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주년 여배우 특집-김윤진] 여전사와 어머니

미국 ABC 방송의 인기 시리즈〈로스트〉는 막을 내렸고, 김윤진은 다시 한국의 직업 배우로 돌아왔다. 액션과 모성애 장르를 개척했던 김윤진은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블랙 실크 뷔스티에 튜브 톱은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레이스 트리밍 오픈토 부티는 지미 추(Jimmy Choo), 블랙 레더 벨트는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러플 미니스커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몸매가 더 근사해졌네요. 수영하나요?
네. 하와이에 살 때도 못했는데 요즘에 집 근처 수영장에서 해요. 하하.

하와이에선 서핑을 배웠죠?
그랬죠. <로스트> 엑스트라 중 한 명이 서핑하는 친구여서 그 친구한테 배웠는데, 콘택트렌즈가 빠져서 눈이 안 보이는 바람에 그만뒀어요.

<로스트>가 막을 내렸으니 하와이 집은 정리했겠네요? 윈저호텔 옆에 있는 건물 1004호였죠?
와우~! 기억력 좋으시네요.

윤진 씨가 천사의 행운이 있는 집이라고 했었잖아요.
그랬나요? 하하. 얼마 전에 짐을 정리해 LA로 부쳤어요. 침대, 소파, TV 전부 부쳐서 LA 도착하는 데 한 달이 걸렸어요. 미국 매니저인 알렉스가 제가 레이아웃 해서 보낸 그대로 잘 정리해줬어요. 행어에 옷가지 순서까지 좌~악.

전 세계 곳곳에 집이 여러 채 있는 게 부러웠어요.
그게 재미있었는데, 지내다 보니 흩어져 있는 게 좋은 게 아니더라구요.

이젠 LA로 가나요?
한국 영화 한 편 하고 가려구요. 블랙 코미디예요. 어떤 내용이에요? 이 기사가 언제 나가죠? 오! 안되겠어요. 영화사가 정보 노출되는 걸 되게 예민해 하더라구요.

어디에 투자를 많이 해요?
전 꽉 쥐고 있어요. 돈을 잘 안 써요. 생각보다 쿨하지 않아요. 하하.

그게 아니라 어느 부분에 돈을 많이 쓰냐는 질문이었어요. 자신의 삶에서.
아~ 네, 전 먹는 데 많이 써요. 나이도 있으니까 대부분 제가 사죠. 점심식사와 함께 가볍게 샴페인 한 잔 할 일도 많이 생겨요.

술 좋아해요?
맥주 한 잔도 못 마셔요. 여배우 중에 나처럼 술 못하는 사람 없을걸요. 와인 세 모금만 마셔도 목까지 빨개져요.

그럼 술 취한 연기는 어떻게 하죠?
오히려 술 못 마시니까 취한 사람을 많이 보게 돼요. 말짱한 척 하는데 몸은 말을 안 듣고 혀는 꼬이고….

술 취한 연기 해봤어요?
술 취한 건 <밀애> 때 해봤고요. 2001년에 개봉했던 <아이언 팜>에서 소주칵테일 만드는 바텐더 역할을 했어요. 근데 그 영화 쫄딱 망했어요. 하하.



블랙 실크 블라우스는 발맹(Balmain), 블랙 레더 플리츠 쇼츠는 노케 J(Nohke J).

<아이언 팜>에서 영어 연기가 근사했어요. 당시 윤진씨는 TV에서 오피스 룩 입고 딱딱한 실장님 역할을 많이 했는데, 영화에서 영어로 연기하니까 너무 명랑하더라구요. 깜짝 놀랐어요.
아유~. 그래도 그때 전 고생 많이 했어요. LA 올 로케이션이었는데 혼자 호텔 방에서 물 묻힌 타월 깔아 놓고 소주병 돌리는 연습하느라 병을 많이 깨뜨렸어요. 가만 있자, 그 영화 별로 안 중요한데 왜 이렇게 얘길 늘어놓고 있지?

<밀애> 끝나고 할리우드로 가서 문 두드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많은 배우들이 세계로 나가고 있어요. 윤진 씨가 큰 역할을 해줬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빨라요. K-Pop이 유럽에 진출한 것 보고 깜짝 놀랐어요. 세계가 좁아지고 있어요. 할리우드로 가는 것도 시간 문제고.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대단해요. 빨리 한국 배우가 자리를 잡아야죠.

당신이 개척자였어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하하. 얼마나 오래 유지하느냐,예요. 따져보면 박중훈 선배가 <찰리의 진실>로 먼저 시작하셨죠.

ABC 방송국 어드벤처 SF 시리즈 <로스트>로 참 오래 유지했잖아요? 시즌 6까지 갔었죠?
그건 자랑할 만해요. 최근에 <슈퍼 에이전트>가 개봉했잖아요. 그게 <로스트>의 아이들 버전이 아닌가 해요. JJ 에이브람스가 하는 이야기가 그런 거예요. 그가 그렇게 대스타 감독이 될 줄 몰랐어요.

