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주년 여배우 특집-신세경] 불순물 한 점 없는

신세경은 깨끗하게 빈 채로 무엇이든 담겨지길 기다리는 비커 같다. 감독들이 그녀를 찾는 데는 이유가 있다.

수영복은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 블랙 톱은 이상봉(Lie Sang Bong), 슈즈는 지미 추(Jimmy Choo).

화이트 보디수트는 헥사 바이 구호(Hexa by Kuho).

<보그>랑 촬영 해본 적 있어요?
작년 겨울인가 공효진, 윤은혜 언니랑 패션 화보 촬영했었어요.

재밌었어요?
네. 급하게 했는데도 굉장히 즐거웠어요.

영화 <푸른 소금>은 언제 찍었어요?
작년 여름부터 올해 초까지요. 원래 설에 개봉 예정이었는데 추석으로 미뤄졌어요.

멜로 드라마죠?
원래는 누아르 액션이었는데요, 송강호 선배님이 정통 멜로를 해본 적이 없는데다가, 저도 킬러 역이지만 여리고 감성적인 느낌이 묻어나서 찍다 보니 멜로를 향해 가더라구요.

송강호 선배와 나이 차이가 어떻게 되죠?
강호 선배님은 67년생, 저는 90년생이니까 23년 차이예요.

이현승 감독이 두 사람을 위해 공을 많이 들였겠어요?
<시월애>가 마지막이었으니까 거의 10년 만에 영화를 하신대요. 그래서 더 색다른 멜로를 구상하셨어요. 파이널 편집본 봤는데 저는 너무 좋은 거예요. 객관성이 없겠지만 저는 정말 좋았어요.

어떤 장면이 그렇게 좋았어요?
사람들이 송강호 선배님을 보면서 ‘아! 저런 남자한테 사랑받고 싶다’고 느낄 거예요. 멋진 남자 캐릭터가 탄생했어요. 남자는 조직의 보스고, 저는 사격을 했던 여자인데 어쩔 수 없이 남자를 죽여야 하는 역할이거든요. 은근히 슬퍼요.

<밀양>도 생각나고 <쉬리>도 떠오르고 <박쥐>도 연상되는데요?
<박쥐>도 다시 봤는데, 우리 영화랑은 색감이 완전히 달라요. <푸른 소금>은 정말 한 편의 수채화 같아요. 이 감독님이 전에 연출하셨던 <시월애>나 <그대 안의 블루>처럼 서정적인 컬러예요. 감독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여자는 예뻐야 한다고….

세경 씨는 그러면 예뻐서 캐스팅 됐나요?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제가 안 하면 질투 날 것 같아서 했어요.

그러면 <지붕 뚫고 하이킥>을 보고 캐스팅한 거네요?
그럴 거예요. 다른 거 본 적 없으실 테니까.

주로 아역을 많이 했죠?
네. <선덕여왕>에서 박예진 선배님의 천명 공주 아역, <토지>에서 김현주 선배님의 서희 아역 했어요.

영화 <어린 신부>에서는 문근영 씨와 함께 나왔잖아요?
네. 근영 언니하고 첫 작품 했어요. 중학생이었는데, 그때는 고등학생 역할을 했어요.

그래도 신세경 하면 모두가 <하이킥>을 얘기하죠.
그럼요. 작년에 끝나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 그동안 TV에 노출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제가 아무것도 안 하는 줄 알아요. 속상해요. 저는 <푸른 소금> 찍고 바로 영화 <비상> 들어갔거든요.

<비상>은 비, 정지훈 씨하고 함께 촬영하죠?
네. 그런데 그게 또 <탑건> 같은 파일럿 영화다 보니까 비행기가 주인공이라 비행기 스케줄에 맞춰가야 돼요. 다 파일럿인데 저만 정비사로 나와서 되게 재미있어요. 점프 수트도 예쁘고.

가만, 얼굴에 뭐가 많이 났네요?
활주로에 그늘이 없거든요. 땡볕에 서 있다 보니 얼굴에 뾰루지가 많이 나요. 또 7월부터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들어가요.

와~! 눈이 돌아갈 지경이네요. 시대극이죠?
네. 세종대왕 이야기인데, 한석규, 장혁 선배님이랑 같이 해요.

