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모던 레이디, 송혜교

패션이라는 판타지 세계와 영화라는 리얼리즘 세계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프리패스를 가진 여배우 송혜교. 살아온 날들의 동화 같은 영광과 훼손되지 않은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까지 담고 있는 이 행운의 모던 레이디를 보라!

파리의 깡봉가 31번지에 자리한 코코 샤넬의 아파트에서 포즈를 취한 송혜교. 샤넬(Chanel)의 부드러운 실크 소재 블라우스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누워 있는 소파는 아파트의 중앙 응접실에 자리하고 있다.

리츠 호텔이 바라다 보이는 샤넬 아파트의 창가에 선 송혜교. 어깨 라인을 따라 진주 장식이 들어간 드레스는 샤넬(Chanel).

샤넬이 꾸뛰르 쇼가 열릴 때면 숨어서 거울에 비친 관객들의 표정을 훔쳐 보았다는 거울 계단에서. 허리에 화이트 스팽글 디테일이 들어간 블랙 드레스는 샤넬(Chanel).

방돔 광장의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진 파크 하얏트 호텔의 테라스에 선 송혜교. 따스한 느낌의 그레이 니트 스웨터는 줄리앙 맥도날드(Julien Macdonald at Supernormal), 밑에 입은 드레스는 보라(Bora).

프랑스나 중국이 아닌 서울에서 송혜교를 만나기에 적합한 장소는 어딜까? 3년 전에는 이태원의 이국적인 푸아그라 레스토랑에서 즉흥적인 샴페인 파티가 벌어졌다. 흰 티셔츠에 핫팬츠 차림으로 막 가을 운동회를 마치고 나온 소녀 같은 혜교가 사람들 속에 섞여 격의 없이 웃고 떠들었다. 밤새 젤라틴만 빨아먹은 것 같은 핑크빛 입술이 금요일 저녁 붉은 노을 속에 반짝였다. 작년 이맘때는 피터 린드버그, 헬레나 크리스텐슨과 함께 세계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집 마지막 제본을 앞두고 논현동의 빈티지 살롱 같은 출판사에서 만났다. 싸구려 샴페인과 떡볶이를 나눠 먹으며 사진집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자신의 유치원 사진을 보고 깔깔거렸다. 그녀는 대가들의 사진보다 똥을 싼 채 어기적거리며 달려오는 어린 딸의 사진을 찍었던 엄마라는 최초의 사진가에 대해 얘기하기를 더 좋아했다. 당시 혜교는 대전에서 촬영하고 있던 이정향 감독의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그녀는 늘 자신이 믿는 것에 푹 빠지는 경향이 있다. 이정향은 <미술관 옆 동물원>이나 <집으로> 같은 자연주의적인 영화를 만드는 여자 감독이었고, 송혜교는 그녀가 9년 만에 만드는 영화에 출연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 전 파리에 가서 칼 라거펠트, 파올로 로베르시, 오중석 3인의 사진작가들과 연이어 스펙터클한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서울에서 그녀가 이정향 감독과 공들여 만든 영화 <오늘>을 보았다.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작은 영화에서 시종일관 ‘용서’라는 심오한 주제를 놓고 갈등하는 송혜교를 보면서 처음으로 그녀가 장예모 감독의 리얼리즘 영화 속 공리처럼 보인다고 느꼈다. 짙은 눈썹 때문일까, 도톰하면서 정갈한 이마, 혹은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 때문일까. 아니었다. 눈빛 때문이었다. 많은 이야기가 함축된 깊고 단호한 눈빛. 지름 1cm밖에 안 되는 검은 눈동자가 살아온 날들의 동화 같은 영광과 한 번도 훼손되지 않은한 인간의 품위까지 드러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날 나는 영화 상영이 끝난 후 극장에서 관객들과 혜교를 대신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에서 혜교의 선택과 영화 <밀양>에서의 전도연의 선택, <시>에서 윤정희의 선택에 대해. 죄와 용서의 끝없는 딜레마에 대해. 자극적인 범죄가 난무하는 영화라는 남자 세상에서 용서의 십자가를 짊어진 여배우라는 순결한 존재에 대해. 나는 관객들에게 혜교의 마음을 대신해 정호승 시인의 <용서>라는 시를 읽어주었다. “당신에게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슬픔이 있지/ 용서만이 인간의 최선의 아름다움이 아닐 때가 있지/ 내가 내 상처의 뒷골목을 휘청거리며 걸어갈 때/ 내가 내 분노의 산허리를 헉헉거리며 올라가/ 기어이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릴 때/ 아버지처럼 다정히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용서하는 일보다 용서를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마지막 단풍이 거리에 흩날리던 날, 송혜교를 만나러 청담동의 10꼬르소 꼬모 카페에 들어섰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얼마 전 샤넬 쇼 프런트 로에 앉은 송혜교의 사진과 소식은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됐고,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드라마틱한 파리 스토리? 혹은 용기 있는 화두에도 불구하고 편파적인 배급, 교차 상영으로 흥행에 실패한 영화 <오늘>에 대한 아쉬움? 묻고 싶은 질문들이 너무 많았다. 서가와 책으로 둘러싸인 10꼬르소 꼬모 카페 안쪽에서 혜교가 갈색 가죽의자에 앉아 있다 빙그르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예쁘다! 진부한 호들갑 같지만 그녀를 보면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온다. 파리에서 혜교를 보자마자 “프리티, 프리티!”를 연발했다는 나탈리아 보디아노바와 우마 서먼, 자레드 레토 같은 셀레브리티들이 이해된다. 언제나 그렇듯,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내가 거짓말 못한다는 거 알죠?’라고 속삭이는 듯한 눈웃음이 공중에 치즈 가루처럼 부서진다. 루즈한 니트 원피스에 가죽 재킷을 입고 아무렇게나 올려 묶은 시농 스타일의 헤어가 노 메이크업의 얼굴에 잘 어울렸다. 그녀의 나이 이제 서른이다.

