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순진하다

장진과 강우석 감독의 페르소나로 뜨거운 테스토스테론을 발산하던 정재영이 영화〈 카운트다운〉에서 팜므파탈 전도연과 동행한다. 설경구보다 이성적이며, 황정민보다 감정적이고, 신하균보다는 말이 많은 이 남자, 정재영의 카운터펀치를 기대해보자.

비대칭 소매의 블랙 재킷과 화이트 셔츠는 디올(Dior),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화이트 골드와 로즈 골드 브레이슬릿, 반지는 모두 불가리(Bulgari).

전도연 씨와 인터뷰하면 꼭 나오는 얘기가 있어요. 정재영 씨와 함께한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독불이’가 자기를 사랑했다고. 그 증거가 ‘독불이(정재영)’가 다른 사람은 주먹으로 때려도 ‘수진이(전도연)’는 주먹으로 안 때렸대요.
그랬죠. 수진이를 손으로 안 때렸을 거예요. 나쁜 놈이긴 해도 속정이 깊었거든요. 주먹으로 때리면 죽죠. 흐흐. 그런 거 우리끼린 알아도 관객들은 몰랐을 거예요.

이번에 〈카운트다운〉에서 먼저 캐스팅이 됐잖아요. 상대역을 예상해 봤어요?
제가요? 전 상대역 생각 안 했는데….

그럼 뭘 했어요?
강우석 감독님 하고 <글러브> 후반 작업하고, 그리고 그냥 뭐, 그러니까 기다렸죠. 도연이가 한다고 해서 굉장히 반가웠어요. 도연이 하고 두 번 같이 작업한 남자 배우는 제가 처음이라고 하더라구요. 흐흐.

여배우 하고 한 작품이 많지 않죠? 이나영 씨 하고 나온 <아는 여자> 하고 또?
수애 씨랑 했던 <나의 결혼 원정기>, 정려원 씨 나왔던 <김씨 표류기>요.

차이나 칼라의 셔츠와 화이트 수트는 모두 김서룡(Kimseoryong), 실버 브레이슬릿은 불가리(Bulgari).

주로 원정하고 표류하고 그러셨네요. 남자 배우들 하고는 <실미도> <이끼> <웰컴 투 동막골>에서처럼 육체적으로 부딪히면서 격렬하게 지내시더니만.
흐흐흐. 남자 배우들은 편하죠. 여배우들은 아무래도 세심하게 관리를 해줘야 하니까.

어떤 관리요?
뭐 특별한 관리는 아니고… 그냥 배려해주는 거 있잖아요.

전도연 씨에겐 어떤 관리가 필요했나요?
도연이는 여배우 같지가 않아요. 몸을 사린다든가 두려워한다든가 그런 게 없어요. 남자 배우 같은 마인드라 전 아주 편하고 재미있어요.

서울예대 연극과 90학번이죠? 그 학번이 굉장히 에너지가 왕성했어요.
에너지보다 끈기가 대단했어요. 황정민, 류승룡, 임원희도 동기고, 89학번이지만 장진 감독도 있고, MC 신동엽도 있고. 예전엔 번역극 중심으로 극단이 돌아가다가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리얼리즘 바람이 불었거든요. 그러면서 연극, 영화, 방송 장르가 경계 없이 서로에게 시너지를 줬어요.

그당시가 ‘극단 연우무대’의 전성기였죠. 90년대 초는 시대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있었고, 환경적으로는 연극, 영화, 방송 시스템이 엄청나게 확대되는 시기였어요. 정극 연기자에겐 축복의 시기죠. 정재영 씨는 장진 감독과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죠?
그렇죠. 장진 하고는 ‘만남의 시도’라는 창작극 동아리를 했어요. 장진 감독은 원래 배우였는데, 군대 다녀와서 ‘천호동 구사거리’라는 단편 희곡으로 신춘 문예에 당선되더니, 그 후로는 작가와 연출로 돌아섰어요. 장진 감독이랑 ‘혜화동1번지’ 극장에서 <허탕>이라는 연극도 올리고, ‘수다’라는 공동 창작집단을 만들어서 신하균, 임원희 같은 친구들과 활동했어요. 그때 동기였던 황정민은 학전에서 세미 뮤지컬을 했고요.

