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주년 여배우 특집-송윤아] 뼛 속까지 여자

우리에게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있는 연기자. 타고난 성정대로 살고 있는 천상 여자 송윤아의 평화로움.

블랙 케이프와 홀터넥 점프 수트는 YSL, 블랙 와이드 벨트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블랙 펌프스는 YSL, 블랙 스와로브스키가 박힌 팔찌는 데레쿠니(Derercuny), 귀고리는 수엘(Suel).

화이트 턱시도는 YSL.

좀 전에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좀 의외였어요. 보통 여배우들은 촬영 직전에 그렇게 제대로 식사를 하진 않거든요. 매니저에게도 귀여운 억양으로 물으셨죠. “오므라이스 먹을겨, 물냉면 먹을겨?”
하하, 저는 배고프면 뭘 할 수가 없어요. 먹고 싶은 걸 의식하고 참아본 적도 없고요. 먹는 행위 자체를 너무 좋아해요.

출산 후 첫 공식 무대인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MC 했을 때, 소녀시대 노래에 맞춰 춤을 췄어요. 소녀시대 유니폼처럼 딱 붙는 의상을 입고서.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몸도 안 따라주는데 살까지 많이 안 빠졌을 때였거든요. 사실 이런 얘기하면 제 자신이 좀 창피해져요. 왜 마사지 받고, 운동 하고, 이것저것 가꾸는 데 관심 많은 여자 분들 있죠? 제가 그런 여자였으면 이 직업과도 어울렸을텐데 전 그렇질 못해요. 오늘 손톱에 아무것도 안 바르고 온 거, 여기 와서야 깨닫고 조금 부끄러웠어요. 영화 <웨딩 드레스> 이후 2년 가까이 연기를 쉬고 있지만, 머지않아 카메라 앞에 다시 서야 할 사람인데 이대로 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제 나도 좀더 가꾸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요즘 해요.

그동안 화보 인터뷰를 많이 안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잘 못해요. 똑같이 뭘 표현하는 일이라도 모델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은 또 다른 역할극이잖아요. 저는 그냥 드라마 연기가 편한 사람이지 화보 촬영이라고 하면 참 어색해져요. 물론 그렇다고 연기를 잘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95년도 KBS 슈퍼 탤런트 선발대회로 데뷔했어요. 출연작들 중에서 배우로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뭐죠?
배우로서 꼽으라면 좀 자신 없어져요. 뭐, 여러 가지가 포함될 수 있죠. <왕초>의 연지라는 기생 아이를 제가 참 많이 좋아했어요. 춘삼이를 만나면서 사랑하고 이별하고, 인생 파란만장해서 촬영하는 내내 마음이 많이 갔던 여자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땐데 저는 스스로 성숙하다고 생각했어요.

여배우들의 데뷔 초 모습은 아무래도 앳되고 촌스럽기 마련이죠. 그런데 송윤아 씨는 등장할 때부터 세련되고 성숙한 여인의 느낌이었어요. 그때와 지금 달라진 건 메이크업 정도?
<왕초> 보면 지금보다 오히려 늙어보여요, 하하.

그런데 송윤아 씨는 어쩌다 참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을까요? 저는 늘 귀여운 면이 있는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조금 푼수기가 있어요. 오빠(설경구)가 맨날 제가 세상 사람들을 너무 속이고 산대요. 우아하다는 수식어는 사실 기자 분들이 만들어주신 거예요.

아이러니한 건, 알려진 이미지와 상관없이 어필했던 작품은 나사 하나 빠진 모습이나 푼수로 나왔을 때라는 거예요. 영화 <광복절 특사>, 드라마 <호텔리어> <온에어>가 그랬죠.
맞아요, 그럴 때 반응이 왔어요. <미스터 큐>의 악역은 좀 다른 경우고요. <광복절 특사>로 영화제들 여우 조연상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혹시 이런 기분 아세요? 사실 저는 영화에서 몇 신 나오지도 않았거든요. 어쨌든 짧은 기간 동안 의미있게 촬영했고, 영화 잘 됐고, 그렇게 좋은 일로 끝나면 되는데 제게 상을 주는 거예요. 주인공 하다가 조금 다른 이미지로 짧게 나온 작품에서 잘했다고 상을 주니까….

