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한 존재감

10년 차 배우 김강우를 보고 있으면 스파클링 워터를 마신 듯 눈이 개운해진다. <돈의 맛>으로 배우 인생의 2막을 연 이 남자는 카리스마가 연기의 절대 가치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명민한 디테일로 관객을 설득해온‘ 만년 청년’ 김강우를 만나보자.

블랙 수트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네트 디테일의 니트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브라운 스니커즈는 컨버스(Converse),브레이슬릿은 디올 옴므(Dior Homme), 스터드 장식벨트와 체인은 모두 제이미앤벨(Jamie&Bell).

오늘도 일찍 가야 되나요?
네. 부쩍 갑작스러운 스케줄이 많네요.

그런 나이일지도 몰라요. 30대 중반이죠?
그렇습니다.

나에 대한 주변의 수요가 급속도로 늘어날 때죠. 나를 필요로 하는 현장은 더 많아지고, 빡빡한 스케줄에 최선을 다하며 능력이 확장되는 기쁨을 느끼는 시기예요.
칸에 다녀와서 영화 <미라클>을 끝내고 바로 드라마 <해운대의 연인>에 들어가기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야구영화 <미스터고>에서는 두산의 구단주 역할을 했다지요?
네. 전 야구를 정말 좋아해요. 크지 않은 배역이지만, 야구에 대한 애정과 김용화 감독(<국가대표> <미녀는 괴로워>)과의 친분으로 기꺼이 출연했어요.

<돈의 맛>으로 칸 영화제까지 다녀왔으니 이젠 배우 인생의 2막이 펼쳐질 거예요.
칸에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영화가 끝난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수상은 못했지만 영화 예술가들의 축제를 경험한 것만으로 감동적이었어요.

좋은 와인도 마시고 멋진 레스토랑에도 가고…, 꿈 같은 시간을 보냈나요?
네. 꿈 같았어요. 백윤식 선생님, 윤여정 선생님, 임상수 감독과 해변을 산책하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낭만적인 식사도 했지요. 딱 10년을 일하고 나서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었죠. 뤼미에르 극장에서 기립 박수를 받을 때 배우가 얼마나 명예로운 직업인지 깨달았어요.

<돈의 맛>에서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김강우 씨가 재벌 가문을 조종하는 미국인 비즈니스 파트너를 시종일관 ‘로버트’라고 부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미스터 알트만!”이라고 부르는 대목이었어요.
맞아요. 현장에서 대본을 보니, 이름이 ‘미스터 알트만’이라고 바뀌어 있던데요.

<돈의 맛>이 부르주아를 비꼬는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고스포드 파크>의 시니컬한 유머를 계승했다고 우리가 얘기했던 것 기억나요?
그랬죠. 아! 임상수 감독이 교묘하게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이름을 이 영화 속에 넣은 거군요.

그렇죠.
오호라!

할리우드에서 가장 비할리우드적인 영화를 만드는 반할리우드 감독이 로버트 알트만이었어요. 임상수 감독은 <돈의 맛>에 로버트 알트먼의 시그널을 넣고 싶었던가 봐요. 김강우 씨의 입을 통해서요.
<돈의 맛>은 대중들의 호불호가 분명했어요.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취향이 갈렸죠.

모름지기 사람들은 직설화법을 불편해 하거든요. 그 영화는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서 대중들이 할 말을 잃게 만든 셈이지요. 그런 점에서 말이 없었던 김강우 씨가 가장 점수를 많이 땄죠.
하하. 제가 너무 가여워 보여서 아닐까요? 자기 세계가 확고한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하니까… 똑똑이에서 바보가 돼가는 제 모습이 가여웠을 거예요.



재벌가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영화라서 배우들이 출연을 꺼렸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우도 겁먹을 만하죠.
어쨌든 영화는 감독님의 철학이 반영된 거고 영화는 영화로 즐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사는데 정답이 어디 있겠어요? 저로서는너무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배우는 보통 사람들보다 열어놓고 살아야 되는데, 덕분에 담대해지고 많이 열렸죠.

평소에도 과묵한 편이죠?
네. 말이 없죠. 촬영을 마친 영화 <미라클>에서는 수다스럽고 활동적이고 건강하게 땀 흘리는 형사예요. 김범이라는 어린 친구와 재미있게 촬영 했어요. 사이코 메트리라고 김범이 물건을 만지거나 사람을 만나면 과거를 알아맞히는 초능력자인데, 그 친구와 버디무비 한 편을 찍었어요.