연극과 영화를 병행했죠?
<박봉곤 가출사건>에도 두 신 나왔고, <초록물고기>에도 한 신, <산부인과>에도 나오고, <간첩 리철진>에도 4인조 택시 강도 중에 한 명으로 나오고.

장진 감독 작품에는 거의 주연을 하셨어요.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후반부에는 강우석 감독 영화에 많이 출연했고. 그 두 분은 이준익 감독과 더불어 여자다운 여배우를 잘 안 쓰는 감독들로 유명하죠. 말하자면 남자들의 수다와 거친 싸움으로 일관된 영화들이었어요
하하. 제게는 제 영화 인생 절반을 차지하는 분들이시죠.

인생 최고의 여배우는 누구였나요?
제 입장에선 다 최고죠. 그래도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전도연이요. 두 번이나 같이 했고, 존경스러운 부분도 많고요.

<이끼>에서 노인 역을 했을 때는 기분이 어땠나요?
의외였어요. 누구나 쉽게 생각하는 캐스팅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강우석 감독님을 존경해요. 몇 시간 동안 분장하면서 자기 수양을 많이 했어요.

다른 사람 이야기는 자유롭게 하지만 본인 이야기를 할 때는 주저하는군요.
저는 남을 판단할 수는 있지만, 제 자신을 잘 판단 못하겠어요. 제가 저에 대해 감지할 수 있는 건 내면의 열정이 뜨거운가 식었나, 연기를 잘 할 수 있나 없나 정도예요.

순진하시군요.
10년 전이 더 순진했지요. 지금은 많이 열려 있는 상태예요.

촌스러운 것과 세련된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촌스러운 건 무관심한 거고, 세련된 건 관심이 많은 거죠.

세련된 분이군요.
저는 완전 촌스럽죠. 저는 배우는 촌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많은 것에 관심 있고 많은 걸 알려고 하면 깊이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져요. 역할에 집중할 수도 없고요. 내 역할은 대부분 촌스러워요.

왜 감독들은 정재영 씨를 촌스러운 역할에 캐스팅할까요?
제가 촌스러워 보이니까요. 전문대졸 이상을 맡아본 적이 없어요. 딱 내 학력만큼만 했어요. 내가 살아온 삶이 그런 거니까.

재벌 2세와는 거리가 멀겠군요.
재벌 2세는, 아이구… 뭐, 흐흐, 맡을 일이 없겠죠. 나이도 그렇고, 나이 들어 갈수록 삶이 묻어나는 거니까.

이번 <카운트다운>에서 맡은 역할은 채권추심원이죠? 경제적 난관에 처했을 때 최종적으로 부딪혀야 할 반갑지 않은 사람이네요.
나쁘게 말하면 사채업자죠.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갖은 협박을 일삼죠.

화이트 셔츠와 블랙 타이는 디올(Dior), 베스트와 팬츠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모자는 프레드 페리(Fred Perry), 볼드한 골드 뱅글은 엠주(Mzuu).

아! 협박은 인간의 영혼을 잠식해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투견장 관리인으로 나왔을 때도 그랬어요. 그런데 배우가 아닌 정재영 씨는 어떤 사람인가요?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죠. 너무 모나지 않고 너무 유들거리지도 않고.

실례지만 어디 사세요?
분당에 살아요.

분당 신도시의 평범한 주민이겠군요.
네. 동네 목욕탕 다니고요.

톱스타가 아닌 직업 배우로서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고 계시군요.
인기나 유명세가 몰려온다면 내 직업이 헷갈릴 것 같아요. 전 인기나 유명세를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거든요.

인기나 유명세는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거죠. 만약 정재영 씨의 눈부신 프로포션을 보고 디자이너가 패션쇼 무대에 서달라고 요청한다면요?
그럴일은 없을 거예요. 설득력이 없어요. 잘 하지도 못 하고. 그런 식의 이벤트는 낯간지러워요. 혹 돈을 엄청나게 주면 모를까, 흐흐흐.

돈은 벌어서 어디에 쓰시나요?
생활에 쓰죠. 아이들 학비, 학원비, 먹고 사는 데 쓰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술값에 가장 많이 씁니다.