문득 얼마 전 본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누군가 고영욱에게 물었다. “예전에 룰라 멤버였던 이지현 씨는 뭘 하나요?”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그녀는, …늙어가고 있죠.”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었지만, 나는 그 멘트가 마치 우디 알렌의 대사처럼 중의적으로 들렸다. 우리는 다들 뭘 하고 있을까? 나도, 여러분도, 우리의 요정 혜교도. 늙어가고 있다! 다만 혜교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답고 기품이 더해지길 바라면서. 여전히 과거의 송혜교 시간을 살고 있는 대중과 정신적으로 점점 더 강하고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그녀 사이의 균열은 조금 있다 얘기하기로 하자.

콩코드 광장 속 금빛 분수대 앞에서 포즈를 취한 송혜교. 크리스털 장식의 화이트 드레스는 암살라(Amsale), 블랙 깃털 장식의 볼레로는 샤넬(Chanel).

송혜교는 지금 왕가위와 몇 년째 영화 촬영 중이다. 오늘의 만남도 하마터면 중국의 호텔 방에서 전화로 이뤄질 뻔했다. 영화 이 화려한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2046년에 개봉될 거라는 악소문에 시달렸던 것처럼 <일대종사>도 진행만 8년째다. 엽문(이소룡의 스승)의 일대기에 관한 영화고, 양조위와 장첸과 장쯔이와 송혜교가 캐스팅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게 베일에 쌓여 있다. 나는 스탠리 큐브릭이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만을 데리고 현란하게 찍었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편집이 기묘했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을 예로 들어, 그 영화가 왕가위 감독의 유작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혜교는 왕가위 감독은 너무나 건강하며, 아마 그렇게 되면 너무 여러 가지 버전 때문에 편집이 아예 불가능할 거라고 비꼬았다.

