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코팽과 최지우의 만남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패션계에서 니나 리치 디자이너, 피터 코팽의 선한 인상과 사려 깊은 태도는 유난히 돋보인다. 여성스러운 파리지엔 스타일을 대표하는 이 로맨틱 하우스의 주인공 피터 코팽과의 만남은 봄 햇살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서울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만나는 건 흥분되는 일이다. 하지만 내심 긴장되는 것도 사실이다. 혹시 긴 여행 때문에 바이오리듬이 깨졌다며 짜증을 내는 건 아닐까? 사적인 질문에 불같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버리면 어쩌지? 혹은 그저 만사 귀찮다는 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단답형으로 인터뷰의 맥을 끊어버릴지도 몰라! 온갖 우려가 머릿속에 맴돌기 마련이지만, 만약 니나 리치의 피터 코팽(Peter Copping)을 만난다면 이 모든 염려와 걱정을 붙들어 매도 좋다. “정말 사람 좋아 보이더라.” “너무 친절하던데?” “덩치만 큰 소년 같은 느낌이야.” 이미 피터 코팽이란 사람의 매력에 빠진 주위 사람들은 모두들 이렇게 그를 칭찬했으니 말이다. 2009년 미소년 같은 올리비에 데스켄스의 뒤를 이어 니나 리치 하우스에 들어선 그는 그동안 자신만의 비전과 하우스의 전통을 완벽하게 조화시켜왔다. 덕분에 생기를 잃어가던 니나 리치 하우스에는 달콤한 여인의 향기가 폴폴 풍기기 시작했다. 물론 그 향기는 하우스 창립자인 마담 리치가 30~40년대에 그렸던 이태리적인 로맨티시즘과 완전히 닮은꼴은 아니었다. 하우스의 가훈이 로맨스라면, 피터 코팽은 거기에 현대적일 것, 그리고 현실적일 것이라는 원칙을 더했다. 덕분에 이제 여섯 번의 컬렉션을 선보인 그는 셀린의 피비 파일로가 완성한 ‘미니멀한 현실주의’의 반대편, 그러니까 ‘로맨틱한 현실주의’의 기수로 손꼽힌다(마침 파리 애브뉴 몽테뉴에 자리한 니나 리치 아틀리에는 셀린 맞은편이다). <보그>와 피터 코팽의 만남에는 또 다른 손님이 초대되었다. 영화〈여배우들〉을 통해 <보그>와는 특별한 인연을 공유한 여배우 최지우가 그 주인공.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늘씬한 프로포션 덕분에 유난히 이브닝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그녀가 기꺼이 <보그> 앵글 속에서 ‘리치 레이디’로 변신했다. 하얀 종이 꽃이 흩날리는 세트 앞에서 섬세한 연분홍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100% 리치 레이디 그 자체! 머리털 나고 처음 발라보는 새빨간 립스틱이 어색하다고 특유의 애교 섞인 어투로 볼멘소리를 했지만, 니나 리치의 프리폴 드레스들은 그녀의 늘씬한 보디에서 빛을 발했다(루니 마라가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입었던 블랙 드레스는 심지어 그녀에게 짧았다!). 드레스를 입고 드레싱룸에서 나오는 최지우를 바라보던 피터 코팽이 연신 “뷰티풀!” “고저스”를 연발했다. 최지우는 그날 밤 명동에서 열리는 10 꼬르소 꼬모의 오프닝 파티에도 참석하기로 했기 때문에 촬영이 끝나자 곧 또 다른 니나 리치 드레스로 갈아입고는 스튜디오를 떠났다. 인터뷰를 위해 자리를 옮겨 한 카페에 앉자마자, 피터 코팽은 먼저 사과의 말을 건넸다. 한국에 오기 전 머물렀던 도쿄에서 지독한 감기에 걸려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터뷰에 최선을 다하지 못할 테니 이해해달라는 것.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상냥하면서 부드러운 태도를 잃지 않았고, 어떤 질문에도 정성스럽게 답변했다. 지금 파리 패션계에서 손꼽히는 톱 디자이너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까다로운 태도나 시니컬한 표정은 찾을 수 없었다. 함께 나눴던 밀크티만큼이나 부드럽고 따뜻했던, 피터 코팽과 <보그>의 대화.

