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가 되어

현대사회에서 예술가라는 평판은 로맨틱한 허위에 가깝다. 그러나 최민식만큼은 마지막 남은 영화 예술가라 부를 수 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남자들의 전성시대〉를 스타트로 이 영화 고전주의자의 전성시대가 다시 시작됐다.

셔츠와 타이, 수트는 모두 루소소(Lussoso), 슈즈는 키사(Kissa),

담배를 피워도 좋습니다.
아니요. 좀 참아볼 생각입니다.

진심이세요? 담배도 피우지 않고…
생애 첫 건강검진을 받았어요. 며칠 전에.

건강검진이라… 실례지만, 몇 살이신가요?
오십입니다.

늦으셨군요.
네. 그동안 내 인생의 반전이 시작될까 두려웠습니다. 폐가 좀 지쳐 있다고 하더군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흡연을 했거든요. 30년 넘게 담배 연기를 마신 셈이죠. 제게 연기는 일산화탄소가 아니라 산소입니다.

절실하시겠어요.
미칠 것 같습니다.

당신한텐 언제나 연기 냄새가 가득했지요. 곰방대를 문 인디언 같았어요. 담배와 연기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담배가 꼭 있어야 연기를 하는 건 아니죠. 흡연은 생활 습관일 뿐인데, 세상이 점점 더 나쁘게 몰고 가더군요. 의학적으로 백해무익하지만, 이 아이(담배)는 나를 배신한 적이 없지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30년 동안 내 속을 들락날락 해온 놈이에요. 연기 말고는 누가 내 곪은 속을 알겠어요?

깊은 친밀감이로군요.
연기와 함께한 세월 속에… 폐암으로 죽는 한이 있어도 금연 광고는 안 할 겁니다. 율 브리너가 죽기 전에 “Don’t Smoke!” 공익 광고를 했는데, 그건 배신이에요. 평생 함께한 담배 입장에서 봐서는.

담배의 입장이라… 이번에 <범죄와의 전쟁>으로 80년대 영화를 찍으셨죠? 80년대 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르시나요?
담배 피우는 풍경이 떠오르는군요. 담배를 뻑뻑 피울 수밖에 없는 시대였죠. 학생도 직장인도 정치인도… 다 꽉 찬 연기 속에 있었습니다.

연기에 관해 얘기해 봅시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부> 같은 영화 연기를 하고 싶어 했었죠?
러닝타임이 긴 대작 영화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요. 요즘 영화들은 KTX 리듬으로 치고 달리죠. 2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는 기차 같습니다. 연기를…, 그 유장한 삶의 이야기를 천편일률적인 시간 안에 가두는 게 못마땅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예술가라는 말은 로맨틱한 허위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도 당신은 마지막 남은 영화 고전주의자처럼 느껴지네요.
영화를 산업으로만 이해한다는 건 가슴 아픈 일입니다.

몇 시간을 원하십니까?
<범죄와의 전쟁>은 3시간 40분 정도가 적당합니다. 2시간 26분 정도도 좋지요.

두 가지 버전으로 상영되면 좋겠군요. 저라면 3시간 40분짜리를 보겠습니다. 제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거든요.
이 영화는 특별히 모나지 않은 평범한 가장, 부패 관리의 무용담입니다. 비리 세관 공무원이었던 사내가 건달과 결탁하고 돈도 벌고 봉변도 당하고 가오도 잡으며 전성기를 보냅니다. 나중에 ‘범죄와의 전쟁’ 선포로 위기가 닥치자, 혼자 살겠다고 배신도 하죠. 생명력 하나는 끝내주는 사내 이야기예요. 치고받고 허우적거리고 짠해지고 쓸쓸해지는 거죠.

80년대엔 그런 사내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셨나요?
학교에서 최루탄 가스를 맡았습니다. 학교를 떠나 군대에 갔는데, 군대마저도 화생방 부대였어요.

저런, 연기를 피할 수 없으셨네요. 하여간 포스터는 근사하더군요. 남자라면 누구나 양복 입고 부하들을 양 옆에 거느리고 거리를 휩쓸고 다니고 싶은 판타지가 있죠. 정글의 사자 떼들처럼. 안 그렇습니까?
사내자식들이 떼로 나오니까 폼이 나죠. 그 포스터는 일부러 찍은 게 아니에요. 현장 리허설 할 때 스틸 사진가가 달려들더니 기관총 쏘듯이, 탕탕탕탕!

멋진 우연이군요!
잘 건져냈죠. 저는 평소 영화 포스터에 불만이 많았어요. 왜 대체 배우들의 뻔한 얼굴을 포스터에 박아놓는 거죠? 그걸 매니지먼트에서 원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악마를 보았다> 포스터에서도 최민식과 이병헌의 얼굴이 붙어 있죠. 마케팅적인 이유가 클 거예요. 그건 그렇고 <악마를 보았다>를 찍은 이후에 후폭풍은 없었습니까? 최민식의 ‘악마’ 연기가 너무 끔찍해서 현실에서도 마주치기 싫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죠.
아내가 그러더군요. “나가서 영화 찍으라고 했더니, 왜 미친 짓을 하고 왔느냐”고.

후회는 없으신가요?
전 필름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물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아요. 옳고 그른 것, 싫고 좋은 것을 떠나 통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캐릭터에 애정이 있죠.

무엇을 표현하고 싶으셨던 거죠?
슬픈 살인마의 느낌이었어요. 잔혹한 살인 후에 조용히 꽃밭을 가꾸는 남자.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듯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도록 태어난 악마. 그 악마에게 전염돼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 남자.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는 관객… 폭력 앞의 폭소.

