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연애의 공학

2016.03.17

by VOGUE

    연애의 공학

    연애는 무엇을 기반으로 쌓아 올려질까? 연애와 건축이 맞물리는 멜로영화〈 건축학개론〉이 개봉한다. 이용주 감독과 그의 자아가 투영된 남자 주인공, 엄태웅이 연애에 얽힌 재료들을 풀어놓았다.

    이용주가 입은 티셔츠는 사카이(Sakai at Mue), 스카프는 자라(Zara), 시계는 블로바(Bulova), 엄태웅이 입은 데님 셔츠는 하트포드(Hartford at Koon).

    엄태웅은 진돗개 ‘백용’과 함께 스튜디오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가 일주일 중 유일하게 잠깐이나마 쉬어야 하는 일요일이었다. <1박 2일> 촬영 차 강원도 정선에 갔다 돌아온 다음 날이었고, 새 드라마 <적도의 남자> 때문에 태국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된 날이기도 했다. 그가 ‘백용’의 목줄을 손에서 놓기도 전에 반갑게 말을 붙인 대상은 이용주 감독이다. 일주일 새에 외국과 지방을 오간 엄태웅에 비하면 그는 요즘 늘 한 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사람 뇌에서 진물이 흐르게 만든다는 편집실. 영화 <건축학개론>의 편집을 속 시원히 마무리 짓지 못한 그는 다소 예민한 상태였다. 이 심각한 감독과 전혀 심각할 것 없는 배우가 만나자, 점점 변해가는 쪽은 심각하던 사람이었다. 대기실에선 두 남자의 활발한 언어들이 피어났다.

    이용주 감독에 대한 얘기부터 해보자. 그의 첫 작품 <불신지옥>은 허름한 아파트가 배경이지만 만듦새가 세련되고 지적인 공포영화였다. 흥행과 평가 두 가지를 다 잡는 입봉작이 어디 흔한가? 흔치 않다, <불신지옥>도 흥행에서는 ‘망했다’. 그래도 영화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냐고 위로하자 이용주가 말했다. “흥행도 망하고 평가도 안 좋으면 바로 은퇴해야 돼요.” <건축학개론> 프로젝트를 처음 들은 건 2년 전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났을 때다(이야기하길 좋아하는 이 달변가는 당시 흔쾌히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는데, <보그> 스태프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만지고 옷을 입히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의 기억이 이용주 감독에겐 트라우마 수준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는 준비 중인 다음 작품이 멜로물이라고 했다. 건축과 연애가 맞물리는 영화. 건축이 사랑과 만나 무한 육면 각체로 펼쳐지려나, 흥미로우면서도 의아한 아이디어로 들렸다. 공포영화를 보고 감독의 가능성을 봤던 이들이라면 배신자라고 할 만하다. “<불신지옥> 개봉하고 어디 강의를 나간 적이 있는데, 한 수강생은 제가 박쥐 뜯어먹고 그런 사람일 줄 알았대요. 제 얼굴을 보고 ‘와, 이 사람 만만치 않겠구나’ 했다고.” 이용주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첫인상을 배반하는 캐릭터’다. 그 배반의 증거 중 하나로 첫 작품보다 훨씬 앞서 구상했던 ‘멜로물’에 대해 설명하는 감독에게선 애정과 다짐이 느껴졌다.

    영화에서 엄태웅은 건축가, 한가인은 건축주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나 풋풋하게 좋아했던 사이. 15년이 흐른 어느 날 여자는 남자를 찾아와 자신을 위한 집을 지어달라고 한다. 채 꽃 피우기도 전에 오해로 어긋나버린 첫사랑이 살 집을 짓는다는 건 얼마나 잔인하면서도 설레는 일일까? 건축공학과를 나온 이용주는 설계 사무소에서 몇 년 동안 일한 경력이 있다. “집을 지으려면 건축주의 취향을 상세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걸 좋아하고, 왜 필요로 하는지, 그에게 집의 의미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대화해요. 서로의 취향을 조금씩 알아가는거죠.” 취향을 주고받으며 차츰 상대방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연애의 구조와 꼭 닮았다.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남길 것인지 실랑이 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꼬인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집이 꼴을 갖춰가듯 오해도 풀려간다. 집 짓는 동안만 지속되는 시한부 연애다.

