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주년 여배우 특집-문소리] 명예롭다

해산을 앞둔 여배우의 설렘, 감독의 아내로 산다는 것의 기쁨, 셜리 맥클레인을 따서 지어진 이름‘소리’의 운명을 명예롭게 받아들인 문소리의 여배우론.

카키색 롱 원피스는 프론트로우(Frontrow), 카디건은 파비아나 필리피(Fabiana Filippi),트렌치코트는 재희신(Jehee Sheen), 카키 슈즈는 스페리(Sperry), 머리에 두른 스카프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해산이 코앞인데, 먹고 싶은 건 실컷 먹었나요?
양곱창이랑 스테이크만 먹었어요.

스테이크? 군침 도는걸요.
원래 해산물을 좋아하는데, 식성이 변해서 김장철에도 해산물이 들어간 김치를 못 먹었어요.

뱃속의 아기가 자기 주장이 강하군요?
남편(영화감독 장준환)이 바라는 바예요.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 하하.

문소리 같은 여자네요. 하하. 연기 강의를 하고 있죠?
건국대 영화과에서 강의하는데요. 마침 시험 때인데 연기 실기를 상대평가 하라네요. 어떻게 절대적인 걸 상대평가 할지….

문소리 씨한테 연기 수업을 받다니, 학생들도 행운인걸요?
임신을 안 했으면 거절했을 거예요.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연기를 가르칠 생각도 없고, 연기가 가르친다고 될 일도 아니라서. 그런데 유산 3개월 만에 임신해서 집에만 계속 있으려니까 답답하던 차에 제의를 받았거든요. 마침 병원에서 3개월부터는 움직여도 된다고 해서.

커리큘럼은 어떻게 돼요?
가자마자 난 연기 가르칠 생각은 없다, 연기 배울 생각하지 말아라, 연기와 영화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자, 그랬어요. 수업도 토론이 많고요. 장편 시나리오를 구해서 작품 분석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죠.

문소리 씨에게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고 싶지 않았을까요?
연기라는 게 절대 한번에 안 늘어요. 처음엔 유명인이 오니까 설렁설렁 할 줄 알았나 본데, 제가 무지 빡빡하게 했어요. 비싼 등록금 내고 배우는 거니까, 온 힘을 다해서. 하하.

최근작 <하하하>에서 바람 피운 애인을 여관 앞에서마주쳤을 때, “한번 업어봐도 돼요?”라고 한 연기가 참 맛깔스러웠어요.
그죠? 깔끔하더라구요.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란 말이죠. “나, 안 죽었어”하는 기분으로 상큼하게 연기했어요. 본래 불륜 현장을 목격한 여자들 반응이 드세게 달려들거나 파르르 창백해지거나 이렇게 천편일률적인데,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게 좋았죠.

정말 그 장면을 보고는 하하하, 웃었어요. 문소리가 연기해서 더 산뜻했잖아요.
많이 웃어줘서 기뻤어요. 홍상수 감독 영화라 다르게 생각하고, 달라져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제목을 일부러 그렇게 지으신 건지, 사람들이 많이 웃어줘서 좋았어요. 관객들이 지지해준다는 뜻이니까.

임신하고서는 많이 쉰 편이네요.
너무 쉬어서 출산 후 빨리 복귀해야 할 거 같아요.

태명이 뭐죠?
열매요. 유산 후 3개월 만에 된 임신이라, 뭘 크게 바라지를 못 하겠더라구요. 열매를 맺었으니, 그냥 열매…, 말도 야무져서 듣기 좋구요.

외국에는 임신한 여배우를 일부러 캐스팅해서 그 신비를 영화화하는 감독도 있어요.
그렇죠? 그런 시나리오를 받아보긴 했어요.

여배우란 뭘까요? 명배우 문소리의 정의를 한번 들어봅시다
하하. 글쎄요, 뭘까요. 최대한 부드럽게 얘기해도 불쌍한 존재죠. 존 카사베츠 감독의 <오프닝 나잇>이란 영화가 있어요. 지나 롤렌즈가 여주인공인데, 연극을 올리는 이야기예요. 여배우가 신경쇠약 직전의 알코올 중독자로 나와요. 연극도 만취 상태로 올리죠.
그걸 연출자의 와이프가 지켜봐요. 남편이 여배우의 전화를 받고 뛰쳐나가고, 연극이 끝나고 여배우를 파티에서 안아주고… 그 모습을 와이프가 가만히 지켜봐요. 저는 그 와이프의 인생이 우아한 인생이라는 거죠. 즐기고 판단하고 지켜보는… 평소에 보면 그 와이프가 여배우 같아요. 여배우는 예쁘지만 성격이 피폐해서 엉망진창이에요. 갈채를 받지만 요만큼도 건강하지 못하고 정신 못 차리는 인생. 여배우와 통화하는 남편을 지켜보는 와이프가 더 섹시해 보이고, 인생 참 고급으로 산다 싶어요.

