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 유르겐 텔러를 매혹시키다

유르겐 텔러는 〈마더〉를 본 후, 동양의 아름다운 한 남자에게 완전히 매료 당했다. 독창적인 스타일과 예측불허의 방식으로 셀레브리티들의 내면을 포착해온 이 독일 사진가는 원빈을 만나는 순간,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다. 그는 원빈의 ‘진짜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붉고 흰 장미와 러넌 큘러스 화병 앞에 앉아 있는 원빈. 그와 유르겐 텔러가 함께한 어느 한나절에 대한 기록을 풀어놓기 전에, 이 사진이 탄생하게 된 배경부터 설명해야겠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촬영을 마치고 잠시 차를 마시기 위해 작은 플라워 카페에 들어서던 참이었다. 원빈은 아무렇게나 후드를 눌러쓴 채 카페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앤틱한 소품과 꽃들이 여기저기 진열된 그곳은 구경할 거리가 좀 많았다. 손님은 별로 없었다. 유르겐 텔러의 눈빛이 반짝인 건 그때였다. “당신만 괜찮다면 지금 여기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싶은데, 어때요?” 유르겐은 이제야 비로소 간절히 기다리던 무엇을 만났다는 듯 상기된 표정으로 원빈의 허락을 구했다. “그럼요, 그냥 이 상태로요? 네, 좋아요.” 원빈이 답하자 그는 허둥지둥 카메라 가방에서 다시 콘탁스 G2를 꺼내들었다. 어시스턴트를 부르고 플래시와 렌즈를 만지는 그의 목소리와 움직임에서 다급함이 묻어났다. 재빨리 카페 주인에게 촬영 허가를 받고 공간을 위해 화분 몇 개를 이동시켰다. 그리고 플래시가 터졌다.



와펜 장식의 핀스트라이프 더블 브레스트 재킷은 발맹(Balmain at Mue).

촬영은 정말 순식간에 벌어졌다. 스타일리스트가 준비한 여덟 벌의 근사한 수트 대신 청바지에 후드 티셔츠 차림으로 돌아온 원빈은 무방비 상태로 카메라 앞에 노출되었다. 헤어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았던 머리는 이미 헝클어진 후였고 메이크업도 지운 상태였다. 유르겐은 그야말로 허겁지겁 사진을 찍었다. 잔뜩 굶주린 뚱보가 쩝쩝거리며 빵집어 삼킬 때처럼 집중력은 엄청났다. 동물적 본능이었다. 허리를 계속 구부린 탓에 엉덩이 골이 보일 만큼 바지가 흘러내렸지만 의식도 못한 듯했다. 그는 연신 몇 개의 문장만 반복했다. ‘좋아. 그렇지. 내 이럴 줄 알았어.’ 그건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투명한 화병이 진열된 계단 아래서, 커다란 화분 앞에서, 싱싱하고 마른 꽃들 사이에서, 촬영은 10여 분 동안 이어졌고 갑자기 끝났다. 유르겐은 비로소 바지를 끌어올렸다. “이제 충분해.” 허기를 채우고 숟가락을 내려놓듯 ‘탁’. 어리둥절한 건 원빈이나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 “일상적인 공간에서 촬영하는 게 좋아요. 차를 마시러 왔다가 사진을 찍는 지금처럼!” 어쩌면 유르겐은 이순간을 위해 한나절 동안 연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디언〉의 미술 비평가 아디리안 씰이 유르겐 텔러의 전시 서문에 남겼던 그 말, “이것은한 편의 연극이었다. 그는 조명을 설치하고 카메라를 테스트하는 대신 곧 자신의 사진 속에 담기게 될 주인공과 술을 마시며 한참 수다만 떨었다. 그리고 피사체가 잠시 방심하는 사이, 갑자기 달려들어 플래시를 터뜨렸다”는 바로 이런 상황을 의미했을 것이다.