    이용주가 입은 티셔츠는 사카이(Sakai at Mue), 시계는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 엄태웅이 입은 셔츠는 띠어리(Theory).

    <건축학개론> 팀은 진짜 집을 지었다. 있던 집을 개조하는 증축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제주도 위미리 마을의 평범한 양옥집이 여자의 집으로 낙점됐다. 이용주가 10년 가까이 끌어온 이 프로젝트를 위해 그와 과동기인 건축가 구승회가 함께했다. “같이 공부하며 취업 준비도 했고, 서로가 원하는 걸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규모나 마감재 같은 큰 틀 뿐만 아니라 창문의 센티미터 하나를 두고도 부딪쳤어요. 친구 하나 잃는 줄 알았죠. 집은 대지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순서인데, 오랫동안 가상의 땅에 자리 잡은 집을 먼저 생각했다가 진짜 설계를 하려니 더 힘들었어요.” 건축가 친구와 감독의 지난한 조율의 날들은 고스란히 엄태웅과 한가인의 대화로 반영되기도 했다. 건축은 연애와 닮았지만, 건축홍보영화가 아닌 멜로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자기 점검’은 또 다른 숙제였다. “건축가와 건축주는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대요. 뭘 결정해도 이게 최선인가 의심하게 되고. 연애도 그래요. 모르는 두 사람이 만나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면 처음엔 서로 좋아한다는 마음만 있을 뿐이죠. 상대가 어떤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잖아요.” 엄태웅은 <보그>와의 지난 인터뷰에서 건물주가 되는 게 꿈이라고 장난처럼 말한 적이 있다. <1박 2일> 이후 전에 없던 광고 섭외가 몰려들어온 건 그에게 큰 수확이지만, ‘강남에 빌딩 한 채 사는 일’은 신기루처럼 멀리 있는 꿈이다. 그는 정원에 풀이 없는 한옥(있으면 자주 깎아줘야 하니까)에서 전원 생활하는 자신을 그린다. 영화 속에서 여자에게 ‘폴딩 창’이 있는 집을 지어줬던 것처럼, 전면에 시원하게 펼쳐진 창으로 환한 빛이 들어오는 집일 것이다.

    엄태웅에겐 사실 배우로서 각인된 강력한 무언가가 없었다. 하지만 장률의 영화 <이리>에서 이리 폭발사고 영향으로 살짝 모자라게 태어난 여동생을 보살피느라 늘 짓눌려 보였던 엄태웅의 얼굴만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이용주는 그런 무게감과 가벼움, 남자다움과 소년다움을 오갈 수 있는 스펙트럼이 엄태웅의 장점이라고 했다. 그러곤 국내 영화감독들 대부분이 엄태웅 최고의 필모그래피로 <가족의 탄생>을 꼽을 거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가족을 찾으면서 스무 살 연상인 고두심을 사랑하는 여자라고 대동한 청년. “그 영화에서 태웅 씨, 참 능글능글했지. 제가 배우를 볼 때 중요하게 보는 것 중 하나가 유머 감각이에요. 원래부터 그 유연함이 없으면 배우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절대로 안 나와요.” 엄태웅과 유머 감각이라? 적어도 <1박 2일>에서는 게임 하나 제대로 못 해내서 웃기지도 울리지도 못하는 ‘허당’ 엄태웅을 봤을 뿐이다. “저 유머 감각 있는 남자입니다. 실제로 더 웃겨요.” 엄태웅과 같이 있는 시간 동안 그의 웃긴 지점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만년 소년으로 늙어갈 그의 미래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는 여자에게 고백할 때도 늘 장난처럼 해버려서 실없는 남자처럼 보일 거라고 털어놨다. ‘소년’이란 칭호가 거북하지 않고, 연애영화 속에서 툴툴거려도 용서되는 서른 아홉.