또 여기저기 뛰어다니나요?
네. 유괴 사건을 함께 해결해 나가면서 서로 성장하는 거죠.

김강우 씨는 20대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청춘의 느낌이 강해요. <태풍태양>을 찍던 20대 때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던 아웃사이더였고, 30대인 지금은 수트를 입은 보헤미안처럼 느껴져요. 어떤 공동체에도 정규직으로 소속되지 못하고 관찰자적인 자세로 인생을 사는 젊은이 같다고 할까요. 때로는 <식객>의 요리사 ‘성찬’처럼 진실하게 노력할 때도 있지만, 역시나 메이저 인생에 대한 욕구는 없어 보여요.
제 존재감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그래서 캐스팅이 더 잘 될 수도 있다는 말이죠.
제가 색깔이 딱히 규정돼 있지 않죠. 여기 놔도 웬만큼 좋고 저기 놔도 어느 정도 어울리고.

존재감에 대한 고민은 안 해 봤어요?
흥행이 잘 돼서 한 가지 느낌이 각인되면 좋지만, 저로서는 요리조리 포지셔닝을 바꿀 수 있다는 장점도 있죠. 머리보다 마음이 가는 캐릭터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된 부분도 있습니다.

<하하하>에서 까칠한 시인 역할은 정말 잘 어울렸어요. 뜨거운 감정과 지나치게 뾰족한 사상으로 생활과 인간 관계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우울한 시인 배역에 딱이더군요.
원래 성격이 다혈질이에요. 그런데 촬영할 때 까칠해지면 나만 힘들어지죠. 실제로는 타인에게 피해를 안 주는 타입이에요. 폐를 끼치면 죽어버릴 것 같아요.

과한 욕심도 안 부리죠?
그럼요. 인생 전체를 보고 길게 가고 싶어요.

어떤 감독들을 존경해요?
다섯 작품 이상 감독한 분들이면 다 존경스러워요. 치열한 영화계에서 그 자체로 정말 대단한 일이거든요.

임권택 감독을 가장 존경하겠네요. 101번째 영화를 만드셨으니.
그런데 임상수 감독님이 임권택 감독님 조수로 시작하셨어요.

오호라! 그런데 본인만이 지닌 표현의 무기는 뭐죠?
무기요? 글쎄…, 자신 있게 ‘저를 갖다 쓰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무기… 나이 들면서 하나씩 생기겠죠?

연기의 특질은?
담백하죠.

반면 뻔뻔하지 못한 면도 있어요. 어쨌든 얼굴 각도는 아주 좋아졌어요. 어디에 카메라를 가져다 대도 뭉툭한 데가 없이 각이 사네요. 카메라 감독들이 정말 좋아하겠어요.
이젠 저도 그걸 좀 아나 봐요. 흐흐.

그레이 슬립은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블랙 크로커다일 뱅글은 HR,실버 뱅글은 제이미앤벨(Jamie&Bell), 링은 CK 캘빈 클라인주얼리(CK Calvin Klein Jewelry).

사진 찍는 법이요?
네. 이젠 즐기게 돼요.

오늘은 대니 보일 감독의 <트레인스포팅> 스타일로 찍으려다가 강우 씨의 남성성을 제어할 수 없어서 중간에 프란시스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으로 갔어요. 이완 맥그리거에서 마틴 쉰까지 연기 폭이 다양하더군요. 하하.
예전엔 정지 상태로 가만히 있었는데, 이젠 스토리를 느끼고 있죠. 제 호흡이 들어가니까 더 생동감이 있네요.

촬영에 들어갈 드라마 <해운대의 연인>은 어떤 스토리인가요?
일단 8월부터 방영되는 해운대 올로케이션 드라마예요. 까칠한 남자가 바닷가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여자 가족들을 만나 동화되는 로맨틱 코미디예요. 조여정 씨가 특유의 러블리한 매력을 발산할 거예요. 저는 파트너인 워커홀릭 검사 역을 맡았어요.

제2의 <시크릿 가든>을 꿈꾸는 건가요?
하하. 그렇게 되길 바라요. 저는 사실 드라마는 많이 못 봤어요.

히트 드라마 한 편이면 배우 인생 한 방이죠.
하하. 전 좀더 인간 냄새 나는 역할이에요.

수트 입고 멋지게 등장할 것 같은데… 혹시 신분이 바뀌나요?
아뇨. 기억을 잃어버려요.

