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문

유지태를 떠올리면 아직도〈봄날은 간다〉의 엔딩 신이 생각난다. 가을 들판에서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의 결을 느끼던 부드러운 보헤미안. 지금, 장편 상업영화 촬영을 마친 감독 유지태가 배우 유지태와의 평생의 긴장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보리 재킷은 다미르 도마(Damir Doma at Blush), 니트톱은 보리스 비잔 사베리(Boris Bidjan Saberi at Blush), 실크스카프와 샌들은 에르메스(Hermes), 핀스트라이프 팬츠는 트루사르디(Trussardi by Boon The Shop Men), 페도라는 제이미앤벨(Jamie&Bell).

스튜디오를 참 편안해 하네요.
전 사진가와 있는 게 편해요. 청년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거든요.

스튜디오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네. 20대 때 잼 스튜디오에서 포토 어시스턴트를 했어요. 뮤직비디오도 찍었죠.

어떤 뮤직비디오를 찍었죠?
유희열, 윤종신, 강수지, 안치환…. 셀 수 없이 많아요. 특히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기억나네요. 한겨울에 쓰레기차 안에서 포인트 뷰를 잡아야 해서 제가 쓰레기차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때 없는 돈에 엄마 졸라서 산 20만원짜리 무스탕을 입고 있었는데…촬영 끝나고 버렸어요. 쓰레기 냄새가 어찌나 고약하던지….

모델 출신이잖아요?
90년대 문화는 그런 경계가 없었어요. 사진가 조수로 일하다가 갑자기 리바이스 모델로 서는 식이었죠. 전 배우가 안 됐으면 사진을 찍었을 거예요.

<주유소 습격사건>의 ‘뻬인트’로 뜨기 전까지 참 다이내믹한 청춘을 보냈네요.
그땐 모든 게 다 재미있었어요. 90년대 후반 특유의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있었죠.

어쨌든 배우 유지태보다 감독 유지태의 내력이 먼저였다는게 놀랍네요.
네. 영상을 만드는 데 관심이 먼저였어요.

최근 인터넷 뉴스를 보면 유지태 씨에 관한 이야기에 어떤 맥락이 있더군요. 위안부 나눔의 집 할머니들을 방문하고, 결혼 축의금을 아이티에 기부하고, 용산 참사를 다룬 독립영화 <두 개의 문>을 지원하고….
<두 개의 문>의 경우는 어떤 정치적인 의도는 없었어요. 독립영화를 지원하는 게 꿈이 었고, 상업영화 배우로서 영화와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핵심이 뭐죠?
나누면서 살고 싶어요.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바른 생활 사나이네요. 조금 전 브에나비스타소셜클럽 음악에 맞춰 움직일 때 집시가 된 것처럼 자유로워 보였어요.
전 보사노바와 삼바를 좋아해요. 제가 두 번째로 만든 중편 영화 <장님은 무슨 꿈을 꾸는가>도 삼바를 다뤘죠.

장님은 무슨 꿈을 꾸나요?
하하. 스토리는 시각장애인들의 성적 판타지예요. 자유롭고 화려한 삼바 리듬을 타고 그들만의 욕구를 분출시켜주고 싶었거든요. 당시로서는 독특한 실험이었어요. 디지털 3D 방식으로 골룸을 촬영했던 센서를 부착해서 영상을 표현했거든요.

대단한데요? 제작비는 지원을 받았나요?
아니요. 처음엔 단편 지원 프로젝트로 시작했는데 그게 무산이 됐죠. 5천만원 자비를 들여서 만들었어요.

롱 슬리브 티셔츠, 홀터넥 베스트, 배기 팬츠는 모두 릭 오웬스(Ric Owens).

그 디지털 실험 작품으로 후지필름상을 받았죠?
부상으로 필름을 받아서 바로 다음 영화 <나도 모르게>를 찍었습니다.

정말 알뜰하고 부지런하시네요.
전 알뜰하게 살아요. 영화는 리스크가 많은 분야예요. 영화를 오래 하려면 경영 마인드가 있어야 되죠. 이상적인 시스템은 이재용, 박찬욱, 임상수, 김지운 감독처럼 제작을 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투자사와 제작사의 입김에서 감독의 예술 철학을 지켜내려면 말이죠.

