. 저 선수들처럼 멋지게 뛰고 싶었다. “내가 다시 그 위치가 되었구나. 어서 빨리 뛰고 싶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스스로를 정비하게 되었어요.” 전 경기를 풀 타임으로 뛰지는 못했지만, 올해 그는 20홈런을 달성했다. 강민호는 그 부상을 자신의 야구인생의 반환점이라고 말했다.

촬영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잠시 서울로 상경한 그는 다음날 선수단 납패식 때문에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야 했다. 잡지가 나올 즈음엔 괌에서 재활 훈련 중일 것이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목표를 물었다. “김동수의 최다 경기, 박경완의 최다 홈런, 조인성의 최다 타점. 다 깨고 싶습니다.” 강민호의 우렁찬 각오다.


체크 셔츠와 점프수트는 엠비오(Mvio), 보타이는 폴 스미스(Paul Smith), 워커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그라운드의 멋쟁이



두산베어스의 가을 야구는 차라리 한 편의 드라마였다. 순간 시청률 최고의 명장면을 기록한 건 오재원이었다.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4차전에서의 그림 같은 베이스커버와 환상적인 글러브 토스 말이다. 4회 말 수비 2사 1, 2루 상황에서 타석에는 강타자 조성환, 1루에는 도루왕 김주찬이 대기하고 있었다. 타자의 공은 1루와 2루 사이로 빠르게 굴러갔다. 중전 안타성 타구였다. 그때 1루수 오재원이 타구를 쫓아가는가 싶더니 글러브 포켓을 이용해 그대로 걷어 올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공은 대기 중이던 유격수 손시헌에게 전달됐다. 발빠른 김주찬이 슬라이딩까지 했지만 아웃이었다. “사실 프로에서는 그런 건 서커스 같은 플레이라고 연습할 때 그런 식으로 하면 되게 많이 혼나요. 일단 슬라이딩으로 잡긴 했지만, 이 정도면 세이프 타이밍이라 저도 모르게 그냥 바로 던졌죠. 그 순간 선글라스가 살짝 내려가 공이 안 보였거든요. 그런데 심판이 아웃이라는 거예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깜짝 놀랐죠. 흐흐.” 마치 만화의 한 장면처럼 3초간 수십 컷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의 우승은 두산이었다.

정규리그를 3위로 마감한 두산은 이례적으로 신문과 배너광고를 통해 팬들의 응원에 감사를 전했다. 그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그리고 오재원은 팬들이 직접 뽑은 올해의 신데렐라 ‘MIP’선수로 선정됐다. 치통으로 마우스피스를 낀 채 그야말로 이 악물고 뛴 결과다. 고영민의 부진으로 교체 멤버로 나간 그가 1차전 막판 첫 타석에서 안타를 치자 김경문 감독은 줄곧 그를 선발 출전시켰다. 1루부터 3루까지 수비가 가능한 이 전천후 내야수는 심지어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는 양팀 통틀어 김동주 다음으로 많은 안타를 쳤다. “신인 때는 MIP를 타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받고 나니 이젠 원래 잘 하는 꾸준한 선수가 되고 싶어요.” 공으로 하는 운동이 좋아 야구를 시작한 그는 대학 1학년 때 방황하며 잠시 야구를 쉬었던 게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회가 된다. “그랬다면 프로에 와서 덜 힘들지 않았을까요? 몸이 마르고 빠르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이 저를 왼손으로 바꿨어요. ‘너 같은 애는 전국에 수천 명이 넘는다고.’ 그때부터 1, 2번 타자 연습을 하다 10년 넘게 반복되는 훈련과 답답한 기숙사 생활이 더 이상은 싫어 떠났는데, 결국 제 자리는 여기더라고요. 돌아왔죠. 피가 나든 부러지든, 프로에서 성공하고 자리 잡으려면 무조건 견뎌야 해요. 전엔 제가 철이 없었어요.” 눈물의 가을 야구가 끝난 10월 13일.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시각은 새벽 2시. 거의 매일같이 무려 10편의 드라마를 써낸 선수들은 단체 회식마저 포기했다. “다들 피곤해서 얼굴이 말이 아니었거든요. 경기가 거듭될수록 악이 생겼는데, 막상 지던 순간… 저희팀이 자랑스러웠어요.”

그는 곰돌이 두산의 유일한 ‘스키니 라인’으로 통한다. 보기보다 허벅지가 굵고 덩치가 큰 야구 선수들과 달리 일반 사이즈를 입을 수 있는 그는 패션에도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여동생이 오픈한 쇼핑몰(ones shop)에도 모델로 깜짝 출연했다. “야구장 갈 땐 신경 안 써도 밖에선 좀 달라지고 싶죠. 기왕이면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으니까.” 슬림한 몸은 야구 선수에게는 핸디캡이기도 하다. 부족한 건 하체 힘이다. “연예인들처럼 몸을 키우는 운동 대신 밸런스 운동을 많이 해요. 물렁물렁한 공 위에 올라가서 버티는 거예요. 손목도 남들처럼 이두가 아니라 잔근육을 키워줘야 하죠. 제가 또 힘으로 치는 타입이 아니기도 하고요.” 손목을 이용하는 법을 연구하고 땅볼을 빠르게 보내기 위해 배트도 무거운 것으로 바꿨다. 지금도 팀 내 도루왕이지만 내년엔 50개의 도루도 하고 싶다. “야구는 처음엔 꿈이었는데, 지금은 인생이 되어버렸어요. 타석에 서면 기분이 좋아요.” 요즘은 더 욕심이 생겼다. 아무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2011년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전설의 포수 요리베라의 유명한 명언이 있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야인들의 인생도 이제 시작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