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카메라 앞에 선 권상우

신용카드 같던 2000년대를 넘어서 그는 계속 달리고 있다. 본질적으로 파워 게임인 대중 문화 속에서 “한 게임 더할까?” 박카스 청년 같은 스태미나를 자랑하며. 강풀 원안의 멜로〈통증〉을 촬영한 권상우가 〈보그〉카메라 앞에 섰다.

권상우의 블랙 수트와 블랙 타이는 구찌(Gucci), 셔츠는 돌체 앤 가바나(Dolce&Gabbana), 악어가죽 레이스업 슈즈는 체사레 파초티(Cesare Paciotti). 여자 모델의 스틸레토 힐은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네크리스는 블랙 뮤즈(Black Muse).

사실 이제까지 권상우를 좋아하고, 그의 연기력에 반해서 영화들을 봤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건 약간 남사스러웠다. 그건 마치 권상우가 출연한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의 감독이기도 했던 시인 원태연의 시를 좋아한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시대의 통증을 담은 서사시가 아닌 소녀 취향의 순정시에 마음을 뺏긴다고 말하긴 쉽지 않으니까. 권상우를 처음 만났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한다. 간단하다. 권상우에게 관심이 없었다. 기자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스타에게 관심을 보이란 법은 없으니까. 스타는 공급자, 대중은 수용자, 기자는 선택자라는 입지에서 권력은 없으나 취향은 있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내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권상우는 잘나갔다. <천국의 계단> <슬픈 연가> 같은 낯간지러운 드라마로 한류 스타로 등극했고, <화산고>로 데뷔한 뒤 영화 배우로 흥행 성적도 꽤 좋았다. 그에게 열광하진 않았으나 그가 출연한 학원물 영화는 재미 있게 봤다. 영화의 문법이 신선하고 텍스트가 훌륭해서였다. 어쨌든 윤기 흐르는 양복을 입은 브라운관 속의 권상우보다 흙 묻은 교복을 입은 스크린 속의 권상우는 훨씬 더 리얼해 보였다.

첫 번째 영화 <화산고>는 당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거대예산이 투자된 CG 투성이의 학원무협물이었다. 장혁과 신민아와 공효진이 공중 권법을 행사하던 교실에서 그는 무림 고수 중 하나였다. 허약한 내러티브 속에서도 존재감이 특별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를 공중부양시킨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동갑내기 과외하기>. 푼수기 있는 치킨집 딸 김하늘의 상대역으로 매력적인 불량기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동갑내기 과외 교사와의 로맨스를 꿈꾸며 몸이 단 전국의 철부지 청소년들을 대리만족시키며. 그리고 권상우 불후의 명작 <말죽거리 잔혹사>. 유하 감독이 권상우를 발견한 건 축복이다. 사랑 고백조차 못하고 억눌려 지내던 어눌한 청소년이 학교 옥상에서 학교 건달패들을 때려눕히며 자기 존재를 드러낼 때, 권상우의 폭발력은 극에 달한다. 이렇게 애기해 놓고 보니 교복을 입었을 때의 권상우는 청소년기에 우리가 한번쯤 꿈꿨던 사랑과 모험의 판타지를 모두 관통해낸 것 같다. 알고 보면 선량하고 착실한 보통 남자의 좌충우돌 성장기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렇게 10년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는 그를 보면서 서서히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렇게 지치지 않고 스태미나가 넘칠까. 그리고 영화 외적인 그의 사생활. 손태영과의 결혼. 인생이란 자기가 선택한 것들의 누적분이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을 감당한 것이라고 봤을 때, 한국 남자로서 그의 선택은 꽤 멋있었다. 제멋대로였던 청소년이 책임을 지고 어른이 되는 것을 보는 기쁨이랄까. 결혼 과정에서 그는 대중의 파시스트적인 이빨 앞에서 아내인 손태영을 철저하게 보호했고, <무릎팍도사>에 나와 둘의 연애와 프러포즈 과정을 장황하리만치 순진하게 공개했다. 그리고 유부남 한류 스타로는 처음으로 멜로 영화에 출연했다. 결혼 이후에도 권상우라는 ‘상품’이 여전히 로맨틱하게 유통되고 있다는 증거로.

만화가 강풀 원안의 영화 <통증>에서 권상우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를 연기했다. 어릴 적 자신의 실수 때문에 가족을 잃은 죄책감과 후유증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는 작은 상처조차 치명적인 혈우병 환자 정려원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강풀이 직접 그린 포스터에서는 한겨울에 반팔 티셔츠를 입은 채 피를 흘리며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남자가 나온다.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춥지도 않나 봐”라고 중얼거리는 여자. 상처와 상처가 포개져 사랑으로 아물어 가는 강풀의 이야기에 기대가 실린다. 오늘 어떤 통증에도 무미건조한 권상우를 촬영하기 위해 우리는 스산한 분위기의 세트를 만들었다. 장마 이후 오랜만에 땡볕이 내리쬐고 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스튜디오 앞마당에서 우리는 땀을 흘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가 들수록 느끼는데 일할 때가 제일 좋아요.” 그가 살짝 처진 눈을 빛내며 애교 있게 웃는다. 세 살 난 아들을 둔 아버지라는 사실이 그의 육체를 더욱 섹시하게 만든다.