지금 장편 상업영화 <마이라띠아>의 촬영을 끝냈죠?
네. 편집도 끝냈고 색보정, 믹싱 작업만 남아 있어요.

이젠 정말 감독 유지태라고 불러야겠어요. 어떤 이야기인가요?
태국에서 국제결혼한 이주민 이야기예요.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의 가난한 아시아 여성들이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들어오죠. 꿈을 갖고 왔지만 폭력을 당하기도 하고 한국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어요.

관심이 계속 그쪽으로 가네요?
아무래도 전 배우고 보통 사람들보다 화려해 보이는 삶을 살잖아요. 그래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요. 영화를 찍을 때만큼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지죠.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 진짜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요. 이 작품도 대학 때 대본을 썼는데 그게 현실화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린 셈이에요.

배우로 인기를 누리는 동안에도 포기를 안 한 거네요?
그게 제 성격이에요. 하고 싶은 건 끝까지 놓지 않아요.

블랙 재킷은 발맹(Balmain), 헨리 셔츠는 엘지비(L,G,B at Blush), 자수패턴이 돋보이는 울 팬츠는 알렉시스 마빌(Alexis Mabille at Mue), 브레이슬릿은 카스트로(Castro NYC at Blush).

지치지도 않고?
지치기도 하죠. 시나리오를 주고 기다려도 제작사가 결정을 안 해주면 피가 마르고 무기력해지죠.

그런 와중에 <봄날은 간다>와 <올드보이>와 <야수>와 <남극일기>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찍은 거고요?
배우 생활을 하면서 벌어놔야 나중에 하고 싶은 영화를 할 수 있으니까요. 또 영화 현장에서 배우는 게 실속 있거든요.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았군요. 배우인 동시에 감독 준비를 하면서.
그렇죠. 중간에 나는 감독이 될 수 없는 걸까? 좌절도 했지만, 지금은 많이 깨우쳤어요. 투자가 안 되면 되도록 시나리오를 고치는 법도 알았죠. 목적한 바가 점점 더 뚜렷해져서 삶에서 무기력해질 여유가 없을 정도예요. 요즘도 다음 영화 찍고 싶어서 자료를 모으는 중입니다.

신혼 여행도 못 갈 정도로?
신혼 여행은 <돈의 맛> 때문에 못갔죠. 효진 씨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배우예요. 그녀를 만난 게 행복이에요. 정말 속이 깊은 친구고 삶을 가치 있게 살려고 노력하는 친구죠.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무엇이든 정확히 알려고 노력해요. 감성적으로 지적으로 정직하죠.

영화 지식도 동시대 여배우 중 최고던데요? 특히 유럽 고전 영화에 대해서는….
박식하죠. 효진이는 루이스 브뉘엘이나 레오 꺄락스를 좋아하고, 저는 트렌드를 읽으려고 미국 현대영화를 주로 보죠. 샘 멘더스, 폴 토마스 앤더슨, 알렉산더 폐인… 우린 서로 에너지를 주는 존재예요.

얘기를 하면서도 웃으시네요.
효진이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와요.

오페라 가수 역할을 맡았던 <더 테너>는 잠시 촬영이 중단된 건가요?
모든 상황이 잘 해결되리라고 믿어요.

마음이 힘드신가요?
저는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습니다.

효진 씨가 <돈의 맛>으로 바쁜 데 비해, 지태 씨는 배우로서 <심야의 FM>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이 없었어요.
감독으로 제 작품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영화와 드라마를 할 수가 없었어요. 출연 제의를 받은 작품 개런티가 제가 만들 작품의 제작비보다 높은 경우도 있었죠. 그럴 땐 희생을 감수하고 선택을 해야 해요. 돈이나 인기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가치 있는 일이 뭔지…, 계속해서 상기했어요.

그러는 사이 대중의 마음은 빨리 바뀌죠.
네. 하지만 제 인생은 바뀌지 않아요. 대중들이 원하는 쪽으로 가려고 제 영혼을 바꿀 수는 없잖아요. 제 인생의 주체는 저예요.