    이용주 감독에게 첫사랑은 아주 좋은 기억으로, 엄태웅에게 첫사랑은 아주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엄태웅은 첫사랑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게 첫사랑이어서 그렇게 힘들었던거구나! 20대 초반부터 6~7년을 만난 여자였죠. 빨리빨리 잊는 편이지만 그땐 얼마나 힘들어야 하는지를 몰라서 더 힘들었어요.” 사랑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든, 남자들은 ‘찌질’했던 한때를 꼬리표처럼 지니고 있다. 그 과거 속의 자신을 ‘나쁜 놈’이라고 바라볼 줄 알면서도 죽을 때까지 절대 변하지 않는 종자. “연애할 때 저는 부딪치고 해결하려는 노력조차 잘 안 했어요. 나 혼자만의 생각을 여자 친구가 그냥 알아주겠거니 했죠. 그건 가족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게 안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나를 봐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아직까지 생각하는 것 보니 쉽게 바뀔 것 같지도 않아요.”

    엄태웅이 입은 티셔츠는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가죽 베스트는 에잇 세컨즈(Eight Seconds), 바지는 타임(Time), 슈즈는 사눅(Sanuk), 목걸이는 고티(Goti at Published), 브레이슬릿은 엠주(Mzuu), 선글라스는 그라픽 플라스틱(Grafik Plastic), 이용주가 입은 바지는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 슈즈는 푸마(Puma), 선글라스는 그라픽 플라스틱.

    배우가 연기로 과거에 대한 굿을 치를 수 있다면, 감독은 그 굿판을 자신이 짤 수 있다. 이용주는 지난날의 자신에게 반성문을 쓰는 기분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소개팅 했던 여자네 집에 전화해서 ‘저기… 별로’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냥 연락을 안 해버렸던 기억들 마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죠. 남에게 싫은 소리 하기 싫어서 나에게 편한 길을 택했던 거니까. 이번 영화는 그 비겁함과 찌질함에 대해 반성하는 편지이기도 해요. 그런데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김현석 감독이 이미 이런 얘기 다 하고 다녔더라?”

    감독의 자아가 투영된 남자 주인공, 그 ‘모형’을 분양 받았던 배우는 영화 한 편을 거치며 감독과 공통된 화두를 붙들게 된다. “혹시 감독님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있나요?” 엄태웅에게 말하자, 그는 “물론이죠”라고 대답한 뒤 그때부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영화의 외부인은 자세히 알아들을 수 없는, 신과 연기에 대한 문답들이었다. 확신과 아쉬움과 위로들이 오갔다. 그 수다 속에서 지나가듯 등장한 단어, ‘압서방’을 계기로 오늘의 대화는 2라운드에 접어들었다. ‘압서방’은 어떤 서방님인가. ‘압구정, 서초동, 방배동’의 준말이다. 이용주는 대학 선배이기도 한 봉준호(이용주는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조감독이었다)의 입에서 이 단어를 처음 들었는데, 봉준호가 친히 하사하여 이 말을 <건축학개론> 속에도 등장시켰다. 영화에서 두 남녀를 멀어지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물리적인 거리감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을 신기해하다가, 서울 중에서도 ‘강남’으로 흘러 들어간 여자. ‘강북’을 지키는 남자는 물리적인 거리감과 동시에 종족 자체가 다른 강남 오빠들, 일명 ‘압서방’ 역시 극복해야 한다.

