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소녀에서 여인으로

2016.03.17

by VOGUE

    소녀에서 여인으로

    여인으로 ‘아브라카다브라’이 후 꽤 시간이 흘러 브라운 아이드 걸스가 돌아왔다. 보다 성숙하고 패셔너블한 모습으로. 이탈리아〈 보그〉를 패러디한 마리오네트 화보모델도 척척 해내는 그들. 이렇게 꼭두각시인 체 하던 그들은 언제고 지면을 박차고 나와 파격적인 쇼를 보여줄 수 있다.

    가인의 도트무늬 화이트 원피스는 스텔라 맥카트니(Stella McCartney), 레이스업 슈즈는 모스키노(Moschino).

    브라운 아이드 걸스(브아걸)는 ‘보컬 그룹’으로 불렸다. 한때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 ‘아브라카다브라’가 나오기 전까진 그랬다. 메인 보컬과 묻어가는 보컬의 구분 없이 노래깨나 부르는 보컬 세 명에 래퍼 한 명. 브아걸이 데뷔했던 2006년 상반기 가요계에서 이름을 알린 그룹은 씨야 정도였다. 브아걸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씨야는 ‘소몰이 군단’의 여성 주축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지금 씨야는 없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등장한 건 이듬해 일이다. 대중 가수가 데뷔년도를 꼼꼼히 따지는 일이야 저희들끼리 서열 따질 때나 하는 짓이지만, 지금 활발히 활동하는 여자 그룹 중에서 가장 ‘유서 깊은’ 당사자가 브아걸이라는 사실은 맞다.

    사실은 맞다. ‘아브라카다브라’ 한 곡이 빅 히트를 친 바람에 브아걸은 ‘아브라카다브라’ 전과 후로 명백히 나뉜다. 사실 그 노래가 나왔을 때 브아걸은 소녀라고 하기엔 이미 성숙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브아걸은 앳된 소녀가 아니라 손가락 하나로 남자를 꼬시는 모습이다. 스물 다섯인 가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멤버들의 나이는 서른 하나. 이들이 <무릎팍 도사>에 나갔다면 유세윤이 면전에 대고 악을 쓰면서 확인사살시켜줬을 나이다(이 때 쓰기 좋은 성인돌이라는 호칭은 누가 만들었는지, 탁월한 언어 감각이다). 그러나 가요계가 걸그룹 천하로 편성된 만큼, 우리에게 브아걸은 그 맥락에서 함께 받아들여졌다. 브아걸 역시 자신들이 걸그룹과 묶여 회자되는 것을 즐기고 재밌어 한다. “요즘 아이돌은 트레이닝을 거쳐 엄선된 멤버들이니 모두 실력이 좋아요. 단지 그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묻히는 것 같아요. 소수라면 부각됐을 테지만, 가요계를 걸그룹과 보이그룹이 점령하고 있잖아요. 그들끼리는 아주 치열할 거예요.(나르샤)”

    중요한 건 이들 스스로 ‘진짜 걸그룹’과 조금은 달라야 한다는 마음을 굳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쁘게 얘기하면 애매하고, 좋게 얘기하면 두 마리 토끼다 잡고 있다고 봐요. 완전히 아이돌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빅마마 같은 가수도 아니잖아요. 두 마리 토끼를 다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걸 좋게 생각하고 싶어요. 이 위치에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미료)” 여느 걸그룹과 출발이 조금 달랐던 브아걸을 생각하면 이들이 ‘달라야 한다’ 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게 자연스럽다. 물론 브아걸은 ‘아브라카다브라’ 이전에도 대중적으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었다. ‘L..O.V.E’ ‘어쩌다’ ‘마이 스타일’ 같은 말랑말랑한 곡들은 당시 꽤 많은 음원 수익을 올렸다. 비록 그 시절의 자료화면을 보면 뭐라 반응하기가 민망하게 촌스럽고, 다른 걸그룹의 컴백일과 겹치면서 순식간에 묻힌 일도 있었지만 말이다.

    나르샤의 블랙 원피스는 더 센토르(The Centaur at Boy ), 볼륨감 있는 판초는 릭 오웬스(Rick Owens), 미료의 니트 원피스는 휘 드 마이(Rue du Mail at Super Normal), 슈즈는 지니 킴(Jinny Kim).

