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함과 잔머리 사이의 아이돌, 엠블랙

엠블랙에겐 스파르타식 트레이닝을 거친 아이돌의 몸에 밴 엄격함 같은 것이 없다. 대책 없는 순진함과 약은 잔머리 사이의 적절한 지점에 있는 아이돌 그룹, 엠블랙을 만났다.

(왼쪽부터)천둥이 입은 셔츠와 롱 재킷은 재희 신(Jehee Sheen), 데님 팬츠는 칩 먼데이(Cheap Monday at Tomgreyhound), 워커는 디올 옴므(Dior Homme). 승호가 입은 티셔츠와 재킷, 팬츠는 재희 신, 행커치프는 미하라 야스히로(Mihara Yasuhiro at Mue), 슈즈는 컨버스(Converse). 지오가 입은 셔츠, 롱 재킷, 팬츠는 재희 신, 보타이는 아담 키멜(Adam Kimmel at Mue), 페이턴트 슈즈는 레페토(Repetto). 이준이 입은 셔츠와 턱받이 모양의 보타이는 솔리드 옴므(Solid Homme), 팬츠는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 슈즈는 프레미아타(Premiata at ELBON The Style). 미르가 입은 셔츠, 롱 재킷, 팬츠, 슈즈는 디올 옴므.

천둥이 입은 셔츠와 니트 티셔츠는 프라다(Prada), 모직 소재와 니트 소재가 섞인 팬츠는 커스텀멜로우(Customellow), 슈즈는 몽클레르 (Moncler). 이준이 입은 오버 사이즈의 니트 티셔츠는 프라다, 팬츠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삭스는 구찌(Gucci), 슈즈는 엠비오(Mvio).

승호가 입은 티셔츠는 솔리드 옴므(Solid Homme), 모직 체크 팬츠와 슈즈는 엠비오. 지오가 입은 니트 티셔츠는 지-제냐(Z-zegna), 팬츠는 재희 신(Jehee Sheen), 도트 프린트의 실키한 머플러는 빈폴 바이 밴드 오브 아웃사이더스(Bean Pole by Band of Outsiders), 슈즈는 돌체 앤 가바나(Dolce&Gabbana). 미르가 입은 슬리브리스, 베스트, 팬츠는 디올 옴므(Dior Homme), 슈즈는 재희 신.

(왼쪽부터)이준이 입은 니트 티셔츠는 프라다(Prada). 천둥이 입은 니트 티셔츠는 프라다, 머플러는 시스템 옴므(System Homme). 미르가 입은 슬리브리스와 베스트는 디올 옴므(Dior Homme), 모자는 볼컴(Volcom at Hat’s On). 승호가 입은 티셔츠는 솔리드 옴므(Solid Homme), 안경은 프라다. 지오가 입은 레더 소재의 후드가 달린 니트 티셔츠는 캘빈 클라인 컬렉션(Calvin Klein Collection).

대한민국에서 아이돌 그룹의 일원이 되는 건 ‘88만원 세대’가 총체적 취업난의 위기 속에서 아르바이트와 인턴을 거쳐 정규직으로 발돋움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일단 마스크 좋고 춤까지 잘 추는 군계일학이면 나를 반기는 회사가 있다는 게 결정적 차이점이다. 기획사의 간택을 받아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던 예비 아이돌이 갖가지 이유들로 공중분해 된다는 게 문제지만. 애초 엠블랙의 비빌언덕은 ‘비’라는 존재였다. SM 엔터테인먼트의 아이돌이 오랜 연습생시절 동안 최소한의 팬덤을 구축하고, 엠블랙과 하루 차이로 데뷔한 비스트의 멤버들이 데뷔 전부터 솔로 활동이나 방송, 유튜브 등으로 존재를 알렸던 것에 비하면, 엠블랙은 가수 비가 발굴하고 키웠다는 사실 하나로 화제가 될 수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멤버 이준이 〈닌자 어쌔신〉에서 비의 아역으로 출연했다거나, 천둥과 미르가 산다라박과 고은아의 동생이라는 ‘서브 요소’마저 없었다면 이들의 시작은 훨씬 외롭고 험난했을 것 같다.