하하. 존 카사베츠 감독의 아내가 바로 여배우 지나 롤렌즈잖아요. 현실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아내 채령 여사가 여배우보다 더 여배우답죠. 그러고 보니 문소리 씨도 감독의 와이프잖아요?
그렇죠. 저는 감독 부인기도 하죠.

여배우와 여배우다운 감독의 와이프를 다 누리시는군요?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죠. 어쨌든 여배우는 직업으로 선택하기에는 위험한 일이에요.

리스크가 크니까 도전해볼 만하죠.
위험하니까 성취감은 큰 편이죠. 에베레스트 산 올라가는 것처럼.

어떤 자질이 필요할까요? 여배우에게.
몸도 정신도 건강해야죠. 그리고 타고난 팔자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연기력은 어때요?
없어도 많이들 하시던데요. 하하. 각자 승부하는 게 다르니까요. 저마다의 매력이 있겠죠.

본인은 여배우로서 적합한가요?
육체도 정신도 건강하려고 노력하죠. 결혼이 큰 도움이 됐어요. 예전에는 가족에게만 의지했는데, 지금은 둘이서 결속력이 강해요. 저는 사실 제 의지로 배우가 된 게 아니에요. 사범대 나와서 선생님 하는 게 정상적인데, 극단에서 연극을 하게 돼서…, 그게 그렇게 큰 결정일 줄은 몰랐어요.

감독의 아내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내가 배우니까, 여배우의 남편으로 산다는 것도 힘들 테니까, 같이 퉁을 쳤어요. 하하. 직업보다 원래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나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라임 톱은 프론트로우(Frontrow), 카디건은 파비아나 필리피(Fabiana Filippi), 팬츠는 재희신(Jehee Sheen).

아직까지 서로 존댓말을 쓴다죠?
문자도 존댓말로 보내요. 그전에 ‘감독님~’하고 불렀으니까 습관이 됐어요. 연애할 때도 존댓말을 쓰니까 주변에서 눈치를 못 챘죠.

여배우가 아름답게 나온 영화는 뭐가 있을까요?
글쎄요, 뭐가 있으려나…?

[오아시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통념을 깼다는 면에서. 저는 옛날 영화들이 더 근사했던 거 같아요. 정윤희의 [안개마을]이나 장미희의 [깊고 푸른 밤]은 정말 강렬하고 매력적이었는데….

왜 그럴까요?
존재감 자체가 크게 느껴졌어요. 여배우들이. 그게 90년대 후반부터 여배우들이 참 많이 나왔는데,수적으로도 그렇게 압도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아요.

여배우 트로이카도 더 이상 없죠.
없죠.그 시절 영화 자체가 여배우의 존재감에 전적으로 기댈 때여서 그랬나 봐요. 요즘은 그것 말고도 영화를 재밌게 만드는 요소가 많으니까.

다른 여배우들과 문소리의 다른 점은?
다 다르지 않나?

기가 더 세지 않나요? 연기적 자존심도 센 편이죠?
못하는 사람들은 싫죠. 못하면 불편하니까. 예전에는 불안하면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이었는데 그게 줄어든 것 같아요. 옛날에는 날 다치게 하기 싫고 건강하고 멀쩡하게 살아 남고 싶어서 두려움이 더 많았던 것 같네요. 살다 보니 영화 현장도 사람 사는 데고,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고 같이 해나가야 하니까 마음을 열고…, 그러면서 많이 변했죠.

언젠가 자신을 육체파 여배우라고 했죠? [오아시스]로 장애인 연기하면서 육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면에서.
맞아요. 나는 고정된 상품 이미지를
만들고 살진 않았어요. 11년 동안 연기하면서 매니저 없던 시절이 절반이었고, 그러니까 대중들이 그냥 ‘문소리 하면 연기파 여배우다’ 그렇게 규정 지었죠. 그런데 그 말이 요리파 주방장처럼 웃긴 말이라, 반항심에 “왜 이래? 나 육체파 여배우야” 그랬죠.

지금은 뭐죠?
지금은, 지금은 시골파요. 하하. 평택에 사니까

하하. 평택댁! 개도 키우고?
네. 개도 키우고, 블루베리랑 금귤, 자두, 사과나무도 보살피고.