“캐릭터도 모르고 시나리오도 모르죠. 한번 찍은 장면을 여린 여성일 때, 강한 여성일 때로 바꿔서 찍기도 하구요. 내가 어떤 여자인지도모른 채 카메라 앞에 서는 기분이 어떻겠어요? 왕가위는 백지 상태로 들어가라고 하지만, 그가 원하는 건 배우가 혼돈에 처해서 세포가 뜯겨나가는 것 같은 상태인지도 몰라요.” 송혜교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왕가위는 그녀에게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그런데 그건 내가 생각해도 아주 어려운 주문이다.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에도 불구하고 의 몇 장면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하며, 왕정문과 기무라 다쿠야는 자신이 뭘하는지 모르는 채 영화를 찍었음에 분명하다. 몇 년에 걸쳐서.

“배우는 사이보그가 아니죠. 감정이 있는 존재예요. 한번은 너무 화가 나서 한국말로 감독님에게 막 소리를 질렀는데, 그가 웃으면서 그러더군요. ‘치어스!’” 이야기의 앞,뒤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영화를 찍고 있다고 울상이 된 송혜교. 그렇게 안개 속에 있다가도 금세 해가 비친 말간 얼굴로 영화가 끝나면 왕가위가 카메라를 잡고 양조위, 장첸, 장쯔이와 함께 <보그 코리아> 표지를 찍으면 어떻겠냐고 희망의 동화를 꺼내 보이고야마는. 아! 그랬었지. <가을동화>에서도 <올인>에서도 <풀하우스>에서도 이 아이는 포기를 몰랐었지. 그리고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었었지.

나는 가끔 고현정의 담대함과 최지우의 천진함을 반반씩 나눠 가진 여배우가 송혜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 있다. 고현정이 홍상수감독의 <해변의 여인>에서 ‘지랄이야’라는 첫 대사로 자기 언어를 찾고, 최지우가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에서 고현정에게 삿대질을 하며 반전의 쾌감을 주었듯이, 혜교에게도 자기 풍자적인 목소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헬무트 뉴튼이 YSL의 ‘르 스모킹’ 사진을 찍었던 골목과 꼭 닮은 생 제르망 데 프레 지역의 뒷 골목. 화이트 플리츠 드레스와 소매에 트위드 장식이 들어간 재킷은 샤넬(Chanel), 블랙 스트랩 힐은 크리스챤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은은한 가로등 조명이 불을 밝힌 오데옹 성당의 뒷골목. 블렉 레이스 톱은 에밀리오 푸치(Emilio Pucci at 10 Corso Como), 블랙 뷔스티에는 데릭 램(Derek Lam at 10 Corso Como), 스팽글 드레스는 맥앤로건(Mag&Logan).

“정말이요? 홍상수 감독님 영화도 인연이 되면 하고 싶어요. 지금은 왕가위만으로도 버거워요. <여배우들>처럼 여러 선배님들과 어울린 영화도 하고 싶고요. 현정 언니와 지우 언니의 행보도 멋있어요. 그런데 전 지금의 제 선택도 좋아요. 전 일 때문에 한 번도 불안한 적이 없어요. 어떤 분들은 젊고 예쁜 20대들이 나오니까 불안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전 제가 20대 때 할 수 있는 건 다했어요. 지금은 또 새로운 30대를 만들어 가야죠. 저한테 스물네 살 때 했던 <풀하우스>를 원하시면 그건 무리예요. 전 항상 그 시절에 제가 원했던 것을 했어요. 의도적으로 전략적으로 대중과 평론가가 좋아할 만한 것을 왔다 갔다 하며 밀고 당기기를 해본적이 없어요. 전 지금의 제 도전이 좋아요. 너무 재미있는 걸요.” 어쩌면 혜교는 자기 식대로 레드 오션이 아닌 블루 오션을 개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혼하거나 이혼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 채로 지금의 20대 여배우들이 먼 훗날 참고할 만한.

