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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주년 여배우 특집-김여진] 용기 있다

2016.03.17

by VOGUE

    [15주년 여배우 특집-김여진] 용기 있다

    김여진이라는 이상한 배우가 한국 사회에 불시착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뜨겁게, 존재하고 있는 이 여배우가 언젠가 꼭 하고 싶은 배역은 ‘세기의 미친년’.

    네이비 롱 원피스는 르베이지(Lebeige).

    오늘 찍으려고 하는 이미지가 약간은 청교도적이에요. 몸가짐은 보수적이고 정신은 바른 여자.
    그거 나랑 아주 다른데요? 난 내 트위터 아이디도 ‘날라리 외부세력’이에요.

    날라리? 김여진 씨가 날라리였어요?
    그럼요. 진보 진영에서도 보수적인 분들은 저 아주 싫어해요. 제가 얼마 전에 홍대 청소용역하시는 어머님들 농성하실 때도 모금해서 <조선일보>에 광고를 했잖아요. 그때도 사람들이 보수라고 정평이 난 신문에 왜 그런 광고를 하냐? 그래서 난 니 편 내 편 안 가린다. 홍대 총장이 영자 신문, 일어 신문, 그리고 <조선일보> 3개를 본다고 해서 그럼, <조선일보>에 광고해야 효과가 있지. 그런 거예요. 전 진보든 보수든 그런 거 상관 안 해요. 양쪽을 같이 흔들어요.

    요즘엔 연예 뉴스가 아니라 <9시 뉴스>에 나온다고 비꼬는 사람도 있죠. 연기는 안 하고 시위 현장에 가 있나, 그런 오해 받죠?
    그게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전 집회 한 번 안 가고 촛불 한 번 안 들어본 사람이에요. 전 그 방법 재미없고 효과적이라고 생각 안 해요. 트위터에서 사람들하고 아이디어 주고받고 그게 괜찮으면 그냥 행동에 옮겨요. 굉장히 리버럴하죠.

    오늘 사진이랑 정반대겠어요.
    그러게요. 바르다? 아니에요. 제멋대로죠.

    그래도 바르게 살려고 하는 거잖아요.
    모든 사람이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어 하는 거 하면서 두려움 없이 살기를 바라는 거죠. 저는 사람들이 절대로 지켜야 할 가치나 도덕이라고 규정한 것에 개의치 않아요. 모든 건 변하는 거잖아요. 여자들 투표권 생긴 것도 100년도 안 된대요.

    그러니까 사회 통념을 깨고 싶다? 그런 거죠? 어쨌든 그건 방법적인 거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게 진심이죠?
    언론의 목소리가 10% 가진 사람들의 생각만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니까, 나라도 그래야죠. 누구나 입장이 있는데 한쪽 손만 들어주니까, 절대 다수인 노동자 목소리도 들어주자는 거예요. 나는.

    트위터가 일간지보다 더 영향력 있어졌죠. 요즘은.
    유명인들한테는 진짜 트위터가 양날의 칼이에요.

    트위터 안에서 진짜 캐릭터를 찾은 듯 보이네요.
    저하고는 잘 맞아요. 친교를 목표로 하지 않고 낯선 사람들과 얘기를 주고받는 게 재밌거든요.

    <100분 토론>에서도 활약이 대단했어요. 보통 말로 조곤조곤 민심을 대변하셨죠.
    보통 말이라, 그 말이 맞아요. 거기 나오시는 분들은 전문성도 있고 신뢰감도 주지만 거리감이 느껴지잖아요. 언어가 주는 틀이 있으니까. 근데 저는 대단한 의식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제 의견을 상식 선에서 말한 거예요. 초중고에서 배운 게 거짓말 안 하고 모르는 건 물어보고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가 있고 세금은 가진 사람이 더 많이 내는 거잖아요.

    그런데 배우가 보통 사람들 사는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4~5년 전부터 JTS라고 국제보호단체에서 일했어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사는 아시아 사람들 돕는 단체예요.

    노희경 씨가 시작해서 북한 어린이 돕기에 배우들이 많이 참여하던 그 단체 말이군요.
    네. 거기서 상근으로 일주일에 5일을 자원봉사로 일했어요. 대학생들하고 많이 다녔고, 실제로 사람들 사는 것을 다 보고 다녔어요. 뉴스나 신문에 안 나오는 그런 얘기들이 있어요. 홍대 청소용역 어머님들도 최저임금 못 받으면 어떻게 사는지 제가 다 실제로 봤어요.