레드 컬러의 카디건은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이야기는 다시 석 달 전으로 돌아간다. 유르겐 텔러의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던 대림 미술관을 통해 유르겐은 한국을 방문하는 기간 동안 〈보그 코리아〉와 사진 작업을 진행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가능하다면 원빈이 자신의 모델이 되어주었으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봉준호감독의 〈마더〉를 두 번이나 봤다는 그는 이 영화와 원빈이라는 한국 최고의 스타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사실 전 영화를 선택할 땐 신중한 편입니다. 너무 바빠 극장에 갈 시간이 없거든요. 〈마더〉에 대해서는 신문마다 호평이었어요. 함께 일하는 어시스턴트까지 “꼭 보라”는 문자를 보냈기에 다음날 일이 끝나자마자 혼자 극장에 갔죠. 굉장히 흥미롭고 파워풀한 영화더군요. 어머니 역할을 한 배우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전 원빈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어요. 그는 정말 잘생겼어요.”〈마더〉는 런던의 예술 극장에 3주간이나 상영되었다. 박찬욱과 김기덕 영화를 비롯, 한국 영화 상영 기간은 대부분 일주일을 넘지 않았다. 김혜자라는 배우가 우리나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한국 어머니 특유의 ‘모성애’를 모르는 외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영화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소감은 뜻밖이었다. 나중에 서울에서 마주 앉게 되었을 때, 그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마더’들도 다 마찬가지예요. 우리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어린아이인 줄 안다니까요.”



스트라이프 니트 톱은 오프닝 세레모니(Opening Ceremony at Tomgreyhound), 그레이 컬러의 테일러드 재킷은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

원빈은 꽤 오래전부터 유르겐 텔러의 사진이 프린트된 종이를 한 장 지니고 있었다. 소피아 코폴라가 모델이 된 마크 제이콥스의 첫 번째 향수 광고 사진이었다. 마크 제이콥스의 영원한 뮤즈인 그녀는 유르겐 텔러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냥 잡지를 보다가 마음에 들어 찢어서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소피아 코폴라를 촬영한 사진가가 누군지도 몰랐고. 〈보그〉를 통해 처음 이야기를 듣고 우연히 다시 그 사진을 보다 ‘Juergen Teller’라고 조그맣게 적혀 있는 이름을 발견했어요. 제가 출연한 영화가 해외에 수출되어 외국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고, 또 유르겐 텔러처럼 유명한 사진가까지 저를 안다는 건 고마운 일이죠.” 원빈은 유르겐의 제안에 대해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오랜 시간 고민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영화 홍보 기간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리고 유르겐 텔러의 카메라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콧대 높은 빅토리아 베컴을 쇼핑백 안에 구겨 넣는가 하면, 오징어 먹물로 범벅이 된 비요크의 얼굴을 잡아내고, 케이트 모스를 낡은 손수레에 던져버리는 식이다. 물론 그 사진 안에는 패션 상품 자체인 빅토리아의 욕망과 여전히 아이같은 비요크의 순수와 광기, 케이트 모스의 지친 영혼과 황폐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대상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유르겐의 사진들은 그래서 싱싱하고 매력적이다. 하지만 사진 속 인물의 입장에선 걱정스럽고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누드 사진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유르겐의 셀프 누드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갤러리스트인 그의 아내 새디콜과 아들딸까지 홀딱 벗겨 촬영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예순 살이 넘은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알몸이 되고, 남자 같던 로니 혼이 가슴을 드러낼 줄은 누구도 상상 못했으니까. 엄숙함마저 느껴지는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그림 앞에 벌거벗은 샬롯 램플링과 라켈 짐머만을 나란히 세웠던 희대의 사건은 또 어떻고! “모델이 원하지 않는다면 전 누드를 촬영하지 않아요. 원빈,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제가 원하는 건 평소와 같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는 일이죠.” 괴짜 사진가의 간곡한 바람과 진심 어린 배려가 원빈의 마음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