나는 그녀에게 ‘밖으로 뻗어나가는 대륙 기질이 다분하다’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전 남들이 안 가본 새로운 길을 가는 걸 좋아해요”라고 혜교가 긍정했다. 그녀는 한자리에 오래 머무른 적이 없다. 몇 년 전 그녀가 선택한 영화 <황진이>는 북한 소설가 홍석중의 황진이(놀랍게도 그것은 신데렐라에서 천기로 떨어진 다음, 계급사회의 허상을 깨닫고 비웃는 일종의 ‘여성 혁명가’에 대한 탄생 설화였다). 송혜교는 영화 촬영이 끝나자마자 파리의 사진가 파올로 로베르시를 찾아가 16세기 조선의 슈퍼 모델 황진이를 연기했고, 개봉 즈음엔 북한에 가서 금강산 시사회에 참석했다. 흥행 참패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는 실패했지만 송혜교는 실패하지 않았다,고 장윤현 감독은 선언했다. 배급사의 상영관 축소로 충격에 빠졌던 이정향 감독도 영화 <오늘>에서 보여준 송혜교의 연기와 용기에 여러 번 찬사를 보냈다. “전, 만족해요. 나중에 관객들이 DVD라도 봤으면 좋겠어요. 다행히도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가 11월 말까지 장기 상영을 해주기로 약속했어요”라고 송혜교는 부연했다. 이 자유롭고 현대적인 신여성을 현재의 엔터테인먼트 카테고리에 맞춰 충고하는 대중문화평론가들은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살아남은 하지원, 최강희, 김하늘 혹은 전도연을 예로 들어 그들의 전략을 배우라는 그런 충고 말이다.

“저는 저만의 길이 있어요. 현재 몇 편이 어둡고 비상업적인 영화로 가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그건 제 의지였어요. 송혜교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제가 또 흔한 로맨스 영화에 출연하면 나이답지 않다고 싫어할지도 모르죠. 저는 배우예요. 진실을 연기하는 배우. 배우가 당장의 인기를 위해서 마음에 없는 캐릭터를 연기 할 수는 없어요. 그게 저예요. 저는 흔들림 없이 가고 있어요. 제가 저를 믿는 것처럼, 여러분도 제가 가는 길을 믿어주세요.” 아! 내가 그녀에게서 공리의 얼굴을 본 게 우연이 아니었다. 저 흔들림 없는 눈동자라니! 내친김에 그녀에게 노출 연기에 거부감이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평론가들은 은연중에 송혜교가 ‘성적’ 통과제의를 거쳐야 한다고들 하니까.

“제가 지금 벗으면 캐릭터가 벗었다고 생각할까요? 아니요. 제 가슴은 송혜교의 가슴이지 캐릭터의 가슴이 되지 못할 거예요. 영화적 맥락으로 보여지지 않고 제 신체 일부로 평가되겠죠. 제 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실제로 악의적인 인터넷 캡처 사진과 악플로 많은 여배우가 고통 받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한국 영화계에서 여배우들을 위한 진지한 영화가 기획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와 <장화홍련> 이후 박찬욱 감독과 김지운 감독은 더 이상 여배우를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을 것이며, <시>의 이창동 감독과 <마더>의 봉준호 감독을 기다리는 것보다 오히려 재능 있는 신인 감독과 작업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국엔 재능 있는 신인 감독들이 많아요. 그분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라고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문득 그녀가 존경하는 여배우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담대한 고현정? 천진한 장미희? “심은하 씨요. 스타성과 배우의 힘을 모두 지녔죠. 모두들 그랬어요. 심은하 선배님은 연기 시작 전에 백도화지 같았다고. 저도 그게 좋은데 잘 안 돼요. 지금은 생각이 너무 많죠. 가끔 모든 걸 놔버리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하죠.” 고뇌하는 혜교와 로맨틱한 혜교, 그 사이에 중심을 잡아주는 건 역시나 여행과 샴페인이다. 커피와 자몽 주스를 홀짝거리던 그녀와 나는 날이 저물자 하우스 샴페인과 감자튀김을 시키고야 말았다. 물론 감자튀김은 모두 내 몫이었지만.

