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주년 여배우 특집-장미희] 천진한 인생

장미희의 나이가 몇 살일까 짐작하지 말라. 그녀는 매년 더 어려진다. 70년대 패셔니스타였던 그녀는 지금도 패션계에서 가장 핫한 존재다. 여배우도 남배우도 아닌, 창조적인 어린아이로서의 장미희.

거대한 아트피스를 연상시키는 스커트는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 싸이하이 부츠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트렌치코트로 혹은 스커트로도 입을 수 있는 아이템과 가죽 브라 톱은 꼼 데 가르송(Commes des Garons), 가죽 커프스는 모두 릭 오웬스(Rick Owens).

긴 머리를 한 장미희는 정말 오랜만이에요. 마치 젊은 시절의 장미희를 보는 것 같네요. 타임 머신 타고 가서.
저도 이런 머리 하고 싶었어요.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긴 머리. 역시나 <보그>가 꿈을 이뤄주시네요.

오늘 찍은 사진을 보니 70년대에 <내셔널지오그라피> 표지로 나오셨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앙드레 김 선생님하고.
네. 그때 <내셔널지오그라피>가 발전된 한국을 소개하면서 한국 패션계의 인물을 표지로 썼어요. 앙드레 김 선생님하고 저하고, 모델 전원기 씨하고. 전원기 씨는 피에르 가르뎅 무대에 섰던 굉장히 동양적인 얼굴의 모델이었어요.

70년대였죠?
그렇죠. 연도는 정확히 기억 못해요.

지금이 2011년이니까 적어도 30년은 넘은 거네요. 그당시에 가장 세련된 패셔니스타가 지금도 당대의 패셔니스타로 현존하고 있는 거예요. 기적 같은 일이죠.
아유~! 고맙습니다. 예쁘게 봐주셔서 그래요.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끝나고 어떻게 지내셨어요?
여행 다녔어요. 돌아오면 학교에 가서 학생들 가르쳤구요. 수업과 여행의 나날이었죠.

드라마에서지만 지난해 결혼식을 올리셨어요. 디자이너 정구호가 드레스도 해주셨죠?
네. 정구호 씨가 품위 있게 살을 감추는 드레스를 만들어줬는데, 그 라인에 맞는 천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잖아요. 친구들이 제주도로 와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까지 정성껏 준비해줬어요. 신부 화장도 손대식 씨가 공들여 해줬고.

가상 결혼식이지만 좋으셨겠어요. 실제 결혼식도 그렇게 치르기 쉽지 않거든요.
담담해요. 저는. 가까운 사람들이 나서서 자기 일처럼 도와줬다는 것만 기억나요. 그 상황을 극적인 감정으로 끌어올리질 못해요. 그건 일이니까, 개인 감정으로 전환이 안 돼요.

연기적으로 딱 객관화시키시는군요.
배역 안에서의 삶과 내 삶이 딱 분리가 돼요.

사진 찍으면서 느낀 건데, 결혼을 안 한 얼굴이세요.
그래요? 그렇죠? 천진난만하죠? 어릴 때 보던 얼굴이 아직 남아 있어요. 저로서는 그게 가장 보석 같은 면이에요. 천진성, 순진함이야말로 제가 가장 아끼는 감정의 퀄리티예요. 그게 사라지면 호기심, 창조성 이런 게 동기부여가 안 돼요.

천진함이 가장 잃고 싶지 않은 감정인 거죠?
그럼요. 너무너무 소중해요.

반면에 농염함은 어떠세요? 항상 느낀 게 장미희의 섹시함은 남자를 알아서 풍기는 찐한 섹시함이 아니라 본연의 몰아지경에서 오는 라이트한 섹시함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롤리타적인 냄새가 날 만큼.
농염함, 요염함은 삶과 함께 짙어지는 거죠. 그것에는 성숙함이 존재하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있죠. 마릴린 먼로의 천진난만한 섹시함과 브리짓 바르도의 농염함이 다르잖아요. 성적 매력과 순수한 관능은 차이가 있는데 두 가지가 교차되는 게 핵심인 거죠. 그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한다면 오묘함과 신비스러움이 있죠. 절대 싫증이 안 나는 강한 생명력이랄까.