대중문화산업을 쥐고 있는 아이돌의 파워와 미덕을 수긍하며 〈보그〉가 택한 그룹, 엠블랙. 1월 10일 컴백을 앞두고 ‘선택과 집중’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던 그들을 만났다. 스태프들에겐 사전에 멤버들의 이름과 얼굴 정도는 반드시 매치시켜 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아이돌계에서 ‘깨방정’의 종결자라 할 수 있는 미르의 본명이 방철용이라는 사실까진 모르더라도, 이름을 불러야 꽃이 될 수 있으니까. 엠블랙과의 6시간은 에디터와 스태프들을 넉다운 시킨 전반부 5시간과 반전의 인터뷰시간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등장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몸을 폴더처럼 접고 우렁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과함 없이 예의를 갖춘 인사, 며칠 밤을 새우며 뮤직비디오 촬영을 이어가다 꿀 같은 단잠을 자고 왔다는 얼굴. 그러나 메이크업을 하며 예열을 하던 멤버들은 서서히 통제 불가능한 에너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누나, 빨리 옷 입혀줘요.” “내 옷! 내 옷! 아, 아직 몸 관리를 못해서 이런 옷은 곤란합니다. 근육 담당인 이준에게로….” “지금 이거 멋있는 패션 맞아요? 완전 런던 부랑자 스타일인데.” 스튜디오 한복판에서 나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는 유치원 교사로 빙의하고 있었다. “부랑자 스타일 아무나 소화해낼 수 있는거 아니에요. 자, 일부러 더 부랑자 같은 표정 짓진 말고.” “승호는 안경쓰니까 황보래용 같네요!” “황보래용이 누구예요?” “있어요, 만화에 등장하는 멋있는(그리고 4차원인) 친구.” “아, 네.” 단체 컷을 찍을 땐 허들 모서리에 계속 걸터앉아 있어야 하는 미르를 배려하지 못한 탓에 똥꼬가 아파 죽겠다는 호소를 듣고야 말았다. 드라마 〈정글피쉬 2〉를 촬영하느라 3일 동안 제대로 침대에 눕지 못했다는 이준만이 혼자 다른 차원에 있는 듯 모든 순간 과묵했고(하지만 팬들에게 이준은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말을 더듬으며 흥분하는 모습이 더 익숙하다), 순정만화에서 걸어 나온 천둥은 떠드는 학생들과 상관없이 수학 문제를 푸는 우등생처럼 중간중간 아이패드로 단순한 게임을 즐겼다. 신속함에 최적화된 아이돌은 과년한 처녀들 앞에서 훌렁 바지를 벗기도 했고, 매트 위에 앉아달라는 주문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쩍벌남’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문득, 청소년기의 장난기와 어수선함을 마음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과거의 아이돌들은 얼마나 인생이 거짓 같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엠블랙이 처음 데뷔했을 때 정적이어서 오히려 튀었던 천둥이 ‘내가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멤버들이 이미지 관리를 안 하는 것’이라고 했다니, 아이돌이 무게 잡는 모습만 보여줄 필요 없이 본인의 성정을 있는 대로 드러내도 되는 지금 환경은 그들이 살인적 스케줄을 소화하고도 굴러갈 수 있게 해주는 멍석이다. 물론 영리하고도 영악한 아이돌은 오히려 풀어헤친 캐릭터를 이미지화 한다.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 이빨 닦는 모습까지 방송 카메라에 잡히는 세상에 전략적으로 다듬어진 모습만을 노출할 수 있는 아이돌은 없을 것이다. 엠블랙에게는 스파르타식 트레이닝을 거친 아이돌의 몸에 밴 엄격함 같은 것이 없다. 이들은 합숙 생활을 하면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개인 시간을 누리는 대신, 먼저 가요계에 뛰어들어 톱의 위치를 누리는 멘토인 비를 통해 톱스타의 애티튜드와 정신을 보며 산다. 〈보그〉 2월호가 언제쯤 나오냐고 묻던 엠블랙은 책이 자신들의 컴백 직후 발행된다는 사실을 알고 가까운 미래의 시점을 상상하며 말문을 열었다. “며칠 전 잠실 주경기장에서 7만 명에 둘러싸여 콘서트를 무사히 치렀어요.” “지금 앨범이 20여만 장 나간 가운데… 9주 연속 1위를 달리고 있어서 참 감사드립니다.” “일단 그저께 싱가포르 대사관에 가서….” “으하하! 대사관에 왜 가, 여권 잃어버렸니?”장난은 여기까지였다. 빠른 주기로 싱글을 발표하는 요즘 추세 속 에서 대중에게 가수가 들고 나오는 앨범이 미니 앨범인지 정규 앨범인지 따위는 큰 의미가 없지만, 가수들은 첫 정규 앨범을 낼 때 유독 비장해진다. 엠블랙은 일취월장하려는 각오 때문에 앨범 준비 외의 섭외는 웬만하면 가지치기 했고(이들이 거절한 행사들을 금액으로 따지면 4억이 넘는다고), 들어오는 곡들 중에서 썩 마음에 드는 게 없자 직접 곡을 쓰기 시작했다. 받은 곡을 시키는 대로 부르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고 이해했더니 자신감이 붙었단다. 곧 들고 나올 앨범은 음악적으로 전보다 훨씬 진할 것이고, 들으면 인정하게 될 거라고 한껏 고취돼 있는 그들.