상을 받고도 좀 의아했군요.
뭔가 싶었어요. 해가 바뀌고 춘사 영화제에서 또 상을 주더라고요. 이게 나의 숨겨진 파워인가! 싶기도 했어요.

배우로서 아쉬운 점이 있는 편인가요?
있었던 적이 있어요, 몇 년 전까지요. 결혼을 앞두면 마음이 괜히 더 복잡해지잖아요. 이 길을 택하면 연기자로서 더 창창해질 앞이 보이는데, 저 길을 택하면 내가 뭔가 포기해야 할 것 같은 느낌. 그 갈림길에서 저는 결혼을 선택했어요.

하하, 잘한 선택일 거예요.
이게 참 현실적인 얘기인데, 아이를 낳고 보니 그때라도 결혼을 한 게 다행이다 싶은 거예요. 아이를 생각하니 제 나이가 좀 많더라고요. 남아 있는 생을 두고 봤을 때 어느 시기에 일 욕심을 더 내지 않았던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렸을 때 꿈꾸던 30대의 모습으로 지금 살고 있나요?
아니요, 저는 그냥 대학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할 줄 알았어요. 평범한 여자로 사는 인생이 늘 머릿속에 있었어요.

생각했던 것과 다른 그 길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죠?
결혼 전까지 일과 현장만 알고 살았어요. 제 마음은 치열하지 않았는데, 상황들이 치열했어요.

상황보다는 늘 마음이 중요하죠.
그렇죠. 마음이 치열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전 운이 좋아서 어떻게 하다가 지금의 송윤아가 됐어요. 만약 거기서 더 치열했다면, 또 다른 송윤아가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주변 사람들이 송윤아 씨가 드러내는 것보다 묵히는 재능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거죠?
재능이 아깝다기보단, 아,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예를 들어 같은 시기에 두 작품이 들어왔어요. 이 작품을 하면, 소위 말하는 영화 배우의 길이 보여요. 이성적으로 그걸 아는데도 그냥 다른 작품을 했어요.

그건 왜죠? 자신감이 없었나요?
어렸을 때부터 여자, 아내, 엄마로서의 모습을 그리며 산 내가 1등이 되기 위한 길을 가면… 내가 그렸던 모습과 자꾸 멀어질 것 같았어요. 능력이 안돼서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부러 피해다닌 것도 있어요.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다 해도 후회는 없어요.

그래서인지 송윤아는 환상에 가려진 여배우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생활 배우, 그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네, 그 애매한 선에 제가 있어요. 애매한 선을 조절하는 것도 아주 힘들어요. 그런데 저는 잘 조절하면서 살아왔다니까요. 하하.

여배우 송윤아와 여자 송윤아가 상반된 욕망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겠죠?
아무래도 24시간 똑같은 생각만 하고 살 수는 없죠. 저도 연기자이기에 순간순간 욕심이 날 때가 있어요. 물론 추상적인 욕심이에요. 그와 동시에 현실이 뒷받침돼 있지 않다는 것도 동시에 깨닫죠.

일하는 여성에게 아이는 리얼리티를 일깨워 주는 존재예요. 바쁘게 살다 보면 시간의 흐름에 둔감해지기 쉬운데, 아이가 있으면 하루하루 커가는 게 보이죠.
네, 참 신기해요. 아침에 병원 간다고 짐 쌀 때만 해도 없었던 존재가 어느 순간 딱 나타난 거잖아요. 지금 아이가 기어 다니면서 뭐만 보이면 잡고 일어나려는 단계인데, 지금도 갓난아기지만 정말 요만하던 갓난아기가 언제 저렇게 컸지? 내가 어떻게 키웠지? 모든 게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어요. 당장 연기자로 서는 현장에 발가락이라도 하나 걸치라고 하면 아직까진 못하겠어요. 살면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아까부터 여배우라는 말 대신 연기자라는 말을 선택하는군요. 그 두 단어는 희한하게도 어감이 좀 달라요.
네, 달라요. 아마 그 다른 어감은 여러분들이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저는 여배우라는 말이 그냥 제 직업에 붙여지는 호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여배우니까 여배우라고 말할 때가 있는 건데, “당신이 배우야?” 하는 인터넷 댓글을 보면 사람이 이런 식으로도 상처를 받을 수 있구나 싶어요. 어느 순간부터 여배우라는 말을 제 입으로 표현하는 게 굉장히 조심스러워졌어요.