여배우에게 중요한 세 가지 자질을 꼽으신다면?
우선 지성과 재능. 재능 안에 감수성, 감각, 테크니컬한 연기력이 포함되겠죠. 가장 중요한 건 동심이요.

여배우에게 동심이 가장 중요하다구요?
그렇죠. 천진함, 순진함, 호기심을 모두 포함한 동심이죠. 결코 의심하지 않는 힘. 상황 안의 깊은 몰입. 집중력, 스스럼 없이 빠져드는 것. 우리가 아인슈타인에게 빠져드는 것도 천재성 이면의 순수함 때문 아닐까요.

어린아이의 연기가 뛰어난 것과도 같은 맥락인가요?
그건 모방에서 오는 단순성이고, 어른의 천진성은 창조성으로 연결이 돼요.

어떻게 평생 천진난만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경계가 없었어요. 자유롭게 사고했죠. 돌아가신 제 오빠가 그랬어요. 비둘기의 순수를 지키려면 뱀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천진성은 깨지기 쉽고 엄청난 절제가 필요하죠. 전 그걸 습관처럼 지켜왔어요.

살아온 시대가 그렇게 편안하진 않았을 텐데요.
그래도 낭만적으로 밝게 자랐어요. 하나 비결이 있다면 동물을 안 키운 적이 없었어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굉장히 중요해요. 동물에 관한 책, 프로그램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교감했어요.

개와 고양이요?
개, 고양이, 새, 토끼, 오리… 토끼는 마당에서 키우고 오리는 물통에서 키웠죠. 다른 생명체와의 교감 능력이 있겠어요. 마음이 통하면 새도 고양이도 반응해요. 저 아이가 우는 행동을 하면 눈을 맞추고 달래요…, 나는 너를 안다…, 그 과정이 참 중요해요. 저는 나무와도 시그널을 주고받아요. 관심을 기울여주면 정말 잘 자라요.

사랑을 주시는군요.
그럼요. 제가 어떻게 지금까지 천진난만할 수 있나, 하면 어머니한테 사랑을 많이 받아서예요.

어머니 아직 건강하셔요?
그럼요. 마당에 고추밭 만들고 방울토마토까지 심으셨어요. 우리 삽살이가 그 밭에다 영역을 넓힌다고 오줌을 싸서, 어머니가 “너 그러지 마라!” 했더니, 건드리지 않는대요. 그런데 그 삽살이 밥을 요즘 비둘기가 와서 다 먹는다잖아요. 호호. 어머니와 저는 이런 얘기하면서 둘이 낄낄거려요.

사소한 일에 행복해 하는 모녀네요.
나는 그 사소한 일이 참 즐겁고 중요해요. 햇빛 좋은 날 마루에 나와서 바짓단 꿰매고, 너무 한가해서 하는 일 있죠? 저런 일을 왜 하나 싶은, 그런 일을 하는 기쁨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걸레질 열심히 하고 내가 닦아놓은 마루를 쓰다듬어 보고.

삶이 영화적이라 일상을 더 소중히 하는군요.
나는 일반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 느낌이 좋아요. 설거지 하고 바느질 하고. 저는 집안일이 명상이에요. 밖에 쓸데없이 나돌아 다니지 않아요.

여배우들을 만나다 보니 예전의 여배우 트로이카 시절 이야기를 하게 돼요. 왜 다시 그런 시절이 오지 않는 걸까요?
트로이카는 TV 방송이 생기면서 영화계와 방송계가 함께 만들어낸 기획물 같은 거였어요. 김지미 선생님 이후에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가 있었고, 그 다음이 2세대 트로이카였어요. 저하고 정윤희, 유지인 이렇게 세 여배우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장르를 달리하는 체제로 갔지요. 언론에서 트로이카로 이슈도 많이 만들었구요.

서로 경쟁은 없었나요?
많았죠. 그런데 세 사람이 조건도 특성도 다 달랐어요. 유지인은 세련된 이미지의 대학생, 그리고 권법 액션물을 많이 했고, 정윤희는 백치미와 관능미로 부잣집 딸을 많이 했어요. 저는 청순가련한 역할들을 했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못하는 아픔을 간직한 여자를 주로 했어요.