JJ 에이브람스가 윤진 씨를 알아보고 <로스트>에서 없던 역할까지 만들어 캐스팅했었죠?
정말 감사하죠. 그때만 해도 에이브람스가 이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이 될 줄 몰랐어요. 우리랑 촬영하면서 킥킥 대던 사람이었는데.

6년 넘게 촬영했는데, <로스트> 끝나고 허전했겠어요. 작년에 끝났죠?
작년 5월 <로스트> 끝내고 영화 <심장의 발견>을 찍었죠. 와! 벌써 1년이 넘었네요. 그때는 정말 다른 세상에 있었어요. 시간을 넘나들었죠.

그런데 <로스트>가 어떻게 끝난 거죠? 엔딩 얘기 좀 해봐요. 섬에 불시착한 생존자들이 어떻게 된 거예요?
JJ 에이브람스와 공동 프로듀서인 데이먼 랜돌루프가 <로스트> 끝나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한 여자가 와서 “혹시 <로스트> 쓰신 데이먼 아니세요?,” 그렇다고 했더니 그 여자가 화가 나서 소리쳤대요. “당신 때문에 6년 반을 허비했어요. 결말이 너무 짜증났어요.” 6년 반 동안을 끌고 다녔으니 다들 기대치가 너무 높아진 거죠. 거대한 비밀이라도 밝혀질 줄 알았는데 마무리는 마치 우리가 다른 단계에 올라가는 것처럼 됐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 죽고, 주인공 잭이 우리가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느낌으로. 센 조명을 확 비추면서요. 저는 그게 가장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허무했던가 봐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처럼 말이죠.
아! <신> 읽으셨어요? 거기서도 엄청난 비밀이 밝혀질 듯하다가, 거대한 눈을 가진 신은 곧 나다, 독자들이다, 그렇게 끝나잖아요. 우리의 상상력의 글을 만들어서 움직였을 뿐이라고. 너무 허무하죠. 하지만 엔딩은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도 그랬죠.
네. 그런데 왠지 <1Q84>는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듯했어요. 리틀 피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윤진 씨는 SF 판타지가 참 잘 어울리네요. <1Q84>가 영화로 제작된다면?
와우! 여주인공 역은 꼭 제가 하고 싶어요. 정말 쿨한 캐릭터죠. 일 년 내내 운동해서 몸을 만들 거예요. 예민할 것 같지만 단단한 근육을 갖고 있고, 침 한 방으로 사람을 죽이고… 쿨하게 육체를 사용하는 캐릭터.

게다가 섹스 없는 임신까지, 마리아를 연상시키죠.
그게 너무 좋아요. 훌륭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모두 성경이나 셰익스피어, 체홉, 제인 오스틴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와요. 제인 오스틴 작품도 계속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잖아요. 그걸 자기화시켜서 풀어나가는 게 재밌어요.

대단히 문학적인 배우인걸요? 미국에서 연극을 해서 그런가요?
소설을 워낙 좋아해요. 읽을 땐 전화도 안 받아요. 댄 브라운 소설 읽으면 전 미치는 거죠. 영화 현장에선 잠들기 전에 책을 못 봐요. 밤을 새버리니까.

언제나 엔딩이 중요하죠? 소설도 끝을 보기 위해 달려가는 거잖아요. 영화도 그렇고.
엔딩이 좋으면 모든 게 용서가 돼요. 영화 보고 나서 기억에 남는 건 사실 두세 장면이에요. 전체적으로 느낌만 기억할 뿐. 그러니까 <쉬리>에서 만큼 멋지게 죽어야 해요. 여배우는 더더욱.

그러고 보니 액션 배우네요. 안젤리나 졸리처럼.
저는 공 가지고 하는 운동은 못해요. 골프도 못 쳐요. 스키나 수영처럼 몸을 던지는 것만 하죠. 엔딩이 중요하고 목표가 중요해요.

융통성이 없는 편이죠?
요령도 없죠. 배운 대로만 하니까. 그래서 연극을 잘하죠. 디렉팅 받은 대로, 감독님 요구대로 절대적으로 복종해서 열심히 하니까요.

여배우란 현장에서 어떤 존재일까요?
여배우가 여우라고 하는 건 맞지 않아요. 오히려 남자 배우들이 더 여우죠. 그게 생존본능일 수도 있는데, 감독들에겐 남자 배우들이 더 여우 같아요.