    그렇게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건 인간 김여진의 역할인가요? 배우 김여진의 역할인가요?
    터닝 포인트가 있었어요. 배우로 살면서 불안감이 있었죠. 사람들의 환상을 채워주며 화려한 듯이 살지만,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게 참 슬픈 거예요.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진하듯이. 특히나 연기자는 감정을 쓰는 게 직업이고, 그 감정을 과잉으로 쓰니까 쉽게 우울증이 오고 중독에 빠지는 거예요. 드라마나 영화 하면서 감정을 열 배로 쓰던 사람이 점잖은 일상으로 오면 적응이 안 되는 거죠. 높이 올라갈수록 병이 드는 거예요. 저는 뭐 대단한 스타는 아니었지만….

    여진 씨는 배우라는 틀이 처음부터 단단한 편이었죠. 어린 나이일 때도.
    그게 <처녀들의 저녁식사> 할 때가 스물 여덟이었어요. 운 좋게 강수연, 진희경 같은 카리스마 있는 분들하고 처음 해서….

    당시에도 그분들 말이 ‘김여진이라고 신인인데, 절대 나한테 안 꿀려’라고 했어요.
    젊고 예쁜 여배우랑은 달랐죠. 그런데도 더 좋은 역할 하고 싶고, 하고 나면 더 허전하고 고파지는 거예요. 그러다 2007년 즈음해서 배우들이 한두 명씩 자살하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게 최진실 언니가 자살한 거.

    故 최진실 씨는 아직도 전 국민적인 트라우마예요.
    그게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여배우고 시련을 견디고 일어선 여배우라서 그래요. 최진실 씨는 그래서 배우들의 워너비였어요.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이거든요. 최진실 씨는 오뚝이 같았다구요. 그런 그녀가 자살을 해버렸으니, 아! 내가 달려가는 끝이 바로 저건가. 내가 갖고 있는 욕망, 저 작품만 하면, 저 사람 만큼만 뜨면, 그런데 그렇게 간다 한들 그게 행복과는 무관한 거구나. 그럴 즈음 JTS를 만나서 활동을 시작한 거예요.

    배우로서의 허기와 허욕이 진짜 리얼리티를 만난 거네요.
    그때가 <이산>에서 정순왕후를 할 때였는데, 모금함을 들고 배우들이 다 명동 거리엘 나갔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한지민 씨만 알아보고 거기에 다 기부를 하는 거예요. 차라리 그때는 배우가 아니었으면 싶었죠. 심지어 자원봉사자들이 거든다고 ‘이분 탤런트 누구신데
    모르세요?’ 이러면 그냥 신경질 나서 딱 도망가고 싶어져요. 그때 들었던 생각이, 내가 여길 왜왔나?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사는 가족들, 하루 한 끼 먹는 그 애들 먹이려고 왔는데, 내가 온통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나 몰라보나 그거에만 정신이 팔렸구나. 아! 이게 진짜 부끄러운 거구나. 내가 나라는 사람의 아픔에 사로잡혀서 진짜 아픔을 못 보는구나.

    그래서요?
    JTS 구호가 그때야 보여요. “배고픈 사람은 먹여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 받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배워야 합니다.” 이걸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돈도 모이는 거예요.

    배우의 병적인 자아에서 빠져 나와 사회적인 자아를 찾은 건가요?
    그런 셈이죠. 내가 아파하던 게 굶어 죽는 거에 비하면 그렇게 대단한 건가? 내 문제가 오히려 아주 가뿐하고 사소해지는 거예요. 내 속이 작아서 문제를 조이고 괴로워하던 거지, 마음이 팽창돼서 보면 크게 괴롭지가 않아요.

    여배우의 사회 의식이 성장했다고 해도, 보는 사람이 그 모습을 다 기꺼이 동의하는 건 아니에요. 사회적 발언이 이슈화되면서 왈가왈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진 않나요?
    저는 거의 힘들지 않아요. 아버지는 약간 더 신나하시는 것 같고, 남편도 자연스럽게 봐요. 다들 나한테 상처가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캐스팅에 영향을 받을지도 모를 텐데…
    분명한 색깔이 있으면 몰입이 힘들 수도 있겠죠. 방송이 안 되면 영화 하고, 영화 안 되면 연극 하고, 연극이 안 되면 새로운 장르의 거리 공연을 개척할 수도 있잖아요. 어떤 걸 못하게 됐다고 해서 두렵진 않아요. 그러면 새로운 장르를 찾고 활동 폭을 넓힐 수 있으니까.