“룩희가 29개월이에요. 자동차를 정렬시키는 게 최대 관심사죠. 비뚤어지면 큰일 나요.” 그는 마흔이 넘었는데도 결혼하지 않은 남자 배우들을 가여워했다. “내 또래 친구들도 애가 없는 경우가 많죠. 그들을 보면 불쌍해요. 저들은 언제 이런 행복을 맛보려나.” 정우성, 이병헌, 이정재, 송승헌을 포함한 모든 미혼 남자 배우들 말이다. 어쩌면 길지 않은 인생에서 아직도 싱글 라이프를 누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잘생긴 철부지들. 이 부분에서 그는 스스로 대한 대견함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30대 초반에 결혼하고자 했던 계획을 차질 없이 이행하고, 호주에 가족이 머무를 집을 사고, 아들 교육을 위한 입학 과정까지 밟아놓은 것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뿌듯함.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게 좋아요. 누군가를 케어할 수 있다는 게. 룩희가 일곱 살이 되는 40대에 저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시장에서 일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거든요.” 내용의 어른스러움과는 달리 그의 말투는 여전히 자신의 재치를 보여주고자 하는 청소년 같았고, 상대를 조금도 압도하지 않았다. 아주 공손해서 하마터면 고향의 남자 동생으로 착각해서 어깨를 두드릴 뻔할 정도였다.

그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발목 인대가 늘어났다. “현장 모니터를 보기 위해 담장을 뛰어내리다가 인대가 눌렸어요. 인대가 찢어진 부위에 주사를 놔서 버티고 있죠. 전 아직도 제가 20대 초반인 줄 알고 몸을 쓰다 다친다니까요.” 권상우는 <통증>에서 실제로 심한 구타를 당했다. “사채업자가 돈을 받으러 다니면서 협박용으로 저를 쓰죠. 저는 발길질과 주먹질을 당하면서도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연기해야 했어요.” 나는 영화의 모티브가 흥미롭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곽경택 감독의 감각이 현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기분에 제동을 걸었다. “<친구>에서도 그렇지만 <태풍>이나 <사랑>에서도 여자를 다루는 방식이 진부하기 짝이 없었죠.”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곽경택 감독 특유의 남자 냄새가 나지 않아요.” 이어 곽경택 감독의 전작 멜로인 <사랑>을 예로 들어 신파적 감수성에 우려를 표시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주진모 씨의 <사랑>도 저는 굉장히 재밌게 봤어요. 그 영화도 200만 넘게 관객이 들었죠. 게다가 이번 영화는 훨씬 세련된 색깔이라니까요.”

권상우는 자신만만했다. 나는 그의 자신만만이 자만이 아니라 성실함과 순진함에서 나온다고 느꼈다. 돌이켜보면 그가 설경구나 조인성처럼 관습을 파괴한 장르에서 영화사에 남을 만큼 걸출한 연기를 보여준 적은 없지만,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변머리 없이 얌전하던 그가 “대한민국 학교들 다 좆까라 그래!”라고 외치던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잊을 수 없다. 매 작품에서 그의 연기가 최고는 아니었으나 매혹의 지점이 존재했다. 예민한 머리로 한 연기가 아니라 본능과 직관으로 한 연기. 그는 자신의 연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연기 잘하는 배우 많잖아요. 저 사람 연기 정말 잘한다, 이런 말을 듣는 배우도 있죠. 하지만 연기에 감탄하거나 판단하기 전에 그냥 그 사람을 보면서 울고 웃는 경우도 있어요”라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어떻게 다르죠?”라고 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 “황정민, 류승범, 이병헌 같은 배우들은 연기력이 정말 뛰어나죠. 전 그렇게 못해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드라마와 영화가 다른 점이 있어요. 몇 번 흥행에서 실패하면 흡인력이 떨어지죠. 저는 다행히 흥행에서 거의 다 성공했어요. 부족한 게 많지만 매력이 있는 거죠. 전 어떤 감독을 만나도 연기를 잘 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하지만 좋은 감독을 만나면 좋은 걸 꺼내줄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해요.” 인정! 그는 대중을 끄는 매력이 있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설득시키고자 하는 타고난 끈기가 있다. 그건 배우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스타의 특징이다. 그도 그걸 인정했다.