와우~! 하인도 됐다가 형사도 됐다가 검사도 되고. 기억을 잃어버린 채 사랑도 하고. 어쨌든 여러 직업을 전전하느라 바쁘시겠어요.
한 직업당 6개월씩 살죠.

그러곤 바로 스위치가 되는 거죠? 하나님이 왜 그런 배우라는 직업을 창조했을까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역할놀이를 좋아해요. 애들을 보면 알죠. 자기와는 다른 객체를 만들어서 흉내 내면서 놀잖아요. 신도 당신을 닮은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거잖아요.

모방 본능이라는 건가요?
그럼요. 그러면서 자기와 비교해 보는 거죠.

인간이라면 모방 본능, 비교 본능은 거스르기 힘들죠.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있나요?
올해는 욕심을 좀 부렸어요. 돈, 명예, 인기 이런 거보다 그냥 너무 재미있어서요.

재미있게 하고 있으면 결국 돈, 명예, 인기, 기회는 따라오죠.
그러게요.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난감할 때도 있죠?
이대로 가면 분명 사실성이 떨어지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상황 때문에 억지로 연기해야할 때가 있어요. 소품이나 세트의 디테일이 떨어질 때도 화가 나요. 반면 모든 게 맞아떨어지는 환희의 순간이 <돈의 맛>이었어요. 제 약점을 커버할 만한 조명, 카메라 워킹… 제가 노력해서 메꿔야 할 영화도 있지만, 이번처럼 저는 가만 있는데 채워주는 영화도 있죠.



독특한 패턴의 블랙 재킷은 CK 컬렉션(CK Collection),그레이 슬립은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블랙 레더 진은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그레이앵클 부츠는 토즈(Tod’s), 실버 링은 엠주(Mzuu),레더 뱅글과 실버 뱅글은 제이미앤벨(Jamie&Bell).

휴 그랜트는 촬영장에서 아침 해가 뜨고 석양이 질 때까지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고 했어요.
전 몸을 만들 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이건 완전히 쇳덩이와의 싸움이군.’ 사람들은 전작에서 몸이 좋으면 그게 계속 유지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돈의 맛>에선 긴장된 몸을 보여줘야 하지만 <미라클>에서는 술 마시고 풀어진 몸을 보여줘야 하죠. 또 <해운대의 연인>에서는 로맨틱한 몸을 만들어야 하고. 그러면 전 미치는 거죠.

극한의 의지가 필요하겠어요.
불안하게 쫓기는 신세죠. 하지만 그 안에서 행복을 찾죠.

예전엔 배우가 불행한 이미지였어요.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으로 고독한 인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있었죠.
맞아요. 사실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는 게 힘들어요. 혼자 사는 게 편할지도 모르죠. 가령 몸 만들려고 안 먹을 때는 가족들이 괜히 제 눈치를 보게 돼요. 너무 이기적인 직업이에요. 제 행복을 위해서 가족을 만들었는데, 저의 날카로움까지 그들에게 견뎌내라고 요구하는 식이죠. 아내에게 “나, 티 안 나지”라고 물으면 100% 티가 난대요. 미안하게도요.

가족의 희생을 담보로 한 직업이군요.
그럼요. 감정도 약한데다가 언제나 이해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거든요. 갑자기 제가 배우를 대변하는 사람 같네요. 큭큭.

일과 결혼을 병행하기 힘이 드나요?
결혼을 통해 제 감정이 풍부해졌어요. 저를 닮고 제 행동을 모방하는 아들을 보면 삶의 신비를 느껴요.

아내는 어떤가요?
다행히도 감정 기복이 없어요. 뮤지컬을 보면서 졸 정도니까요.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고 10년 동안 딱 한 번 명품 백을 사줬는데도 너무 기뻐하는 여자예요.

남편 김강우는요?
가정적인 남편이지만 좀 세죠. 괴팍해요. 작은 것은 져주지만 큰 것은 절대 꼭 이겨야 해요.

꽉 조여진 나사 같군요.
이제 좀 풀어져야 할 때가 됐죠.

언제 행복하고 언제 불행한가요?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많을 때. 불행할 때는 나에 대한 필요가 적어질 때.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뭐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모태 신앙인이에요. 아침에 일어날 때 무기력한 날이면 일곱 번씩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쳐요. 그럼 기분이 한결 나아지죠.

자신이 언제 남자로 느껴지나요?
일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아내와 아이가 자고 있어요. 가족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게 내가 만든 울타리구나’하고 느낄 때 뭉클해져요. 책임감이 생기고 제 자신이 남자로 느껴져요.