    혹 그런 여배우 모델이 있나요?
    마릴린 먼로도 매카시 열풍 때 남편 아서 밀러가 공산주의자로 핍박 받던 상황에서 결혼했잖아요. 수잔 서랜든도 정치적인 행동에 거침없고. 프랑스 여배우들은 동물, 이주노동자 문제 등 정치적인 의지가 없으면 덜 지성적으로 평가 받는데요.

    우리나라에도 정치적 의견이 있는 여배우가 출현했다는 게 놀라워요.
    다양성 차원에서 저 같은 여배우가 있는 것도 재밌잖아요. 요즘엔 다른 배우들도 동물, 환경, 자선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연예인을 보는 시각이 이중적이라, 스캔들은 즐기고 공익적인 활동을 하면 또 의심하고 흉을 보죠.

    그게 인간의 모습인 거죠.
    맞아요. 인간의 모습이네요.

    마음이 참 튼튼해 보여요.
    쉽게 상처 받지 않아요. 처음 <처녀들의 저녁식사> 오디션 볼 때도 저는 연극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었어요. 연출부에서 2차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해서, 제가 화냈어요. 공연하는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마라. 그랬더니, “너 이거 되면 인생이 바뀌어” 그래요. “전 인생 바꾸고 싶은 생각 없거든요. 전 무대에 서는 걸로 충분히 만족하고 미련 없어요”하고 버텼더니, 덜컥 됐어요. 웃기는 애라고 그러면서. 연기하면서도 눈치도 안 보고 떨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영화로 신인상도 받고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니까 그때부터 불편해지고 당당해지지가 않아요. 우울해지는 거죠.

    남편이 PD죠?
    MBC 드라마 PD예요. <개와 늑대의 시간> <로드 넘버원>했어요.

    여진 씨 같은 여배우를 아내로 두다니 품이 넓은 사람이겠어요.
    고맙게 생각해요. 제 베스트 프렌드죠.

    연기에 대해 조언도 해주나요?
    JTS 사무실 출근할 때, 그렇게 살면 여배우로서 감을 잃지 않겠냐, 그러긴 했어요. 그런데 전 일이 들어오면 다시 배우로 살아요. 오히려 평소에 좋은 사람들, 보통 사람들 많이 만나야 영혼에 도움이 된다고 봐요. 배우라는 틀 안에 갇히면 오히려 정형화돼요. 내 인생이 버라이어티하고 재미나야 연기도 펄떡이죠.

    연기관이나 아웃풋이 좀 바뀌었나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나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을 할 때의 잡초 같은 여자와는 좀 다른 듯해요. 예전엔 좀더 장악력이 크고 짱짱했는데, 요즘 <내 마음이 들리니> 드라마에선 좀 훌훌해 보인다고나 할까요.
    저는 20% 살짝 부족한 연기를 해요. 열연하는 걸 안 좋아해요. 100이 정답이면 120까지 끌어올렸다가 꾹 눌러서 80만 했는데, 요즘엔 그냥 딱 80만 해요. 그래서 좀 건조해 보이기도 하고. 요즘엔 징하게 열연도 해보고 싶네요.

    현실에서 열연하고 있잖아요.
    하하하. 얼마 전에 한나라당 정책자문위원이신 박용호라는 분이 트위터에서 절더러 ‘미친년’이라고 하셨어요. 5.18 다음이었는데, 저는 촬영하러 가면서 그걸 보고 ‘…맞을지도’라고 썼거든요. 그걸 이외수 선생님이 ‘누가 미친년인가 판단해보자’고 리트윗’하셔서 뉴스에 나고 결국 그분 당에서 공식탈퇴 하셨잖아요. 그때 생각했는데, 아! 진짜 미친년 역할 한번 해보고 싶다. 얼마나 신선해요. 미친년.

    미친년 안 해봤어요?
    안 해봤어요. 저 세기의 미친년 역할 해보고 싶어요. 허난설헌이나 나혜석 같은 분들이 그 시대에 꿈도 안 꿨던 행동을 해서 일파만파 지탄을 받으셨던 분들인데… 그런 진정한 미친년이고 싶은 거죠. 저는.