상대역이 다 찬란하네요. 송강호에서 비를 거쳐 한석규까지.
네. 제가 상대 배우 복이 많은 것 같아요. 드라마에선 한석규 선배님이 세종대왕이신데, 역사에서 알던 그런 왕이 아니라 의외의 면이 많은 재미난 왕이에요. 저는 실어증에 걸린 궁녀고요.

실어증이면 대사는 안 외워도 되겠네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못하니까 되게 어려워요. 그런데 그게 한글창제하고 연결이 돼요. 한글은 모든 소리를 글로 적을 수 있다는 거에서 시작되잖아요. 세종이 궁녀를 앉혀놓고 어디를 움직여서 소리를 내보아라, 그러거든요.

그렇게 소리를 내다가 실어증이 풀리나요?
그것보다는 좀더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어요.

그런데 말 안 하는 거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맞아요. 원래 갖고 있는 이미지가 그렇대요. 차분하게 가라앉는, 억울한 게 많은 듯한 캐릭터라고.

<토지>나 <하이킥>도 억울한 느낌이 강하네요.
네. 한 번도 마냥 밝은 역할을 한 적이 없어요. 하이힐 신어본 적도 없고, 단화만 신었어요.

<하이킥>의 김병욱 감독은 세경 씨를 어떻게 그리도 매력적인 신파 캐릭터로 만들었을까요?
그죠? 김병욱 감독님은 희극을 만드시는 분인데 비극적 성향이 강해요. 너무 신기해요.

요즘 세상에 시골에서 상경해 식모로 들어가는 캐릭터는 상상하기 힘들어요. 게다가 상경하는 장면은 정말 슬프더라구요.
저도 그 장면 슬펐어요. 정음 언니는 밝고 톡톡 튀는 캐릭터라 이목이 집중되는데, 그 코미디 속에서 저의 슬픈 상황이 가지는 힘이 있더라구요.

세경 씨의 진짜 성격적인 매력은 뭐예요?
저요? 제 매력이요? 저는…, 오래 지내봐야 돼요. 친구들이랑 있을 때는 되게 밝아요.

세경 씨가 베이비 글래머, ‘베이글녀’라고 이미지화되면서 광고계에서 러브콜도 많잖아요. 함께 광고 찍고 싶은 사람 있어요?
전 김갑수 선생님 좋아해요. <토지> 때도 김갑수 선생님이랑 했는데 배울 점이 참 많았어요.

연상의 남자와 그림이 잘 붙네요.
다들 그렇대요. 지훈이 오빠하고 여덟 살 차이인데, 그게 가장 차이가 적은 거예요. 또래랑 하는 걸 까먹을 거 같아요.

예쁘지만 평범해 보이는 면이 있어요.
네. 워낙 예쁜 아이돌 친구들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전 외모에 집중하는 걸 조절하려고 해요. 촬영하다 보면 감독님이 “어떤 앵글이 예뻤어” 얘기해주시니까 자꾸 그걸 기억하게 돼요. 오만 가지 감정을 연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한쪽에선 또 앵글에 신경 쓰니까 힘들더라구요. 그냥 내 몸은 직업상 데리고 살아야 하니까 연기를 침범하지 않을 정도만 신경 쓰려구요.

이미 10년을 그 몸으로 일을 한 셈이네요.
네. 어릴 땐 더 순도 높게 일했던 것 같아요. <토지> 때부터. 그런데 어릴 땐 안 그랬는데 요즘에는 몇 개월 같이 촬영하다가 함께 일한 배우들이나 스태프들과 헤어지는 게 참 슬퍼요.

배우는 몇 달 간격으로 이별을 겪어야 하죠.
네. 그래서 영화 하는 사람들끼리 집 지어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요. 어른들은 저희보다 이별을 더 많이 겪어서 마음이 딴딴해진 것 같아요. 이번에 <푸른 소금> 찍고 나서는 저도 잘 이겨내는구나 싶어요. 똑같은 압력이나 상처를 받아도 바위나 두부가 다치는 게 다르듯이.