    브아걸을 만나면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한 가지는 이제 막 나온 신보 얘기보다도 시간을 2년여 전으로 돌린 과거 얘기였다. ‘얼굴 없는 가수’로 보컬 역량을 강조하던 그룹이 어쩌다 퍼포먼스를 부각하는 ‘쎈 그룹’의 모습으로 돌아왔을까? “‘아브라카다브라’ 전에 발표했던 곡들과 비슷한 느낌으로 쭉 갔어도 우린 망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전의 곡들 모두 음원도 잘 팔렸으니까요. 그런데 다음 앨범을 내려고 곡 수집을 했더니 계속 이전에 선보였던 말랑말랑한 후크송들만 들어왔어요. 문득 이쯤에서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나 싶었죠.(제아)” “‘L.O.V.E’ ‘어쩌다’ ‘마이 스타일’에 이어 제4탄의 느낌으로 가기가 싫었어요. 그래서 더 강한 느낌, 강한 사운드를 택했죠.(미료)” 2009년은 오토튠을 쓰지 않은 가요는 가요가 아닐 만큼 비슷한 소리가 난무하던 때였다. 그러나 ‘아브라카다브라’는 최신 유행 요소를 고루 섭렵하면서도 가수가 생각하는 음악적 자부심에 해를 입히지 않을 선택이었다. 능숙하고 화려한 사운드, 초등학생부터 회식 자리 아저씨들까지 사로잡은 ‘시건방춤’, 컨셉추얼하게 무장한 비주얼. 그들은 비디오와 오디오 양면으로 대중을 강타했다. “우리는 잃은 게 없고 얻은 것만 있었어요.”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흘러 나온 음악이 요즘 활동 중인 ‘식스센스’ 다. 처음 컴백 무대를 봤을 땐 당황스러웠다. 곡 전체에 흐르는 오케스트라, 과장된 메이크업, 요소가 많은 소리와 무대 연출, 거기에 브아걸과 대치한 전경들이 떼로 출동하는 뮤직 비디오까지, 온통 강하고 센 느낌이었다. 네티즌은 제아와 가인과 나르샤가 연타로 선보이는 고음을 ‘돌고래 하이노트’로 부르고 있다. 라이브 하는 브아걸을 보면 무대를 마친 후 대기실로 가는 길에 쓰러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다. 아마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비규환’ ‘고성방가’ ‘이판사판’스러운 진풍경이 연출될 것 같다. 처음 ‘식스센스’ 가이드곡을 받았을 때 브아걸 역시 머릿속이 백지 상태가 됐다고 한다. “가만히 서서 부르기도 힘든 음역대예요. 그런데 연습을 하도 많이 해서 지금은 그냥 서 있으면 노래가 안나올 지경이에요. 춤을 춰야 노래가 나와요.”

    어떻게 보면 브아걸에겐 이번 앨범이 실질적인 ‘소포모어 음반’이다. “저희를 ‘아브라카다브라’로 뜬 댄스 그룹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더 부담감을 가지고 다른 그룹과 우리를 차별화할 수 있는게 뭘까 생각해보니 ‘보컬’이었어요. 보컬로 우리가 강하다는 걸 보여주면서 퍼포먼스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미료)” 커리어의 터닝 포인트를 기점으로 브아걸은 보컬로 ‘다름’을 보여주는 길을 택했다. 트렌드와 상관없이 순전히 보여줄 수 있는대로 만든 ‘식스센스’가 흥행한다면, 그건 브아걸이 더 이상 트렌드를 좇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인의 시스루 드레스는 펜디(Fendi), 깃털 스커트는 김동순 울티모(Kim Dong Soon Ultimo), 슈즈는 펜디(Fendi), 제아의 롱 드레스는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at Detail), 모피는 펜디(Fendi), 슈즈는 모스키노(Moschino).

    인터뷰를 할 때 가장 말을 많이 하는 멤버는 제아와 미료였다. 개별 동을 하는 나르샤와 가인에 비해 팀을 정신적으로 정비하고 생각을 정리 정돈할 시간이 많아서였을까? 제아는 브아걸을 하기 전 다른 회사에서 솔로를 준비하다 엎어지면서 작곡 공부를 하던 학생이었다(그녀의 대학 교수는 ‘귀요미’ 김연우). 이번 앨범에도 제아는 자신이 쓴 곡을 수록했다. 미료는 허니 패밀리에서 랩을 하던 힙합퍼였다. 힙합을 하던 인물이 노래 위주인 그룹에서 랩을 하고 있으니, 늘 미료에게 허기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노래를 못하니까 랩을 해도 좋아, 이런 식으로 들어온 멤버가 아니라 원래 힙합을 하다 우연치 않게 합류한 거예요. 그러니 아티스트로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많죠. 하지만 팀 내에서는 역할과 분량이 모두 나눠지니 원하는 대로만 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곧 솔로 앨범을 냅니다!” 허니 패밀리 멤버였던 길이 변하고 개리가 변했듯, 그녀도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변했다. 여전히 힙합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래퍼지만, 취향이 좀더 나긋나긋해졌다는 뜻이다. 미료의 솔로 앨범은 마냥 터프하고 묵직하진 않을 것 같다.

    나르샤는 요즘 자기 정체성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예능에서 보이는 털털한 모습과 무대 위에서 프로페셔널하게 변신해야 하는 모습 중, 대중이 인정하는 자기 이미지는 어떤 쪽일까 약간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듯했다. “나이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점점 소심해져요. 개그맨들이 집에선 조용하단 얘길 들으면 왜 그럴까 싶었는데 예능을 많이 겪어보니까 왜 그런지 알겠어요. 밖에서 쏟아야 하는 에너지가 너무 많아요.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나로 돌아왔을 때 가라앉고 풀어지는 면이 있어요.” 나르샤의 말에 가인이 받아쳤다. “방송 보면 언니가 기 세 보이잖아요. 그런데 요즘 옆에서 보면 기가 안 세 보이는 게 아니라 아예 없어 보여요.(웃음)” 제아가 마무리했다. “나이 들어서 그래.” 그런 나르샤에게 이효리는 롤 모델이 될 만하다. “예능에선 노 메이크업에 옆집 언니 같은데 무대 위에선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잖아요. 참 멋있는 면이에요. 저는 솔로 앨범 낼 때 대중성은 포기하고 만들었어요. 우리끼리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말고, 혼자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걸 해보고 싶었어요. 특이하고, 신선하고, 재밌는 거요.” 그리하여 ‘삐리빠빠’가 탄생했다. 그 무대 하나만으로 나르샤가 노래를 아우르는 비주얼과 퍼포먼스에 얼마나 관심 있는 엔터테이너인지 알 수 있었다.