제가 본 건 아주 도회적인 모습이었어요.
영화에서는 그랬어요. <겨울 여자>에서는 순수와 관능이 동시에 있었고, <깊고 푸른 밤>에서는 차갑고 허무한 이미지였죠. <사의 찬미> <황진이> <춘향전> 모두 진보적인 여성들이었어요.

여배우 후배들과는 허물없이 지내는 편인가요?
저는 배역에 들어가면 그 관계에 몰입을 하기 때문에 같이 작품을 해도 사적인 관계를 잘 안 맺어요. <엄마가 뿔났다>에서도 며느리 영미에게 생뚱하게 대사를 하려면 사적인 느낌이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늘 멀찍이 떨어져 있었어요.

어머니는 여배우인 딸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평생 저 때문에 조심스럽고 피곤하셨을 거예요.

젊은 시절엔 어머니를 미스 최라고 불렀죠?
그랬죠. 장난 삼아. 근데 나이 드니까 엄마도 아니고, 어머니라고 부르게 돼요. 어머니가 제가 <춘향전> 오디션 보고 됐다고 하니까 매일 촬영장에 와서 감독님에게 물어보셨어요. “저 아이가 재능이 있나요?”

재능뿐 아니라 노력도 중요하죠.
그럼요. 재능은 노력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죠.

<엄마가 뿔났다>에서 <육남매>의 대사 ‘떡 사세요’를 패러디해서 남편에게 “떡 사먹으려구요”라고 애교 부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김수현 작가 작품에서 상류 사회 여자를 너무 잘 소화하셔서, 이젠 가난한 엄마 역할은 다시 못하실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그게 패션가의 파워고 김수현 선생님의 위력이죠. 요즘 드라마의 대세가 트렌디한 요소를 가져가야 하니까, 아마도 그렇겠죠.

영화 작업은 안 하세요?
단 두 장면만 나와도 까뜨린느 드뇌브처럼 존재감과 의미가 있는 역할이라면 하고 싶어요. 저는 우스운 중년이나 모욕하는 중년 역할은 연기하고 싶지 않아요.

우스운 중년은 한 번도 연기해 본 적이 없으시죠?
저는 이제까지 정극 배우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았어요. 최은희, 김지미 선생님부터 1세대 트로이카, 2세대 트로이카, 그리고 강수연, 전도연에 이르기까지 정극 배우들이 그런 정통성은 이어갔으면 해요. <춘향전> <황진이> <사의 찬미> <토지>를 해왔던 배우들의 자존심이 있거든요. 지금에 와서 대중의 존중이 없어졌다고 해도, 내가 어떤 역할을 목표로 하는가에 대한 방향은 지켜가야죠. 나이 들어가면서 얻은 지혜와 성숙이 가치가 있는 건데, 내가 지켜온 카테고리에 대한 존중은 하고 싶어요. 내 삶의 기품을 가차 없이 내던지는 것에는 설득이 안 돼요. 망가져야 인기 있다, 그런 말도 있던데, 그건 삶의 선택이 다른 거예요.

영화 <여배우들>도 섭외를 받으셨는데, 안 하셨죠?
그 영화는 시나리오가 있는 것 같지가 않더라구요. 새로운 장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나하고는 안 맞아요. 나는 친한 사람하고는 위트 있는 대화를 하는데, 그냥 수다는 못 떨어요. 저는 늘 듣는 입장이라 자연스럽게 잘 못했을 거예요.

여배우와 그냥 배우는 어떻게 다를까요?
저는 그냥 배우예요. 저는 까뜨린느 드뇌브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의 연기보다는 뿜어 나오는 자긍심이 멋있어 보여요. 프렌치 특유의 자긍심. 저는 항상 의문을 갖고 흔들리고 자신이 없고,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가거든요. 김지미 선생님도 철저하게 자신을 믿어요. 그건 타고난 기질이고 본성인 것 같아요. 저는 자학과 고민을 하도 많이 해서 그렇게 확신에 찬 사람들을 볼 때면 감동하게 돼요. 반대로 제가 배우로서 좋아하는 사람은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알파치노예요. 그 사람들은 연기만으로 완벽하게 스스로를 통제하잖아요. 그건 노력하면 할 수 있어요.

장미희가 자긍심이 부족하다니,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대신 누구보다 천진난만하죠.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