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주년 여배우 특집-엄지원] 반하고 싶어

엄지원은 깊고 명료한 여자다. “당신 재미 봤으니, 이제 그만 뚝~!”이라고 상큼하게 호통치는〈극장전〉의 여배우처럼. 남자에게도 반하고, 작품에게도 반하고 싶다는 엄지원. 과연 목자가 양 떼를 이끌듯 그녀를 이끌고 갈 사람은?

블랙 롱 드레스는 디올(Dior), 깃털 모자와 진주 귀고리는 제이미 앤 벨(Jamie&Bell).

모래시계 실루엣의 수트는 도나 카란(Donna Karan), 와이드 벨트는 디올, 진주 목걸이와 귀고리는 타사키(Tasaki), 반지는 미네타니(Minetani).

스트라이프 원피스가 잘 어울리네요.
진짜요? 호호. 입을 만큼 입었으니까 팔아버리려구요.

바자회에 내놓으려면 나한테 연락해요. 예전에도 가로수길 바자회에서 지원 씨가 내놓은 멋진 초록색 스카프를 제가 건졌거든요.
오! 진짜요?

그럼요. 파는 걸 좋아해요?
보통 사람들보다 옷이 많잖아요. 옷장을 정리해야 원래 있던 애들도 숨을 쉬고, 안 입던 아이들도 새 주인을 만나 사랑받죠. 옷장을 열어서 “아이들아! 내가 공간을 늘려줄게~” 하고는, 그 옷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가도록 해줘요. 귀한 아이니까 귀함을 아는 사람에게 보내주자! 예전엔 미용실 스태프들에게 봄, 가을로 안 입는 옷 가져다 줬거든요. 요즘엔 바자회 열어서 적은 돈이라도 받고 그걸로 기부도 하니까 재미있어요.

엄지원 씨는 요즘 믿음이 좋은 크리스챤이죠? 지난주에 교회에서 간증하는 걸 봤어요. 아주 참한 블라우스에 플레어 스커트 입고. 얼마나 또박또박 말을 잘 하시던지.
하하. 제가 주최가 돼 여배우들 몇 명 모아서 같이 창조과학 탐사 다녀왔거든요. 창세기를 과학적으로 보여주는 탐사 여행이요.

‘엄지원 자매님’은 십일조도 잘 하신다죠? 몇 달 전에 ‘돈 많은 여자’라는 컨셉으로 촬영했을 때, 그 인터뷰가 <보그> 홈페이지에서 인기 순위 1위에 랭크됐었어요.
아! 정말이요? 그 사이 전 좀 괴로웠는데. 정신 세계만 좋고, 재정의 축복은 쏟아지지 않아서….

배우와 돈 얘기를 하다니 흥미롭네요.
저는요, 제가 ‘욥’ 같다고 생각했어요.

‘욥’이라면, 이유도 모른 채 끝없이 고난을 당하는 성경 속의 인물?
네. 제가 욥의 마음을 알겠어요. 욥은 의인이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식도 잃고 참혹한 병에도 걸리고 고통을 당하잖아요. 그런데 한편 묵상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신을 알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게 복 주시는 하나님만 사랑한 게 아닌가? 그런 의문이 생겼죠.

늘 밝고 명랑한 당신에게 어떤 고통이 있었나요?
드라마 <싸인> 끝나고 모든 시간을 신께 드리고 할 수 있는 건 다했는데, 재정도 막히고, 부모님도 편찮으시고, 언니네도 안 좋고, 저도 몸이 아프고….

마음의 통증이 더 컸겠어요.
절규했죠. 하나님! 왜 저는 늘 통로만 되나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통로. 저도 행복하고 싶은데, 왜 저는 안 되나요?

어떤 결론을 내렸나요?
내 삶에서 무엇을 원하셔서 이 시간을 허락했는지 알게 됐어요. 신과의 깊은 소통, 그 자체에서 참기쁨을 누리길 바라신 거죠. 고난은 다 지나갈 테니까.