이즈음에서 ‘혜교가 파리로 간 까닭’을 얘기해 보자. 뉴욕의 혜교가 <페티시>라는 독립영화를 찍었고, 중국의 혜교가 끝이 언제일지 모르는 왕가위의 영화를 찍고 있다면, 파리의 혜교는 전설적인 패션 대가들과 꿈을 찍는다. 한국 영화계가 송혜교라는 귀여운 거물을 어떻게 다룰 줄 몰라 오우삼이나 왕가위에게 맡겨두고 헤매는 동안 패션계는 그녀를 존 갈리아노나 칼 라거펠트 같은 거물들에게 데려갔다. 몇 년 전 디올 쇼에 할리우드 배우들과 나란히 앉아 마리오 테스티노의 플래시 세례를 받던 장면이 기억난다. 존 갈리아노와 비주하며 그의 땀 때문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깜찍한 사진도.

이번엔 칼 라거펠트의 초대를 받았다. “이젠 프런트 로에 앉는 게 어색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온 배우라는 자존감이 있어요. ‘From Korea’ 와 ‘Korea Actress’라는 말을 강조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걸요.” 혜교는 패션계의 세계적인 스타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꼴레뜨에서 몇 번 마주쳤던 칼 라거펠트나 두 번째 만난 파올로 로베르시는 친근한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칼 라거펠트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100명의 셀레브리티 촬영 프로젝트를 위해 피카소와 헤밍웨이 등의 명사들로 북적거렸던 맥심 카페를 통째로 빌렸고, 혜교를 그곳으로 초대했다. 스타일링은 카린 로이펠트가 담당했다. 아! 칼과 카린이라니! 피터 린드버그와 마리 아멜리 소베와 작업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혜교에게는 어째서 이렇게 매번 달콤한 기적이 일어나는 걸까.

패션이라는 판타지 세계와 영화라는 리얼리즘 세계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프리패스를 가진 여배우 송혜교. 그리고 촬영장의 샤넬 레이디들은 혜교에게 다가와 촬영하면서 칼이 저렇게 감탄사를 내뱉은 건 처음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레이트였는지, 프리티였는지, 원더풀이었는지, 스위트였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좀 정신이 없었거든요. 하하.” 이 프로젝트는 내년 봄까지 비밀리에 계속 진행중이다. “세계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대가들은 다 친절하죠.”

물론, 우리의 파올로 로베르시 할아버지도. 몇 년 전에 한복으로 가슴을 졸라매고 미래적인 아미달라 여왕과 조선의 명성황후를 섞은 기품으로 파올로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감동시켰던 혜교는 <보그 코리아> 12월호 표지를 위해 다시 한번 대가의 스튜디오를 찾았다. 디지털 프로세스로 바뀐 파올로 로베르시의 프린트 속에서 혜교는 근사한 모던 레이디처럼 보였다. 세상 밖으로 나가 서구의 신문물을 접하고,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 교류하고 돌아온 신여성. 그녀는 이미 샬롯 갱스부르가 소속된 파리의 글로벌 에이전시 ‘에피지스’와 계약했다. 그리고 파리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밤. 깡봉에 있는 코코 샤넬 아파트와 오데옹 성당 뒷골목, 콩코드 광장과 분수대, 퐁데자르와 방돔 광장을 돌며 한 편의 대하드라마 같은 화보를 찍은 우리의 신여성은 밤 12시가 넘어 호텔 방으로 돌아와 드레스와 하이힐을 벗었다.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로 ‘송혜교’라는 이름이 새겨진 샴페인 한 잔이 금빛 거품을 출렁이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 연인들의 사랑 맹세가 담긴 자물쇠로 장식된 세느 강, 퐁 데 자르에서. 스트라이프 니트와 진주 목걸이, 뱅글은 샤넬(Chanel), 시폰 소재의 드레스는 미스지 콜렉션(Miss Gee Collection), 모자는 헬렌 카민스키(Helen Kamin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