여배우들이 더 순수해서일 수도 있고, 남자 배우들은 감독들과 동성이라 커뮤니케이션이 더 잘 돼서일 수도 있어요. <심장이 뛴다>는 어땠어요?
너무 더웠어요. 하와이에서 6년 동안 버텨서 웬만한 더위는 견딜 수 있는데, <심장이 뛴다>는 진짜 더웠어요. 옥탑방 텐트 안에서 스웨터 입고 몇 시간씩… 어휴~.

<심장이 뛴다>에서도 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연기하셨죠?
네. 언제부턴가 모성애 전문 배우가 됐죠. 여자 캐릭터가 끌고 나가는 동력이 모성애니까.

액션과 모성애를 결합한 스릴러 <세븐 데이즈> 출연 이후 30대 여자 배우의 모성애 캐릭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하모니>에서도 모성애 연기죠?
<하모니>는 교도소에서 노래하는 이야기인데, 그것도 엄마 역할로 정리되더군요.

극적 상황에서 엄마를 연기하는 힘 있는 장르 영화에는 김윤진이라는 캐스팅 공식이 생긴 것 같아요. 의식을 했든 안 했든 어쨌든 개척자적인 역할을 많이 하고 있어요. <쉬리>의 액션도, <밀애>의 노출 연기도, 모성애도…
<밀애>도 많이들 반대하셨죠. 노출 강도도 심했고, 결혼한 여자 역할이었으니까. 하지만 전 뭐 CF스타도 아니었고, 남을 의식하면서 연기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액션도, 모성애도 처음 한 게 많네요. 요즘 홈페이지 정리하다 보니 제가 필모그래피가 많지 않아요. 일본에서 찍었던 <러쉬>까지 합쳐도 10편이에요. 그게 <로스트> 촬영 때문에 9개월을 하와이에 있고, 1년에 3개월 정도 쉬는데 그때 영화 한 편씩 찍어서 그래요. 그래서 덜 질리는가 싶기도 하구요.

결혼하고 나서 더 힘이 있어 보여요. 매니저였던 남편이 요즘은 영화 제작도 시작하셨죠?
하하. 네. 더 조심스러워졌어요.

남편을 뭐라고 불러요?
멋쟁이, 여봉봉!

하하. 좋네요. 윤진 씨의 몸은 맘에 드는 편이에요?
만족해요. 어깨가 조금 좁은 것만 빼고. <쉬리> 때 내가 너무 살찌게 나와서 놀래서 <밀애> 때는 진짜 열심히 관리했죠. 배우 생활 시작한 이후 7시 이후에는 안 먹으려고 했는데, 결혼하고 남자랑 같이 사니까 자꾸 야식을 먹게 돼서 그게 좀 걱정이에요.

그런데 윤진 씨는 왠지 여배우보다는 배우 같아요.
칭찬이에요? 하하. 농담 삼아 스태프들한테 “나 여배우 같아?” 그럴 때 있어요. 그럴 때 의미가 “나 연예인 같아?” 거든요. 전 점잖게 입으면 ‘아나운서 삘’이 나서요. 전 염색, 커트, 펌, 매니큐어 그런 거 한다고 세 시간 이상 미용실에 앉아 있는 것도 못해요.

그럼, 자신이 여자라고 느낄 때는 언제예요?
샤워하고 보디 로션 바르고 화장실 조명 앞에서 뽀샤시하게 비치는 나를 볼 때.

월드스타라고 불릴 때는 기분이 어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마돈나나 톰 크루즈 정도는 되야 월드스타죠. 저는 그냥 일하는 배우예요. 내 안에 찌질하고 유치한 모습도 있고, 세련되고 우아한 모습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보통 인간이죠. 그래도 이왕 사는 거 멋지고 재밌게 살자, 그런 결심을 매번 해요. 하하. 현장에 있으면 내가 배우라는 것도 모르고 “여기서 뭐하세요?” 영화 찍는다고 하면 “누가 나와요?” 그럴 땐 “나문희 선생님 나와요” 그래요. 나는 나를 못 알아보는 게 좋아요. 혼자서 모자 쓰고 대형 마트 가서 쇼핑하는 지금이 좋아요. 배우는 내 직업이니까, 그러니까 배우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쿨하고 당당하게 내 인생을 살아요. 그리고 나는 여배우라는 존재를 참 사랑해요. 너무 소중하고, 예민하고, 감싸주고 싶은 존재들이에요. 여배우들은. 하지만 현장에서 ‘여배우들은 어쩌구저쩌구…’ 싸잡아 수근거리면 저는 또 발끈해요.

왜냐하면 당신은, 여배우는 소중하니까요.
하하. 고마워요. 꼭 제가 출연한 로레알 광고 카피 같네요.

이제는 목표가 뭐예요? 여우주연상도 탔고, 할리우드 생활도 잘 했고.
지금은 그냥 좋은 작품 하는 거. 그리고 결혼했으니까 아이를 갖고 싶어요. 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모성애를 만끽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