    이용주 감독은 동부이촌동에서만 38년을 살았다. 공간에 대한 불만으로 철없이 엄마를 졸라대던 어린아이에게 그 동네는 어쩔 수 없이 고향이 돼버렸다. 서울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디인가? 이 조그만 도시에서 ‘강북 주민’과 ‘강남 주민’의 고향은 다리 하나로 해결되지 않을 만큼 그 심리적 거리감이 크다. 대학 시절 이용주는 신촌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강북 거주 학생과 강남 거주 학생의 동선이 4년 동안 한 번도 겹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과 친구들이 대부분 강남 아이들이었는데, 그들에게 강북은 버려진 동네였어요. 언젠가 친구가 저희집에 놀러 왔다가 택시가 안 잡혀서 고생하더니 ‘강북은 올 곳이 못 돼’라고 중얼거렸죠. 강북에 대해 무지하니까 지역에 대한 공포감마저 있는 거예요.” 드러내놓고 얘기하지 않지만 지역에 대한 위계가 확연히 인식되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친구나 연인이 되고, 친구나 연인이 될 뻔하다 어긋난다.

    엄태웅은 면목동에 사는 청소년이었다. 거기서 ‘엄마의 아는 사람의 남편’이 있는 미술학원에 다니기 위해 압구정동을 오갔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걸으면 그 느낌이 참 불편했어요.” 한가인은 은평구와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출신’을 추적하는 우스운 얘기 같지만, 그건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묘한 유대에 물꼬를 터주기도 했다. “강남 출신들의 고향은 건설사가 정해줍니다. 어릴 때 친구들을 떠올려 보면, 강남 아이들은 사는 곳을 말할 때 동네 이름보다 ‘구 현대’ ‘우성 3차’ ‘그랜드 백화점 근처’로 인식하고 있었죠. 서로 간에 무지와 오해가 있다는 건 비슷하지만, 저는 강남 아이들이 강북 아이들보다 서울을 한정적으로 느끼고 있다고 봤어요.” 같은 서울 사람끼리도 다르게 느끼고 있는 ‘동네’의 질감. 소비문화가 발달된 강남에 갈 일이 생길 수밖에 없는 강북 사람, 동네 이름은 알아도 그곳이 강북 어느 즈음에 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강남 사람에 대한 일화는 영화 속에도 등장한다(이용주와 엄태웅은 내가 어느 지역에서 10대를 보냈는지 물었고, 8학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데 다 마침 게을러서 강북 구석구석을 가볼 일이 없었던 나는 순식간에 ‘뭘 모르는 여자’가 되었다).

    우리의 연애는 무엇을 기반으로 쌓아 올려질까?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거나 강북에서 강남으로 유입될 때의 문화 충격이 20대 초반을 관통하는 사람에게 연애사가 맞물린다면? 적어도 <건축학개론>과 연애를 얘기할 때는 남녀의 성향이라는 대지가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한 터전이고, 취향이라는 재료들이 그 집을 이뤄간다. 연애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단지 물리적인 거리감이 심리적인 거리감으로 번지고, 다시 그 모든 거리감과 사정들이 얽혀 결국 각자의 삶만이 남는 수순은 비극적인 필연이다. 이 영화에서 두 남녀는 도시라는 거시적인 관점 안에서 이야기된다. 그들이 각자 삶의 패턴과 속성을 어느 정도 규정한 이후, 이야기는 집이라는 미시적인 관점으로 옮아간다. 그 과정에 이야기를 설계하는 감독의 고민과 이야기를 표현하는 배우의 고민이 있다. 못난 과거를 고백하는 남자들 또한 있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영화와 일상 속에서 이보다 배는 못난 남자들을 목격했기에, 첫사랑과 건축의 관계를 로맨틱하게 풀어놓은 이 영화가 흥미롭게 다가올 뿐이다. 연애를 품은 그 집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에디터
      피처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김영준
      스탭
      스타일리스트 / 구동현, 헤어&메이크업 / 종범, 효진(순수), 세트 스타일링/ 다락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