정말 통로로 잘 쓰이시네요. 엄지원 씨를 통해서 사람들이 서로를 알고, 신을 알게 되고, 또 옷도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구요. 고이지 않고 회전이 되는 건 중요해요.
그렇죠. 사람도 사랑도 돈도 옷도 흘러가도록 만들어줘야 해요. 그런데 여전히 남만 행복하게 하는 사람 말고, 나도 행복한 사람이고 싶어요.

그럼요. 이해해요. 그러고 보니, 배우도 결국 통로가 되는 사람이에요. 다른 영혼의 통로가 돼서 관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렇죠. 배우도 옛날에는 광대라고 불렀잖아요. 자신은 천대 받으면서 남을 울리고 웃기는 직업이니까.

그런데 지리학도가 배우가 된 건 반전이네요.
너무 큰 반전이죠. 저도 어떻게 됐는지 신기해요. 고등학교 때 예쁘다고는 생각했어요. 그래도 세상을 뒤흔드는 미모는 아니고, 그냥 상중하를 나누면 상위권에 머무르는 정도였거든요.

길거리 캐스팅이었죠?
하이틴 잡지 유행할 때, 길에서 찾은 예쁜 애로 찍힌 거죠. 매니지먼트사에서 전화 왔길래 재미 삼아 했는데, 여기까지 왔고요.

초기에는 ‘비운의 여인’을 단골로 맡아 했죠?
영화 <똥개>의 왈가닥이 저랑 제일 비슷한 거였죠. 그런데 <주홍글씨>부터 비련의 여인이 됐어요. 한석규 선배님 와이프 역이었는데, 미스터리하고 슬픈 캐릭터였어요. 그 역할이 저와는 정반대인데, 그걸 잘하면 맞는 건 또 얼마나 잘할까? 초기작이니까 관객들이 나한테 기대치가 없을 테니 못해도 실망은 안 하겠지. 또 하나는 첼리스트 역이었는데, 어린 내가 생각해도 그런 전문 직업이 나오면 배우들이 가짜처럼 연기하는 게 싫었어요. 나는 진짜처럼 해야지, 하는 욕심도 났고. 그런데 그 비련의 배역이 너무 제게 잘 어울리게 나온 거죠.

그러면 또 한 가지 이미지로 팔리죠. 그게 소위 색깔이 돼서.
그래서 드라마 <매직>에서도 아프고, <가을로>에서도 슬프고… 아니, 감독들은 배우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해야지 왜 기존 작품의 것을 인용만 하는 거예요? 나중에 알았죠. 그런 감독도 있으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해주는 감독을 만나는 게 배우가 될 확률보다 더 희박하다는걸. 결국은 자기가 만들어 가야 되는 거더라구요. 결국 내 선택에 의해 내 삶이 만들어지는 거죠. 내가 그걸 선택했으니 비련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거죠.

그게 무서운 거예요. 배우를 비롯해서 많은 대중 아티스트들이 시장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하고, 여러 번의 선택이 모여 부정할 수 없는 나를 만들죠. 지원 씨는 운이 좋은 편이에요.
그래요? 하하. 네.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요즘엔 관객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모르겠어요.

모르는 것도 좋아요. 자기를 믿고 지금처럼 그냥 쭉 가세요. 나는 지원 씨가 문학적인 여배우로 보여요.
문학이요? 크리스챤이 되고 나서는 거의 성경과 기독교 서적만 읽어요.

추천해준다면?
<상한 마음의 치유>가 좋아요.

데이빗 씨멘즈 책이죠? 저도 좋아해요. 같은 맥락으로 정신과 의사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도 훌륭해요. 좋은 감독도 배우에겐 정신의 치유 효과를 주죠. 홍상수 감독이 <극장전>에서 똑똑하고 심플한 여배우 엄지원을 발견해 줬잖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도 그랬고.
맞아요. 감독들과 소통하면서 친구처럼 지내고, 우리가 만들어가는 예술 세계에 대한 기쁨이 꽉 차 있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는 내가 생각하는 예술적 유토피아의 기쁨을 누리며 그게 전부인 것처럼 살았어요. 그런 교류와 감성을 잃고 싶지 않았어요. 저의 20대는 그런 에너지가 움직였던 것 같아요. 온전한 존재로 빛을 발하며 만족하며 산다면 자유할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지원 씨에게 지금은 과도기인 듯하군요. 전 얼마 전에 드라마 <싸인>에서 지원 씨의 검사 역할이 상쾌했어요.
하하. 그런 똑 부러진 느낌 좋아요.