tvN의 <코리아 갓 탤런트>에서는 박칼린, 장진 감독과 더불어 당당한 여배우 심사위원인데요?
저는 제가 누굴 심사한다는 마음 없어요. 제작진도 절 섭외할 때 이 프로는 같이 즐기고, 잘하면 박수 쳐주는 거라고 해서 승낙했어요. <코리아 갓 탤런트> 무대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스토리가 있어요. 그저 끼와 재능을 보여주는 무대가 아니라, 이렇게 살고 저렇게 흘러와서 오늘 이 무대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걸 느껴요.

지역 예선 때 인상적인 사람이 있었어요. 마음을 읽는 멘탈리스트였죠? 송윤아 씨를 무대로 불러 생애 가장 감동적이었던 선물을 칠판에 쓰게 했는데, 그걸 맞춰서 모두가 깜짝 놀랐어요.
맞아요, 제가 ‘양말’이라고 썼죠.

그 양말의 정체는 뭔가요?
아… 설경구 씨와 만난 후 첫 크리스마스 때였어요. 저는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기념일 챙기는 것 싫어하는 그 사람이 그럼 만원 이내에서 선물을 주고받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결국 선물 안 했어요. 근데 오빠는 양말 네 켤레를 준 거죠. 저도 비싼 걸 선물하는 스타일은 못 되지만, 그 일이 선물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심어줬어요.

부부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죠? 우문일 수도 있지만 친구 같은 배우자, 조력자 같은 배우자, 어느 한쪽이 더 의지하는 관계라는 게 있죠.
지금 말씀하신 게 다 포함돼요. 살아보니까, 시간이 가면서 이 사람이 더 좋아진다는 생각은 분명히 들어요. 그러기가 쉽지 않대요.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두 남녀 배우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 영화적인 면이 있어요. 실제 생활은 전혀 드라마틱한 데가 없다고 해도.
드라마틱하다니요. 우리는 거기서 완전 제외돼요.

영화 <사랑을 놓치다>는 정적이면서 드라마틱했어요. 그 영화를 개봉 후 끝 무렵에 작은 상영관에서 봤는데, 오히려 스크린과 더 밀착되는 기분이라 느낌이 좋았어요.
아마 끝물이 아니었어도 작은 상영관에서 했을 거예요, 하하.

흥행도 놓쳤죠?
좀 놓쳤죠.

영화의 인상이 너무 좋아, 휴가 때 영화 속에 나온 동네를 찾아가기도 했어요. 전주와 동상 저수지 일대였죠?
어머, 어머, 정말이요? 세상에… 그 영화를 유독 좋게 본 분들이 꽤 있더라고요. 그래서 더 안타깝기도 해요.

그 작품엔 물이 많이 등장했어요. 오늘 송윤아 씨를 보니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문구가 떠올라요. 정돈된 정숙함 속에 있는 느낌이에요.
흐르는 강물처럼, 좋네요!

하지만 그저 흘러가는 대로만 놔둘 순 없겠죠? 무게 중심이 연기자 송윤아가 아닌 쪽으로 쏠리길 원하는 건 아닐 거예요.
물론이죠. 다만 잘 조율하며 살고 싶어요. 이제 서서히 움직이고 있잖아요, 오늘 이런 촬영도 하고.

밸런스 맞추는 일엔 자신 있나요?
제가 1등이 되는 건 어차피 포기하고 살았다니까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