    참, 일관된 사람이네요.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에서 일관된 사람이죠. 전 두려움이 정말 없어요. 그런데 이 옷들 정말 단순한데 예쁘네요.

    단순한데 예쁘기란 참 쉽지 않아요. 군더더기 없이. 사람도 그렇죠. 연기도 그렇고.
    맞아요. 결국은 잘 살아야 좋은 연기가 나와요. 재능만 가지고는 길게 갈 수가 없어요. 바른 삶을 살아야 된다, 그건 아니구요. 실패나 실수 후에도 담백하게 인정할 수 있는 삶이어야겠죠. 인생을 길게 변명하고 설명하면서 힘 빼고 싶지 않아요. 욕먹을 수 있다, 이거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뭘 못하진 않는다는 거예요.

    요즘 연기도 설명 안 하면서도 숨통이 트이는 그런 연기처럼 보여요.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전 쉼표 같은 존재죠. 캐릭터는 카리스마 있지만 ‘저 여자 누구야?’ 싶게 코믹하잖아요.

    처음부터 임상수, 이창동, 임권택 같은 감독들이 알아봤는데, 그분들이 김여진에게 기대하는 연기가 있었죠?
    저를 캐스팅한 분들은 제가 어떻게 연기할 줄 알고 캐스팅하세요. 영화뿐 아니라 <대장금> <이산> 같은 드라마에서도 다 자기 주관이 강했죠.

    존재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마음이 약해지면 존재감이 약해져요. 존재감은 본인의 마음의 결정을 상대가 알아차리는 거죠. 내가 단단할 땐 사람들도 알아봐요. 그런데 연기자의 존재감은 또 작품에 따라 달라지는 거 같아. 미친 존재감 욕심 때문에 작품이 영향 받을 수도 있는데 그 욕심 버리기가 쉽지 않아요.

    여진 씨도 그런 욕심 부린 적 있어요?
    <푸른 물고기>라는 드라마를 할 때 고소영의 고모 역을 했어요. 저를 캐스팅할 때는 주인공의 정신적인 지주인데다, 비중이 크다고 했는데, 역시 그냥 다리 역할이었어요. 게다가 저는 고소영 씨랑 동갑이었고… 욕심이 생겼다가 스트레스 받아서 그냥 놨어요.

    언제 뜨겁게 존재한다고 느껴요?
    요즘이요.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사니까. 사람들은 타인을 자기 맘대로 통제하려고 해요. 그래서 반대 의견을 못 참고 틀렸다,고 그래요. 자기 의견을 납득시키려면 몸을 움직여서 실천하면 돼요. 그러면 내 존재가 스스로 뜨거워져요.

    행복하겠어요?
    행복하죠. 우리 일 하는 사람들이 다 몰입 중독이 있잖아요. 몰입하면 행복하잖아요. 요즘엔 트위터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아이디어 주고받고 그걸 현실에 구현하는 데 재미를 붙였어요. 홍대 청소용역 어머님들 문제도 모금하고 <조선일보> 광고하는 데 6일 걸렸어요. 그게 여론화되면서 170명 전원이 복직되고 주5일 근무에 최저임금보다 높게 받는 걸로 해결이 됐어요.

    사람들을 들끓게 만들었군요.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거죠.

    현재 배우로서 보다 활동가로서 더 주목 받는 데 부담은 없나요?
    지금은 감수하고 있어요. 지금은 드라마에 제 인생 전부를 담을 수는 없어요. 배우로서의 갈증? 그건 연극으로 풀어야 할 것 같아요. 타격? 그냥 돈 버는 건 포기해야겠구나 정도.

    올해 마흔이죠?
    그러게요. 마흔이 되니까 사는 게 버라이어티한 게 재미있어요. 토크쇼도 하고 책도 쓰면서 내 즐거움을 더 찾고 싶어요.

    오늘 작업 어땠어요?
    영화 한 편 찍은 거 같네요. 이렇게 프로들끼리 힘을 합쳐서 정교하지만 스무쓰하게 가는 거 정말 중요해요. 저는 많은 젊은이들도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대학 나오자마자 등록금 대출 때문에 신용불량자 되는 그런 사회 말고 열심히 하면 인정받고 대가도 따르는 그런 사회요.

    마지막으로 김여진을 설명해 봐요.
    지금, 이순간, 몰입.

      포토그래퍼
      김보하
      스탭
      스타일리스트/한연구, 헤어 / 유다(Duet), 메이크업/류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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