니나 리치 프리폴 컬렉션의 섬세한 핑크빛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최지우.



어디선가 런던 세인트 마틴 졸업 컬렉션 제목이 ‘BCBG(Bon Chic, BonGenre, 프랑스식 클래식한 로맨틱 스타일을 가리키는 말)’였다고 읽었다. 그때부터 니나 리치에 오게 될 운명이었던 것 아닐까?
그땐 클래식한 패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졸업 컬렉션이라기 보다 어떤 패션 브랜드에서 스폰서를 받아 하나의 컬렉션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와 지금은 소니아 리키엘을 맡고 있는 에이프릴 크라이턴, 그리고 예전에 구찌 남성복 디렉터를 맡았던 존 레이 이렇게 셋이서 함께했다. 그때는 그것이 파리지엔 스타일이라고 생각지도 못 했다. 어쩌면 그단어가 멋있게 들려서 그리 지었던 건 아닐까?

니나 리치에 오기 전까지 패션계에서 당신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한 번도 내 개인 컬렉션을 선보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니나 리치에서 선보이는 컬렉션이 결국 피터 코팽 스타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난 아주 운이 좋은 디자이너다. 억지로 내 스타일을 바꿀 필요도, 애써 어떤 룰을 따를 필요도 없었다.

파리지엔 시크, 레이스, 리본, 프릴, 그리고 ‘L’air du Temps(마담 리치가 선보인 하우스의 시그니처 향수)’ 등이 니나 리치를 대표하는 단어들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닌, 로맨틱도 포함될 것 같은데, 여기에 어떤 새로운 단어를 더하고 싶나?
음, 모두우리 작업과 꽤 어울리는 단어들이다. 새로운 단어를 더한다면 컨템포러리(동시대적인), 그리고 모던 정도? 난 현재를 살고 있는 여성들을 위해 옷을 디자인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드레스도 로맨틱하고 여성적이고, 당시엔 파리지엔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드레스엔 현대적인 멋은 없다.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인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미국 <보그>의 100년 전 아카이브를 이제 인터넷으로 꺼내볼 수 있는 시대다. 1940년대와 1950년대 마담 리치가 직접 디자인할 때 디자인도 <보그>에 종종 등장한다. 의외로 구조적이고 단정한 옷들이 많아 놀랐다. 니나 리치 하면 떠올렸던 하늘하늘한 시폰 드레스나 레이스 드레스는 없었다.
나도 미국 <보그> 아카이브로 찾아봤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옷들은 여성적이지만 섹시하진 않았다. 아마도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니나 리치의 이미지는 70년대 향수 광고들 때문일 것이다. 데이빗 해밀턴이 줄곧 찍었던 그 광고들 때문에 그런 센슈얼하고 섬세한 분위기가 완성됐던 것 같다.

당신의 니나 리치에서 니나 리치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노골적으로 재해석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올봄 컬렉션에서 지나 드 플라니의 플라워 프린트를 사용한 것이 그나마 직접적인 활용이었던 것 같은데.
물론 우린 훌륭한 아카이브를 갖고 있고, 가끔씩 살펴보긴 하지만 컬렉션을 준비할 때 계속해서 그 아카이브를 염두에 두는 건 아니다. 봄 컬렉션의 플라워 프린트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게 됐다. 를 읽다가, 지나 드 플라니가 30년대와 40년대 프린트 디자이너로 마담 리치와 함께 작업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때마침 지나의 딸인 마리 테레스가 나를 지나의 아카이브로 초대해, 그녀와 함께 아카이브를 살펴보면서 플로럴 프린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봄 컬렉션에선 프린트를 꼭 하고 싶었는데, 정말 좋은 재료가 나타난 셈이었다. 물론 그 아카이브 프린트를 그대로 사용하진 않았다. 컬러를 강조하고 패턴 크기를 확대하기도 했다. 내가 아카이브를 해석하는 방법은 그런 식이다. 니나 리치가 예전에 함께했던 아티스트들의 또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고, 그곳에서 또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것. 과거를 좋아하지만 그대로 보여주는 건 재미도, 흥미도 없다.