(왼쪽부터)천둥이 입은 티셔츠는 아크네(Acne at Mue), 하이웨이스트 팬츠와 슈즈는 재희 신(Jehee Sheen). 이준이 입은 민소매 터틀넥 티셔츠는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모직 팬츠는 3.1 필립 림(3.1 Phillip Lim), 슈즈는 디올 옴므(Dior Homme), 삭스는 유니클로(Uniqlo). 승호가 입은 티셔츠와 루즈한 니트 카디건은 사카이(Sacai at Mue), 팬츠는 갭(Gap), 슈즈는 퓨마(Puma). 지오가 입은 스트라이프 티셔츠는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at Tomgreyhound), 팬츠는 재희 신, 스웨이드 로퍼는 호킨스(Hawkins). 미르가 입은 스트라이프 티셔츠는 알렉산더 왕(at Tomgreyhound), 카고 팬츠는 구찌(Gucci).

내가 엠블랙이라는 아이돌에게 놀란 건 이들이 ‘부족하지만 무조건 열심히 하겠습니다’ 식의 1인칭형 아이돌이 아니라, 생각보다 이 지형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3개월 동안 엠블랙이들고 나온 몇 곡들은 아이돌 그룹에게 기대한 것 이상으로 확실히 고급스러웠다. 그러나 비의 아래서 ‘수학’했다면 좀더 완벽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말에 리드보컬 지오가 말했다. “대부분의 그룹들이 다 급하게 나와요. 밴드는 각자의 포지션을 가진 멤버들이 의기투합해서 뭉치지만, 아이돌은 기획사에서 뽑은 이런 이미지, 저런 이미지의 사랑받을 것 같은 멤버들이 모여 회사가 준비해주는 대로 시작하니까 신인 때는 당연히 중구난방 느낌도 나겠죠. 각자가 원하는 색깔이 뚜렷이 갖춰지기도 전에 그룹으로 묶여버렸으니, 결국 그룹들이 해체하는 이유는 음악적인 견해차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우리도 점차 우리 것을 더 드러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대중가수는 사람들이 질리지 않도록 팔색조의 매력을 하나씩 꺼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음악만 하는 게 좋았으면 굳이 어렵게 데뷔하지 않고 길거리공연만 하며 살았을 거라고 인정하는 아이돌. 안 되는 안무지만 직접짜서 안무가에게 들이민 뒤 욕먹고, 곡 만들어서 회사에 들려준 뒤 욕먹는 식으로 부딪히는 이 아이들은 대책 없는 순진함과 약은 잔머리사이의 적절한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리더인 승호는 가짜가 진짜인 척 포장하는 발상을 좋아하지 않는, 멤버들 중에서 가장 ‘남자’인 인물인데, 지오와 더불어 엠블랙의 입장을 정리, 대변한다. “요즘엔 라이브라고 해도 음악 밑에 잔잔하게 목소리를 깔아놓고 덧부르는 식으로 하는 가수들이 많아요. 그런데 우리는 순수한 MR이에요.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라이브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 경우 라이브를 할 때 음을 모니터 하기 위한 ‘인 이어’도 하지 않아요. 인 이어를 하면 내 목소리는 잘 들을 수 있겠지만, 무대와 현장 분위기 자체를 즐기는 데 방해가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음이 흔들리기도 하죠. 