술이 어떤 도움을 주나요?
몸과 마음을 풀어지게 해주죠. 알코올성 간염을 달고 삽니다.

주로 어떤 노래를 부르죠?
조용필의 ‘끝없는 날개짓 하늘로’와 예민의 ‘산골소년의 사랑 이야기’. 가사가 참 순수합니다.

최근 곤드레만드레 취한 적은 언제인가요?
<카운트다운> 촬영이 끝나고 배우와 스태프들과 쫑파티를 했어요. 눈을 떠보니 집이더군요.

외모 중 어떤 부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까?
눈이요. 관객들은 영화를 볼 때 배우의 눈을 보려고 합니다. 선글라스 끼고 연기하면 답답하죠. 감정이 들어간 눈을 좋아해요.

찰리 채플린과 숀 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너무 존경하는 위대한 분들입니다. 죽을 때 발끝이라도 따라가고 싶어요. 연기적인 것뿐 아니라 철학이 탄탄한 분들입니다

위대한 배우들은 스크린 위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죠.
안성기, 박중훈,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이런 배우들은 인간 희로애락에 대한 자기 해석의 힘을 가진 분들이에요. 유명세가 지배하는 장르에서 오랫동안 명퇴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죠.

돌아 보면 유년기와 청년기는 어땠나요?
유년기는 평범했어요. 자신감이 많던 시절은 아니었죠. 청년기엔 연기만 생각하고 바쁘게 지냈어요. 연극 무대와 영화 오디션장을 오갔죠.

마지막 울었을 때는 언제였죠?
<김씨 표류기>라는 영화를 찍었을 때예요. 초반에 사루비아 꽃 때문에 설사해서 울고, 후반에 자장면 먹으면서 감격해서 울었죠.

20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장소로 가시겠어요?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혜화동 1번지 소극장은 어때요?
싫어요. 여태껏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100억이란 돈이 생긴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요?
100억이 생긴다면 영화를 안 만들겠어요. 저금해야죠. 흐흐.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면 아끼고 아껴서 많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5억짜리 20편 정도.

과연 소시민을 연기하는 배우답군요. <신기전>이 100억 예산의 영화였는데, 흥행이 잘 안 됐죠?
관객이 378만 정도 들었습니다. 평균은 했다고 들었어요

투자자들은 왜 정재영 씨에게 투자를 할까요?
저는 모르죠. 그건 그분들이 분석하겠죠.

정재영이란 배우는 관객들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을까요?
매번 각인되길 기도할 뿐입니다. 전 국민이 다 제 영화를 봤으면 좋겠어요. <1박 2일>을 보는 것처럼요. 저는 뭐 꾸준히 열정을 쏟을 뿐이죠.

참으로 정직하고 우직한 배우의 삶을 사시는군요. 한 방에 대한 욕심은 없나요?
한 방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 방은 없습니다. 한 방은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작은 제 인생도 한 방은 아닐 거예요. 모든 게 쌓여서 터질 뿐이죠.

그런 모습이 직업 배우로서 정재영에 대한 신뢰를 만드는 거죠. 배우로 사는 영예는 무엇일까요?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지요. 잠깐이라도 남의 인생을 살아봤으면 좋겠다. 건달이면 욕도 해보고, 남자라면 위험한 사랑도 해보고, 저는 영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서 남의 인생에 들어갈 수 있죠. 참으로 정당한 영예라고 생각해요.

쓸쓸하거나 외울 때는 없나요?
혼자 연기를 감당하는 건 안 외로워요. 영화 현장에선 모두가 나눠서 함께 감당하니까요. 가끔 왜 태어났나? 하고 물으면 이렇게 살라고 태어났나 보다 해요. 다른 영화가 잘 되면 비교하게 되고 그럼 덜 행복하지만, 그런 게 다 사는 재미겠죠.

마지막으로 영화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요?
사랑, 사랑을 일깨우게 하기 위해서죠. 사랑 안에 희로애락이 다 있으니까요. 사랑에 목마르거나 사랑을 이용하거나 사랑을 왜곡하거나 어쨌든 영화 속 사건의 모든 단서는 사랑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