분명 마리 테레스가 그 컬렉션을 보고 좋아했을 것 같다.
물론이다. 쇼에 초대했었는데, 내게 너무 고맙다고 했다. 아주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이번 봄 컬렉션에서 플라워 프린트 드레스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지퍼 장식의 가죽 스커트와 재킷이었다.
플라워 프린트나 파스텔 컬러처럼 예쁜 느낌의 옷들과 균형을 맞추고 싶었다. 예쁜 것들로만 가득한 컬렉션은 재미 없지 않나.

컬러 이야기가 나왔는데, 지난 3월 선보인 가을 컬렉션에서 가장 돋보인 건 컬러 감각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컬러는 무엇인가?
컬러를 칭찬해주니 고맙다. 컬러는 언제나 내가 많은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가을 컬렉션에선 조금 낡은 듯한, 다락방에서 방금 꺼낸 듯한 컬러들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비비드한 컬러 대신 물이 빠진 듯 색이 바랜 듯한 컬러들을 사용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컬러라! 아마도 네이비일 것 같다.

가을 컬렉션에서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요소는 란제리였다. 관능적인 란제리 디테일들이 다른 소재들과 믹스되어 있었다.
겨울 컬렉션은 자칫 답답해 보이고, 무거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란제리 디테일을 사용해 좀더 가벼운 느낌을 주고 싶었다. 트위드 수트에 란제리 디테일의 블라우스를 매치하는 것처럼.

란제리를 직접 디자인해도 잘할 것 같다.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란제리는 무엇인가?
니나 리치에는 이미 라이선스로 만들어지는 란제리 라인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란제리라! 브라가 아닐까? 아름다운 브라는 꼭 필요할 것 같다. 블라우스 아래로 살짝 비치는 브라는 정말 섹시해 보인다.

라이선스 이야기를 하자면, 한국엔 니나 리치 액세서리와 니나 리치 옴므도 있다. 이 라인들을 본 적 있나?
물론이다. 재밌는 건 니나 리치 옴므다. 니나 리치는정말 여성적인 하우스인데, 그곳에서 나오는 남성복이라니 정말 신기하다.

만약 니나 리치에 새로운 라인을 더한다면 어떤 라인에 도전하고 싶은가? 웨딩라인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이미 고객들 중엔 웨딩 드레스를 디자인해달라는 분들도 많다. 거의 커스텀 메이드 드레스로 만들어주곤 한다. 그래서 오뜨 꾸뛰르 컬렉션에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 이미 고객들도 존재하고, 니나 리치와도 잘 어울릴 듯하다.

드레스 가격이 엄청날 것 같다. 대체 그런 드레스를 입는 고객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대부분 중동에서 온 여성들이다. 그들은 노출이나 디자인에 대한 걱정이 많아서 그런 면을 고려해서 옷을 만든다.

크리스찬 라크로와 꾸뛰르팀에서 일하지 않았나?
아주 예전 일이다. 런던에서 학교 다닐 때, 무슈 라크로와가 내가 아르바이트 하던 콘란 숍(영국의 인테리어브랜드)에 온 적이 있다. 매장에서 나가는 그를 붙잡고 밑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말했고, 다행히 인턴으로 일할 수 있었다.