    미료의 롱 드레스는 존 리치몬드(John Richmond at Colombo).

    ‘기’에 관한 얘기에서 인상적인 건 가인이었다. 노래도 하고 영화와 시트콤도 하고 예능 프로에도 나가는 가인이지만, 한 가지, 그녀는 숫기가 없어 보였다. “저… 점 보러 가면 기가 너무 세서 점이 안 봐질 정도래요.” 미처 기가 센 줄은 몰랐던 가인을 보면 마인드 컨트롤로 다져진 노력파 같다. 작은 체구로 뿜어내는 에너지는 대단하지만, 가끔은 섹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습이 보송보송한 얼굴과 어긋나 보이기도 했다. “제 몸매, 볼 거 없죠. 몸은 초딩 스타일이에요. 저는 노골적으로 섹시한 걸 혐오해요. 제가 짧은 옷을 즐겨 입긴 하지만 사람들이 어디 제 몸매를 보고 섹시하다고 하나요? 그저 메이크업의 힘도 빌리면서, 기운으로 섹시함을 풍기고는 싶어요.” 하기야 윤상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솔로 앨범을 발표할 때 ‘탱고’를 내놓지 않았던가. 한창 뜨거웠던 ‘걸그룹’ 멤버의 선택으로는 의외의 장르여서 더 반가웠고, 그녀가 신발을 벗은 채 맨발로 무대에 서던 모습에선 섹시함보다 여문 집중력이 보였다(‘돌이킬 수 없는’ 을 부를 때 신발을 벗게 된 건 사막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일화 때문이다. 힐이 모래 속에 푹푹 빠져 구두를 벗어 던지고 연습을 했다가, 그 컨셉 그대로 무대에도 섰다). “<몽땅 내 사랑>을 찍을 때 시트콤 스케줄이 정말 힘들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영화나 시트콤에서 연기했던 경험이 표정 연출할 때나 무대에서 감정을 일으킬 때 큰 도움이 돼요.”

    브아걸의 커리어에서 ‘아브라카다브라’가 터닝 포인트였다면, 가인에게는 <우리 결혼했어요>도 추가된다. “즐기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서웠어요. 초등학생부터 아줌마들까지 다 저를 알아봤거든요.” 왜 안 무서웠을까? 제아는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조권과 가인의 집들이 편에 두 번 나온 것만으로 해외 팬들이 생겼다고 한다. “한국에선 예능을 해야지만 계속 노래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데뷔 초기에는 음악으로 우리를 알리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존재를 알 수 없었어요. 지금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는 걸 생각하면, 예능은 필요해요.”

    제아의 원 숄더 원피스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브아걸은 새벽 1시가 다 되어 스튜디오를 떠났다. 6시간 동안 그들을 지켜보면서, 이 네 여자들에게선 ‘독한 기운’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우린 다른 걸그룹과 달라야 해요’라고 말할 때조차 모진 기세가 나은 승부욕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이성으로 산출한 결론을 털어놓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선 시기에 찬 여자들끼리 서로 돋보이고 싶어 하는 위태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그건 여자그룹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큰 근거다. “팀을 하다보면 희생할 게 많아요. 그걸 못 참고 놔버리는 여자들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욕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을 참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독한 것 같아요. 포기할 건 포기하고 서로 희생할 수 있는 마음, 그게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가인)”

    여자들이 모인 집단이 어떻게 해야 굴러갈 수 있는지 아는 현명함. 그 현명함으로 선택한 전략이 지금의 무대다. 영예의 순간을 기점으로 ‘그 다음’이 부담스러운 건 ‘Gee’ 이후의 소녀시대, ‘텔 미’ 이후의 원더걸스, ‘아이 돈 케어’ 이후의 투애니원에게도 마찬가지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브아걸은 다른 걸그룹이 흉내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버전으로 돌아왔다. 자의 반, 타의 반 ‘소녀들’로 언급되던 그들에게 소녀의 모습은 없고, 이제 진짜 패를 보여줄 때가 됐다. 그들이 내놓은 패가 통할까?

    나르샤의 블랙 코트는 김동순 울티모(Kim Dong Soon Ultimo), 벨트는 펜디(Fendi), 슈즈는 니나 리치(Nina Ricci).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강혜원
      스탭
      스타일리스트/한연구, 헤어/유다, 메이크업 / 고유경, 세트스타일리스트 / 최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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