순수한 몰입이 있네요. 세경 씨는. 근영 씨와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 <장화 홍련>의 자매처럼.
근영 언니랑 잘 만나지는 못하지만 비슷한 점이 많아요. 같이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근영 씨는 오랫동안 어린 이미지였는데, 세경 씨는 일찍부터 여자 냄새가 났어요.
사람들한테 알려진 게 스무 살 무렵부터여서일 거예요.

그런데 머리에 피스 붙인 거예요?
아? 네! <푸른 소금>에서는 머리가 짧았는데, 지금은 다시 긴 머리여야 해서 실리콘 머리를 이고 다녀요.

무겁고 힘들 거예요. 두피도 많이 상하고.
익숙해져서 느낌이 별로 없어요.

여배우 신체 중에 머리카락이 가장 중요하죠.
맞아요. <푸른 소금>에서는 총도 들고 터프한 이미지라 커트인데, 지금은 또 청순한 역할이라 길어야 하고….

우리나라 여배우 중에 삭발한 사람은 김지미, 강수연 씨가 유일할 거예요. 세경 씨도 삭발을 할 수 있나요?
작품이 좋으면 해야죠. 호호. 그런데 저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너무 멋진 분들이 많으셔요. 저는 갈 길이 너무 멀어요.

송강호 선배님도 여배우를 귀하게 대접해 주시죠?
네. 다 서 있어도 저만은 앉을 수 있게 배려해 주셔요.

베드 신은 있었나요?
아뇨, 아뇨. 키스 신도 없었어요. 그래도 멜로예요.

세경 씨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요? 사랑, 해봤어요?
저는 했는데, 그게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엄마가 딸을 사랑해주는 마음과는 다른 거잖아요. 남자 여자가 사랑하는 건 이기적인 마음이 기본이고. 설레고 두근거리고 행복하다가 그 마음이 변질되고 상처 받고, 그래서 늘 미완성인 것 같아요.

최승자 시인의 시 중에 라는 시가 있어요. 마지막 구절이 “오, 개새끼 못 잊어”예요. 이별과 낙태를 주제로 한 시인데, 귀기 어린 모성의 시인은 “널 내 안에 다시 낳고 말 거야”라고 절규하죠. 세경 씨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그 시가 생각나는군요.
아! 저 그 시 알아요. 이현승 감독님이 선물해 주셨어요. 이번 영화의 감성을 이해하는 데 좋다고 하시면서 최승자 시인의 시를 낭송시키셨어요. 독백 같은 시들이 다 감정이 격하고 불 같고 파도 같고, 그걸 모놀로그처럼 했어요. 감독님하고 같이. 저한테는 처연하고 여린 느낌만 있으니까 그 안에 거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으셨나 봐요.

정말 멋진 배우 조련법이네요.
재미있었어요. 또 영화 <니키타>의 스크립트를 인쇄해서 열심히 읽었어요. 총 들고 뛰어다니면서 연습했어요. 그 영화 주인공 이름이 조세핀인데, 제 이름도 그걸 본 떠서 조세빈이었어요.

아! 정말 여배우는 미완의 여자로 시작해서 영화와 함께 자기 캐릭터를 찾아가는 존재군요.
그런 것 같아요.

어떤 여자가 되고 싶어요?
작년쯤인가 천편일률적으로 사람들이 저를 보면 여성스럽다, 슬프다, 우울하다 그런 쪽으로만 몰고 가서 되게 혼란스러웠어요. 저의 밝은 면을 저는 아는데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래서 저 혼자 억지스럽게 남자 애처럼 굴기도 했어요. 어느 순간 이것도 아닌데…, 생각해보면 제 캐릭터는 그냥 조금씩 쌓여가는 거다, 싶어요. 얼마 전엔 <파수꾼>이라는 영화 보고, 완전 한방 먹은 것 같았어요. 남고생들의 우정과 변절의 이야기인데…, 아! 청춘은 아무리 파도 마르지 않는 우물 같구나.

세경 씨의 매력은 불순물이 없다는 거예요. 깨끗하게 비어 있어서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가 있죠. 감독들은 앞으로도 세경 씨를 많이 찾을 거예요.
그러면 영화가 끝나고 남은 찌꺼기들은 어떡하죠?

그런 게 조금씩 쌓여서 신세경이라는 특질이 만들어져 갈 거예요. 좋든 나쁘든.
아! 배우란 그런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