요즘 아이돌 그룹이 많지만, 저는 어디 갔을 때 누구한테 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인정 안 하는 게 아니라 위축되는 순간 진짜 뒤처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겉멋도 들어봤고, 아이돌 중에서는 평균연령이 좀 높은 편이라 우리가 더 성숙하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그런 것 다 제쳐두고 이제서야 감이 좀 잡힌 것 같아요.” H.O.T와 동방신기와 빅뱅 이후 ‘대형 댄스 아이돌’의 자리는 지금 공석 상태다. H.O.T와 동방신기가 등장하던 무렵에야 지금처럼 조직화된 아이돌 그룹의 수가 많지 않았고, 빅뱅은 애초 묵직한 힙합으로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스타일을 바꿔 우뚝 설 수 있었다. 10대들만이 선호하는 아이돌이 아닌 모두의 아이돌, 그 남자 아이돌의 계보는 과연 어떤 그룹이 이어가게 될까? 적어도 ‘연차’와는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주기가 빨라진 음악시장에서는 톱 가수가 아닌 한 ‘누가’부르냐보다 누가 ‘무엇’을 부르는지가 더 중요하다. 선배와 후배 상관없이 노래가 좋으면 음원차트를 휩쓸 수 있다. 사실 차트라는 것은 팬들을 제외한 대중들의 관심에서는 멀어진 지 오래다. 그러나 가수들은 여전히 ‘1위’를 하면 울먹인다. 엠블랙이 M.net의 엠카운트다운에서 처음 1위를 했을 때, 미르가 울음과 함께 초심 역시 날려버렸다는 농담 섞인 일화는 한동안 멤버들이 자주 뱉던 얘기였다.

“1위가 그렇게 중요해요? 요즘 누가 순위 신경 쓰나요?” 내가 묻자 지오가 숙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1위예요. 1위라는 타이틀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거예요. 그건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가치예요. 그러니까 팬클럽들끼리 스트리밍 클럽을 만들어 음원을 다운 받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에게 1위를 안겨주기 위해 대량으로 음반을 사들이는 경쟁을 하죠. 저는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과 음원차트에서 1위를 해봐야 한 그룹의 음악적 색깔이 잡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빅뱅과 소녀시대만 봐도 그들이 처음에 들고 나온 음악과 지금의 음악이 달라요.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차트의 순위가 올라갈 수록 ‘이런 색깔의 음악을 하면 대중에게 인정받는구나’ 하고 감 잡을 수 있는 거예요. 우리도 차츰 순위의 계단을 밟아가며 계속해서 대중과 맞춰왔어요. 그리고 여전히 1위를 목표로 나아가고 있어요.” 순위의 무상함에 대해 무심하게 털어놓던 내 입이 다소 민망해지는 순간, 엠블랙이 이렇게 덧붙였다. 비가 해외에서 드라마 〈도망자Plan B〉를 찍을 때(드라마가 끝날 때마다 흘러나오던 강렬한 비트의 곡 ‘Running&Running’은 엠블랙이 부른 노래다), 드라마 촬영과 두시간의 공연과 광고 촬영까지 이어가면서 스케줄을 더 잡아달라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런 정신이 자신들의 기준점이 돼버렸다고 말이다. 친구들이 술 먹으러 가자고 꼬드기면 ‘지훈이 형도 술, 담배 안 하는데 우리가?’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도 했다. 이 아이돌에게 불순물이 있다면, 부족한 잠과 뾰루지와 자주 먹을 수밖에 없는 인스턴트 식품 정도일 것이다. ‘아이돌’이고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기대하지 않았던 영리함은 덤이다. 엠블랙의 순수한 열정이 곧 폭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일단 이들의 변명을 접수하기로 했다. “아까 장난많이 친 거… 그렇게 해야 힘이 나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