머릿속에선 새로운 영화를 찍으셨군요.
하하. 요즘엔 연출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담배 한 대 태우시겠어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로버트 레드포드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배우 출신 감독들도 좋은 영화를 만들었죠. 배우 최민식이 만든 영화라면 연기 하나는 끝내주겠군요.
아직은…, 아직은 연기를 더 해야 될 때예요. 그리고 감독은 절대적 공력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결국은 감독도 ‘인간이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죠.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그 많은 사람과 장비와 돈을 운영해서 창조적인 일을 하는데, 현장에선 수많은 변수들이 터집니다. 시시각각 머릿속에 대지진이 일어나는 와중에, 언제나 차선책을 내놔야 한다구요. 저마다 크리에이티브한 인간들의 맥시멈을 끌어내면서….

오오…, 누가 가장 ‘사람이 된’ 감독이었나요?
그야 박찬욱이죠.

김지운이나 임권택 감독은 어떤가요?
여우 중의 여우는 박찬욱이죠.

감독이 되면 첫 영화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세요?
격정 멜로를 하고 싶습니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볼 수 있는 중년의 불륜 이야기. 솔직하고 웃기고 슬픈, 누구나 목말라 하는 그런 로맨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다른 분이 해주는 게 좋겠어요. 가만…, 이재용 감독 어때요? 아니에요. 역시 박찬욱이 좋겠어요.

박찬욱 감독을 정말 사랑하시는군요.
배우는 감독이 끌어내는 만큼 새 얼굴을 얻는 법이죠. 박 감독이 여배우 이영애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보세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뭘 해도 쿨하게 온도를 맞춰내죠.

당신은 초기에 이미 시네마스코프의 걸작 연기를 다 해냈어요. 박찬욱 감독과의 <올드보이>가 정점이었죠. 그런데도 여전히 목이 마른가요?
미칠 정도입니다. 전투력으로 온몸이 충전돼 있어요. 이제야 제대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이전의 연기는 뭐란 말인가요? <해피엔드> <취화선> <파이란>의 뜨거운 연기는.
그 연기들을 보면 너무 불완전합니다.

보기가 괴로울 정도인가요?
네. 괴로워요. 그건 저만이 알 수 있는 거죠. 저는 지금 옛날보다 훨씬 자유로워요. 뭐든지 와라, 진짜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겁니다. 정말, 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입니다.

제 생각엔 박찬욱의 <올드보이>와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라는 쿨링 시스템을 거치면서 시대에 맞는 적정 체온을 얻으신 듯합니다. 그전까진 최민식이라는 자체 화력이 너무 강했어요. 한석규를 보세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뿌리 깊은 나무>에서 냉온 시스템이 완비된 연기를 보여 줬잖아요.
한석규는 훌륭한 배우입니다.

드라마를 해보는 게 어떠세요?
<서울의 달>을 했던 김운경 작가의 제안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언어와 캐릭터를 좋아해요. 덜 떨어지고 능글능글하고, 한량 같고….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은 왜 안 하셨나요?
그건, 그 이야기를 제가 실화로 받아들여 연기하는 게 심정적으로 불편해서였습니다. 안성기 선배님이 잘하셨죠.

차기작 <신세계>는 황정민, 이정재가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조인했다더군요. 배우들에게 존경받는 기분이 어떤가요?
과찬입니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하정우와는 잘 지내셨어요?
직업 배우로서 마인드가 훌륭했어요. 기분 좋은 영화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욕심이 많아지셨죠?
욕심이 정말 커졌습니다. 머릿속에 온통 이야기들이 아우성입니다.

몸에서 연기를 빼면 최민식은 뭐가 되나요?
병신이죠. 병신이에요, 나는. 그래서 죽을 때까지 어떤 사람과 작업하느냐, 그게 전부예요. 사랑이 뭐냐? 증오가 뭐냐? 복수가 뭐냐? 평생 질문을 던지면서 사는. 난 내가 수도승 같다는 생각을 해요.

언제 감상에 빠지시나요?
시도 때도 없이 빠집니다. 오십이 되면서 자주 우울해져요. 젊음이 가는구나… 아직 나는 젊은데, 이렇게 가겠구나,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어떤 남편이신가요?
일상에서 시정 안 되는 잘못을 수시로 저지르고, 그 행위를 반복하는 철없는 보통 남자입니다.

영화 동료와는 어떤 얘기를 나누나요?
영화를 빼면 여자 얘기를 합니다.

여자에 대해 뭐가 궁금하시죠? 우리는 여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자에게 잘해줄까를 생각하죠. 으하하.

참으로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시는군요. 요즘 만나고 싶은 분이 있으신가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낄낄낄.

나는 당신이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베르너 헤어조크라구요?

<아귀레, 신의 분노>라고 <지옥의 묵시록>에 영감을 준 영화를 찍은 감독이에요. 아마존 밀림을 배경으로 엘도라도의 환상을 좇다가 미쳐가는 스페인 군인 아귀레의 모험담을 다룬 작품이죠. 이 광기에 가득 찬 영화를 찍을 때 감독 베르너 헤어조크가 주연 배우인 클라우스 킨스키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연기를 계속하도록 시켰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다들 반쯤 미쳐 있었거든요.
놀랍네요. 꼭 보도록 하지요.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요즘엔 버나드쇼의 묘비명이 생각나서 혼자 웃곤 합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기막힌 명문이죠.

묘비명에 쓰실 작정이세요?
아니요. 전 모든 걸 태울 겁니다. 아무것도 남기고 가고 싶지 않습니다. 육신도, 영화도. 다 연기가 되어 사라지겠군요. 그래서 생명이 주어진 시간 동안, 모든 걸, 차분하게, 꼼꼼히 다 느끼고 싶습니다. 하나하나, 정확하게, 더, 즐기고 싶어요. 다 끝났으면 담배 한 대 태워도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