선택의 누적분이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결정적 순간에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느냐를 돌아보면 내 정체를 알 수 있다는 거죠. 지태 씨는 좋은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어요. 인생을 바칠 만큼 가치 있는 건 또 뭐가 있나요?
효진이죠. 왜 빨리 결혼했냐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게 맞아요. 이게 제가 그린 삶이에요.

원래 그렇게 계획적인 삶을 살아요?
전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인간형이에요. 그래서 자승자박하기도 하지만 이게 좋아요. 제 인생이 영화에 편중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한번도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하진 않았어요.

블랙 꼬임 디테일 스카프는 다미르 도마(Damir Doma at Blush), 그레이 티셔츠와 글렌체크 면 팬츠 모두 포르메 디 익스프레션(Forme D'expression at Blush), 샌들은 에르메스(Hermes).

연기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죠?
배우는 시지프스예요. 등짐을 지고 산을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는 것과 같죠. 정상이 없는 예술 영역이라는 생각이에요.

<봄날은 간다>에서의 연기가 제일 좋지 않았어요?
하하하. 맞아요. 그 영화는 다큐적인 성격이 강했어요. 허진호 감독이 유지태의 본질과 세계관을 끄집어내서 자연스럽게 필름 안에 담으셨어요. 영화 연기를 보는 관점은 다양해요. 히치콕 스타일도 있고 네오리얼리즘적인 스타일도 있는 거죠. <올드보이>를 했던 박찬욱 감독은 연기적인 연기를 좋아하시거든요. 기술적으로 훌륭한 흉내 내기로서의 연기요. 반면 홍상수 감독이나 허진호 감독은 사실적인 면에 집중하시는 편이죠. 저는 다 받아들여요. 그분들 모두가 제 스승이시니까.

그분들 어깨너머로 감독 수업도 한 거네요?
네. 계속 물어보고 귀찮게 해드렸죠. 어떤 감독은 3개월 동안 저를 만나 차마시고 술 마시면서 대화하기를 즐겨 하고, 어떤 감독은 배우에게 깊이 개입되는 걸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더군요.

감독 유지태는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아직 아마추어예요. 앞으로 사람들이 평가하겠죠.

예전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해 보였어요. 화가 난 것 처럼 보이기도 했죠.
당시엔 대인기피증이 있었어요. 배우 일을 해서 내 인생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내 삶, 내가 만들 영화를 위해 자금을 만들어야겠다는 일념만 있었던 거예요.

요즘엔 어떤 정서 상태에 있나요?
행복감, 자신감, 생명감. 특히 효진이와 살면서 작은 것들에게서 생명의 신비를 느껴요. 화초가 풀이 죽어 있다가 물을 먹고 파릇하게 몸을 풀 때 얼마나 예쁜지, 작은 접시 하나도 얼마나 사랑스러운 수공이 들어가 있는지…. 제가 접시 이름까지 외우게 될지 몰랐어요.

과연, 여자는 남자의 미래군요.
네. 효진이에게선 여성적인 생명이 흘러나와요. 효진이가 없으면 저는 피폐해져요. 그녀가 해외에 나가 있으면 저는 메마른 화초 같아요. 독립적이고 질서정연한 어머니와는 완전히 다른 여성성이죠? 네. 우리는 서로 예술을 지향하는 관계니까요.

왜 배우가 되셨어요?
음…, 제가 배우가 된 건 성극이 처음이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같은 작품을 공연하면서 배우도 돼보고 연출도 했어요. 저는 교회에서 사랑을 배웠어요. 사람들과 지내면서 외롭고 아플 때가 많지만, 제가 신에게 배운 근본적인 사랑은 배신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인간이 연약하고 시험 받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 연약한 인간이 모인 공동체에서 사랑하면서 살기 위해 배우가 됐어요. 그걸 대놓고 드러내고 싶진 않지만요.

세상엔 라스 폰 트리에처럼 <안티 크라이스트> 같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있고, 멜 깁슨처럼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같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있죠.
네. 모두 존중해요. 영화는 예술이고, 저는 그 예술적인 다양성 안에서 움직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