정말 패션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것 같다. 그런 경험들이 많은 도움이 됐나?
물론이다. 그당시 라크로와 하우스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부유한 미국 부인들이 꾸뛰르 컬렉션이 시작되면 수없이 드레스들을 구입해 갔다. 그런 세상을 처음 만났으니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졸업하고 다시 라크로와로 돌아가지 않았나?
라크로와에선 다시 오라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졸업하는해에 걸프전이 터졌고, 고객들의 수가 확 주는 바람에 새로운 직원을 뽑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자리가 있는 밀라노로 갔다. 아이스버그에서 일하게 됐는데, 당시엔 밀라노에서 일하는 학교 친구들도 많았다. 비록 꾸뛰르 하우스에선 일하진 않았지만, 이태리에서 살고 있었고, 친구들도 많았다.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무려 12년간 루이 비통에서 마크 제이콥스와 일했는데, 최근 파리에서 오픈한 마크 제이콥스 전시회는 구경해봤나? 그 중엔 직접 당신 손으로 만든 옷들도 많았을 것 같다.
물론이다. 전시된 옷들 중에는 내가 루이 비통에서 마크와 함께 완성한 옷들이 많았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길 바란다.

어릴 때부터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나?
어릴 때부터 패션이 좋았다. 옥스퍼드에서 자랐는데, 그곳은 패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다. 하지만 난 호기심이 많았고, 주로 그 호기심은 패션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손재주가 좋아서 옷들을 직접만들곤 했는데, 그 재능을 내가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들은 디자이너가 되는 것에 대찬성하셨겠다.
물론 그랬다. 두 분은 예술 분야는 뭐든 반기는 분이셨다.어쩌면 누나가 먼저 가구 디자인을 시작해서일지도 모르지만, 패션 디자이너란 꿈을 적극 인정하고 후원해주셨다.

부모님의 직업도 예술과 관련된 것이었나?
아버지는 공군이었고, 어머닌 옥스퍼드 대학에서 제도사로 일하셨다.

군인 가족이면 어릴 때 세계 곳곳을 다니지 않았나?
어머니가 이사 다니는 걸 싫어하셨기에 그렇진 않았다. 어린시절 영국적인 마을에서 자란 추억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아주 영국적인 사람 말인가?
그렇다. 그건 영국 사람들의 특징인 것 같다. 세계 어딜 가도 영국 사람들은 끝까지 영국 사람이다. 특별히 뿌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서인지, 게을러서 오래된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파리에선 몇 년째 살고 있나? 이제는 프랑스가 고향이라는 기분이 들지는 않나?
18년이 넘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고, 이곳을 좋아하지만 난 여전히 영국인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미국 <보그>에 나왔던 노르망디 별장은 영국 별장 같은 느낌이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15세기에 지어진 별장인데, 최근까지 그곳을 꾸미느라 바빴다.

<보그 코리아> 리빙 부록을 위해 연락했을 때 별장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브루타뉴 지방에 하나 더 있다. 훨씬 아담한 곳이다.

별장이 두 개나 있으면 파리의 사무실에 있기가 힘들겠다. 항상 그곳으로 가고 싶을 것 같다.
하하. 주말은 대부분 별장에서 보낸다. 컬렉션이 임박하지 않는 한 주말 출근이나 야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도 중요하지만 내 삶도 중요하니까.

좋은 ‘보스’일 것 같다.
그건 우리 스태프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파리에서 손꼽히는 하우스 디자이너에, 프랑스 교외의 별장들에, 이렇게 먼 나라까지 여행 오는 기회까지. 또 아주 멋진 파트너도 있는 삶. 그야말로 다 이룬 것 같다. 더 이루고 싶은 꿈이 남아 있는가?
음. 정말 모두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는 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없다. 지금으로도 무척 행복하고, 이걸 유지하고 싶다. 물론 니나 리치에서 좀더 멋진 옷들을 선보이고 싶다. 그것만큼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