비련의 여인에서 신분 상승한 느낌?
그렇죠. 하하. 배우가 할 수 있는 게 한정적이잖아요. 만약에 마지막에 하나의 역만 할 수 있다면 저는 왕이나 여왕을 해보고 싶어요.

신분 상승의 최고 절정이군요.
언젠가 승마를 배우는데, 임호 선배님이 오신 거예요.

아! 왕 전문 배우요?
네. 그 선배님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가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의 통로가 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왕을 하면 그들의 선택과 고민과 삶을 다 짊어지고 이해하면서 인간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요? 상상으로 표현해낸다고 해도.

맞아요. 콜린 퍼쓰도 <킹스 스피치>를 하면서 좋은 경험을 했을 거예요. 지원 씨는 어떤 왕이 되고 싶은데요?
명성황후 혹은 선덕여왕. 그녀들의 월드는 얼마나 넓을까요?

하하. 그분들의 연애가 저는 더 궁금하네요. 지원 씨의 연애 라이프는 어떤가요?
연애는 모르겠고 결혼은 해야죠. 그런데 제 주위에는 새벽 기도하고 배우자 기도해서 다들 웨딩 팡파레를 울리던데 왜 저만…, 유독 저만, 배우자를 안 주시나요? 하나님!! 그런데 또 남자를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건 아닌 듯해요. 남자를 만나기 위한 외출! 헛되고 헛되도다!

하하. 여배우의 연애는 연기에 도움이 되나요?
아무래도 많은 감정을 경험하게 해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꼭 불 같은 사랑, 자유로운 사랑을 해야 연기 잘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여전히 연기가 잘하고 싶은가요?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게 고민이죠?
할 때는 취해서 가니까 모르는데, 요즘은 ‘잘 할 수 있으려나?’ ‘이게 맞나?’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누구나 두려움은 있어요. 그냥 뻔뻔하게 가는 거죠. 영화 <페스티벌>에서도 영어 연기와 판타지 섹스 신을 리얼하게 했잖아요?
맞아요. 연기는 인생처럼 정답이라는 게 없으니까, 자기는 그냥 믿고 가면, 똑똑한 연출자가 알아서 정리를 해주는 거죠. 목자가 양 떼를 키우듯 잘 몰고 가면 나는 그 안에서 기뻐하면서 즐겁게 풀을 뜯으면 될 것 같아요.

오래 할 생각이에요?
지금은 계속 하는 게 좋아요.

크게 집착은 안 하네요?
이 일이 자아실현과 만족감 때문에 하는 거잖아요. 더 행복한 일이 나타나면 그걸 해야죠.

지원 씨는 시트콤을 하면 잘할 듯한데요?
정말 하고 싶어요. 저는, 정말 시트콤 하고 싶어요.

김병욱 감독에게 전화해 봐요.
7월 말에 이미 시트콤 들어가신대요. 윤유선 언니가 캐스팅 됐다고.

윤유선 씨에게 말해봐요. 아니, 먼저 간절히 기도해 보세요. 윤유선 씨가 <선덕여왕> 캐스팅될 때도 선교사님이 예언해 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이요? 저도 예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제가 큰 리더가 될 거래요. 저는, 리더 딱 싫은데…, 큰 나무가 돼서 밑의 나무를 키운대요.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아! 저는 그냥 작은 행복을 누리고 싶은데.

하하. 통로가 될 운명이잖아요.
제가 쏙 반하는 일에 쓰이고 싶어요.

전라 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어릴 때는 했을 거고, 지금은 안 하고 싶어요. 그게 나를 반하게 했다면 할 수 있는데, 점점 더 반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어요. 맞아요. 저는 항상 반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남자에게도, 영화에게도 반하고 싶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