권상우가 입은 더블 버튼 코트는 구찌(Gucci), 여자 모델의 가죽 스커트는 랄프 로렌 컬렉션(Ralph Lauren Collection), 스웨이드 스틸레토 힐은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처음 배우 하겠다는 사람한테 넌 스타가 될래, 연기자가 될래 질문하잖아요. 제 대답은 스타예요. 전 보통 연기자가 아닌 스타로 살고 싶어요. 저는 계속 이슈가 되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는 스타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대중 문화 속의 입지라고 생각하며, 그 힘을 계속 지키고 싶어한다. “결혼한 후 CF가 떨어져 나갔어요. 대중들의 충격이 컸겠죠. 제가 스트레스를 받냐구요? 당연하죠. 해외에서 연기도 하고, 작품적으로도 좋은데, 3년째 광고는 없어요. CF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건 배우로서의 자존심이거든요.” 권상우가 다시 광고계의 러브콜을 받을 수 있을까? 그건 장동건이 결혼 후에도 CF에 나오는 것과 다른 문제다. 권상우는 말하자면 광고계에서 이승기 같은 존재였다. 해맑게 미소 짓는 싱그러운 청년. 싱글일 때와는 달리 결혼한 남자 스타는 대중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쨌든 대중은 복잡할지 몰라도 권상우는 그렇지 않다. “저는 지금 쉬지 않고 달리고 있어요. 잭키(성룡)와 액션 영화도 찍고 있고, 그 후엔 다음 프로젝트까지 예약돼 있죠. 한 해에 한 편 하는 게 보통인 영화계에서 저는 이미 네 편의 영화에 들어가기로 확정됐죠. 저는 할 수 있을 만큼 제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싶어요.”

권상우는 지금 경기도의 한 세트장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생수만 몇 잔 마시면서 여자 모델의 다리를 잡고 땅바닥에 누워 헬무트 뉴튼 스타일의 포즈를 취한다. 톱스타를 이렇게 대해도 되나 싶을 만큼 기이한 포즈인데, 그는 되려 여자 모델을 격려한다. “쑥스러워 하지 마세요. 되게 멋있으세요.” 벗은 상체를 보여주고 싶다는 내 요구에도 거부감 없이 응한다. “미리 말씀하셨으면 좀더 몸을 만들었을 텐데요”라며 몇 번 카메라 밖에서 푸시업을 한 게 전부. 촬영을 진행하면서 느껴지는 이 이상한 기분은 뭘까? 왜 그는 다른 배우들처럼 이의를 제기하거나 제압하려 들거나 거들먹거리지 않는 거지? 가양동 폐공장으로 가다가 경기도 오포로 세트 촬영장이 바뀌었을 때도(먼저 간 촬영팀이 사전 허가 없이 촬영 장비를 설치했다는 이유로 쫓겨났기 때문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핸들을 틀어 분당으로 왔다(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올림픽도로를 질주 중이었다).

뭐랄까, 권상우는 자신이 ‘스타’라고 이야기하면서 ‘스타 행세’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다. 그는 드라마나영화 촬영장에서도 이럴 것이다. 그는 아마 촬영장에 제일 먼저 나타나고, 대역을 쓰지 않고, 크랭크업 후엔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드라마 <대물>에서도 그는 고현정에게 철없는 동생처럼 구는 따스한 오빠였다. “총각 시절엔 송승헌, 소지섭과 밤에 어울려 다녔어요. 함께 영화를 보고 맥주를 마셨지요. 결혼한 후엔 거의 만나지 못하고 있어요. 저도 밤 11시만 되면 졸려서 와이프와 아기 옆으로 가게 돼요.”

이지 리스닝 계열의 전형적인 핀업 스타일인 채 그가 성취한 업적의 중심엔 무엇이 있을까? <화산고>가 미국 MTV에서 방영됐고, 10년 전 쿠엔틴 타란티노의 러브콜을 그가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일축하지 않았다면, 그는 가장 먼저 월드 스타가 됐을까? <일단 뛰어>에서 송승헌과 만나 우정을 유지하고, <야수>에서 유지태의 영화적 프로필에 압도되어 숨죽이던 시절을 지나, 신용카드 같던 2000년대를 넘어서 그는 계속 달리고 있다. 본질적으로 파워 게임인 대중 문화 속에서 “한 게임 더할까?” 박카스 청년 같은 스태미나를 자랑하며.

가끔은 궁금하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감독이자 시인인 유하 감독은, 순정파 시인 원태연이 연출한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에 출연한 권상우를 어떻게 생각할까. 로맨틱 코미디와 액션에 기우는 그의 작품 변별력에 대해. “흥행이 전부가 아니라지만 흥행이 전부예요”라고 얘기하는 권상우. 그는 <통증>으로 한국 멜로의 기록을 깨고 싶다고 했다. 추석 영화 대목을 노린 <통증>의 포스터를 보니 권상우의 얼굴은 감정이 응축되어 손끝만 닿아도 으스러져버릴 것 같다. 한국 영화 관객들은 그 ‘사랑의 통증’에 감화될까. 그는 실제로 고통스러운 사랑을 했다. 그리고 훌륭한 남편, 아버지가 됐고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곽경택 감독이 오버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성공적일 거라는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