요즘엔 영화사들도 다 강남에 있잖아요.
시골에 있으면 <9시 뉴스> 끝나고 할 일이 없죠. 정보도 느리고 작품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어떤 여배우가 좋은 거 한다고 하면 샘도 나고 그래요. 그래서 남편이랑 한번쯤 서울 나가서 정보통인 친구 만나서 소식도 듣고 그래요.

질투는 없나요?
연기하다 보면 샘이 날 때는 있는데, 그냥 다르다고 생각해요.

문소리 씨가 여배우와 함께한 영화가 ]우리 생애 특별한 순간]이 있었잖아요?
하하. 그게 여자들 모이면 마스카라를 더 발랐네, 립스틱을 더 진하게 칠했네, 추리닝도 광나는 거를 골랐네, 하다가도 결국은 다 똑같아져요.

[우생순]도 핸드볼 영화라 고생이 심했겠어요?
와~! 정말 힘들었어요. 핸드볼은 다같이 수비하다가 또 우르르 공격으로 들어갔다가…, 단체 운동이라 또 남다른 맛도 있었구요. 정은이(김정은), 지영이(김지영), 태웅이(엄태웅) 다 동갑이라 친하게 지냈고, 그 중에서 또 제가 반장 역할 하고.

그래도 타임캡슐에 남기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데뷔작인 [박하사탕]이죠. 거기서 제 모습은 제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아요.

이창동 감독이 소리 씨를 참 예뻐했죠. 전도연 씨랑 친하시죠?
도연 언니가 처음엔 어려웠는데, 언니도 이창동 감독님이랑 [밀양]을 하고 나서는 더 이해하는 면이 커진 것 같아요.

극한까지 가본 여배우라는 공감대?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했어요. 자존심도 둘 다 세고. 작년에 윤정희 선생님이 이창동 감독님의 [시] 촬영하시고 VIP 시사회를 하셔서 남편하고 뒷풀이에 참석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제가 남편 옆에 앉아서 “제 남편이에요” 했더니, 윤정희 선생님이, “뭐? 남편이 장준환 감독이야?” 그러시는 거예요. “아니, [지구를 지켜라] 만든 감독하고 결혼한 여배우가 전도연 아니었어? 문소리야?” 하시면서, 백건우 선생님하고 한참을 신기해 하시며 주거니받거니… 호호.

윤정희 선생님하고 백건우 선생님이야말로 영화처럼 사시죠. 그분들 보면 서로가 서로의 예술 세계를 멋지게 비평해줘요. 장준환 감독은 소리 씨 연기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해요?
남편하고는 영화계 뒷얘기하는 게 재밌어요. 연기 비평은 남처럼 아주 냉정하게 해요. 누가 한번 대놓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그래요.

문소리의 연기가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구요?
네. 그게 장점이면서 단점이래요. 깊이는 있는데 넓이가 부족하다고.

놀랍네요. 그걸 극복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좋은 감독을 많이 만나야죠. 배우는 어떤 감독을 만나느냐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아요. 앞으로 살면서 몇 작품이나 할까, 생각하면 좋은 영향 받으며 좋은 시간 보내고 싶어서 더 간절해지죠.

소리 씨 아버님이 소리 씨를 낳기 전에 여배우 셜리 맥클레인을 너무 좋아하셔서 ‘소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잖아요. 여배우를 생각하니 여배우가 나온 셈이네요.
하하. 그런 셈인가요? 저는 그냥 우리 애가 건강하게만 나와줬으면 해요.

참, 끝으로 여름에 개봉할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얘기를 좀 해주세요. 목소리 연기에 혼신을 다했다죠?
네. 닭이 참 멋있어요.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모험을 선택하는 호기심 많은 닭! 실사에서도 흔치 않은 캐릭터예요.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알을 품는 게 싫어서 도망친 후, 거리에서 버려진 알을 품어서 자식처럼 키우죠.

독특한 모성애를 가진 암탉이네요?
네. 그런데 키우고 보니 닭이 아니라 청둥오리라 처음엔 엄마를 창피해 하죠. 나중엔 생태가 다른 걸 알고 헤어져요. 정말 존경스러운 암탉이에요.

여배우의 태교에 좋은 작품이었군요. 그런데 지금 태동이 느껴져요?
지금 마구 밀고 있어요. 이 안이 좁았나 봐요. 빨리 넓은 세계로 나와야죠. 쑥 잘 나와라! 아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